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샤르를 만난 후,
내가 읽고 쓰는 모든 것이 시가 되었다
시에 온전히 담긴 삶,
본 대로 묘사하는 시인
미국의 시인 마크 도티는 말했다. “표현할 단어를 찾으려 해 보면,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손에 잡히지 않으며 모호하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이내 분명해진다.” 시는 경험한 것을 본 대로 느낀 대로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SNS에 사진과 함께 올린 문장부터 프로필의 상태 메시지까지 우리는 모두 시를 쓰려 한다. 하지만, 업로드 버튼을 누른 후엔 만족감보다 담아내지 못한 것들이 더 많음에 아쉬움을 느낀다.
“샤르는 본 대로 묘사한다.” 르네 샤르는 자연, 친구, 연인, 그리고 자신이 속한 세상까지 그가 사랑한 모든 것들을 오롯이 글로 남긴 시인이었다. 그의 시에는 고향의 자연에 대한 서정과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열정이 온전히 담겨 있다. 대개 체험은 논리를 앞서 나간다. 그래서 논리를 역설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감각을 갱신시키는 시,
시와 더불어 우리는 누군가가 된다
블랑쇼는 샤르의 시를 두고 “시의 시”라고 했다. 그의 시 작품에는 시적인 것에 속하지 않는 이질적인 것들이 생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의 한계와 근원을 동시에 헤아리면서 생겨난 이질감과 난해함이 읽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새로운 신비가 당신들의 뼛속에서 노래하니. 당신의 정당한 낯섦을 일구어 내라.”
샤르는 레지스탕스 지휘관 시절 하늘을 감시하는 경계 임무를 수행하며 눈이 크게 상했다. 이 때문에 말년에는 글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시력을 거의 상실하고 만다. 하지만 그는 거의 불가능한 육체적 상황 속에서도 시를 썼다. 그의 치열함은 역설적이게도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은 언어를 통해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샤르는 그런 언어의 경우를 믿었고, 그렇기에 계속 시를 써 내려갔다. 그리고 말했다. 시와 더불어 우리는 ‘누군가’가 될 수 있다고.
푸코와 카뮈의 사랑을 받고
피카소와 스타엘에게 영감을 불어넣다
1957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카뮈는 기자회견에서 샤르의 작품을 극찬했다. “그의 작품은 가장 위대한 작품들 가운데, 정말이지 프랑스 문학이 낳은 최고의 작품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푸코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 『광기와 비이성』의 첫머리에 샤르의 글을 인용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을 만나고자 하는 학생이 샤르의 시를 하나라도 외우지 못하면 만나지 않을 정도로 샤르의 작품을 좋아했다. 세계적인 화가 피카소와 스타엘은 일찍이 그의 작품을 그림으로 형상화했으며, 프랑스 현대음악의 대표자 불레즈는 그의 작품을 음악화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국내에는 르네 샤르의 번역 시집이나 그에게 온전히 할애된 저작이 아직 없다. 프랑스 문학 전문가 이찬규 교수의 『시는 언제나, 르네 샤르』는 국내 최초로 번역한 샤르의 시와 삶을 섬세하게 담아냈다.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샤르에게 보낸 카뮈의 말처럼, 샤르를 통해 우리는 일상 속으로 시가 깊숙이 들어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전과는 분명히 달라진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의 시에서 서둘러 논리를 찾지 않는다면, 그 시는 “자라나는 현재”(OC:260)마냥 점점 재미있어지는 데가 있다. 샤르의 시가 난해함으로 불리는 것은 우선 세계에 대한 감각의 갱신에서 비롯된다. 감각의 갱신은 아름답기도 하고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다. 좀 더 나가자면 샤르의 시 작품에는 시적인 것의 통념을 벗어나는 이질적인 것들이 생동한다.
--- p.8
‘관찰자’라는 단어 속에는 시인이 되기 위한 기본적인 비법이 은닉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존재를 “왜곡하지 않고 보여” 주는 것, 그것이 관찰자의 방식이며 샤르에게는 시인의 소명이 되었다.
--- p.72
“시인은 진실을 말하지 않고, 진실을 살아간다.”(OC:760) 근본적인 것은 진실이 아니라 변하는 상황이다. 샤르에게 있어서 진실은 진실이 되는 과정보다 중요하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 샤르에게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한 지속의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매 순간을 위해 매 순간으로 태어나는 것. 샤르가 순간으로 빛나는 번개의 역설을 우리에게 전하는 까닭이다.
--- p.144
‘체험’과 ‘비체험’ 같은 것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시인은 전쟁 중에 혹은 삶 중에 “살짝 벌어진 틈”을 보았다. ‘어둠’이라 할 수도 없고 ‘빛’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것이 삶을 살게 해주었다. “살짝 벌어진 틈”은, 서정주라면,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정도가 될까. 그는 전쟁 동안 ‘급하게’ 썼고, 그가 쓴 것들은 전쟁 이후에 발표되었다. 적과의 대치 상황 속에서는 ‘급하게’ 쓸 수 있는 시간조차 귀했다. 하지만 글을 쓸 수 있는 그 짧은 시간이 그를 번번이 구원했다. 그는 “삶이 가장 명확해지는 순간”들을 기록했다.
--- p.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