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의 외딴섬 이스터섬의 모아이는 바다를 바라보지 않고 육지를 바라보고 있다.
모아이의 시선은 아름다운 바다를 향하지 않고 황량한 벌판을 응시하고 있다.
모아이의 시선에서 이스터섬의 비밀을 풀 수 있다.
이스터섬은 육지에서 3000키로 이고, 가장 가까운 섬 핏케인에서 2000키로가 넘게 떨어져 있다. 이스터 섬에 언제 사람이 처음 도착했는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남겨진 뼛조각등 유물의 탄소 측정연대와 그들의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로 짐작해 보면 기원후 900년 정도로 추정이 된다.
남부 아시아인들이 태평양 섬들을 점령하고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이 이스터섬이다.
이스터섬 원주민들은 모아이 석상을 어떻게 만들어서 운반하고 세웠을까?
크고 작은 모아이의 크기는 10미터에 달하는 것도 있다. 무게는 100톤이 넘는 것도 있다. 온전히 세워져 있는 것은 25개 정도이다. 나머지 수 백 개는 조각을 하던 채석장에 있거나 운반을 하던 도로 옆에 쓰러져 있거나, 모아이를 세웠던 기단 아후에 쓰러져 있다. 세워진 모아이에는 푸카오라는 모자를 쓴 것도 있고 쓰지 않은 것도 있다.
모아이는 왜 푸카오를 쓰고 있을까?
푸카오를 쓰지 않은 모아이는 왜 있을까?
그리고 현재 남아 있는 주민들이야 관광으로 먹고 산다하지만, 과거의 원주민들은 황량한 벌판과, 절벽이 많아 어업을 하기도 힘든 곳에서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지금의 이스터 사람들은 원주민이 아니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칠레에서 건너 온 사람들이다. 그들의 원주민 춤은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다.
엉터리 춤을 추면서 오로지 모아이 석상이 영업 덕분에 먹고 사는 칠레 사람들이다. 엉덩이가 탐스런 이스터 원주민 여자는 오래 전에 사라졌다.
유럽인들이 이스터 섬에 도착한 건, 1700 년대이다.
그때 이스터섬의 원주민의 인구는 2000 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 후 남아 있던 원주민은 유럽인들이 가져온 천연두 바이러스에 의해 반 이상이 사망하고, 노예로 팔려 갔다.
칠레에 합병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스터섬에 상륙한 사람들에 의하면, 불과 백 여명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남아 있던 이스터 원주민들은 굶어서 피골이 상접한 채로, 먹을 것을 구걸 했다고 한다.
이스터 섬의 역사를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이스터섬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야자수 숲이 섬 전체를 덮고 있었다고 한다.
뼈의 화석에서 그들의 식생활을 알 수 있었는데, 태평양 섬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돌고래 화석이 반 이상이었다. 그리고 육지새와 바다새의 뼈였다.
그런데, 처음 유럽인들이 이스터 섬에 도착했을 때는 야자나무 숲은 없었고, 육지새는 멸종되었고, 겨우 적은 수의 바다새만이 부속 섬에 생존하고 있었다.
돌고래를 사냥할 정도라면 태평양 섬에서는 가장 큰 카누가 있어야 했는데, 그것도 전부 사라지고 겨우 근해를 돌아다닐 작은 카누만이 몇 척 남아 있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야자나무 숲은 왜 사라진 걸까?
돌고래를 잡던 커다란 카누는 왜 사라지고 만들 수 없게 된 것일까?
그 많던 육지새는 왜 멸종이 되었을까?
수백개의 모아이 중 25 개만 세워져 있고, 그중 일부만이 푸카오를 쓰고 있고, 모아이의 시선은 바다를 향하지 않고 왜 육지를 향하고 있을까?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스터 섬의 인구가 30000 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들은 11개 씨족으로 나뉘어 각 씨족장에 의해 통치가 되었고, 나중에는 하나의 부족으로 통일 되었다.
그들은 식량은 어업을 통한 해산물과 돌고래, 바다새 육지새 뿐만아니라, 지구 상에서 가장 큰 야자열매와 열대과일, 게다가 농업생산물 등이었다.
그들이 플랜테이션 농업을 했다는 증거가 곳곳에 남아 있었다. 적어도 그들은 식량 걱정 없이 살아갔던 것은 분명했다.
태평양의 다른 섬들은 식량 문제로 골치를 앓았던과 비교하면 이스터섬은 태평양에서 복 받은 땅이었다.
이스터 섬 원주민들이 사라진 이유는, 환경파괴와 권력 때문이다. 넘쳐나는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먼바다에 나가 돌고래를 잡고 넘쳐나는 육지새 바다새 농업생산물을 조리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나무가 필요했다.
다른 섬들과는 다르게 불을 피우지 않고서는 요리를 할 수 없었다.
커다란 카누를 만들기 위해서도, 작업에 쓰이는 그물과 밧줄을 위해서도, 집을 짓기 위해서도, 농업을 위해 도구를 만들기 위해서도, 점점 나무들은 사라져갔다.
부족장들은 불안해 하는 주민들에게 뭔가 보여주어야 했고, 그들의 불안을 잠재울 증거가 필요했다. 부족장은 제사장과 공모하여 드디어 모아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화산석은 섬 정상에 널려 있었다. 채석장에서 만들어 운반하여 해안지역에 기단 아후를 쌓고 모아이를 세우고 나중에는 푸카오라는 붉은 모자를 만들어 씨웠다.
각 부족장들은 서로 경쟁을 하면서 점점 더 큰 모아이를 만들었고, 나중에는 높이 경쟁을 하기 위해 푸카오가 등장한 것이다.
모아이의 시선이 바다를 향하지 않고 육지를 향한 것은, 오로지 주민들에게 그들의 힘을 과시하고, 모아이라는 신격 존재를 통해 주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드디어 권력은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다른 권력자가 그랬듯이.
숲은 점점 더 망가져 갔다.
모아이 작업 과정에서, 육체노동을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식량이 필요했다.
모아이를 운반하기 위해서도 많은 나무와 밧줄이 필요했다.
숲이 망가지면서, 농지도 황폐 해져 갔다. 식량은 부족하기 시작 했다.
나중에는 커다란 야자수가 사라지자 카누를 만들 수 없어, 돌고래 사냥도 불가능해졌다.
씨족간에 전쟁이 일어나고, 하나의 부족으로 통일되면서 점점 더 숲이 망가지고 급기야는 부족장을 믿을 수 없었던 주민들은 쿠테타를 일으켰고, 식량이 점점 더 사라지자 인육을 먹는 카니발리즘이 생겨났다.
유럽인들은 이스터 섬의 막바지에 나타나, 마지막 선물(?)인 천연두와 원주민들을 노예로 팔아 먹었다.
천 여명 남은 원주민 마저도 피골이 상접한 백 여명 정도만 남게 되었다.
칠레에서 이스터 섬을 합병하고 원주민들을 구한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그래서 칠레 사람들이 원주민 흉내를 내면서 모아이의 영업으로 먹고 사는 것이 이스터섬의 지금의 모습이다.
어쩌면 모아이의 시선이 바다를 향하지 않고, 육지로 향한 이유는, 주민들을 위압하고 감시하는 것 보다, 미래의 자신의 처지가 관광지의 돌하루방 같은 신세가 될지 모른다는 예견하고 돌아선 것은 아닌지.
인류의 역사는, 이스터섬과 다름없다.
권력의 역사이고 자연과의 순응보다 욕심에 의한 자연 파괴의 역사이다.
이스터섬에서 인류의 미래를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