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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1일 (주님 세례 축일 ) 마르 1,7-11.
약자를 꺾지 않는 예수님 . 오늘은 예수님이 세례 받았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위대한 인물이라서 그분이 세례 받은 사실을 우리가 기념하는 오늘의 축일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이 세례 받은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그 사실을 전하는 이야기들 안에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구원자라고 믿는 예수님을 알리기 위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그 이야기들 중 하나가 예수님이 세례 받은 이야기입니다. 역사 안에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그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그리스도 신앙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에는 서민을 대상으로 세례운동이 여러 가지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만 세례를 준 것이 아닙니다. 여러 사람이 다양하게 세례운동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가운데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의 세례운동에 그분이 가담하신 것입니다. 그 시대 다른 세례운동들이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정결례였다면, 요한의 것은 죄를 씻는 데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삶을 약속하는 의례였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심판이 가까웠다고 말하면서, 회개하여 올바르게 살 것을 약속하는 세례 운동을 펼쳤습니다. 요한은 유대교의 어느 분파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하느님 앞에 우리의 삶을 바꾸어 올바르게 살자고 외치는 이스라엘의 예언자였습니다.
네 개의 복음서가 모두 예수님이 세례 받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들은 그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초기 신앙인들이 믿고 있던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동시에 알립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이 주님이신 것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고, 파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요한의 입을 빌려 예수님이 요한보다 뒤에 오셨지만, 사실은 요한과 비교되지 않는 분이라고 선포합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영을 받은 예수님은 우리 안에 하느님의 숨결이 살아 있게 하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지만, 회개하여 올바르게 살라는 요한의 교훈을 계승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삶 안에 하느님의 숨결, 곧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 있게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이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갈등으로 목숨을 잃기까지 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그분의 생각이 그들의 것과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에서 들은 이사야 예언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초기 신앙인들에게 이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예언으로 들렸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아버지의 후광으로 사람들에게 군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 10,45)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당신 마음에 들어 선택하신 종이었습니다. 이사야서는 또 말합니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리라.’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가르쳤지만, 그분은 목소리를 높여 외치며 사람들에게 군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벌주신다고 사람들을 위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은 성전 의례를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몇 명 되지도 않는 제자들을 모아서 초라하게 또 조용하게 가르치면서, 하느님의 종이 되어 하느님의 일을 스스로 실천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 하느님의 용서를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영을 받들어 사는 종이었습니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이사 42,3) 이사야서가 이어서 하는 말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죄인으로 단죄하여 부러트려 놓은 약자들을 예수님은 꺾어 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아버지라는 확신과 희망을 그들의 마음속에 심었습니다. 육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병이 있어서 꺼져 가는 생명들을 절망 속에 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서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그들이 새로운 삶을 살도록 도왔습니다. 초기 신앙인은 예수님의 그런 실천들 안에 하느님의 영이 하시는 일을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자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는 말씀이 하늘에서 들렸다고 말합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주님,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른 것은 성령이 그분 안에 계셨고, 그분의 삶이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는 것이었으며, 그분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모두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 되어 그분의 생명을 살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느님의 영을 우리의 숨결로 삼아 살겠다는 약속입니다. 세례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신분이 높아진 것이 아닙니다. 세례 받은 우리는 외치지도, 소리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이 외치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꺾어버리지 않습니다. “수고하며 짐 진 여러분은 모두 나에게로 오시오.”(마태 11,28).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신앙인인 우리는 좌절한 사람, 실패한 사람, 무거운 짐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위해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기회가 오면 그들을 돌봅니다. 우리는 심지가 꺼져 간다고 등불을 꺼 버리지 아니합니다. “지극히 작은 내 형제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그것은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40).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꺼져 가는 생명들 안에서 주님이신 예수님을 보고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봅니다. 하느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 것은 나 한 사람 잘 되자고 나선 것이 아닙니다. 세례는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살아 계셔서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종이 되겠다고 약속하는 의례입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요르단 강, 요한은 세례를 주고 있었다. 예수는 강둑에 서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본다. 강물은 저렇게 흘러가는구나, 세상은 저렇게 흘러가는구나. 이내 예수는 내려와 요한을 향해 물살을 거슬러 한발 한발 걸음을 옮긴다. 흘러오는 강물이 예수의 다리와 몸에 부딪치더니 다시 아래로 아래로 흘러간다.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관상하다가 생뚱맞게 연어 이야기다. 연어는 강에서 부화하고 태어난 뒤, 강을 따라 바다로 삶의 자리를 옮긴다. 약 4년 정도 바다에 살다가 연어는 자기가 태어난 곳을 향한다. 바다에서 모천(고향)을 향한 물길은 아주 험난한 여정이다. 때로 그 길은 수백 수천 킬로미터. 게다가 수많은 지류가 있기 때문에 잘못하면 다른 길로 갈 수도 있다. 물고기에 잡혀 먹힐 수도 있고 그물에 걸려 죽을 수도 있다. 폭포를 만나면 거세게 쏟아지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온몸을 휘저으며.
연어가 어떻게 모천을 찾아갈 수 있는가에 대해 여러 학설이 있지만 정확한 과학적인 설명은 하지 못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학설 중에 그래도 신빙성이 있는 것은 연어가 어린 시절 맡았던 강물 냄새에 대한 기억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기억 때문에, 또는 그 기억의 힘으로 연어는 자신이 태어난 곳에 도착한다. 알을 낳기 위해 집을 만들고, 그 안에 알을 낳는다. 그리곤 그 험난한 여정을 거쳐 오느라 지친 연어는 죽는다. 며칠 후에 수많은 새끼가 태어나고, 그 어린 새끼들은 죽은 어미 살을 먹고 자란다. 연어의 이런 삶이 그저 본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슬프고 아름답다. 거룩하고 숭고하다. 연어가 모천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새끼 때 맡았던 강물 냄새에 대한 기억이라면, 나는 어떤 기억이 있을까? 그 기억은 오래전에 일어난 어떤 일이 내 뇌에 저장된 그 무엇이라기보다, 한 인간으로 태어날 때, 우리 존재에, 우리의 혼에 저장되어 있던 그 무엇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내 존재가 시작된 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내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던 분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본성이 우리 안에 새겨져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모천인 하느님을 향해 살아가는 여정이다. 따라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 생명이 시작된 곳, 내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출발점인 것이다. 그 여정에서 우리는 우리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상을 보며, 그 모상에 따라 더욱 인간답고 거룩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원의가 움터 오른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살아갔던 예수님의 길에 우리도 들어서게 된다.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 외치는 광신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가톨릭신자만 예수님의 길을 걸어가는 것도 아니다. 또한 이 세상사람 모두를 가톨릭신자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가톨릭에서 세례를 받지 않았어도, 다른 종교인들도 복음적인 가치를 살아간다. 선의의 사람들, 그리고 우리 사회의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세례를 받고 살아가는 우리는 복음적인 가치에 삶의 뿌리를 내리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좀 더 인간다운 세상, 좀 더 공평하고 좀 더 따뜻한 세상, 좀 더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도록 기도하고, 그런 세상을 만들어가는 그들을 응원하고 그들과 함께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연어가 모천을 향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수많은 위험을 만나고 난관을 겪어야 했다. 그런데 오직 살아 있는 연어만 강물을 거슬러 모천까지 다다랐고, 죽은 연어는 물살에 휩쓸려 저 아래로 떠내려갔다.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속적인 이 세상의 강물을 거슬러 살아간다는 것이다.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무시하고, 인간의 존엄과 생명을 수단화하고, 복음의 가치를 부정하고, 지극히 천박한 가치가 지배하는 이 세상의 강물에 나를 맡길 때, 우리는 죽은 연어가 되어 흘러갈 것이다, 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오늘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셨을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예수님은 이 소리의 힘으로, 이 소리를 기억하면서 당신 삶의 길을 걸어갔을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길을 걸어갈 때, 우리도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딸, 내 마음에 드는 아들/딸이다”
[생활 속의 복음] 사제직·왕직·예언직을 통해 하느님께로
주님 세례 축일인 오늘은 세례를 통해 받게 되는 중요한 직분인 사제직, 왕직, 예언직을 훌륭하게 실천하며 살았던 이들을 살펴보려 합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동참해 주시길 바랍니다. 먼저 사제직입니다. 사제직은 하느님과 인간을 이어주는 중간자(사제)의 역할, 하느님의 은총과 선하심을 세상과 함께하도록 하는 임무를 갖고 있습니다. 오래전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바르톨로메오 데 라스 카사스(1474~1566) 신부를 소개합니다. 그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갔던 콜럼버스(1451~1506)와 동시대 인물입니다. 라스 카사스 신부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인권을 최초로 부르짖었습니다. 당시 유럽 사회와 교회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인간이 아니란 말이오? 그들은 이성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란 말입니까?”라고 외쳤습니다. 1515년, 소유하고 있던 쿠바의 농장을 포기하고 도미니코수도회에 입회한 후 사제가 돼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정복자들이 저지른 ‘신대륙 파괴’를 규탄했습니다. 또 많은 저서를 통해 참다운 화해의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지금도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사회연구소가 운영되고 있으며 페루의 해방 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가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라스 카사스 신부는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참다운 사제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왕직은 봉사입니다. 페루의 ‘빗자루 수사’ 마르티노 데 포레스(1579~1639) 성인을 예로 들고 싶습니다. 흑인인 성인은 스페인 출신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장하면서 많은 인종 차별을 겪었습니다. 성인은 이발사(돌팔이 의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성인이 이를 뽑아준 ‘환자’들은 고통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여러 병자가 치유되는 기적도 일어났습니다. 온 생애를 하느님께 봉헌하기 위해 도미니코수도회에 입회를 신청했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습니다. 수도회 문지기로 사는 것을 겨우 허락받습니다. 그는 7년간 동물들과 함께 밥을 먹고, 청소와 온갖 잡일을 하면서 철저하게 하느님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하지만 정식 수도자는 될 수 없었습니다. 단지 수도복 착용만 허락받았습니다. 성인은 계속해서 수도회를 위해 봉사하고 가난한 리마(페루) 주민들을 치유해줬습니다. 또 그들에게 빵을 나눠주며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의 다정한 이웃으로 살아갔습니다. 여기서 또 한 번 하느님의 신비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성인이 사는 곳 건너편에 성인보다 7살 아래인 백인 여성 로사 데 리마(1586~1617) 성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성녀는 필리핀 선교를 원했지만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미니코회 제3회원으로 열심히 살다가 세상을 떠난 후 54년 만에 남미 최초의 복자가 됩니다. 마르티노 성인은 이보다 291년 늦은 1962년 요한 23세 교황에 의해 복자로 선포됩니다. 흑인들과 유색인들의 후손들이 마르티노 성인의 영성과 삶을 꾸준히 기억하고 실천했기에 이뤄진 신비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언직은 정의 선포라 생각합니다. 예언직은 하느님 기준과 시각으로 세상에서 하느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스리랑카의 ‘사르보다야(모든 사람의 깨달음) 운동’을 50여 년 동안 이끌어 가고 있는 아리야라트네 박사를 소개합니다. 그는 참여 불교와 간디 사상에 뿌리를 두고, 불교의 팔정도(八正道)를 근간으로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한다”는 고전적 방식을 통해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3가지 독(욕망, 성냄, 무지)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갈 것을 당부합니다. 식수 설비 설치, 도로ㆍ화장실ㆍ주택ㆍ도로 건설, 에너지원 확보 등 다양한 일을 펼치며 가난한 마을의 자립을 이끌었습니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 사르보다야 운동을 통해 자립한 마을이 1만 5000여 개에 이르고, 무상 유치원도 4335개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아리야트네 박사는 “과거로부터 이어온 위대한 도덕과 원칙 속에서 내 마음이 작동하는 ‘독’을 꿰뚫는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고 강조합니다. 주님 세례 축일을 맞아 그리스도인의 직무인 사제직, 왕직, 예언직을 실천한 이들을 생각해봤습니다. 세 가지 직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길 바랍니다. -박재식 토마스신부님
주님 세례 축일(마태오 복음 3장 13-17절)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이다.' 라는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이런 이야기가 생각나서 옮겨봅니다.
【명강사로 소문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모인 세미나에서 그 강사가 열변을 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 강사는 갑자기 10만원짜리 수표 한 장을 높이 쳐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돈을 갖고 싶지요? 어디 이 돈을 갖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어 보십시오.”
그러자 세미나에 참석한 그 수많은 사람들 대부분이 손을 들었습니다. 강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습니다.
“저는 여러분 중에 한 사람에게 이 돈을 드릴 생각입니다. 하지만 먼저 나의 손을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쳐들었던 수표를 손으로 이리저리 마구 구겼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이 수표를 가지기를 원하십니까?”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강사의 행동에 놀랐지만, 역시 모든 사람이 손을 들었지요.
“좋아요.” 그러더니 이번에는 그 10만원짜리 수표를 땅바닥에 던지더니 구둣발로 밟으며 더럽혔습니다.
그리고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구겨지고 더러워진 그 10만원짜리 수표를 집어 들고, 아직도 그 돈을 갖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또 다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이 때 강사는 힘찬 어조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가 아무리 이 수표를 마구 구기고 발로 짓밟고 더럽게 했을지라도 10만원짜리 수표는 항상 10만원 짜리 수표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인생이라는 무대에서는 여러 번 바닥에 떨어지고, 밟히며, 더러워지는 일이 있습니다. 실패라는 이름으로, 또는 패배라는 이름으로 겪게 되는 그 아픔들... 그런 아픔을 겪게 되면,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평가절하 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당신이 실패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의 가치는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구겨지고 짓밟혀도 여전히 자신의 가치를 지닌 이 수표처럼 말입니다.】
강사가 말하는 그 가치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 복음 마지막에 나오는 말씀대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예수님이 들으신 그 목소리를 우리도 세례 때에 들었습니다. 너무 아기 때 세례를 받았거나, 그 날 말씀에 집중하지 않은 분들은 기억이 없다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하느님께서는 자녀 된 우리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라는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잘 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녀 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다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사랑합니다.
더 많은 돈을 벌어야 사랑하고 더 많은 일을 이루고 성취해야 사랑합니다. 또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사랑하고, 더 많이 가져야 사랑합니다.
더 많이 가지지 못하고, 올라가지 못하고, 이루지 못한 사람에게는 ‘너는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없어... 너는 쓸모없는 인간이야...’ 라고 말합니다.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떻겠습니까? 세상에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세상이 인정해 주면 일시적인 기쁨을 느끼고, 세상이 인정해 주지 않으면 좌절하고 실망할 겁니다.
그 좌절과 실망이 반복되다보면, 자기 회의, 낮은 자존감, 자기 거부, 그리고 우울함이라는 암흑에 파묻힐 수밖에 없겠죠.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하느님께서 들려주시는 진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자녀이다.’ 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세상이 주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경쟁에서 뒤처지고, 원하는 직장에 뽑히지 못하고, 단체 내에서 리더로 일하지 못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잃고 죽음을 맞이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관계와 소유물과 생명을 모두 잃은 그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자녀이다.’ 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사랑으로 안아주십니다.
그런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희망을 잃지 않고 자신감 있게 살아갈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하루, 기도와 말씀과 미사 안에서 아무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한 남자가 파출소로 뛰어 들어오며 말했다. “제 아내를 때렸습니다. 저를 유치장에 가둬주세요!
당황한 경찰이 물었다. “아내가 죽었습니까?”
남자는 화를 버럭 내며 말했다.
“죽었으면 유치장에 가둬달라고 하겠습니까? 살아서 달려오니까 그렇지요!”
-김기현 요한 신부님
사랑 받고 싶다면?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하느님처럼 이 세상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면 행복할까요? 아니면 아주 돈이 많은 갑부 집 자녀이면 행복할까요?
근래에 노태우 전 대통령의 외손녀이며 SK 최태현 회장의 둘째 딸 최민정이 해군 장교를 지원하여 며칠 전에 소위 임관을 하고 충무공 이순신함에 배치되었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배에 타서 임무를 수행하는 이 역할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평생 놀고 먹어도 되는 재벌의 딸이 왜 굳이 이런 고생의 길을 선택한 것일까요? 그녀는 베이징대학에 다닐 때도 집에서 돈을 하나도 가져다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다 벌어 쓴 것입니다. 평소에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며 돈을 벌었고, 방학 때 한국에 와서도 편의점 알바를 하며 돈을 벌어 썼다고 합니다. 참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 Oblige)의 모범이 되는 예입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란 성경의 용어로 말한다면 “더 많이 받은 사람은 더 많이 내어놓아야 한다”란 예수님의 말씀처럼, 더 많은 특권을 누리는 사람은 사회에 더 많은 공헌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의 유래는 로뎅의 유명한 작품, 칼레의 시민들(Les Bourgeois de Calais)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은 6명의 프랑스 칼레라고 하는 도시의 귀족 시민들이 목에 밧줄을 걸고 죽음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모습의 청동상입니다.
당시 영국과의 백년전쟁 중 프랑스 칼레는 영국군에 포위되어 식량이 떨어져 결국 항복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국 왕 에드워드 3세가 제안을 하나 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칼레의 지도자 중에서 6명이 스스로 목숨을 내놓게 된다면 이곳의 시민 목숨은 살려주도록 하겠다.”
가장 먼저 그 도시의 가장 부유했던 생 피에르가 나섰고 그 이어 시장을 비롯한 6명이 더 지원을 하여 총 7명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빠지라고 하여 생 피에르가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생 피에르는 이 6명이 용기를 잃을까봐 스스로 자살을 선택합니다. 이 모습에 감동하여 영국 왕은 나머지 6명도 살려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들이 참으로 행복한 이들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것에 있는데, 이들만큼 사랑했고 이들만큼 사랑받는 사람은 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받는 이유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번 반대 경우도 볼까요? 구속되어 고생을 하고 있는 대한항공의 부사장 조현아씨는 평소에도 직원들에게 모욕적인 욕설을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고 합니다.
땅콩 때문에 비행기를 회항하게 했던 어마어마한 힘과 부의 소유자, 조현아씨는 과연 행복할까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어도 그녀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 모습을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지 못하면 행복하지 못하고 살 힘이 없어집니다. 요즘 돈 많은 사람들의 ‘VIP 갑질’이 뉴스에 많이 나오는데 이들이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돈이 있으면 행복할 것 같지만 사실 행복은 돈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란 우리 자아를 물속에 죽이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뜻을 물속에 죽이고 하느님 뜻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기 위한 첫 발을 내딛는 순간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계명에 불순종하여 행복을 빼앗겼던 것과는 반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 자신을 버리고 순종을 약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당신께서 받으실 세례가 따로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새롭게 부활하시겠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때, 하늘로부터 성령님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시고 열린 하늘의 문에서는 이런 음성이 들려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우리도 이 한 마디만 듣는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아마 행복감에 까무러칠 것입니다. 마지막 날 심판대에서 당신 왼 편에 선 사람들에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모른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희가 기적도 행하고 예언도 하고 사제직무도 행하고 미사에도 얼마나 많이 참례했는데요?”
“나는 너희를 모른다. 너희가 섬겼던 신은 금송아지였다. 금송아지를 이용해 이것 해 달라 저것 해 달라 청하면서 세상에서 부귀영화와 성공만을 바라지 않았느냐? 나는 실제로 너희를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런데 오른 편에 서 있는 우리들에게 “너희는 내가 사랑하는 자녀들이다.”라고 한다면 이 말씀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을 주는 것입니다.
지금 그리스도께서 그런 칭찬을 듣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받고 계신 것입니다. 얼마나 행복할까요? 이 행복이 바로 낮아짐에서 오는 것임을 절대 잊지 맙시다.
아버지의 사랑은 성령님입니다. 성령님께서 비둘기 보양으로 내려오시는데, 성령의 열매가 바로 사랑, 기쁨, 평화입니다. 즉, 사랑과 그로 인한 행복을 성령님을 통해 그리스도께 내려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한 인간에게 세례를 받으신 다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물과 같습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즉, 자신보다 높은 사람은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손바닥 위로 올라오리만큼 그분이 작아지시지 않았다면 하느님께도 우리 사랑이 흘러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릎 꿇고 발을 씻어주시고 우리 양식이 되어주셨기 때문에 우리 사랑에 그분에게 흘러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신보다 낮아지면 그 사랑이 물처럼 그 사람에게로 흘러들어갑니다. 물론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성모님은 가장 낮은 곳에 계셨기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은 물론 인간들의 사랑도 받으셨습니다. 사람이 사랑을 잃는 유일한 이유는 교만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교만해져 하느님과 사람들의 사랑을 잃고 불행하게 살거나, 아니면 겸손해져 하느님과 이웃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 하나 순종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사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당장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하고 십일조를 내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웃을 위해서도 내가 커지려 하지 말고 낮아지며 이웃을 더 높이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행복해지고 싶다면 말입니다.
전에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란 프로에 21살짜리 게임폐인녀가 나왔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잠자기 전까지 게임만 하며 삽니다. 이 세상에서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일지라도 게임 안에서만은 최고의 능력을 지닌 모두가 벌벌 떠는 힘을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이 게임폐인녀는 결국 현실과 게임을 구별하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사람들을 모두 정리해버리겠다고 하며 실제로 물병을 투척하였다고 합니다.
게임 공간에서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자신이 신처럼 모든 것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다고 믿는 지경까지 이른 것입니다.
수많은 이들이 이렇게 스스로 강력해지고 부유해진다면 행복하다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상 누구보다도 외롭고 불행하게 살아야만 합니다. 꿈을 깨야합니다. 행복은 낮아져서 자신을 버리고 상대를 높이는 이의 것입니다.
우리도 이처럼 세례에 참여할 때마다 하느님과 이웃들의 사랑을 받고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
첫댓글 저를 낮아지게 해주소서~
한없이 ~~
아멘~
로마
천사의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