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교생선생님이 오시면 통과의례처럼 거쳐야 하는 것이 있다. 여고에 온 남자 교생선생님이거나 남고에 온 여자교생선생님이라면 이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베길 수가 없다. 바로 첫사랑이야기다. 물론 첫키스에 대한 추억은 절대로 빼놓아서는 안 된다.
스물이 좀 넘은 앳된 교생선생님이 들려주시는 첫사랑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묘한 환상을 줬다. 학생과 선생님과의 나이 차라고 해봐야 대여섯 살 정도이니 학생들은 마치 자기가 그 첫사랑의 주인공이 된 것 마냥 얼굴 붉혀가며 첫사랑의 맨홀 속으로 빠져 들어가곤 했다.
여자들은 첫사랑을 추억 속에 묻고 남자들은 첫사랑을 가슴 속에 묻는다고도 한다. 남자와 여자의 기억과 후회의 방식의 차이라고도 한다. 그 차이와 원인이 무엇이었건 간에 첫사랑의 이야기는 말하는 사람에게나 듣는 사람에게나 달콤쌉싸름하다. 때 묻지 않은 순수했던 시절의 사랑이니 달콤하고, 그 끝이 대부분 아픈 이별로 끝이 나버리니 쌉싸름하다.
하지만 남자들에게서 첫사랑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것도 술 한 잔 들어가지 않은 무알콜의 청정한 정신 상태에 첫사랑 얘길 해달라고 들이대니 이야기를 풀어놓겠단 남자들이 별로 없었다. 그런 쉽지 않은 인터뷰에도 기꺼이 자신의 첫사랑이야기를 해 준 세 남자의 첫사랑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첫 번째 첫사랑 - 성준의 세레나데
성준의 첫사랑은 고2때 찾아왔다. 흡사 번개 맞은 것처럼 말이다. 성준은 학교 남성중창단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선배의 권유로 지역 고등학교 남녀혼성합창단 활동을 시작하던 그 날, 성준의 그녀는 거기에 있었다. 마치 코팅된 책받침 속 ‘최진실’ 누나처럼 귀엽고 예쁜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성준은 정말 한 눈에 그녀에게 반해 버렸다.
합창단의 적지 않은 남자 선배들에게 러브콜을 받던 그녀였다. 은근 경쟁심도 생겼다. 그렇다고 성준도 꿀릴 것은 없었다. 낮게 깔리는 중저음의 목소리에 운동도 꽤 잘했고 큰 키에 훈훈했던 성준도 따르는 여학생들이 많았다. 이걸 훈남훈녀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성준은 누가 그녀를 먼저 빼앗길까봐 내성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그녀는 성준의 고백을 받아줬다. 사실 성준과 그녀가 만나기까지는 숨은 공신들이 있었다. 당시 성준의 절친의 여자친구가 그녀와 친했다. 성준의 절친과 그 여자친구는 성준과 그녀가 만날 수 있는 기회들을 열심히 만들어 줬다. 함께 혹은 둘만의 만남까지. 그렇게 친구들의 도움과 지지 속에 성준과 그녀의 첫사랑은 시작됐다. 함께 공부도 했다. 노래라는 공통의 관심사와 활동은 성준과 그녀를 더욱 가깝게 만들어 줬다. 그렇게 성준은 대학입학원서를 쓰던 그날까지도 그녀와의 사랑이 영원할 줄 알았다.
사건은 그날 일어났다. 서로 다른 학교의 입학원서를 쓰고 돌아오던 그 길에서 성준은 그녀와 말다툼을 했다. 사소한 말다툼이었단 성준의 생각과 그녀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그날 이후 성준은 그녀가 연락을 피하고 있다고 느꼈다. 대학입시로 정신없던 시간을 보내고 나니 성준은 그녀와 헤어지다시피 한 상황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학에 합격한 성준과 달리 전기, 후기 입시 모두 떨어진 그녀가 전문대를 갔더라는 소식까지 성준은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성준이 너무나 사랑했던 그녀와 이별을 실감해가던 즈음이었다. 고등학교 합창반 친구들이 남녀 쌍쌍으로 모이는 모임에 성준을 불렀다. 성준은 그곳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왜 연락이 없었냐거나 왜 그랬냐는 질문도 대답도 필요 없었다. 성준은 그녀와 그렇게 다시 사랑을 시작했다.
성준은 세월이 흘러 사십대 중반을 훌쩍 넘어섰다. 성준은 유통업체의 지점장이 됐다. 결혼을 했고 세 아이를 둔 아빠가 됐다. 물론 성준은 그녀와 결혼하지 못했다. 20여 년 전 그녀와 첫날 밤 이후 성준은 그녀와 다시 멀어졌다. 그녀는 같은 고등학교 합창단의 선배와 결혼을 했다. 그리곤 먼 독일로 떠났다. 성준의 첫사랑은 그렇게 바다를 넘어갔다.
성준은 인터뷰 3주 전쯤 그녀와 통화를 했다고 했다. 우연히 고등학교 친구들의 모임 전화를 받았던 모양이다. 친구들은 성준에게 그녀가 한국에 왔고 지금 모임에 와있다고 전했다. 성준은 설레는 마음으로 통화를 했다고 했다. 감정과 달리 서로 형식적인 안부를 묻고 답한 것이 전부였다. 성준은 그 모임에 가지 못했다. 너무 반갑고 보고 싶어서 한달음에 가고 싶었지만 그 자리엔 그녀의 남편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준에게 첫사랑은 그냥 그녀 자체였다. 가슴 속에도 머릿속에도 차마 지우지 못하고 묻어 놓은 청춘의 흔적처럼.
윤서희 ‘사랑의 향기’ 전
두 번 째 첫사랑 - 무영의 주홍글씨
무영에게도 첫사랑이 있었다.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무영은 죽을 때까지 첫사랑을 잊을 수가 없다. 무영은 결혼을 하고도 십여 년 동안 그녀가 선물해 줬던 셔츠를 보관하고 있었다. 결혼을 하고서도 그녀가 사준 셔츠를 일 년 내내 입다시피했다. 그 옷이 닳고 닳아서 해질 때까지 무영은 입고 다녔다. 이유는 그녀를 못 잊어서였다. 그녀가 자신을 버리고 갔지만 진실이 아닐 거라고 믿고 있었다.
무영이 그녀를 다시 만난 건 3년 전이었다. 그녀의 시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을 가게 됐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무영을 배웅하기 위해 그녀가 따라 나왔다.
“오빠, 난 이제 행복해.” 그녀는 무영에게 말했다. 무영은 그때서야 집으로 돌아와 그 셔츠를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음 속에서도 그녀를 정리할 수 있었다. 그것이 불과 3년 전의 일이었다. 무영의 마음 속에는 그때까지도 그녀가 있었다.
무영은 그녀를 대학교 4학년때 만났다. 무영보다 한 살 어렸던 그녀가 처음부터 좋았던 건 아니었다. 그냥 오며가며 보는 후배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휴학을 했더란 얘기를 들었다. 아무도 이유를 몰랐고 연락도 되지 않았다. 무영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어 수소문 끝에 그녀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그렇게 무작정 연락을 하고 그녀를 만나러 갔다.
시작은 진짜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수소문 끝에 만난 그녀는 사랑한 사람과 이별을 했다고 했다. 그의 아이도 가졌지만 지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녀의 상처는 너무 깊었다. 무영은 그렇게 반년 정도 무작정 그녀를 찾아가 얘기도 들어주며 시간을 보냈다. 서서히 무영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머슴애 같은 여자가 무영의 이상형이었는데 그녀는 무영의 이상형이었다.
무영은 그녀에게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썼다. 하지만 그녀는 무영을 거절했다. 무영의 편지는 일 년 동안 계속됐다. 그날은 무영이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그녀를 작정하고 집에 보내지 않았다. 작은 여인숙으로 그녀를 데려간 무영은 그곳에서 무릎 꿇고 고백을 했다. 내 인생을 너에게 걸겠노라고. 그녀는 무영의 볼에 뽀뽀를 해줬다. 무영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이 됐다. 버스를 타고 가는 소박한 데이트마저 행복했다. 무영은 점점 그녀에게 빠졌고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커다란 삶의 의미가 되버렸다.
무영과 그녀는 그날 안면도를 갔었다. 겨울바다도 구경하고 눈 구경도 실컷 하고 돌아온 그녀의 집 앞이었다. 그녀는 무영에게 말했다.
“오빠, 우리 더 이상 보지 말자.”
“너 장난치지마.”
“아냐, 이젠 안 봐. 오빠랑 나랑은 더 이상 안 돼.”
“내가 그 얘길 듣고 그냥 집엔 못가겠다.”
무영의 단호한 얼굴에 그녀는 결혼할 남자가 있다고 했다. 무영은 그날 그녀 앞에서 많이 울었다. 지금도 무영은 영문도 모르고 헤어져야만 했던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무영은 그날 상가집에서 만난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너 안 행복하구나’라고. 영화나 드라마에서 헤어지며 행복하라는 말은 다 거짓말이라고 무영은 생각했다. 무영은 지금도 그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다. 멜빵바지를 입은 아가씨를 보면 멜빵바지에 흰 운동화를 입었던 밝고 환한 그녀가 떠오른다. 술을 먹다가도 무영은 그녀가 생각나기도 한다. 물론 가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가끔 그녀가 생각나지만 무영의 가슴엔 그녀가 있다.
‘지금이라도 그때 미안했다며 다시 돌아온다면, 다시 돌아와만 준다면.’
무영의 마음 저 깊은 곳엔 아직도 그런 미련이 있다. 그렇게 무영에게 첫사랑은 신기루와 같았다. 잡고 싶지만 죽을 때까지 잡히지 않을 신기루.
마흔의 길 중반을 넘어선 무영과 성준에게 첫사랑은 아직도 잊지 못하는 추억이었다. 가슴 속에 숨겨 놓고 얘기해 본 적 없었다고 했다. 아내가 굳이 묻지 않고 친구들과도 얘기해 본 적 없는 젊은 시절의 첫사랑은 추억만으로도 그들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도대체 낭만이라곤 없어 보이는 그들에게 그런 사랑이 있었을 거란 상상이 어려웠는데 말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추억을 꺼내보며 살게 마련이다. 복잡한 회사일 중간에 인터뷰해 준 성준은 첫사랑 이야기를 하며 머리를 식혀야겠노라고 했다. 그녀와 헤어진 장소를 멀찍이 바라볼 수 있는 곳에서 근무하는 무영은 아주 가끔 아내와 다투고 나면 그녀가 떠오른다고 한다. 그들에게 첫사랑은 그렇게 복잡한 삶을 버티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다.
[이숙정 민중의소리 객원기자]
첫댓글 첫사랑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려옵니다.무려 몇십년이 지났지만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