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인생여정에 자신의 가슴속 한(恨) 이 때로는 하얀 거짓말의 강력한 생산적 에너지가 되어 본인이 염원하는 목표를 성취하는 양질의 동기부여가 되기도 하나 봅니다. 저 또한 그중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 40여 년 전 저에겐 하얀 거짓말로 아름다운 동기 부여를 주었던 감사한 전우들을 그리는 마음으로 짦은 글을 여기 장용의 단결! 필승! 충성!에 올려 봅니다.
40여 년 전, 최전방 철원에서 병사로 근무할 때, 당시 군대신문인 "전우신문"에 제 창작시 "철마는 달리고 싶다"와 "영원한 무궁화 꽃"이 게재되었습니다. 덕분에 국방부에서 주는 작은 상금과 국방부 마크가 찍힌 시계도 상품으로 받고 포상휴가도 갔습니다. 그러자 선임들은 "와! 박일병, 시 잘 짓네. 내 연애편지 쓸 때 좀 도와줘 , 아니 아예 한 장 써주라"했고 "학교는 어데? 국문학과? 문예창작과?' 물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아, 예 **대학교 국문과 중퇴" 하며 어물쩍 넘기곤 하였습니다.
사실 709년대 초, 너무도 어려웠던 가정형편으로 육성회비를 낼 수 없어 중학교 졸업식도 제대로 못하고 세상 풍파에 시달리다 군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어릴 적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혹독한 가난속에서도 글빗기와 독서를 좋아해 무슨 책이든 읽고 나면 필사까지 해보곤 했었지요. 그래서 선임들의 질문에는 당돌이 거짓말로 임기웅변도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듣는 제 가슴은 늘못으로 찔리는 둣 아팠습니다. 짧았던 제 학력이 한이 된 것이지요
그래도 군대 복은 잇었던지, 제 논산 군번 앞과 뒤의 병과가 '의무병인 810"이었고 , 병력도 대학을 다니다가 입대한 자들이 많아 저도 그들과 함께 위생병과를 명받았습니다. 그들과 함께 대구 군의학교에서 의무병의 소양을 교육받고, 청성부대 의무중대에서 군 복무를 했고, 당시 제 선임으로는 K방송드라마센터 소속의 탤런트로 있다가 입대한 하대경 씨,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정동년 선생님이 있었고, 신학대학교에 다니다가 서른 살이 다되어 입대한 후임 김영일 씨 등 다양한 분들과 전우의 인연을 맺게 디었지요.
좋은 전우드르 만나 군복무 동안 그들로부터 좋은 귀동냥을 얻는 행운도 누렸습니다. 마음속으로 다짐도 했습니다. "그래" 제대하고 중학교 졸업장도 찾고, 나도 고등학교, 대학교 함 가자"고. 그래서 복무 중 저는 쥐꼬리만 한 병사 월급, 윗분들의 작은 격려금, 창작시를 써서 받게 된 전우신문 상금 등 받았던 돈이란 돈능 다 모앗습니다. 일단 중학교 졸업장 찾을 돈으오 쓰려고요.
그리고 1975년 11월 제대하고,중학교로 바로 찾아갔습니다. 밀린 육성회비가 6개월 치, 5만원 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우리 집 형편에는 너무나 큰 돈이었습니다.
군대에서 열심히 모은 돈으로 밀린 6 개월간의 육성회비를 냈고, "6년이란 세월이 지났는데 혹시 제적된 건 아닐까. 혹시 그렇더라도 내 눈으로 한 번 확인이나 해보자." 지옥과 천당을 왔다갔다 하는 불안감 소게서 졸업 여부를 확인한 결과 다행히 "졸업"이란 글자를 보게 되었고, 순간 저는 그 자리에서 오열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감동의 그 졸업장은 또 다른 발전적 집념을 잉태한 징검다리가 되어, 저는 치열하게 주경야독 공부하여 기어이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공무원이 되게 했고, 마침내 법학사의 사각모까지 씨워주며 대학 졸업장까지 안게 하는 행운을 주었습나다.
물론 그 과정에는 제 인생의 동반자요. 영원한 친구이자 보약 같은 아내의 따스한 격려와 허닌적 내조도 컸지요. 이렇게 치열했던 삶. 그러나 건강한 인생 여정이라 자부할 수 있는 삶의 길목에서 가끔 추억에 젖어 보는데 그럴 때마다 제 가슴에 큰 은혜와 감사로 오는 것 중 하나가 40 여 년 전의 최전방 철원에서의 군 복무와 그때 당시 나에게 학력을 묻고, 실력을 믿어 주어 내가 학력에 대해 하얀 거짓말을 하도록 원인을 만들어주었던 전우들이었습니다. 제가 초라했던 제 학력을 한탄만 하고 제대 후에도 그냥저냥 세월을 보냈다면 오늘의 제가 없었을 것이라는 아찔한 마음 때문입니다.
그때 최전방 34개월 군 복무는 정말 힘들 때도 솔직히 많았지만, 저는 선후임 전우들로부터 받은 자극과 아름다운 동기부여, 귀동냥은 지금도 너무나 큰 좋은 자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여 저는 가끔 저의 지난 일기장과 군 복무 때의 사진. 전우신문 속 저의 시를 보며 전우였던 하태경 씨, 정동년 씨, 김영일 씨 등 전우들의 얼굴과 이름을 떠올려 봅니다.
특히 신학생이었으며 저보다 후임이었지만 당시 서른 살이 다 되었던 김영일 씨의 믿음 가득한 전도 덕에 지금도 교회에 나가고 있어 더 큰 감사를 드립니다. 보고 싶고 그립습니다. 지금은 일흔을 바라보는 분, 일흔이 넘으신 부늘도 있겠습니다. 제 나이도 벌써 66살이니.
전우 여러분! 40여 년 전 중학교 졸업장도 없이 하얀 거짓말로 버티며 혼자 아파했던저 박경영"이 진짜 등단 시인도 되었습니데이. 꼭 소식들 주이소. 제 첫 시잡과 부산의 명물 돼지국밥 한 그릇, 소주 한 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나다. 하대경! 정동년! 김영일! 그리고 모든 전우여,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 박겨영-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심어로
철마는 달리고 싶다
- 일병 박경영-
초병의 지성 어린 동공에 염제의 기승
지평선 깊숙이 져 갈 때
기적을 울리고파 몸부림치는
철마의 땀방울이...
사랑해온 모든 것을떠나온 당신
아무도 없는 반 쉰을
핏빛 물든 어버이의 고향
통분의 용암이 이글거리는 심장에
D.M.Z. 갈대숲을 헤치고 찾아온
내 형제의 울름소리는
당신의 통분울 잉태했건만
아-
혈관을 파열하는
붉은 담의 포성이
사랑의 대화 삼켜 버린
이리 떼의 포효가
입안에 고이는 눈물을
당신은 아시겠소?
녹슨 철책 넘나드는
상처 입은 추조도
고향 뜰 수수알에 걸린
한가위 보름달도
당신을,
무궁화 띠고
까치소리 정겨운
금수강산의 아들이라는데...
어이 당신은
호올로 땀 흘리며
기적만을 삼키오
<추신> 위의 시(詩)는 1975년 9월 24일 "전우신문에 실렸던 시로 철뤈 6사단 청성부대 의무병으로 철책의 초소와 소대를 돌며 환자들을 돌보고 치료하고 자대로 복귀하면서
동강 난 민족의 능선, 철의 삼각지"월정리역"의 풀숲에서 깨어지고 찌어진 채 북녁을 향해기적 치며 달리고 싶어 땀 흘리는"철마"의 모습을 보고 지은 시입니다.
첫댓글 그래도 군대에서
하얀거짓말 덕분에 ..배움 멈추지않고
정말 승리의 삶을 사셨네요
아마도 그지나온날들속에
하나님의 철저한 개입이 인도하심이 있지않았나싶습니다
이제부터의 남은 이땅에 행보또한
건강하고 복된삶되시다가 ..
이글 쓰신 박경영시인님
천국에서 뵙고싶네요
천사 초롱님! 안녕하세요.
제 기억으로는 처음 뵈는 거 같습니다
반갑습니다. 환영합니다.
국가가 불러 온 몸 바쳐 충성도 했지만,
늘 현실 안주나 신세타령 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으며 금자탑을 쌓은 박경인 시인님.
헛된 삶이 아닌 진취적이고 미래를 보는 삶이
귀감이 되었습니다. 박경영 시인 파이팅!`11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 오네요.
즐감하고 갑니다.
응암동 님 하세요.
리고 싶다고 염원하는데,
. 맹호
조금 오랫만 입니다.
그렇게
따스한 봄은 오건 만,
이젠 기대 해볼만 하는지
저도 싱숭생숭 합니다.
정은이 일당들은
약속 어김을 밥 먹듯 했으니까요
한반도 남북에 봄을 기다려 보자구요.
은혜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