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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금광 이야기에 대한 좋은 자료가 있어서 이렇게 퍼 왔습니다. http://blog.naver.com/soultrain59/166505843
캘리포니아 금광으로 떼돈을 번 사람 보다는.. 망한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특히 떼돈을 번 사람의 경우는 금맥을 발견한 사람 보다는 금을 캐는 광부를 상대로 장사를 해서 성공한 사람이 더 많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리바이스 청바지의 유래도 이 캘리포니아 골드러쉬에서 비롯되었으니.. 이해할 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이야기 하면... 미국의 각 주마다 고유한 닉 네임이 존재 합니다.. 예를들면 뉴욕주와 같은 경우는 엠파이어 스테이트(Empire State) 라는 닉내임이 있습니다.. 아리조나의 경우는 그랜드 캐년 스테이트(Grand Canyon State) 라는 닉네임이 있죠. 마찬가지로 캘리포니아의 경우는 골든 스테이트(Golden State) 라는 닉네임이 있습니다. 한데.. 많은 사람의 경우(밑의 영혼열차님 포함)... 이 골든 스테이트가 캘리포니아 골드러쉬때 발견한 금맥 때문에 명명 되어진 이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즉.. 골든 스테이트라는 이름은... 캘리포니아의 광활한 초지때문에 만들어진 이름이라는 설이 더 설득력을 가진다고 합니다.
즉.. 캘리포니아 중부를 가 보면... 대부분 낮은 구릉지대로서... 높고 푸른 나무대신 광활한 초지가 조성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초지는 우기가 되면 파릇파릇합니다.. 그래서 이때 방문하면 마치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놀던 그 광할한 초지가 연상되어 집니다. 하지만.. 건기가 되면.. 푸르렀던 이 광할한 초지가 다 누렇게 타들어 갑니다.. 그래서 어디를 둘러봐도.. 누르스름한 초지를 볼 수 있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누르스름한 초지 때문에 캘리포니아를 골든 스테이트라고 했다고 합니다. http://blog.naver.com/soultrain59/166505843
여행이야기의 첫번째 글로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설명하며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가 시에라 네바다 산맥에서 금이 발견되며 시작되었다고 했다. 이 골드러시가 미국이나 캘리포니아의 역사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2회에 걸쳐 설명을 해 보겠다.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는 1848년 1월24일, 제임스 윌리엄 마샬(James William Marshall)이라는 사람이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콜로마(Coloma)라는 곳에서 최초로 금을 발견하며 1855년까지 이어졌던 금광시대를 이야기 한다. 당시 새크라멘토 지역의 개척자였던 죤 셔터(John Sutter)의 목재소 셔터스 밀(Shutter’s Mills)에서 감독으로 일하던 마샬은 배수로에서 반짝거리는 금속을 발견하고 셔터에게 알리게 되며, 두 사람은 개인적인 실험을 통해 그것이 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현재 복원되어 있는 셔터스 밀
그런데 실제로 주인이었던 셔터는 자신의 지역에서 금이 발견된 것에대해 매우 난감해 하고 탐탁치 않게 여겼다. 금이 발견 되었다는 소식이 퍼지면 사람들이 몰려들고 자신이생각하고 있던 새크라멘토 지역의 대단위 농장 건설 계획이 무산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셔터는 황금 덩어리보다 농업에 뜻이 있었기에 이 사실을 숨기려 했지만 소문은 금방 퍼져 나갔다.
그해 3월 샌 프랜시스코의 상인이며 지역신문 발행인이었던 새뮤얼 브래넌(Samuel Brannan)은 금 발견 소식을 확인하고 재빨리 채굴도구를 판매하는 가게를 열어버린다. 이 브래넌이 가게를 열고 거리에서 소리친 것이 금광시대를 알리는 신호탄 이었고 ‘Gold! Gold! Gold from American River!’ 라는 외침은 역사적으로 기록된 유명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 금이 발견된 1848년 1월24일의 캘리포니아는 그때까지 멕시코의 영토인 알타 캘리포니아(Alta California)였다. 당시 멕시코 영토의 캘리포니아는 현재 미국과 국경을 맞대고있는 캘리포니아 샌디에고 남쪽의 바하 캘리포니아(Baja California), 그리고 현재의 캘리포니아인 알타 캘리포니아로 나눠져 있었고 알타 캘리포니아에도 총독(주지사)을 두고 있었다. 멕시코가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하며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에 의해 알타 캘리포니아의 소유권을 미국에 이양한 것은 금이 발견된 불과9일 후인 1848년 2월 2일 이었다. 금의 발견이 실제적의 미국의 자산가치를 금전적으로 크게 높여준 것은 아니지만 금광시대를 기화로 미국의 서부가 발전할 수 있는 틀이 형성된 것을 생각해보면 미국은 운도 따라주는 국가임이 분명한 것 같다.
* 금광시대의 광부들
그해 여름인 8월 19일,뉴욕 헤럴드가 캘리포니아의 금 발견 소식을 동부지역에 최초로 전달했고 12월5일, 대통령 제임스 포크는 의회에서 금 발견에 대한 공식입장을 확인시켰다. 그리고 1849년, 미국은물론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금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몰려들며 금광시대의 서막이 올려진 것이다. 그래서 그 시기에 금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온 사람들을포리 나이너(forty-Niners: 49년도의 사람들)이라 칭하게 되었고 풋볼 팀인 샌 프란시스코 포리 나이너스(San Francisco 49ers)는 그것에서 붙인 팀명이다.
물론 셔터의 우려대로 그의 농장은 금을 찾아온 사람들의불법 거주와 약탈로 완전히 망해버렸다. 무법천지가 되었던 것이다. 사실 2월의 조약에 의해 미국이 캘리포니아를 이양 받았지만정식 미국영토로 확정된 상황은 아니라 어떤 획일된 법령으로 사회를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멕시코의 행정, 사법, 의회는이미 권한을 상실했고 미국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무정부 상태나 마찬가지의 시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채굴 허가권 같은 것도 없었고 세금도 없어, 그저 아무데나 파고 훑어서 먼저 발견하는 사람이 부자가되는 것이라 당연히 무법천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은 1850년 9월,캘리포니아가 미 연방으로 가입한 후에야 정리되기 시작했지만 완전히 질서를 잡지는 못했다. 1848년 초기의 금 채굴자들은 당연히 그 지역 주변에 사는 북부 캘리포니아인들 이었다. 농업을 위해 정착을 한 유럽계 백인들과 스페인어를 사용하던멕시코 주민들, 그리고 일부의 인디언들이 채금을 시작했고 처음에는 남자들이 시작했지만 곧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한 가족 모두가 동원되었다.
캘리포니아 주민이 아닌 사람들로 처음 금을 찾으러 온것은 근거리에 위치한 오레건 주민들로 수천명이 한꺼번에 몰려 내려왔고,그 다음 페루와 칠레에서 배를 타고 입항하는 사람들과 멕시코에서 육로를 통해 올라온 사람들, 하와이에서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넌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몰려온 사람들이 1848년에 6천명이었고 실제 미국내의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은 불과 500명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채굴도구를 파는 가게를 열고 재빨리 장사준비를 했던새뮤얼 브래넌이 살던 샌 프랜시스코는 버려진 배들이 쌓여있는 유령마을같은 모습으로,대략 1천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작은 항구였다.
하지만 금광시대를 맞으며 불과 2년만에 인구가 2만5천명으로 불어나며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금을 찾으러 온 각국의 사람들이 거리에 텐트를 치거나 나무로 가건물을 짓고 거주를 하게되고 심지어 버려진 배를 뜯어내어 캐빈을 만들기까지 했다.
* 당시의 샌 프랜시스코
샌 프랜시스코는 셔터가 농장을 개발하던 새크라멘토 지역과는 100마일 정도, 금이 발견된 콜로마와는 150마일 정도가 떨어진 곳이라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지만 샌 프랜시스코에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리게 된 이유는 미국 동부에서 오는 사람들도 대부분 배를 타고 남 아메리카를 돌아서 캘리포니아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당시 캘리포니아까지 철도가 이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말을 타거나 마차를 끌고 오면 지형지물을 비켜가며 시간이 엄청나게 걸리기 때문에18,000마일(3만3천킬로미터)을 돌아도 배를 타는 것이 가장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고, 외국에서 오는 사람들도 금이 발견된지역과 가장 가까운 항구에 닿다보니 샌 프랜시스코에 그 많은 사람이 몰려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조금 머리를 쓴 것이 동부에서 출발한 사람들이남북 아메리카 중간의 가장 협소한 지역인 파나마까지 배를 타고 가서 육로로 정글을 지나 다시 태평양에서 배를 타는 방법으로 시간을 조금 단축할수 있었다. 그것도 비용이 많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말과 마차를 이용해 가족을 데리고 대륙횡단을 하게 된다. 이때 죽어나간 사람들도 무척 많고 특히 시에라 네바다 남동편의 사막 계곡은 금을 찾으로 캘리포니아에 들어선 포리 나이너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곳 이었다.
그래서 그 지역이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으로 불리게 되었고 국립공원으로 지정될때도 그 이름 그대로 데스 밸리 내셔널 팍(Death Valley National Park)이 되었다. http://blog.naver.com/soultrain59/166583006
처음 금을 발견할 시기만 해도 그냥 땅바닥을 조금만 훑어도찾을 수 있던 금덩이리가 1850년부터는 바닥나기 시작했고새로운 방식으로 금을 찾기 위해 채굴장비가 개발되며 전문적 광산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런데 금 발견이 수월하지 않자 수많은 사람들이 인디언들이 거주하던 지역까지 침범하게 되고 충돌이 일어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조상 대대로 살던 땅과 숲을 침범당한 인디언들은 생존을위한 백인과의 전투를 피할 수 없었고 총으로 무장한 그들에게 당해낼 수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1848년부터1868년의 20년 사이에 캘리포니아에서 사망한 인디언 10만명중 4,500명 정도가 살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기록이 그 정도니 훨씬 더 많은 인디언들이 자연사나병사, 혹은 사고사가 아닌 백인들에 의해 살해당했을 것은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때 모인 사람들은 경우에 따라 하루에 수천달러에 해당하는금을 찾기도 해서 평균적으로 동부 근로자 일당의 10배 내지 15배 정도를 하루에 벌어들였다. 그들은 짧은 시간내에 많은 돈을 벌어 귀향을 하거나 캘리포니아에 정착해 사업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리고 1849년이 되어 9만여명이 몰려들며 포리 나이너의 금광시대가 이어진 것이다.
1855년 금광시대가 막을 내릴때까지전세계 각지에서 모두 3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다. 현재 가장 최대규모인 샌 프랜시스코 중국 커뮤니티가 형성된것도 이 골드 러시에 의해서 였다. 1848년과49년 두 해 동안 몇 백 정도의 중국인이 샌 프랜시스코에 입항 했지만 1852년에는 2만여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밀려들었다. 금광시대는 11년 정도의 시간으로 그리 길게 가지는 못했다. 당시 금광시대에 채굴한 금은 현재 싯가로 10억여달러(1조원이 좀 넘는) 정도로 일부 소수의 사람들은 부자로 만들어 주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큰 소득을 얻지는 못해 중도에 많은 인원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오히려 손해를 보고 망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데 실제 갑부가 된 것은 금을 찾은 사람들보다 신속하게 채굴장비 가게를 열었던 새뮤얼 브래넌이라 한다. 그는 샌 프랜시코뿐 아니라 콜로마와 새크라멘토, 그리고 여러 금광지역에 채굴장비를 파는 가게를 열고금도 사서 되파는 장사를 해 금광시대에 금을 채굴하지 않고 부자가 된 무척이나 영특한 사람이었다.
금광시대는 채굴된 금의 금전적 가치보다 캘리포니아를 성장시킨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 훨씬 더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광산기술개발에 의한 공업의 발전과 철도가 캘리포니아까지 이어지며 수송수단이 해결되고 몰려든 정착민들의 식생활을 위해 농장과 목장이 주 전역으로 확장되며 순식간에 농업의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면에 반해 부정적 영향을 끼친 부분도 상당했다. 각종 유흥업의 확산, 범죄, 매춘같이 만연하게 되어 지역사회가 불안해진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원래 그곳에서 수많은 세월동안 대를 이어오며 전통사회를 이루고 있던 실질적인 주인인 인디언들에 대한 무차별 테러였다. 채굴작업에 사용된 독성물질들이 지역을 오염시키며 물고기나산짐승들의 서식지를 파괴하며 그 여파는 자연에 의존하고 살던 인디언의 식량부족 현상을 일으키게 되었다. 또, 백인들의 등장으로 천연두, 홍역, 독감같은 인디언이 면역력이 없는 병들이 퍼지며 수없이 많은 인디언들이 질병으로 사망하게되었다.
이런 것들보다 더 부정적인 것은 폭력을 통해 인디언을 몰아냈다는 것이다. 금을 찾는 백인들에게는 인디언이 가장 거추장스러운 장애물로 그들을 살해하거나 성폭행 하는 행위는 아무런 죄책감이나 법적 책임이 따르지 않는 일반적 행위로 간주되었다. 이런 여러 이유들로 인해 1850년 15만명이던 캘리포니아 인디언의 인구가 1870년에는 3만명으로 감소되는 현상이 벌어졌다. 하다 못해 연방 가입후 캘리포니아의 첫번째 주지사가 된피터 버넷이라는 놈은 인디언을 제거하거나 멸종시켜야 하며 그것은 전쟁밖에 없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을 정도니 보통의 백인들이야 오죽했을지 짐작할수 있다. 또한 초기 금광시대가 지나간 후에 그때 모여들었던 외국인에 대한 인종차별이나 법률 불공정, 테러등이 사회에 만연하게되어 불안한 시기를 겪기도 했다.
캘리포니아 금광시대는 세계무역에도 영향을 끼쳤다.
칠레와 호주, 하와이의 농부들은 캘리포니아라는 새로운 시장을 발견하게 된 것이고 영국의 공산품 제조업체도 거대한 의류시장 개척에 심혈을 기울였다. 골드러시로 인해 캘리포니아는 전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노력만 하면 보상이 뒤따르는 새로운 시작의 장소로 인식되며 행운이 따르는 곳이라 하여 캘리포니아 드림(California Dream)이라는 단어가 생겨나게되었다. 그때 생겨난 골든 스테이트(Golden State)이며 지금까지 캘리포니아를 부르는 별칭으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이민자들이 꿈꾸던 캘리포니아 드림은 그 후손들에의해 농장과 석유개발, 영화제작과 항공기 개발, 닷컴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꿈이 실현되는 장소로 현재 단일국가 보다도 훨씬 거대한 세계경제규모 8위라는 위치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첫댓글 재밌게 읽었읍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핸드폰으로 보니 사진이 하나도 안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