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어느 날 아파트 놀이터에 거니는데 낙엽이 제법 떨어져 있었다.
무심히 보고 있는데 어린아이 두 명이 오더니 한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낙엽을 가리키며 묻는 것이었다.
"예, 너 낙엽이 무엇인지 아니?"
"뭐긴 뭐야. 낙엽이지."
그러자 처음 물은 아이가 말하기를
" 저건 가을이 떠나며 남긴 발자취야." 하지 않는가.
허허 낙엽을 보고 어린아이가 저런 표현을 쓰다니 신기해서 내가 그 아이에게 물었다.
"너 몇 학년이니?"
"초등학교 2학년이에요."
초등학교 2학년인 학생이 저런 멋진 말을 사용하다니 나는 그 아이에게 무언가 주고 싶었다.
"학생. 너 앞으로 시에 소질이 있을 것 같다. 시인이 되겠어"
나는 김 삿갓을 좋아한다.
그가 남긴 시를 보며 어쩌면 한평생 걸인으로 떠돌면서 가는 곳마다 저처럼 가슴을 울리는 시로
풍자와 해학을 남기며 살 수 있을까 감탄한다.
그래서 그가 하루 밤 사랑을 하고 떠나며 남긴 발자국인 시를 몇 수 옮기려 한다.
<쇠뭉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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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시인 김 삿갓과 가련(可憐) 이야기
다시 찾은, 아는 이 없는 쓸쓸한 안변 거리.
김 삿갓은 행복했다.
곱단이와의 신혼 생활은 지난해 가련(可憐)이와 보낸 시간보다 더 자유롭고 즐거웠다.
노처녀를 여의지 못할 줄 알았던 곱단 어머니는 가히 사위가 자랑스러웠고, 천하의 시객(詩客)을 남편으로
맞은 곱단이는 김 삿갓을 온갖 정성으로 섬기고 사랑했다.
그런 시간은 일 년이 넘었고 뜰 앞에 오동나무는 다시 가을 소리를 내고 있었다.
未覺池塘 春草夢 (미각지당 춘초몽) : 연못가에 피어난 봄 풀은 꿈도 깨지 못했는데,
階前梧葉 已秋聲 (계전오엽 이추성) : 뜰 앞에 오동 잎은 벌써 가을 소리를 내는구나.
사람이 사는 인생(人生)의 부귀영화(富貴榮華)가 다 무어란 말인가.
오늘,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오동 잎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지 아니한가?
"내가 또다시 이렇게 안일(安逸)한 생활(生活)만 해서는 아니 될 텐데. “
김 삿갓은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는 묘한 자책이 또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조상이 지은 죄(罪)를 속죄(贖罪) 하기 위해서, 세속(世俗)의 허무함을 잊기 위해서 삿갓을 쓰고 떠난 내가,
4 년이 다 되도록 고향에도 가지 않고 떠돌아다닌 결과(結果)가 겨우 이렇듯 안일한 생활을 하기 위해였던가?
차라리 이렇게 살 바에는 고향(故鄕)에 가서 농사(農事)를 짓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할 것 아닌가?
늙은 어머니가 지금도 살아 계신지 돌아가신지도 모르겠고, 집을 떠나기 전 배가 불러왔던 아내는 아이를
잘 낳아 키우고 있는지? 온갖 궁금증이 그를 짓눌렀다.
드디어 가을 바람이 일기 시작하자 삿갓의 마음은 향수(鄕愁)에 사로잡혀 들뜨기 시작했다.
더구나 곱단이가 태기가 있는지 배가 불룩해 오는 것을 보니 고향에 아내 생각이 더욱 간절(懇切)했다.
(내가 고향에 다니러 간다고 하면 곱단이가 펄쩍 뛸 텐데, 어떡하나!)
이런 생각에 잠겨있던 어느 날 그는 꿈을 꾸었다. 그것은 고향 집 어머니 방에 가족이 모여들어 임종(臨終)을
지켜보는 꿈이었다. 머리에 수건까지 두른 어머니 머리맡에는 약사 발을 놔둔 채 모두 모였는데
"우리 병연이 만 오지 않는구나." 하며 병석의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었다.
삿갓이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내가 하는 말이 "아이고! 여보! 진작 좀 오시지!" 하며 울고,
병석(病席)의 어머니는 가냘픈 눈을 떠서
"병연 이! 이 불효 막심한 놈 아. 이제야 오다니." 하며 그만 운명(殞命)하는 꿈이었다.
"아이고! 어머니!" 그는 꿈 결에 소리를 지르자 옆에서 잠을 자던 곱단이가 잠을 깨며,
"여보!, 당신 무슨 꿈을 꾸셨기에 소리를 지르십니까?" 하며 팔을 흔들어 주었다.
"음! 그랬나?"
"다 큰 양반이 잠결에 어머니를 찾으세요?" 곱단이는 모로 누우며 그렇게 말을 했지만,
삿갓은 벌써 단천(端川)을 떠나 고향 길에 오르는 상상(想像)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렇다. 근본(根本)을 무시(無視)하고 사는 것은 아니 될 일이다. 할아버지만 조상(祖上)이고
날 낳아 키워주신 어머니는 조상도 아니란 말인가?)
이튿날 아침, 삿갓은 아내가 없는 틈을 타 행장(行裝)을 차려입고 장모(丈母)를 찾았다.
"아니, 갑자기 어디를 가려는 차림인가?"
장모(丈母)는 눈이 동그래져 물었다.
"아녜요. 제가 언젠가 도 말씀을 드렸지만, 안변(安邊) 사또가 저를 무척 아껴 주셨는데,
어젯밤 꿈에 보여서 무슨 변고라도 있는가 싶어, 바람도 쐴 겸 안부 삼아 다녀오려고 합니다."
"글쎄 집에만 있으려니 갑갑하기도 하겠지만, 곱단이가 바느질 심부름 다녀온 후에 보고 가지 갑자기 이렇게. “
장모는 딸이 없는데 행장(行裝)을 차려 사위를 떠나보내는 것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허허, 장모님도, 대엿새 면 다녀올 것을 꼭 만나보고 가야 하나요. 나가다가 만나게 되면 말을 해 두지요."
"글쎄 그래도 상관은 없겠지만."
삿갓은 이렇게 말을 하고 인사를 한 다음 성큼성큼 걸어 나와 재를 넘었다.
반짇고리에 간단하게 못 보고 가서 미안하다는 글을 써 놓고 나오기는 했지만,
혹시 곱단이를 만나면 어떡하나? 걱정하였다.
공연히 거리에서 만나게 되면 눈치 빠른 곱단이에게 붙들려, 들어가야 될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 곱단이를 만나지 않은 채 삿갓은 마을을 벗어났다.
모처럼 방랑(放浪)의 길을 나서니 기분이 날아갈 듯 상쾌(爽快)했다.
길을 떠난 지 사흘 만에 안변(安邊)을 밟았다.
벌써 일 년이 넘었지만, 거리는 그때나 다름이 없었고 고향을 찾아온 듯 반갑기만 한 안변의 산천(山川)이다.
누구보다도 가련 이가 보고 싶었다.
"음! 가서 하룻밤 회포(懷抱)나 풀고 가자."
이렇게 생각한 김 삿갓은 가련의 집 앞에서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점잖은 소리로 사람을 불렀다.
"이리 오너라!" 그러나 대답도 없고 인기척도 없었다.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힌 삿갓은 다시 한번 불러 보았다.
"이리 오너라!"
그때 서야, 한 사나이가 동 저고리 바람으로 대문을 빼꼼 열고 내다봤다.
"누굴 찾으시오?"
"여기 혹 가련이 란 기생(妓生)이 지금(只今)... 도."
"댁은 가련이와 어떻게 되오?"
사내는 턱을 들어 아니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글쎄 이렇게 찾아온 것은 아는 사이니까 찾아오질 않았겠소?"
"허 어! 한발 늦었구려. 가련이는 죽었다오! “
"예~?"
"허, 이 양반 그것도 모르고 찾아왔구려. 왜~ 지난해 봄에 목을 매달았다지."
"예? 자결을?"
김삿갓은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정신(精神)이 아찔했다.
지난날 가련과 헤어질 때 가련이가 했던 마지막 말이 뇌리(腦裏)에서 떠나지 않았다.
"꼭 돌아오셔야 해요. 만약 동짓달까지 서방님이 돌아오시지 않는다면 가련이는 죽고 말 거예요.
네? 저를 살리려면 꼭 그때까지 돌아오세요."
가련 이의 자살은 자기와의 이별(離別)이 큰 원인인 것이 아니었나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김 삿갓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쓸쓸히 물었다.
"혹시 죽기 전에 남긴 말이라도 있는지?"
"허! 그 양반, 가련 인지 그 기생이 죽고 난 한참 후에 이 집을 사서 이사를 온 내가 그걸 어찌 아오?"
하고 선 대문을 닫고 안으로 사라졌다.
"허 어! 이런 변이 있나! “
삿갓은 홀로 탄식(歎息)을 거듭하다 가련의 집에서 돌아 나오는 길에 마음이 하도 울적(鬱寂)하여
가까운 주막(酒幕)에 들려 술을 청했다.
주모(酒母)가 날아온 술을 한잔 마신 삿갓은,
"혹시 저 안 마을에 가련이가 왜 죽었는지 아오?" 하며 물었더니.
"아! 왜 그 기생 노릇 하던 가련이요? 서방인가, 남방인가? 못된 놈 떠나보내고 기다리다 지쳐서,
자리에 누워 지내다가 글쎄 불쌍하게도 불현듯 목을 매달았다지요. 아마?"
더 물을 필요도 없었다.
삿갓은 몇 사발 술을 더 벌컥벌컥 마시고 다시 물었다.
"본 군 사또 님은 안녕하시죠?"
"호 호!. 손님은 없는 사람만 찾으시네요. 사또 님도 새로 갈리셨지요."
"네 에? 그럼 먼저 사또 님은 어디로 가셨소?"
"그야 모르죠. 들리는 얘기로는 관직(官職)에서 떠나, 출세(出世)한 아드님 임지(臨地)로 두 양주 분이
가셨다죠. 아마?"
오늘, 김 삿갓이 만난 안변(安邊)은 불과 이태 전까지와 전혀 다른 안변(安邊)이었다.
인생무상(人生無常)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는 쓸쓸한 가슴을 안고 혼자 고개만 주억거리며 주모 (酒母)의 말을 듣다가 주막(酒幕)을 나왔다.
황혼(黃昏)이 밀려오는 안변의 거리를 거닐면서 쓸쓸한 회포를 달랠 길 없는 김 삿갓, 마음을 담은
시 한 수를 읊으며 안변의 거리를 떠돌았다.
秋風訪美 人不見 (추풍방미 인불견) : 가을바람에 미인을 찾았으나 못 만나고
一從別後 豈堪忘 (일종별후 기감망) : 한번 떠난 후로 어찌 너를 잊으랴
汝骨衛粉 我首霜 (여골위분 아수상) : 너의 뼈 가루가 내 머리 위에 서리로 얹혔도다.
鸞鏡影寒 春寂寂 (난경영한 춘적적) : 임자 잃은 거울의 찬 그림자는 봄도 적적하고
鳳簫音斷 月茫茫 (봉소음단 월망망) : 봉 퉁소 소리 끊기니 달빛마저 막막하다.
早吟衛北 鬼谷子 (조음위북 귀곡자) : 일찍이 북위의 귀곡자를 부르며 이별했고
早吟衛北 歸齊曲 (조음위북 귀제곡) : 지난날엔 귀제곡을 즐겨 부르더니
虛負周南 采藻章 (허부주남 채조장) : 지금은 주남의 채조장도 잊었구나!
舊路無痕 難再訪 (구로 무흔 난재방) : 옛길 흔적 없어 다시 찾기 어려우니
停車坐愛 野花芳 (정차 좌애 야화방) : 수레 멈추고 앉아 들꽃 향기 나 즐기리.
☆☆☆☆☆☆☆☆☆☆☆☆☆☆
贖罪 (속죄) : 贖 속죄할 속, 罪 허물 죄
鄕愁 (향수) : 鄕 시골 향, 愁 근심 수
懇切 (간절) : 懇 간절할 간, 切 벨 절, 끊을 절
<출처 : 권가네 사람들 권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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