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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사랑에 응답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 요구를 받아들이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 사이에는 아주 깊은 골짜기가 가로놓여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 오시고 살아가심은 사람들 안에 분열을 일으키지만, 그리 놀랄 일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오심으로 우리 삶 속의 진리와 거짓, 진실과 겉치레가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이시고 참평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한평생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 동참하게 되고, 전쟁, 소유욕, 이기심, 교만 따위는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배척합니다. 또, 주님을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진리를 외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결국 진리이신 주님을 모르는 것이고, 주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부름 받은 우리는 저마다 해야 할 일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곧, 세상에 진리를 증언하는 일입니다. 이 사명을 이루려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결단과 다짐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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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 말씀은 어려운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스승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분명하게 평화를 빌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칼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칼은 자르는 도구입니다. 무엇을 자르라는 말씀인지요?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가족을 자르라는 말씀입니다. 평생 사랑해야 할 가족입니다. 삶의 이유요 살아가는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를 수 있단 말입니까?
가족만을 위하여 악착같이 재물을 모으고 있다면 이 말씀을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자식 사랑에 내몰려 정신없이 살고 있다면 이 말씀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가족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가르침입니다. 내 자식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모두를 사랑하라는 교훈입니다. 그러한 애정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집착을 끊는 칼입니다. 아집을 자르고 편견을 도려내는 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칼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 가족만 소중한 듯 행동했다면 이제는 ‘예수님의 칼’을 사용해야 합니다. 내 자식이 귀하면 남의 자식도 당연히 귀한 법입니다. 평범한 이 진리를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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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말씀 가운데 한 구절의 옛날 번역에는 “부모나 자식을 미워하지 않으면 나를 따를 수 없다.”고 되어 있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모질다고 여겨졌습니다. 훗날 이것은 히브리 말의 비교급으로, 부모님을 사랑해야 하지만 그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지 않으면 그분을 따를 수 없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려면 그만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생사고락을 함께하고자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여야 합니다.
칼
- 나명옥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하시며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자주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당신의 평화를 빌어주신 모습과 대조되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날카로운 비수를 던지십니다.
‘칼’ 하면 로마에서 공부할 때 가끔 방문한 성바오로 대성당 앞에 있는 대리석상의 바오로 사도가 들고 있는 쌍날칼과, 세종로에 근엄하게 서 있는 이순신 장군의 오른손에 있는 ‘칼’ 이 겹쳐 떠오릅니다.
바오로 사도의 쌍날칼은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히브 4, 12) 라는 말씀에 따른 표상이고, 이순신 장군의 칼은 직접 지은 ‘한산섬 달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라는 시에서처럼 세상 한가운데서 사람을 생각하고 선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깨어 있는 자로서의 이순신 장군의 위상을 표상합니다.
자신의 삶 앞에 놓여 있는 유혹 앞에서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내면의 갈등이 없는 얼버무리기 식의 적당한 평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하느님과 사탄과의 평화를 종식시키기 위해 사용해야할 날카로운 쌍날칼이 더없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몇 년 전, 우연히 외제차를 한 번 몰아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워낙 유명한 차였고, 아주 비싼 차였지요. 실제로 운전을 해보니 명성은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차는 아주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차를 끌고 도로를 주행하면서 약간의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혹시 앞차가 급정거를 하는 것은 아닐까, 혹시 어디선가 돌멩이가 날아와서 차에 흠집을 내지는 않을까, 혹시 신호를 기다리는 이 차를 보지 못하고 뒤에 부딪히는 것은 아닐까 등등의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습니다.
사실 제가 차에 대해 거의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제 차에 상처를 냈던 많은 운전수에게 단 한 번도 보상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 차의 지금 상태는 흠집투성이로 엉망진창이지요. 그러다보니 아주 편안하게 운전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외제차를 타고 운전할 때에는 영 불안합니다. 워낙 비싼 차인 동시에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좋은 차면 무엇 합니까? 내가 운전하는데 불편한 마음을 없앨 수가 없다면, 내게 있어서 더 이상 차가 아닌 것이지요. 차는 차로서 기능을 할 때 가장 ‘차’다운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제가 운전하는 차와 달리 맘 편하게 운전할 수 없고 걱정만 할 수밖에 없다면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차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내가 어떤 것을 소유함으로 인해 편안함을 얻을 수 없다면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러한 용기를 갖지 못합니다. 남들도 다 가지려는 것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더욱 더 드러내게 한다는 이유로, 우리들은 이 불편한 것들을 어떻게든 소유하려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마련해주신 모든 것들은 이 세상 안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주님의 사랑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것들을 나를 위해 누리기보다는 오히려 그것들을 섬기면서 주님의 자리를 오히려 빼앗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세상의 시선으로 살지 말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다보면 심지어 가족 안에서도 분열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한 상황이 와도 세상의 시선이 아닌, 주님의 시선으로 살아야 한다고 힘있게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그렇게 의로운 사람이 주님 안에서 큰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시지요.
진리이시며 참 평화를 주시는 주님의 시선을 간직하며 살아야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처럼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전부인 것인 양 살아서는 안 됩니다. 대신 제1독서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지금 당장 실천하도록 합시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치워 버려라.”
진리를 깨달음은 달이 물에 비치는 것과 같다. 달은 젖지 않고 물은 깨지지 않는다(도원).
십자가
-신효원-
해마다 오월이면 학교 실습지가 있는 농장의 식구들이 죽전 공소의 나환우들을
모시고 야유회를 갑니다. 그분들 중에 세상을 떠나거나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이 생기면서 참석 인원이 자꾸 줄어듭니다. 올해는 여덟 분이 오셨습니다. 할아버지 두 분은 한껏 멋을 냈고 할머니들도 곱게 단장을 했습니다. 고단했을 지난 세월의 흔적 없이 모두 밝았습니다. 오히려 시중 드는 우리들의 표정이 더 어두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공소 회장님께 꾸중을 들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웃고
사는데 당신들이 무슨 걱정이 있어? 정 답답하면 예수님을 부르면 되잖아!”
십 년째 장기집권 하고 있는 다두 회장님은 여든이신데도 씩씩하고 분위기를
잘 띄우십니다. 술잔이 돌아가고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고, 서넛은 춤을
추었습니다. 곁에 앉은 루시아 할머니도 즐거워했습니다. “처음 병을 알았을 때 모든 게 끝난 줄 알았어요. 남편을 붙잡고 며칠을 울었지요. 집 떠나 이곳에
온 지 삼십 년이 지났네요. 이제는 감사하지요. 이 병이 아니었더라면 좋으신
주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어요.” 사람마다 집집마다 걱정이 있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과 태도에 따라 고통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그 속에 깃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으면 십자가는 길이 됩니다. 하느님의 때를 묵묵히 기다릴 수 있으면 십자가는 은총입니다. 십자가 없이 십자가 위의
주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가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받아들이는 대로 받는다.
-김찬선신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저는 인복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만
그 중에 한 가지는 저에게 와서 남의 흉을 보는 분보다는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얘기하거나
어려움을 전해주는 분이 대부분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데는 저도 한 몫을 합니다.
저의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한데
다른 사람과의 안 좋은 점을 얘기하면서
저도 같이 나쁘다고 얘기해주길 바라는 경우,
대부분의 경우 저는 동조하지 않거나,
오히려 상대편을 이해하라고 하거나 당신도 문제 있다고 하기도하고
미숙하게도 불쾌한 표정을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위로를 받으려던 마음이 오히려 상처를 받고,
웬만하면 정말 문제가 있어도 제게 얘기하지 않아
문제가 곪아 터진 뒤에야 제가 알게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저는 바뀐 것이 별로 없습니다.
곤란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괴롭기도 하지만
인정에 끌려 옳지 않은 것을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이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쉽지 않은 길을 가라고 하십니다.
당신을 위해서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비록 평화가 깨지더라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예언을 하고,
그로 인해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되더라도 감수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아울러 우리를 위로하시며 격려하십니다.
당신을 위해 예언을 하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당신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큰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받아들이는 것에 따라 받는 것이 달라지고,
받아들이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따라
받느냐 못 받느냐가 달라진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칼을 주러 왔다
-전삼용신부-
제가 처음부터 지니고 살았던 인생의 모토는 ‘행복’이었습니다. 행복하기 위해 예쁜 여자와 결혼도 하고, 돈도 많이 벌고, 건강해야 하는 등의 조건들과 함께 생각했던 것이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을 심하게 미워하면서 느낀 것은 누가 미워지면 그것만큼 괴로운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두려움만 키우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유학 생활하다가 치료차 한국에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치료도 하고 쉬기도 하기위해 들어온 것이지만 병원 다니고 인사 다니는 게 바빠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지냈습니다. 속으로는 '이러다가는 병 얻어가겠다.'라는 생각까지 들 때도 있었습니다. 인사를 드리는 것은 세 달로도 모자랐고 다시 로마로 돌아와 보니 인사를 못 드리고 와서 섭섭해 할 사람들이 많이도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분들에게 인사를 드리려하는 이유는 들어왔으면서도 인사를 드리지 않으면 그 분들이 저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지니지 않을까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들어왔으니 반가운 마음으로 마땅히 그 분들을 찾아뵙는 것이 아니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욕먹지 않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의무로 생각했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인사드려야한다는 부담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 어렸을 때 가졌던 행복을 위한 선입관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과 관계가 안 좋으면 내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나를 이유 없이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면 더 힘들고 그 사람이 나를 미워하지 않도록 몇 배의 노력을 하였습니다.
결국엔 내가 아무리 잘 해도 나를 미워할 사람은 미워하고 아무리 못해도 좋아할 사람은 좋아해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며 산다는 것이 나의 약함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 사랑받는 사람은 누구의 미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선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고 서로 갈라지도록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가족끼리 서로 갈라져 원수가 되도록 하기 위해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만약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는 것에 저해된다면 가족이라도 가차 없이 칼로 쳐서 원수로 만드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뜻보다 다른 사람의 뜻을 더 따르게 되어 그분과의 사이가 멀어진다면 그분과의 사이를 다시 좁히기 위해 가족이라도 원수를 만들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당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의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성소의 길을 택하신 분들은 너무도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성소자들 중 가족 중에 단 한명의 반대자도 없이 그 길을 들어가는 경우는 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아버지께서 크게 반대하셨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겠다는 말씀을 듣고는 밤에 잠도 주무시지 않으셨습니다.
또 제가 아는 한 신부님은 사대 독자로서 늦게나마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고, 신학교 다니는 내내 아버지는 아들을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대를 잇지 못하게 되어 조상을 뵐 면목이 없게 된 것이고 그래서 아들과 원수가 된 것입니다.
또 제가 아는 한 수녀님은 수녀님이 되신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가족들은 아직도 단 한 명도 성당에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도 믿음이 없고 성당을 안 다니는데 딸이 갑자기 수녀가 되겠다고 하니 그 반대가 얼마나 거세었을까 상상이 갑니다.
이렇게 주님의 뜻 위에 서려고 하는 것이 무엇이든 칼로 쳐 내야 하는 것이 우리 신앙입니다. 그러나 가족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다른 어느 것보다 더 큰 고통입니다. 그렇더라도 주님은 우리 손에 칼을 쥐어 주시며 당신의 뜻보다 더 사랑하게 될 것들을 쳐 내라고 주문하고 계신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는 순서가 너무 명확합니다.
우리 손에 들려있는 원수를 만들게도 할 수 있는 그 칼, 결코 주님이 두 번째가 되시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칼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해서 사람과의 분열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어느 시장 입구에서 쪼그려 앉아서 채소를 파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상점도 없이 초라하게 앉아서는 오이 몇 개만을 놓고서 장사를 하는 할머니는 무척이나 초라해 보였지요. 이 모습을 본 어떤 한 손님이 “할머니, 이 오이 하나에 얼마에요?”라고 묻습니다. 할머니는 “오백 원입니다.”라고 답을 했지요. 손님은 가격이 싸다고 생각했는지 계속 묻습니다.
“그러면 두 개에는 얼마에요?”
“천 원입니다.”
“그러면 세 개 사면요?”
“천오백 원이지. 그것도 계산이 안 돼?”
“에이, 많이 사면 싸게 해 주는 줄 알았죠. 할머니, 그럼 여기 있는 오이를 다 사면 좀 싸게 해주시겠죠?”
그러자 할머니께서는 아주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게 전부는 절대로 팔지 않아.”
이렇게 말씀하시는 할머니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상점 없이 하루 종일 쪼그려 있다가도 다 팔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요. 따라서 기회가 될 때 다 파는 것은 할머니 스스로를 위해서도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께서는 이렇게 계속 말씀을 잇습니다.
“돈도 좋지만, 나는 여기에 이렇게 앉아서 일하는 것이 좋아. 열심히 살아가는 시장 사람들을 봐서 좋고, 또한 이렇게 보잘 것 없는 나에게 반갑게 인사해주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좋고, 또한 오후에 따스하게 시장 바닥을 내려 쬐는 햇볕을 너무나도 사랑하지. 그런데 이 오이를 다 사겠다는 것은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나의 일과 사람들과 나의 하루를 당신이 몽땅 빼앗아 가는 것이잖아. 그래서 결코 전부를 팔 수 없다고 말하는 거야.”
많은 사람들이 돈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지요. 그러다보니 중요한 사랑의 가치는 뒤로 밀린 채,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아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가치는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실천은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시지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부활 하신 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평화를 빌어주셨으면서, 평화가 아닌 폭력을 상징하는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가장 중요한 사랑을 뒷자리에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시지요. 그렇기 때문에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과감하게 잘라 버려야 할 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지금 나는 과연 예수님께 이 칼을 받아서 사용하고 있는지 반성해보았으면 합니다. 이제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욕심들을 모두 끊어버리고 주님의 사랑에 초점을 맞출 때입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보다 사랑의 실천이 더 중요함을 기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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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살리라
-조성숙 수녀-
“칼을 주러 왔다”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표현 앞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예수님 제자의 길은 분명 그리 호락호락한 길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보다,
자기 가족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 길은 순교까지 각오해야 하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수녀원에 입회할 때, 가족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습니다.
수도자의 길을 가는 것을 ‘가문의 영광’이라고 기뻐하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
원수처럼 여기는 가족도 있었습니다. 조건은 달랐지만 모두들 하나같이
더 이상 자신을 찾지 않겠다고, 사랑하는 부모 형제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길을 가겠다고 결심하고 수녀원에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하늘을 찌를 듯한 열정은 막상 수도 공동체에 살기 시작하면
곧 시들해져버립니다.
사랑은 이상적인 생각의 차원이 아니라 나의 몸과 마음에 고통이 따라오는
의지의 차원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구체적인
일상생활 가운데 자기를 버리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관심사가 ‘자기 성취’인 이 시대에 나를 찾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의
죽음입니다. 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죽기 싫어서
예수님과 힘겨루기를 합니다. “예수님 정말 제가 죽으면 살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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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자리
- 기정희 수녀-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너의 앉은 그 자리가/바로 꽃자리니라./반갑고 고맙고 기쁘다.’(구상, <꽃자리>)
구상 시인이 돌아가시기 전 당신을 찾은 이들에게 건네신 이 시는 가끔씩 허덕이며 살아가는 일상에서 나를 멈추게 한다. 삶의 무게가 버거워질 때 나는 ‘네 자리가 꽃자리니라.’는 시인의 말씀을 떠올린다. 사람이 죽음을 맞으면서 오랜 세월의 경륜을 실어 가슴으로 말하는 언어는 얼마나 절절한 울림으로 들리는가!
젊은 시절, 열정과 사랑으로 첫발을 내디딘 수도 생활 초기에는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아무런 이의 없이 용감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복병처럼 숨어 있는 십자가를 대할 때 예수님의 말씀을 머리로는 수긍하면서도 가슴으로는 비켜 가길 바라며 마주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이 무게가 전부인 양 허덕이며 숨차했다. 아직 인생의 마지막에는 다다르지 않았지만 훌쩍 세월을 뛰어넘어 나이가 들면서 십자가의 의미와 무게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하는지 더 깊이 알게 된다. 그러나 세월이 그 의미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처럼 제 십자가는 스스로 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세상에 단 하나의 의미로 나를 내셨다. 그 의미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한 것이다. 그러기에 모두가 비슷해 보여도 내 십자가는 다른 이와 비교할 수 없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제 것이 아닌 십자가를 부러워한다면 진정 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리라. 누구의 십자가도 아닌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님은 우리 삶의 목표를 명확히 방향 짓고 그 목표를 향해 가는 방법도 제시하셨다.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목표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목표는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목표조차도 하느님의 선물이 아니겠는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상의 은총.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데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말씀하신다. 그 무엇도 주님보다 우선일 수 없음을, 자기 자신마저 부정하는 삶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임을 알려주신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믿어주신다. 십자가가 버겁다고 투정을 부려도,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지어도 우리가 다시 일어나 걸어갈 것이라고 믿어주신다. 나무는 그 키만한 뿌리를 가졌다고 한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열망의 깊이는 우리 삶으로 드러난다. 그분을 따르는 데 피할 수 없는 모든 십자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며 앉은 그 자리가 내가 앉아 있어야 할 꽃자리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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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5주간 월요일
- 이성균 신부 -
성경에 담긴 말씀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인생의 진리를 알게 해주고 삶의 방향을 일러 주는 보고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다보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당혹스러움을 안겨 주는 것들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성경이 작성되던 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는 담겨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늘의 환경이 과거와 같지 않고 예전의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현실과 마주하고 있는 우리의 개별적인 고민을 구체적으로 적용하여 답을 얻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통과 문화의 차이는 생각의 차이를 빚어냅니다. 시대를 달리하면서도 여전히 존속하는 가치들도 있지만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가치 또한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긴 해도 오늘의 복음은 가치를 달리하고 싶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 재평가를 요구하고 있는 듯해서 당혹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주님께서도 인용하신 적이 있듯이 “부모를 떠나 남자와 여자가 한몸”이 되어 이루는 가정과 그 구성원인 가족 사이에 유지되어야 할 바람직한 덕목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화목한 가정’이라는 말로 간단히 표현합니다. 가족들 간에 서로를 돌보며 이해와 사랑을 잃지 않을 때, 우리는 그 목표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 가족을 이루고 사는 우리도 변함없이 바라는 바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는 엇나가는 말씀을 하시는 듯 보입니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아마 우리 주변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가정파괴범이라고 부를 겁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누군가 이렇게 요구한다면 그 사람은 인간관계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만 사랑해야 한다는 미성숙한 사랑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생명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사람이 임의적으로, 또 쉽사리 좌우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요? 오늘의 말씀은 가족들 간에 사이가 좋지 않을 때나 종교로 인해 갈등이 있을 때, 또는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 내세울 수 있는 변명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씀은 초창기에 복음 선포의 길에 나선 제자들의 경험담을 배경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가족들의 몰이해가 안겨준 상처를 보듬고 복음을 전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더 알뜰히 보살펴야할 가족들을 뒤로 하고 못내 길을 나서야 했을 이들이 있었습니다. 목숨을 요구하는 이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적인 삶을 유지해 낸 이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 덕에 오늘 복음을 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가정을 떠나고 가족과 갈라서며 삶을 포기해야만 얻어지는 것이 복음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의미함을 넘어서 경계해야할 위험한 주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처럼 구체적인 고난의 길을 따라간 이들의 희생적인 삶을 주님과 함께 기억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온 생애를 바쳐 증언하고 전해준 복음적 기쁨을 가족들 사이에 펼치는 일입니다. 사랑하라는 주님의 법을 가르치고 배우며 가족애를 넘어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품고 퍼낼 줄 아는 인간이 되는 일입니다. 가정 안에서 각별한 마음으로 서로를 돌보십시오. 그리하여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새로운 모범이 되십시오. 가족을 넘어서는 사랑을 키우십시오. 그것이 오늘날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새로운 복음 선포의 길입니다. 길거리에서 외치는 것보다 그 사랑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더 힘찬 선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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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의 불을 질러라
-김찬선신부-
平和,
그것은 우리가 제대로 누리지 못하지만
참으로 염원하는 것입니다.
不和,
이것은 우리가 잘 해결하지 못하지만
참으로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염원하지만 잘 살지 못하는,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필요한데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불화를 주러 오셨다 하십니다.
이 무슨 어깃장인가?
그리고 다른 데서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14,27)하셨는데
그렇다면 주님의 이런 평화를 어찌 이해해야 하나?
갈라짐,
다툼,
갈등,
이런 것이 없는 것이 평화라면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자기 잇속을 차리기보다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목숨을 잃으며
남을 받아들이는 주님의 사랑은 평화의 왕도입니다.
自己中心性의 탈피,
이것으로 우리는 평화를 이룩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따름에 있어서는 불화를 각오해야 합니다.
인간 서로 간에는 좋은 것이 좋을 수 있지만
하느님을 따름에 있어서는
인간끼리 좋은 것이 좋아서는 안 됩니다.
인간끼리 짬짜미가 맞아
하느님을 따돌리고
하느님의 뜻을 헌 신발짝 버리듯 버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느님 추종을 방해하는 그를 버려야 하고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그와 갈라설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버리고 가면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해도
주님 추종은 버리고 따르는 것이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가족을 버려야 하고
사랑하는 애인과 갈라서야 합니다.
수도원 입회를 결정할 때가 되면
부모의 반대가 너무도 극렬한 성소자가 꼭 있습니다.
작년 같은 경우에는 그 아버지가 성소 담당 신부에게 하소연도하고
폭언도 퍼붓고
심지어 수도원을 폭파해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하였습니다.
어찌하면 좋을지 물었을 때
성소자 본인 뜻만 확고하다면 그대로 받으라고 조언하였습니다.
자식 사랑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기에
자식이 이 생활로 진정 행복하기만 하면
언젠가 마음이 바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충고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런 반대와 불화를 무릅쓰고 주님을 선택해야지만
주님 따름의 의지가 확고해지고
주님 따름의 열망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따라가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이 작으면
작은 반대와 만류에 그 의지와 열망이 꺾이지만
그 의지와 열망이 크면
붙잡으면 붙잡을수록
잡아당기는 힘이 크면 클수록
더 강하게 뿌리치고
더 힘차게 나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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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육신의 제사가 아닌 사랑이 가득한 마음의 제사를 봉헌하자.
-경규봉 신부-
이사야 예언자는 소돔과 고모라의 부패를 뒤쫓아 행하는 예루살렘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유다 백성은 하느님께 제사를 봉헌함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고 믿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외적인 제사가 아니라 제사를 봉헌하는 마음이다.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지 않고, 특히 사회적인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서 마음 없이 드리는 제사를 하느님께서는 물리치신다. 악행을 버리지 않고, 정결하지 못하며, 착하고 올바르게 살지 못하면서 드리는 예배와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듣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고 바르게 살면서 억눌린 자를 풀어주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라.
하느님께 예배를 드릴 때에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릴까?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수많은 제사를 봉헌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하느님께 제사만 드리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느님께 제사를 드림으로써 자신들이 해야 할 모든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제사에 물렸고 지치셨다고 말씀하신다. 제물 타는 냄새에 구역질이 나고, 제물의 피는 보기도 싫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니 그들이 봉헌했던 수많은 제사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오히려 하느님을 역겹게만 한 것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예언자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그것은 곧 악행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다. 억눌린 자들을 풀어주고 고아와 과부의 인권을 돌보며 그들을 감싸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법과 질서인 사랑을 담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마음을 담고 살아가는 것, 그래서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 그것이 하느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하느님의 마음인 사랑이 담겨져 있지 않은 제사와 기도는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지 않으신다. 사랑이 담겨져 있지 않은 제사와 기도는 다만 인간의 욕심이며 이기심일 따름이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인간이 봉헌하는 제물을 가져가시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제물에 담긴 사람의 마음을 가져가실 뿐이다. 그런데 제물 속에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만 담겨져 있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이 담겨져 있지 않은데, 어떻게 하느님께서 그것을 받아주시겠는가!
사도 바울로는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고린 13,1-3) 하고 말했다.
그러므로 내 안에 있는 이기심과 욕심을 하느님 사랑의 마음으로 바꾸어주시기를 청하자. 하느님의 마음이 내 안에 들어오도록 기도하자. 우리가 매 미사를 봉헌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고,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기도하듯이, 내 마음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로 채워지기를 기도하고,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채워지기를 기도하자. 그리하여 하느님 사랑의 마음으로 제사를 봉헌하고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하자. 오늘 육신의 제사만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봉헌하는 제사가 되고, 하느님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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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요구에 기쁘게 응답하는 삶
-이기정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제자로서의 참된 삶의 자세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모든 유혹을 거슬러 복음의 요구에 기꺼이 응답하려는 신앙적인 결단과 선택 속에, 모든 것에 앞서 항상 주님을 삶의 첫 자리에 놓고 사랑할 수 있는 참된 믿음의 삶을 살기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고 신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의 유혹에 맞서 싸우겠다는 세상에 대한 선전포고로서,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의 가치를 거슬러 복음적 가치와 신앙의 진리를 끝까지 지켜내려는 결연한 의지가 요구됩니다. 가장 아끼고 사랑해야 할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과 딸과 같은 가족과 혈육까지도 주님 때문에 포기하고 뒤로 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들 때문에 주님께 대한 사랑이 식어질 때, 세상 것들이 아무리 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지더라도 세상 것들 때문에 주님을 멀리하는 어리석음을 살아서는 안 되며, 어떤 것도 주님보다 낫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라고 말씀하시는데, 칼은 무엇을 자르는 도구로서, 잘라서 서로 갈라놓으면 갈라진 둘이 서로 분명히 구분이 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칼’이라는 이 말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결단과 선택에 대한 단호함과 결연한 의지의 상징적인 표현일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보통으로 결단력이 있고, 되는 것은 되고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맺고 끊는 선이 분명한 사람을 보고, ‘칼’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일과 나 자신의 유익을 챙기고, 자신의 감정의 요구에 따르는 일에는 조그마한 손해와 양보도 허락하지 않는 칼같이 분명한 태도와 입장을 취하면서도, 복음의 요구를 따르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데에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믿음 없는 우리 삶의 자세와 태도를 자주 보게 됩니다.
참으로 반대로 거꾸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일에는 바보처럼 너그럽고 착하게 살고 주님의 일을 행하고 복음의 가치를 지키는 일에는 칼처럼 단호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어떤 날카로운 칼로도 끊을 수 없고 자를 수 없는 혈육의 정과 유대조차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입니다. 바로 주님이 우리의 전부이고 모든 것이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소중한 세상의 모든 것을 바쳐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세상의 모든 유혹들을 신앙으로 꿋꿋하게 이겨내며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승리함으로써, 주님의 크심과 좋으심을 더욱 깊이 깨닫고 체험하는 은총 속에서의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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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조욱현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을 하게 될 때, 그것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통스러운 것을 말씀하시면서,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다"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유대인들이 일상적으로 알고 행하던 일 중의 하나를 예로 들어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이 누구의 심부름으로 자기에게 왔을 때, 그 심부름꾼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은 바로 보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즉 친구가 보낸 사람을 사랑으로 영접하는 것은 보낸 그 친구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 되는 것이며, 웃어른이 보낸 사람을 존경으로 영접하는 것은 바로 그 어른께 대한 존경을 드러내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과 생활 방식은 하느님의 진리를 전달하고 선포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유대 스승들은 가르치기를 "현자를 대접하는 자는 자기의 수확에서 난 첫 열매를 하느님께 바치는 것과 같다!"고 했으며, "박식한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은 하느님께 인사하는 것과 같다!"고 가르쳐 왔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의 복음 말씀을 우리에게 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가 비단 예언자, 의인, 성직자, 수도자가 되는 것도 좋겠지만, 우리 모두가 예언자이며, 의를 행하는 자들이고, 성직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받아들이고 대접할 때, 그와 같은 대접을 받게 되리라고 약속해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회는 탁월한 하느님의 일꾼들을 필요로 하고 목숨 바쳐 옳은 일을 행할 수 있는 의인을 필요로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일할 수 있도록 그들을 뒷받침해 주는 평범한 봉사에 대해서 그들의 업적과 똑같은 상급으로 갚아주시겠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마찬 가지이지만, 세상의 모든 분야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한정되어 있다. 인간 사회는 다양한 직책을 가지고 생활하게 되며, 이러한 다양한 모습 속에서 하나의 사회를 이루며 살고 있다.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다른 사람이 하며, 나의 부족한 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보충하며 살아가는 것이 이 사회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이웃을 통하여 이웃과 똑같은 상급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없는 그 무엇을 통해서 그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웃이 보잘 것 없는 사람 같이 보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40절)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떠나서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얼마나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성찰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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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근 신부-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분과 통화를 했다. 함께 식사하기로 했는데 대접을 해야 할 처지여서 음식점을 내가 정했다. 뭘 드시겠느냐는 나의 물음에 신부님 좋아하시는 걸로 아무거나 정하면 된다고 한다. 그동안 나는 그분에게 음식 신세를 많이 졌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맛있게 만든다는 집을 잘도 찾아내어 내 입맛 수준을 높여놓았다. 그래서 시원한 대구탕을 비롯하여 산나물 비빔밥·아구찜·옛날식 비지찌개 등을 먹으러 식사자리를 여러 번 함께했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분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알지 못했다. 둘이 모두 보신탕을 먹지 못한다는 것이 내가 아는 전부였다. 10년 이상 알고 지냈고, 우스갯소리, 섭섭한 소리도 주고받을 만큼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인데도 말이다. 대접받기에만 익숙한 나의 모습을 다시 보는 순간이었다.
사랑에는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해주고자 하는 속성이 반드시 있을진대, 그러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란 누구이며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니, 나는 입만 벌리면 그렇게 떠들어대던 ‘사랑’ 한번 여태껏 해보지 못했단 말인가! 아, 나는 바리사이 같은 신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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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바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최승일 신부-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이상하게 들리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분명히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부활하신 당신의 평화를 주셨는데,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을 하고 계시니 이를 도대체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겠습니까?
우선 이 말씀은 세상이 주는 평화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평화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세상이 말하는 평화는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평화인 것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적당히 고요하고 적당히 타협함으로써 얻게 되는 거짓 평화가 아니라, 예수님 당신 때문에 그리고 복음 말씀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아들과 아버지가 맞서고, 또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되는 “칼”을 주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칼은 전쟁이나 분열을 상징합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적당히 타협함으로써 전쟁이나 분열이 없는 상태의 평화가 아니라, 불의와 거짓 즉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악의 세력과 싸워 투쟁해서 얻게 되는 그런 평화를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다 평화를 간절히 원하며 살아가고는 있습니다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당신은 지금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까?”라고 물어본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 그렇습니다”라고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평화를 원하면서도 평화를 누릴 수 있는(얻을 수 있는) 방법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평화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먼저,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평화를 빌어주는 너희에게 되돌아 갈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란, 하느님의 평화를 받기에 합당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복음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한 사람, 주님의 메시지를 듣고 기뻐할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평화의 큰 적은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는 것입니다. 죄가 많기 때문에,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웃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는 삶을 살려 하기 보다는 우선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욕심을 내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불안하고 평화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혹은 순전히 인간적인 도움이나 잔재주에만 미련스럽게 매달리는 옹고집 때문에 우리에게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해야만 합니다. 신앙이란 사랑으로 마음을 확 풀고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하느님의 품안에 내어 맡기는 것을 뜻합니다. 어머니의 품안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기고 안겨있는 아기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평화롭습니까? 그리고 무수한 독신 남녀들(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예수님께 대한 사랑 외에 어떠한 사랑도 맛보려 하지 않고 살고 있으며,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순교자들이 그 분을 사랑한 나머지,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아끼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남녀가 모든 것을 버리고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25, 40)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불쌍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생명과 재산을 내던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아닌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평화를 바라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가까이는 가족들과도 불화를 맛보아야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놀림감이 되는 “칼”을 맞게도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그로인해서 맛보게 되는 주님의 평화인 것입니다.
친애하는 평화방송 애청자 여러분, 진정으로 평화로우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오십시오. 평화의 주님에게로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빨리 나아오십시오. 그러면 원하는 평화를 반드시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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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호신부-
얼마 전에 불량만두 사건으로 온 나라가 소란한 적이 있었습니다. 불량만두냐? 우량만두냐? 하는 판단근거는 만두 속입니다. 속재료가 우량하면 그 만두는 우량만두이고, 속재료가 불량하면 그 만두는 불량 만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비록 겉모양이 화려하고 그럴듯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만두는 소비자들로부터 버림받고, 마침내 법적인 처벌과 제재까지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 인격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량인격자냐? 불량인격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속에 따라 결정됩니다. 속이 바르고 참되면 우량인격자가 되는 것이고, 속이 거짓과 위선이면 불량 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외모나 외적 조건이 아무리 그럴듯하고 화려하다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우량인격자가 되려면, 우량한 속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과 정신을 우량하게 가져야 합니다. 내면세계를 바르고 참되게 가져야합니다. 마음과 정신이 불량하면 그 행위는 거짓이 되고 위선이 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허위가 되고 맙니다.
이사야는 말합니다. “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보지도 듣지도 아니하리라.” 따라서 우리가 일체의 인간행위를 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바로 해야 합니다. 내면세계를 바로 해야 합니다. 정신이 없는 제물은 형식에 불과하고, 더 이상 의미가 없는 헛된 제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너나없이 외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이 모든 것의 판단 근거가 되고 있는 세상입니다. 신앙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다릅니다. 신앙생활도 달라야 합니다. “ 나는 칼을 주러 왔다 ”
하느님처럼 살고 싶으면 하느님과 같은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예언자처럼 살고 싶으면 예언자적 정신을 지녀야 합니다.
선인처럼 살고 싶으면 선한 생각을 지녀야 합니다.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행동도 바뀌고 삶도 바뀝니다.
불량만두 후유증이 오래갑니다.
이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속”입니다. “소~~~ 옥!!”
속이 튼튼하면 몸은 저절로 튼튼해집니다.
“옳은 길을 걷는 이에게 하느님의 구원을 보여주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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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누군가 상처받았을 때
-양승국 신부-
‘교회에서 누군가 상처받았을 때’(로렌 헨리 뒤킨 저)란 글을 읽었습니다. 교회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따뜻한 하느님의 손길을 느껴야 정상인데, 공동체 구성원들과의 친교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봐야 정상인데, 와 닿는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오히려 어떤 분들은 교회로부터 크나큰 상처가 입습니다. 그 상처를 치유할 방법을 몰라 고민하다가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이런 분들에게 필요한 말씀이이라 생각합니다.
“교회로부터 받은 상처의 원인 발생은 교회가 부족함을 지닌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데서 비롯한다. 우리가 교회에 대해 갖는 이상은 매우 높지만 현실은 교회가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오해하고 부인하며 배반하는 제자들, 당신께서 기도할 것을 요청했을 때 잠을 자고, 붙잡혀 가실 때 도망가는 제자들과 함께 하셨다.”
사실 교회 공동체의 근본적인 속성 가운데 두드러진 속성 하나는 ‘죄인들의 모임’이란 것입니다. 공동체 구성원 면면을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면 너나할 것 없이 다 부족합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나약하고, 오늘 비록 우리가 상처투성이이고, 오늘 비록 우리가 이토록 형편없지만, 하느님 사랑에 힘입어 천천히 성화와 완성의 길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하는 공동체가 바로 우리 교회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 공동체의 미성숙 앞에, 때로 생기는 스캔들 앞에, 이기심 앞에, 세속의 때 앞에 너무 당황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문제성 많은 우리를 늘 기다려주셨듯이 우리 역시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교회 공동체를 바라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하느님을 보다 가까이 따르면 따를수록, 복음 정신을 보다 철저히 실천하면 할수록 ‘희한한’ 일이 한 가지 생깁니다. 그것은 바로 그런 노력이 더해짐에 따라 십자가의 무게가 더 무거워진다는 것입니다. 상처받는 일도 많아집니다. 고통도 커져갑니다. 때로 다 벗어놓고 떠나버리고 싶습니다.
그럴수록 복음서를 펼치십시오. 복음서를 읽고 또 읽으십시오. 복음서는 갖가지 고통과 상처, 십자가에 적절한 진단과 처방전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다양한 치료제, 다양한 노하우를 우리에게 전수해줍니다. 새로운 감성으로 다시 읽은 복음서는 갖은 의혹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도와줍니다. 집착에서 벗어나게 도와줍니다. 희망의 길을 열어줍니다. 그러나 결국 최종적인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입니다. 십자가의 신비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입니다. 다름 아닌 십자가를 꼭 껴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용, 자아 포기가 신앙인들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잘 설명하고 계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거부합니다. 십자가를 저주합니다. 십자가만 다가오면 기겁을 하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느님 아버지의 놀라운 은총은 바로 십자가 신비 안에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인생은 고해(苦海)’란 말을 자주 씁니다. 돌아보니 맞는 말입니다. 수많은 고통이 끊이지 않습니다. 어찌 그리도 집요하게 우리 뒤를 따라다니는지요.
고통이 크면 클수록, 십자가를 감당하기가 점점 힘겨워질수록 우리는 그 누구도 아닌 십자가 위에서 계신 예수님, 창에 찔리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거기서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권고에 따르면 십자가를 원수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삶의 끝은 멸망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징표로 보내주시는 십자가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순간, 나약하고 비천한 우리의 몸은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변모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의 인생은 언젠가 반드시 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될 것입니다.
고통이 커질수록, 십자가가 무거워질수록 주님께서 나와 함께, 나와 나란히 서셔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감을 기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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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칼
장재봉 신부
오늘 독서 말씀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께서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의 제물을 받지도 않고 분향도 거절하시며 그들의 팔 벌린 기도를 듣지 않겠노라 다짐을 하시니까요. 하느님께 혼쭐나게 야단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비해서 우리에게 이르신 당부는 얼마나 훈훈하고 따뜻하신지요?
많은 말씀 중에 특별히 “시원한 물 한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까지도 상을 주실 것이라 하신 걸보면서, 정말 하늘나라의 상을 받는 일은 쉽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라고 하신 말씀이 좀 걸립니다.
묵상
주님께서 주신 칼을 갖고 살아가십니까?
주님께서 주신 칼을 사용하고 계십니까?
어디에?
무엇에?
쓰고 계신지요?
주님의 말씀은 우리 삶에 예리한 칼입니다.
그 말씀의 칼은
자신의 혈연에만 연연한 마음을 잘라내게 합니다.
자기 가족만 위해서
자기 자식만 위해서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마음을 잘라내는 일에 사용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것이 아닌 모든 것들 이기심, 자존심, 불평과 불만, 시기와 질투심을 잘라내는 일에도 사용합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곧잘 그 칼의 용도를 변경하는 일에 있습니다.
사랑을 빙자하여 상대를 힘들게 하는 일
말씀을 들먹이며 판단하는 일
남의 티를 잘라주는 일,
남의 잘못을 후벼주는 일,
날카로운 칼 날 같은 말로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뽀족하게 날 선 눈길로 상대의 가슴에 피멍을 들이곤 하니까요.
‘무엇하러 그리스도인이 되었느냐?’는 질책을 들을 일이 아니겠는지요? ‘분향 연기도 역겹다’고 역정을 들을 일이 아닌지요?
오늘 우리 모두가 말씀의 칼날을 자신 안에 자신의 행위에만 들이대는 축복을 얻기 바랍니다. 말씀의 칼로 내 잘못된 심사와 생각과 행위를 잘라내는 고통의 하루이기를 원합니다. 해서 우리가 모두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고, 올바른 길을 걷는 이가 되어 하늘나라를 차지하는 영광의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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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열며
산간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어떤 임금이 있었습니다. 그는 산간지방에만 살았기 때문에, 바다에 대해서는 상당히 낯설었지요. 어느 날, 이 임금은 바다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바다에서 아주 멋진 새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바다 위를 유유히 날고 있는 그 모습은 너무나 우아해 보였고 심지어 고귀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 새는 흔한 바다갈매기였지만 산간지방에서만 살았던 그에게는 처음 보는 새였던 것이지요. 이 임금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저 새는 진귀한 새가 분명하다. 저 새를 우리의 조상신으로 모셔야겠다.”
그는 그 새를 잡아서 자기 조상의 사당으로 안내했습니다. 그리고 소와 양, 돼지를 잡아서 성대한 잔치를 벌였지요. 잔치에는 그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악사들도 초대되어 축하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하지만 그 새는 음식에 전혀 입을 대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슬프고 씁쓸한 표정만 짓고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다에 살던 새가 육지에 사는 인간의 음식과 음악에 관심을 가질 리가 만무하겠지요. 하지만 임금은 새의 그런 모습을 보고 제멋대로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역시 진귀한 새의 근엄함은 그 깊이를 알 수 없구나.’
이틀이 지나고 사흘……. 그리고 열흘이 지나도록 새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임금은 더욱 좋은 음식과 술을 새에게 바쳤지요. 그러나 열하루 째가 되던 날, 새는 결국 굶어죽고 말았습니다. 임금은 한탄하며 말했지요.
“고귀한 새여, 제가 그토록 정성을 들여 모셨건만 왜 저를 거부하셨습니까?”
바로 그때 그 옆을 지나가던 현자가 혀를 차며 말합니다.
“쯧쯧, 왕이 아닌 새로 대접했다면 그 새가 굶어죽었겠소? 그 배고픈 새에게 쇠고기, 양고기, 돼지고기, 그리고 술이 무슨 소용이 있겠소? 더구나 인간들이나 듣는 궁중 음악까지…….”
그렇지요. 만약 그 임금이 그 새를 새 자체로 받아들였다면, 그래서 새가 좋아하는 것들을 주었다면 결코 굶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상신이라는 엉뚱한 모습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새를 죽이는 것은 물론 자신 역시 커다란 실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지금 우리가 주님을 대하는 모습도 혹시 이렇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 큰 사랑을 보여주시고, 그 사랑을 우리들도 실천하라고 십자가를 직접 지셨습니다. 즉, 우리 역시 십자가를 지고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십자가를 지어야 하는데, 단순히 보기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보기만 하기 때문에 주님께 커다란 실망을 간직했었던 것은 아닐까요?
보기만 하는 십자가가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우리들은 나에게 주어지는 그 십자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혹시 하나의 액세서리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십자가는 짊어졌을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비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빠다킹 신부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