3전4기. 누가 들으면 대학입시 얘기인 줄 알겠지만 사실은 4수 끝에 성공한 나의 해병대 입대 전력이다.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군대에 가기 싫어 온갖 수를 짜내는 젊은이들도 있는 판국에 무슨 군대를 4수까지 해서 가냐고?
1983년 당시 내 나이는 20살. 가난에 찌들어 살던 농촌청년에서 남들 보기엔 사치스러운 도회지 대학생으로 막 변신했던 당시, 내 인생은 온통 `실패' `불가능' `안된다'는 말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성년의 시작부터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어떤 난관도 이길 수 있는 정신단련이었고 그 돌파구가 바로 해병대였다. 해병대의 혹독한 훈련을 무사히 마친다면 내 인생에서 `실패' `불가능' `안된다'는 단어를 지워버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욕과 달리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유전적으로 혈압이 높아서 신체검사에서 번번이 낙방의 고배를 마신 것이다. 결국 마지막에는 혈압약을 먹는 특단의 조치를 취해 기어코 합격했는데, 입대 후 다시 실시된 신검에서 들통이 나고 말았다. 방법은 오직 하나뿐. 나는 군의관에게 싹싹 빌었다. “꼭 해병이 되고 싶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군생활을 해낼테니 통과시켜 달라”고. 그 마음씨 착한 군의관 덕분에 나는 무사히 해병대원이 될 수 있었고 해병대 1사단에서 통신병으로 임무를 수행하게 됐다. 해병대 훈련이 힘들다는 걸 여기서 말해 무엇하랴. 그저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육체적 고통은 물론 갖가지 전력을 가진 인간 군상들과 겪는 정신적 갈등도 너무 힘들었다.
상병 2호봉 시절, 동해안에서 작전이 벌어져 무전기를 메고 대대장님을 따라 그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가게 됐다. 새벽에 산을 오르는데 그 바닷바람이 어찌나 매서운지…. 땀범벅이 된 상태에서 귀·코가 떨어져 나갈 듯한 고통 속에서 조명탄이 뜨고 온갖 화기들은 바다위 목표물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귀청이 찢 어질 듯 울리는 자동 소총의 굉음 속에서 얼어죽지 않기 위해 뛰고 움직이며 대대장님의 지시사항을 알리던 기억이 난다. 나이 마흔이 넘은 지금도 그때 훈련받던 꿈을 꾸고, 가위에 눌려 깜짝 놀라곤 할 정도라면 당시 군생활이 얼마나 혹독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과정을 이겨냈고 입대할 당시 내가 의도했던 것을 이뤘다. 내 인생에서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지워버린 것이다. 나를 비롯해 군에서 고락을 함께 했던 우리 소대원들은 혹독한 IMF의 시련기를 거쳤고 퇴출의 주대상인 나이 40대지만 소주 한 잔에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좌절과는 거리가 먼 또다른 삶을 살고 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국악인으로서의 삶이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불가능을 모르는 전천후 해병정신으로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있다.
또 하나, 해병대가 나에게 준 선물이라면 선후배 간의 끈끈한 정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선후배 간에 어찌나 서로를 잘 챙기는지 처음에는 해병의 와일드함에 대해 다소 거부감을 갖던 우리 집사람 손심심도 이젠 `해병의 긍지'를 다 외우며 “당신 선배가 모두 내 선배”라고 말하곤 한다.
`8도의 소리'를 채집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선후배들을 많이 괴롭혔지만 그들은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를 도와줬다. 인생에 있어서 선후배들이 얼마나 많이 힘이 되어주는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자신이 지원을 했든, 소집영장이 나와 입대했든 군이라는 곳에 온 이상 2년이 넘는 세월을 허송세월하기보다 무엇이라도 확실한 것 하나를 얻기 위해 노력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군에서 건질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은 남자들의 끈끈한 정이라는 것을 여자들은 알까.
〈국악인 김준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