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역 지붕의 골기와
김여화
이른 아침에 남관 역에서 통학기차를 타고 전주에 내리면 전주시내는 등교하는 학생들이 혹은 직장인들이 도시락을 들고 가는 건지 아무튼 작은 가방 하나씩 옆구리에 끼고 간다거나 분주히 걸어가는 모습들이 보이고 검은 골기와 지붕아래 대합실을 나서면 옆에 지금은 화장실이라고 부르는 측간이 있었다. 당시의 전주역은 화장실도 골기와를 얹어 어린 내가 올려다보면 금방이라도 나를 덮칠 것만 같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열 살 때 정읍태인에서 이사와 남관에 살면서 농사일로 바쁜 부모님대신 나는 두태 한, 두말씩을 머리에 이고 곧잘 통학기차를 타곤 했다. 그때 친구들 두어 명만이 전주로 중학교를 갈 정도로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이다. 나는 어른들에게 이어달라고 부탁해서 두태를 이고 걸어서 중앙시장 지금은 코아백화점앞이 복개를 해서 도로가 되어있지만 당시에는 개울이었다. 개울가에 도넛츠집이 유명했고 수북히 쌓여있는 도넛의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하는 그 길을 걸어서 중앙시장 곡식상회로 콩이나 팥을 가지고 가면 주인은 “아이고 많이도 이고 왔구나” 하시면서 돈을 셈하여 주셨다. 반드시 돈 잘 넣고 가거라는 말씀과 함께. 전주역 대합실만 내려도 머리가 아파지는 연탄 냄새, 전주역 근처에 있던 연탄공장에서는 말이나 소달구지에 연탄을 실고 나가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고. 연탄을 실고 나오던 말이 도로가에 응아를 해도 그냥 무심코 지나가버리는 사람들이었다. 트럭도 귀하던 시절이다. 아마도 1968년 이전이다. 전주역사는 왜 그리도 크고 넓었던지 처음으로 아버지를 따라 전주역에 내려 보고는 집에 있는 동생들한테 대합실이 운동장 같다고 했던 기억도 난다. 나는 부모님대신 두태를 가지고 나가서 돈으로 바꾸어 그 돈으로 동생들 먹일 활명수를 샀고 양말도 사고 약국에서는 당시에 라디오에서 선전하는 아로나민 골드도 사가지고 왔다. 활명수는 동생들이 자주 체했기 때문에 소화제로 산 것이고 아로나민 골드는 아버지가 드실 피로회복제였다. 물론 처음에 혼자서 갈 때는 불안했지만 나중에 자주 다니다 보니 익숙해져서 또랑가상에 있던 도너스집에서 빵도 사먹기도 하고 도넛을 사가지고 가서 동생들과 나누어 먹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어머니가 무엇무엇 사가지고 오라고 하면 연필로 적어서 가지고 갔고 갈 때마다 어머니께는 허락은 받은 후라야 도넛을 사는 것도 가능했다. 도너츠집앞에는 개울물이 연탄과 같이 시커멓게 흐르고 그 개울을 건너는 좁고 작은 다리가 두어군데 있었던 것 같다. 사람들이 많이 걸어가면 한쪽으로 서서 기다리다 걸었다. 내 품속에서 돈이 달아날까봐 전전긍긍하고 누군가 내가 받은 돈을 채 갈까봐 걱정이 태산 같았었다.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약사고 생활필수품을 사는데 소진이 되어야만 안심하고 천천히 다시 전주역까기 걸어올 수 있었으니까. 그 시절이 어언 40년이 넘었다. 전주역 지붕위에는 여름이면 골기와 사이로 풀이 나서 꽃이 피기도 했던 기억. 봄이면 남관 역에서 고사리를 삶아 가지고 나온 사람들이 남관역에서 장사꾼들에게 넘기고 돌아가면 장사꾼들은 그 고사리를 기차에 실고 전주역이나 익산으로 팔러가고 여름이면 남관 화전일군 밭에서 막 뽑아온 열무나 엇가리 배추를 실고 통학차를 타곤 했었다. 가을엔 홍시를 주워서 팔러가는 사람들과 함께 기차를 탔고. 겨울이면 나무장사들이 아침 일찍 남관에서 나무를 사가지고 리어카에 실고 전주를 행해 리어카를 끌고 가는 행령이 즐비하였다. 장작도 팔기도 했지만 남관에서는 주로 싸잽이나 새떼기나무(억새)가 주를 이루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도 새벽에 남관에서 보았던 나무장사 아저씨가 리어카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보면서 기차 안에서 “아까 저 아저씨다” 하면서 놀라워했던 기억이 새롭다. 기차에서 보는 노송동 고샅길, 기차에 얽힌 내 소중했던 추억들 지금도 눈에 선한 전주역사의 골기와 지붕, 그리고 화장실. 그립다. 골기와 넓은지붕 그 개울, 도넛츠가게 앞을 아직도 나는 꿈속에서 찾는다. 원고지(10.8매)
성명: 김여화 출생지: 정읍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