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여행 인터넷 언론 ・ 1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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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여행 장두이 문화국장(연극배우)
필자가 1970년 고대 국문과 1학년 제학시절.
가을 햇살이 유독 빛나던 그해 9월..... 당시 ‘신문회관’에선 특별하고도, 필자를 먹먹한 감성과 다른 차원의 환상 공간으로 이끌기에 충분한 전시회를 만났고, 그것이 평생 나의 뇌막(腦膜)에 남겨진 회화작품들이 되었습니다.
먹으로만 그린다는 동양화의 개념을 넘어 채색화를, 그것도 소재, 기법 또한 한국화가로서는 도대체 믿기지 못할 작품들이 선보여진 <천경자의 남태평양 풍물 시리즈 스케치展>이었습니다.
그 이후 필자는 천경자 화백의 미술적 추종자가 됐습니다.
그리고 작년 선생의 고향 땅, 고흥에서 <천경자 탄생 100주년展>을 찾아 깊은 감수와 감내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나의 삶, 인생에 저항하는 의미로 뱀을 그렸어요.”
“내 온 몸 구석구석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려있나 봐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아요!”
“담배를 피워 물고 긴 한숨 내려 쉬며, 거울에다 연기로 자유를 그려본다.
(천경자 선생의 語錄들 중에서)”
프랑스 야수파 화가 ‘앙리 마티스’를 ‘색의 마술사’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천경자 선생은 ‘한국 여인 여심(女心)의 내면을 밝혀 그려낸, 한국 미술의 마술사’라 칭하고 싶습니다.
故 천경자 화백
1924년 11월 11일 전라남도 고흥에서 태어난 선생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한국전쟁, 4.19 혁명, 5.16 군사정변, 군사독재시대를 거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신군부 정권 등..... 차마 입에 담기조차 벅찬 한국의 격변 시대를 살면서, 남보다 탁월한 예술적 감수성으로 ‘피 토하듯 토하고 담고, 토하며 살다가’, 2015년 8월 6일 이국땅 뉴욕에서 90세를 일기로 승천하셨습니다.
살아생전 온 세상을 주유(周遊)하신 선생님에겐 어느 땅이건, 그곳은 선생의 캔버스에 놓인 삶의 터전이자 족적의 숨결이 아닌가 합니다!
사진: 故 천경자 화백 作
필자가 1978년부터 1997년까지 뉴욕의 유명 극장 LAMAMA 극장에서 공연을 이어가며, 당시 극장주이자 제작자이며 연출가 ‘ELLEN STEWART’ 에게 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자유의 땅이라 일컫는 미국도 여자인데다, 나 같은 흑인이면, 차별과 불평등에 맞서, 인생 내내 싸워야 했지.....”
기회의 땅이자 자유의 나라 미국에도 그렇거니, 일제치하 시대부터 2015년까지 선생이 조국에서 견뎌내야 했던 비인간적 존엄과 남녀차별, 불평등을 바라보고 견디며 살아야했던 그 고통은 어땠을까를 새삼 생각해 봅니다.
전남 고흥군 고흥읍 옥하리에서 태어난 선생은 고흥보통학교, 광주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미 서구 미술교육을 받아들인 도쿄미술전문학교에서 본격적인 서양미술을 접하고, 프랑스 파리 미술아카데미 ‘고애쓰’에서 수련하며, 우리 한국화와 서양미술의 장단점을 섭렵, 당시 본격적인 파격의 작품으로 미술계를 강타한 선구자적인 안목의 아티스트입니다.
사진: 故 천경자 화백 작품(1)
지나치게 분류를 강요하는 한국에서 동양화는 한국적 재료에 소재, 기법을 활용해야 한다는 한계를 뛰어넘은 선생의 행보는 지나치게 왜색과 서양 회화작법을 따라한다는 평단의 소리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소리는 개방적이고 자유사상을 가진 선생의 시도를 오히려 더욱 강렬하게 부추기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하나가 열을 제시한다고 하던가? 그림이 글이고 글이 그림이듯, 1950년대부터 틈틈이 출간한 선생의 ‘여인소묘’, ‘천경자 남태평양에 가다’ 등 수필집은 삽화와 함께 10권이 넘을 정도로 출간되어, 우리사회에 새로운 시각의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고된 인생여정..... 선생의 애환을 그나마 보듬어주고 위로를 대신한 친구는 흡연으로, 하나의 힐링이자 위로이었을 터....
사진: 故 천경자 화백 작품(2)
현대서양미술사에 빛을 발한 인상파, 야수파, 입체파, 점묘파, 초현실파 등의 흐름을 파악한 선생의 독보적인 화법 속에 ‘꽃과 여인’의 <천경자화법>은 시대를 거슬러 내려오면서 뒤늦게나마, 차츰 대한민국현대미술의 한 조류로 자리매김합니다.
天才 뒤엔 亞流가 나타나는 법.
1991년에 대두된 ‘천경자 미인도 위작사건’은 본의 아니게 선생에게 큰 충격으로 남아, 창작에의 길에 잠시나마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선생 스스로 ‘내가 그린 작품이 아니다! 내 작품엔 내 혼이 담긴 핏줄이다. 자기 자식이 아닌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에 있는가? 난 절대 머릿결을 새까맣게 개칠하듯 그리지 않는다. 또 머리 위의 나비도 내 것과 다르다. 작품 싸인과 년도 표시도 내 것이 아니다. 난 작품 년도를 한자로 적는데, 이 그림은 아라비아 숫자로 적혀있다!’라고 천명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선생이 남긴 말씀 가운데, 상흔(傷痕)의 증언이 있습니다. “붓을 들기 두렵습니다.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한 채, 가짜를 진짜로 우기는 풍토.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네요!”
사진: 故 천경자 화백 작품(3)
1954년부터 1973년까지 홍대미대 동양화과 교수로 후학들을 독려했고, 은관문화훈장 등을 수여 받아, 조국에 대한 애정으로 서울시립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선생의 많은 작품을 기증하기도 해, 선생의 뛰어난 작품들을 오랫동안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남겨주셨습니다.
필자에게 천경자 선생은 두 말 없이 우리한국 여성들의 해방을 외친, 첫 번째 페미니스트 아티스트이십니다. 선생님의 작품은 곧 여지없는 한국여인의 표상(表象)이십니다. 간간히 선생 작품을 들여다보며, 필자는 나의 어머니, 누님을 비견하며, 공감(共感)을 넘어 통감(痛感)으로 고즈너기 선생의 외침을 헤아려봅니다.
사진: 故 천경자 화백 작품(4)
칼럼을 읽는 독자여러분!
이 어지러운 2025년 가을.... 잠시 선생의 그림 속에 나타난 해방과 유토피아의 신비경을 잠시나마 함께 공유해보는 시간이 되길 희망해 봅니다. 자유와 사랑이 곧 인본(人本)의 근원이 아닌가요....?
사진: 故 천경자 화백 작품(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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