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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10일 사순 제4주일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루가 15,1-3.11ㄴ-32) ‘Father, I have sinned against heaven and against you;
말씀의 초대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에서 먹었던 주식이다. 땅에서 나는 소출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적의 음식이었다. 만나를 먹는 동안 그들은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직접 체험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가나안 땅에 정착해야 했다. 스스로 일해서 땅의 소출을 먹어야 했던 것이다(제1독서). 누구든지 예수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옛 계약은 지나갔고,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계약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 그것이 그분과 화해하는 길이요, 은총을 얻는 방법이다(제2독서). 누구에게나 작은아들의 모습은 있다. 자신의 힘만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실패를 체험하면서 바뀌게 된다. 실패 또한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인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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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두 아들의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감동적입니다. 어리석을 정도로 착한 아버지 때문입니다. 작은아들은 재산을 물려받자 곧바로 객지로 떠납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렸던 가출입니다. 돈을 손에 쥔 그에게는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까운 돈을 물처럼 다 써 버렸습니다. ☆☆☆
‘호부견자’(虎父犬子)란 말이 있습니다. 호랑이 아버지에 개아들이란 뜻으로, 아버지만한 아들이 못 되고 속을 썩이는 아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모든 부모의 마음은 ‘견부호자’(犬父虎子)일 것입니다. 비록 부모는 천하지만 자식만큼은 잘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 -홍승모신부-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가르쳐 주는 복음 말씀 중에, 되찾은 아들의 비유만큼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이렇게 잘 표현한 복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복음의 백미라 할 수 있습니다.
통회하는 죄인의 무릎이 되자 -손용환신부- 돌아온 탕자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화중 하나를 꼽으라면 사람들은 에르미타슈 미술관에 있는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의 <돌아온 탕자>를 꼽습니다. 그러나 이 성화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고통 -박동호신부-
‘탕자의 비유’쯤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는 오늘 복음 말씀은 사실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칩니다. 멀쩡히 살아있는 아버지를 죽은 이로 여기고 제 몫으로 돌아올 것을 챙긴 둘째 아들의 행위는 분명 패륜입니다. 그가 겪은 고통과 수모는 정의의 실현이라 함이 옳습니다. 뉘우쳤지만 아버지께 돌아가는 그가 참 뻔뻔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만신창이로 돌아오고 있는 그를 아버지는 멀리까지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요? 복음은 간단히 ‘가엾은 마음’이라설명합니다. 아버지의 이 ‘가엾은 마음’을 무슨 말로 형언할 수 있겠습니까?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를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신 마음이라 설명합니다. 수도 없이 당신께 등을 돌린 이스라엘이지만 “이집트의 수치”를 치워버리시는 마음입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셨으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당신 아들을 죄로 만드셨을까요? 하느님께서 품으신 인간에 대한 사랑은 차라리 극단의 고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하느님의 사랑을 허구의 것 혹은 비웃음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현상들이 허다합니다. 복음의 둘째 아들처럼 그렇게 패륜의 죄를 저지르지도 않았음에도 바닥까지 곤두박질 치는 이웃이 너무나 많습니다. 물려받을 유산이라고는 ‘빈곤’밖에 없는 젊은이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돌아온 탕자라도 가엽게 여겨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겨주고”, 게다가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까지 벌여줄 몇몇 높은 분들은 지상에서 천국을, ‘이대로 영원히’를 노래하지만, 대다수의 이 땅의 평범한 사람들은 “곤궁에 허덕”이고 “돼지 치는 일”자리마저 구걸하고,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발전과 성장, 그리고 ‘고진감래’를 들먹이며 고통을 강요하는 이들은 태연하기까지 합니다. “무수한 사람들이 세계에서 굶주리고 있으므로, 거룩한 공의회는 모든 개인과 정부에 촉구한다. ‘굶주림으로죽어 가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주지 않으면 그대가 죽이는 것이다’고 한 교부들의 말씀을 상기”(사목헌장,69항)합시다. 패륜한 아들의 목을 끌어안는 아버지의 그 마음을, 우리를 위해 당신 아들 그리스도를 죄로 만들면서까지 움켜쥔 하느님의 그 고통스러운 사랑을 값싼 허구의 이야기 소재쯤으로 여긴다면, 하느님 앞에 너무 부끄럽고 염치없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회개와 참회의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임숙희-
시작 기도
완전한 사랑 -야곱의 우물-
램브란트의 그림 <돌아온 탕자>에서 되찾은 아들의 목을 껴안은 아버지의
풀려난 사람만이 풀 수 있다 -김찬선신부-
이렇게 말해도 되는지 모르지만
아버지 마음 -전삼용신부-
저희 큰 형은 해병대 특수수색대였습니다. 그 훈련하는 것을 들으니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것들이 많았습니다. 해병 수색대는 해병대에서도 특별히 차출된 해병대의 특공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가장 먼저 적진에 침투하여 주요기물의 폭파나 주요인물을 암살 하는 특공대 중의 특공대입니다. 여러 가지 훈련을 하지만 수영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는 방법도 재밌었습니다. 그냥 헬리콥터로 바다 한 가운데에 떨어뜨려 놓는답니다. 그러면 그들은 나침반만 보며 몇 시간이 걸리든 목적지에 도달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곳에는 막걸리가 마련되어 있어서 오랜 시간 수영하면서 오직 그 막걸리 한 사발만 생각한다고 합니다. 마치 오늘 막내아들이 집을 향하는 심정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망망대해에서 자칫 잘못하면 자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 돌아가야 한다는 신념이 강하기 때문에 낙오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이런 훈련은 수많은 극기 훈련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런 훈련들을 다 마치고 나야 정예의 특공대로 탄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가 아들이 재산을 가지고 나가면 잘 살지 알고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랑은 강요할 수 없기에 아들을 놓아주는 것입니다. 마치 망망대해에 놓아두는 것입니다. 죽을 수도 있지만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쩌면 아버지는 아들을 두고 도박을 하는 것입니다. 아들이 돌아오지 않아 아들을 잃을 위험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다면 이전보다 더 성숙해져서 돌아올 것을 알고 바다 한 가운데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떠나보아야 집의 소중함을 알듯이 한 번 아버지 품을 떠나는 아픔이 어떤 것인가를 절실히 깨닫고 난 이후에야 다시 아버지를 떠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자녀들이 죄를 짓게 내버려두시는 것도 이렇게 다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은 돌아온 탕자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비유말씀의 주제가 '탕자의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읽어보면 오늘 등장하는 세 인물 중에서 탕자의 역할이 가장 덜 두드러짐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말씀을 하시게 된 계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음식을 들고 계셨습니다. 그 때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이것을 보고 예수님을 비판하였습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 사람들과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탕자의 비유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비유말씀을 하시는 대상은 죄인들이 아니라 회개한 죄인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 그런 죄인들을 받아들이는 예수님의 아버지와 같은 자비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인 것입니다. 만약 죄인들을 대상으로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면 작은 아들처럼 회개하라는 의도가 있을 수 있지만 정작 오늘 복음은 죄인들의 회개와는 거리가 먼 자신들을 특별한 사람이라 여기고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며 좀처럼 받아들이려하지 않는 맏형과 같은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세리들이나 죄인들보다 더 나은 존재들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란 뜻 자체가 보통 사람들과는 같지 않고 분리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오늘 비유말씀에서의 맏형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하느님을 더 공경하고 잘못하는 것이 없으므로 마땅히 하느님으로부터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의사는 병든 사람에게만 필요하듯이 그들인 건강하다고 하니 의사가 필요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구원은 없습니다.
간디가 유럽에서 유학할 때 한 번 유럽종교에 관심이 있어 성당 미사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간디는 하느님을 믿지는 않았지만 관심은 있었습니다. 미사시간 때 성당에 도착하여 들어가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그를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유색인종은 다른 미사시간에 와야 한다는 이유였습니다. 당시는 백인과 유색인종의 미사가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간디는 인종을 차별하는 그런 종교는 다시 거들떠보지도 않겠다는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고 다시는 성당을 찾지 않았습니다. 백인들은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에 있는 많은 땅들이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 내려주신 것으로 생각하고 마구 침략하여 자신의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백인들이 다른 유색인종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아프리카 사람들은 사람으로 보지 않고 짐승으로 여겼으며 노예며 학살, 착취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맏형처럼 그리고 유다인들처럼 자신들을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다른 이들은 자신과 같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는 형이나 동생 모두 똑 같은 아들들입니다.
저도 유학하는 동안에 많은 한국인들도 인종차별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흑인들을 연탄이라 부르며 그들이 가난하고 냄새나는 것 때문에 우리보다 못한 인종으로 말하는 경우들을 들었습니다. 백인들도 여름에는 흑인보다 더 지독한 냄새가 나는데 그런 것으로 백인들을 깔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이라고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외국인들이 맡으면 마늘, 고추장 냄새가 나서 못 견딘다고 합니다. 사람의 존엄성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부자도 유식한 사람도 능력 있고 잘난 사람도 굶어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관심을 더 기울이십니다. 아픈 자녀에게 부모의 관심이 더 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가치로 사람을 저울질하기 때문에 사람의 가치가 서로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큰아들은 자신에게 당연히 와야 하는 칭찬과 상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아버지라는 사람이 자신이 죄인이라고 평가한 동생에게 자신보다 더 잘 대해주는 모습을 보며 화가 나게 된 것입니다. 사실 동생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더 화가 난 것이고 아버지의 자비에 화가 난 것입니다. 화가 난 이유는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 생각하여 그만한 보상이 와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교만하다는 뜻입니다. 아버지에게는 모든 자녀들이 다 똑 같이 소중한데도 말입니다. 맏아들과 같은 사람들을 선민의식을 가진 사람들, 특권의식을 가진 사람들이라 부릅니다. 사실 우리 마음 한 구석에는 많든지 적든지 이런 특권의식이 잠재해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지구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굶어죽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태어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게 태어나니 공부할 여건이 안 되고 그러니 또 가난하게 살게 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잘 살고 있다면 우리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고 또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도 그들 탓이 아닐 수 있습니다. 사실 돈이 많다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지수 1위는 제 기억으로 방글라데시이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위권에 머물러 있습니다. 다 잘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큰 아들처럼 만족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작게는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들, 크게는 유다인들 모두 자신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하느님과 함께 있으며 하느님을 믿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볼 수 있었던 민족은 선택된 유다인들이었습니다. 유다인들만이 하느님 아버지를 섬기고 있었고 그 밖의 다른 모든 민족들은 그들의 눈에는 탕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아가 나타나 자신들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하느님을 알지도 못했던 사람들일지라도 사랑만 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니 그들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버지께 화가 났고 그래서 그 아들을 죽이게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이 바로 교회를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교회 밖에서 아버지께 씩씩대며 탕자민족들을 받아들인 아버지의 교회에는 안 들어가겠다고 버티고 있는 지금의 유다인들을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비유말씀에서 맏형이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왔는지 안 들어왔는지는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다큐멘터리에서 실험을 하였습니다. 백인과 동남아 인 둘이서 서울 한복판에서 길을 물어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별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백인에게는 모르는 영어까지 써가면서 친절하게 가르쳐주었지만 동남아 사람은 하루 종일 사람들의 쌀쌀한 외면을 당해야했습니다. 우리도 한 번 반성해 봅시다. 우리는 정말 강한 사람이건 약한 사람이건,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이건 못해주는 사람이건, 사랑하는 사람이건 미워하는 사람이건 구별 없이, 모두가 다 하느님나라에서 만나 행복하게 영원히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용서는 하느님의 잣대로 배광하신부-
용서에 대하여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양승국신부-
<하늘이 무너져내릴 때> 수도원에 들어오기 전, 저와 ’죽이 잘 맞던’ 직장 선배 한 분이 있었습니다. 팍팍하던 직장생활, 선배로 인해 그나마 잘 견딜 수 있었지요. 하루 온종일 일에 시달리다가도 선배 생각만 하면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한마디로 “천사표”였지요. "오늘 저녁 한잔 같이 하자"고 제가 떼를 쓰면 단 한번도 거절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배는 주변 사람들한테도 ’인기 짱’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선배와 한잔하고 싶어 했고, 점심 한 끼 같이 하고 싶어 했습니다. 선배는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고민을 나누느라 월급의 절반 이상을 “접대비”로 지출했습니다. 그렇다고 선배가 많이 배웠거나 말주변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으며, 재산가는 더욱 아니었습니다. 외모가 빼어난 것도 아니고 “백”이 든든한 사람, 줄을 댈 만한 사람도 결코 아니었습니다. 선배 ’인기’의 비결은 다름 아닌 ’한결같음’이었습니다. 선배는 아무리 만나도 싫증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 그대로인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분위기를 편안하고 포근하게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선배는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말을 잘 들어주는 편이었습니다. 술자리에서도 자신의 말은 최대한 아꼈습니다. 그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방 말을 귀담아 들어주며 그렇게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괴로워서 다가갈 때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아 찾아갈 때마다, 그저 소주 한잔 사주던 선배, 말없이 등을 두드려주던 선배를 통해 저는 하느님 자비가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 하느님은 “자비 빼면 시체”인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 계심에도 유산을 챙겨 제 갈 길을 떠난 ’싹수머리 없는’ 자식조차 그저 말없이 다시 받아들이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지난 세월 저질렀던 숱한 과오나 방황은 당신 안중에는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가련한 처지에 가슴아파하십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시고 그저 우리가 당신께로 발길을 돌리는 그 자체로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죽을 것만 같아 찾아갈 때마다 우리와 함께 눈물 흘리시며 우리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아 주십니다. 살다 보면 가끔씩 철저하게도 제 자신이 망가지는 체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완전히 술에 빠져 바닥을 기는 순간이 있습니다. 참담한 실패의 순간, 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 순간,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순간, 아침이 오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하얗던 순간, 생의 최저점에 서는 순간, 정말 비참함을 느끼지만 다른 한편으로 제 자신 본연의 모습, 제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똑똑히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고통스런 순간, “하느님을 떠난 나는 결국 티끌이었구나! 결국 내 생애는 하느님 자비로 이어온 자비의 역사였구나!” 하는 진리에 도달하게 됩니다. “아버지,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제가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야 깨닫는 바지만 아버지를 떠난 인생은 무의미한 인생이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겸손함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비록 수시로 우리가 죄악에 떨어진다 할지라도, 방황과 타락의 길을 걷는다 하더라도, 다시금 새 출발 기회를 마련해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간절히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지칠 때마다, 세상으로 인해 상처받을 때마다, 우리 자신의 한계에 실망할 때마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돌아가야 할 곳은 바로 하느님 그분 품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U턴”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달리고 있는 이 방향이 올바른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빨리 U턴 지점을 찾는 일입니다. 가던 길의 방향을 되돌리는 일입니다. 연기처럼 덧없는 것들을 진리라고 여겼던 삶, 순간적인 것을 영원한 것이라고 믿고 모든 것을 바쳤던 지난날 그릇된 삶을 접고 어떻게 해서라도 진정한 사랑, 결코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 사랑을 찾아 돌아서는 일이 회개입니다. 언제나 우리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진실한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향해 얼굴을 돌리는 일이 회개입니다. 언제나 거듭 태어나고 싶어서 끊임없이 자신의 궤도를 본질적으로 수정하고 재구성하는 일, 그것이 회개입니다.
새벽을 열며
한 청년이 홧김에 실수로 살인을 범해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의 아버지는 주지사를 찾아가 간절히 애원을 했지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마세요. 빠다킹신부
예수님의 마음 -허찬란 신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 -백남용 신부- 루카 복음서에서 오늘 복음구절을 찾아보면 ‘되찾은 아들의 비유’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어린 소신학생 시절의 한 장면을 떠올립니다. 정진석 추기경님이 그 당시 저희 반 담임 신부님이셨고 라틴어를 가르치셨습니다. 당시 교재는 15세기의 독일 가톨릭 신학자 에라스무스가 성경을 재해석하여 쓴 라틴어 성경이었습니다. 어느 날, 바로 오늘 복음 구절을 독해하던 중이었습니다. 신부님께서 갑자기 저희에게 “동구 밖에 나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지쳐서 돌아오는 작은 아들 중에 누가 먼저 상대를 알아봤을까?”하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학생들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졌습니다. 그러자 신부님께서는 그 다음 구절을 읽어 주셨습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이가 더 먼저 알아보았다.” 에라스무스의 멋진 표현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를 화해시키신 하느님 -조욱현 신부- 오늘의 독서와 복음에는 사순절의 엄숙한 분위기에도 기쁨이 있다. 죄라는 것은 우리 자신을 하느님과 멀어지게 할 뿐 아니라, 형제들과도 멀어지게 하는 비극적인 것이며, 제1독서에서는 이집트의 노예생활에 대한 기억을 하고 있고, 이제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감으로써 하느님과 화해하여야 함을 말하고 있다. 악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자비와 형제들과의 화해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참 기쁨이 있는 것이며 그 때문에 오늘이 “기쁨의 주일”이다.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이기양 신부- 어느 주일학교 유치부 선생님이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어린이들에게 설명해주며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어린이들에게 물었습니다.
탕자의 용기 - 함세웅 신부 - 사순 제 4주일은 전례상 ‘기쁜 주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를 묵상하는 사순절의 반이 지났기에, 목적지에 가까이 왔다는 기쁨에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등산객이 산 중턱을 넘어서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볼 때 느끼는 환희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꼭대기를 바라보며 정복할 수 있다는 부푼 희망에 힘찬 발걸음을 계속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너무나 까마득했던 그 목적지가 이제 눈앞에 다다랐으니 그 동안의 ‘나의 노력'이, ‘나의 수고'가 보람이 있구나 하며 스스로 감격해지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죄인이 죽기를 바라시지 않고, 회개하여 살기를 원하시는 하느님
기다려주시는 주님 -김연준 신부- 어느 집안에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커가면서 문제를 일으키더니 돈 먹는 하마가 되었다. 사업한다고 돈 가져가고, 무엇 한다고 돈 가져가고…. 점점 가산이 기울던 어느 날 아들이 이런 제안 겸 선언을 하였다. -서공석신부-
예수님 시대 유대교의 실세인 율사와 사제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모두 죄인이라 믿었으며, 하느님이 그들을 벌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또한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은 하느님이 내리는 벌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우리 생명의 기원이며 돌보아주는 분이라는 뜻으로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자녀가 부모로부터 인간으로 사는 길을 배우듯이, 사람도 하느님으로부터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삶을 배워서 그분의 자녀 되어 산다고 믿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사들이 예수님에 대해 불평을 합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실세들이 하느님을 벌하시는 분이라 믿었던 것은 인간이 하는 일에 준해서 하느님을 상상하였기 때문입니다. 말 잘 듣는 사람에게 상을 주고 듣지 않는 사람에게 벌을 주는 인간의 관행입니다. 인간에 준해서 하느님을 상상한 나머지 하느님은 모든 불행의 원인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아버지였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과응보의 원리에는 자비가 없습니다. 우리의 인과응보 질서를 초과하는 하느님의 자비의 질서입니다. 이 세상의 부모들이 자녀를 키울 때도 인과응보의 질서만 따르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자비로 감싸며 키웁니다. 부모의 그런 자비가 없었으면, 이 세상의 자녀들은 살아남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비유 하나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이 어떤 아버지이시며, 그 하느님의 가치관이 지향하는 질서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십니다.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받아 집을 떠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방탕한 삶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폐인이 되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배가 고픕니다. 아버지의 집에 종이 되어서라도 굶주림을 해결하겠다고 옵니다. 그는 아버지를 버리고 재물과 쾌락에 심취하였습니다. 그는 이제 재물도 탕진하였고, 배고프다는 사실만 남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종들이 먹는 음식이 탐이 나서 집으로 옵니다.
그 아들에게 아버지는 유산을 주는 인물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는 자녀를 위한 아버지의 사랑을 모릅니다. 그는 아버지를 만나면 할 말을 미리 준비하였습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는 아들이기를 포기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도 없고, 아버지와 함께 살겠다는 마음도 없습니다. 그는 오로지 굶주림을 해결하겠다는 마음으로 옵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자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복음서는 말합니다.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다시 아들로 대우합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아버지는 잔치를 벌이라고 명령합니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아버지를 버린 아들은 죽은 것이고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살아 있는 것이라고 복음서는 힘주어 말합니다.
오늘 이야기의 큰아들은 아버지를 버리지도 않았고, 충실하게 아들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는 자식으로서 지켜야 할 바를 다 지켰습니다. 그러나 이 큰아들은 아들과 함께 있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는 인과응보의 원리에 준해서 생각하고, 아버지의 자비로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지킬 것을 다 지키지 않은 아우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아들을 용서하며 받아들이는 아버지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예수님 시대 유대교 실세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형제를 죄인이라고 버리면서 자비로운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자기 생명의 기원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녀는 아버지 혹은 어머니 앞에 지킬 것을 다 지켜 벌 받지 않는 길을 모색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아버지라는 호칭에는 어머니의 역할도 들어 있습니다. 가부장사회였습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호칭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생명의 기원이시기에, 하느님의 질서, 곧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자비를 배우고, 익혀서 하느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느님의 질서를 배워서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자비를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병자를 만나면 고쳐 주고, 마귀 들렸다고 말하던, 간질 환자나 정신 질환자를 만나면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 이야기들 안에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하는 것은 ‘불쌍히 여기셨다’, ‘가련히 여기셨다’, ‘측은히 여기셨다’는 언급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신 것이었습니다.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따뜻한 마음들이 있어서, 이 세상은 살맛나는 좋은 곳입니다. 자비와 용서가 있어서, 우리를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더 살맛나고 더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발생시킬 사명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자녀들을 행복하게 하라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세상입니다.
"래따레" - 즐거워하라, 새로운 예루살렘아! -박상대신부-
육신의 재계로 시작된 은총과 회개의 사순시기가 이제 그 반을 넘었다. 시작이 반이라면, 반을 넘어섰으니 이제 거의 마지막에 다다른 셈이다. 그래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오늘 사순 제4주일을 ’래따레’(laetare; 즐거워하라) 주일이라 부르며, 가능하다면 사제는 장밋빛 제의를 입고 미사를 드린다. 즐거워해야 할 주체는 바로 예루살렘이다.(이사 66,10) 그러나 이 예루살렘은 예전의 시온(Zion: 예루살렘에 있는 언덕 이름, 예루살렘을 달리 일컫는 말로서 상징적으로는 이스라엘 전체를 의미함)이 아니다. 이 예루살렘은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에 의해 탄생될 새로운 시온이며, 새로운 시온이 즐거워해야 할 이유가 바로 제3이사야(56-66장)의 주제인 것이다. 그래서 래따레 주일은 극기와 보속(기도, 단식, 선행)으로 지내온 사순시기의 반환점에서 자칫 지쳐버릴지도 모르는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메시아의 부활로 선사될 새 즐거움으로 재충전시키는 전례주기 흐름상의 큰 의미를 가진다.
오늘 봉독되는 복음은 세 편의 비유가 실려있는 루가복음 15장의 세 번째 비유말씀이다. 세 편의 비유는 ’잃었던 양의 비유’, ’잃었던 은전의 비유’, 그리고 ’잃었던 아들의 비유’이다. 잃었던 양의 비유는 마태오복음(18,12-14)에도 있으나 나머지 두 비유는 루가복음 고유의 특수사료에 속한다. 예수께서 세 편의 비유를 연이어 들을 들려주신 이유는 15장의 도입부분에 밝혀져 있듯이, 세리와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고,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 하며 못마땅해하였기 때문이다.(1-2절) 세 편의 비유는 모두 잃었던 양, 은전, 아들을 다시 찾은 목자, 여인, 아버지의 기쁨으로 종결된다. 이는 곧 세리와 죄인들을 멀리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이들을 받아들이고 환영하며 잃은 것을 끝까지 찾아 나서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 그리고 다시 찾으신 후 기뻐하시는 그분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오늘 복음에는 ’잃었던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 비유’가 선포된다. 이는 루가 고유의 사료이면서도 너무나 잘 알려진 비유로서 때로는 ’탕자의 비유’로, 때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비유’로 소개되기도 한다. 당시 죄인이라는 굴레를 뒤집어쓰고 살아야 했던 세리와 죄인들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끊임없이 예수께 모여든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그들을 예수께서는 환영하여 맞아들이고 기꺼이 말씀의 식탁에 앉혀 말씀의 음식을 나누어주시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자주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함께 식사하는 것을 비난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해명이다.
탕자와 그에 대한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비유는 세부묘사가 매우 생생하여 당시의 관습과 법적인 절차를 반영하고 있으며, 동시에 충격과 감동의 영적인 차원에로 청자(聽者)들을 초대한다. 비유는 크게 작은아들의 타락, 아버지와 탕자의 관계회복의 두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 탕자의 처절한 깨달음이, 그 마지막에 회복의 불가능을 시사하는 큰아들의 정의(正義)가 각각 그 고유의 역할을 행사하고 있다. ① 타락의 단계: 타락의 과정은 작은아들의 자기고집과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아버지로부터의 분리와 이탈에서 시작된다. 아버지로부터의 이탈은 방종(放縱)을 초래하고, 방종은 곧바로 육신의 욕심, 즉 방탕(放蕩)과 정욕(情慾)으로 치닫게 되고, 그 결과는 비천함과 굶주림이다. 이는 곧 영적인 빈곤으로 표현된다.(11b-17절) ② 깨달음의 단계: 영적인 빈곤을 깨닫게 되면 이제 회복과 복귀의 과정이 이루어진다. 회복과 복귀의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결심과 회개이다. 진정한 결심과 회개는 때때로 인간성 자체를 포기하는 처절한 자각에 그 뿌리를 둔다.(18-19절) ③ 복귀와 화해의 단계: 이제 복귀가 진행된다. 진정한 복귀는 육(肉)과 영(靈)의 차원에서의 변화를 의미하며, 이 변화는 처음부터 이탈된 장본인(아버지)에 의한 수용을 필요로 한다. 수용은 변화를 전제로 하여 화해와 화목을 조장하지만, 비유에서는 아버지가 보여준 인내의 기다림과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용서가 인상적이다.(20-24절) ④ 제3자의 입장: 이제 큰아들의 입장이 표명된다. 큰아들이 전체 사건과 아무런 관계없는 제3자는 아니지만, 타락과 회복의 과정에서 용서의 불가능함을 시사하는 정의(正義)를 대변한다.(25-32절)
루가복음은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마지막 대답이 정의이기보다는 자비임을 강조한다. 즉, 심판이기보다는 용서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죄인에 비유된 탕자가 아버지의 용서를 회개함으로써 벌어들인 것은 아니다. 용서는 아버지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진다. 오늘 비유에서 보듯이 탕자인 작은아들(죄인)과 묵묵히 자기 본분을 다한 큰아들(의인)이 대조를 이루고 그 사이에 아버지가 서 있다. 아버지의 태도는 두 가지로 드러난다. 작은아들에게는 용서와 기쁨의 태도를 큰아들에게는 설득과 달램의 태도를 보인다. 큰아들이 작은아들의 잘못을 응징하려는 태도는 정의(正意)를 대변하는 것이며, 흔히 제3자인 우리들의 입장도 이와 같을 수 있다. 무릇 죄인이 우리도 다른 사람의 잘못은 응징하려든다는 말이다. 불의가 정의를 이길 수는 없다. 그러나 작은아들이 자기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있다(21절)는 점이 변수(變數)이다. 사실 이 변수에 관계없이 용서가 베풀어지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의 속성인 것이다. 아버지의 기쁨은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다"(32절)는 데 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난 생명에 대한 기쁨은 그 어떤 것도 불사(不辭)하는 하느님의 진정한 마음인 것이다. 혹자는 순리적인 인과응보도 정당한 심판도 정의도 불사하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탓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 탕자의 입장이라면 그저 감사할 따름일 것이다. 그런데 감사할 줄 아는 탕자 또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처절한 자기 깨달음의 시간을 가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 래따레 주일의 의미는 말씀의 전례식탁에 차려진 모든 독서의 말씀을 두루 꿰뚫고 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르러 첫 과월절을 지내고 그곳의 소출로 양식을 삼게된다.(제1독서)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고 ’새사람’으로 탄생하였음을 본다. 그러나 이 화해는 전적으로 죄 없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 편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선포된다.(제2독서) 이는 오늘 복음이 보여 주듯이 탕자에 대한 아버지의 용서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화해로 승화(昇華)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새사람’이 된 신약의 백성은 탕자로서의 묶은 삶을 버리고 화해의 새 삶을 살아야하는 의무를 가진다. ’새사람’은 곧 그리스도를 보고 화해를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새 삶으로 보답하는 사람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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