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28
9월29일[한가위/연중 제25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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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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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guSNCXXrmh4?si=RmzcAjAhIs7_826-
(조정래 시몬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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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추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부단히 자신만의 왕국을 포기해야 합니다!>
작년 여름 홀로 한달 간에 걸쳐 국내 성지순례를 떠났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순간이었지만, 숙소 문제가 크게 다가왔습니다. 어떤 날은 고마운 지인 댁에서 신세를 졌습니다. 어떤 날은 텐트를 치고 잤습니다. 어떤 날은 찜질방에서 새우잠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아주 좋은 장소가 눈에 띄어, 텐트를 치고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주인이라는 분이 나타나셔서, 당장 나가라시더군요. 한밤 중에 주섬주섬 텐트를 걷는데 기분이 참 그렇더군요. 당시 나만의 공간이 따로 마련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안락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그 작은 공간 마저 포기하라시니, 너무하신다는 생각을 떨칠수가 없습니다.
사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안정된 주거 조건 속에서 복음 선포활동을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끊임없이 떠돌아다니셨습니다. 나자렛을 떠나 카파르나움으로, 카파르나움에서 베타니아로, 베타니아에서 예리코로, 예리코에서 예루살렘으로...
그렇게 떠돌고 계시던 예수님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나 말합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루카 복음 9장 57절)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아주 특별한 말씀, 무척이나 알쏭달쏭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말씀, 꽤나 슬픈 말씀을 건네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복음 9장 58절)
공생활 기간 내내 펼쳐진 예수님의 행적을 뒤따라가 보니, 예수님 말씀은 정확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곳에 오래 머무신 적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꼭 붙들 때 마다, 나는 다른 고을에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시며, 결연히 팔을 뿌리치며, 발길을 옮기셨습니다.
곰곰히 따지고 보니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기간 내내 유다 광야의 여우 한 마리, 갈릴래아 호숫가 나무 위에 깃들며 살던 하늘의 새 한 마리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제가 예수님이었더라면, 경치 좋고 기후도 좋은 갈릴래아 호숫가에 커다란 대저택 하나를 짓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필요로 하는 가난하고 고통받은 백성들을 당신의 발로 직접 찾아다니셨습니다. 당신 치유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하는 환자들을 일일이 방문하셨습니다. 당신이 극진히 사랑하는 양떼를 찾아가기 위해 떠돌이 생활, 노숙도 마다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 조차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놀랍게도 공생활 여정의 마지막 순간에도 정확히 이루어졌습니다. 당신 사명의 종착지인 골고타 언덕 십자가 위에서 의미심장한 예언은 마무리되었습니다.
통상 임종할 때 사람들은 자신이 사용하던 방에서, 그게 아니라면 병원 침대 위에서 머리를 바닥에 대고 세상을 뜹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공중에서, 그 어디에도, 그 존귀한 당신의 머리를 대지 못한 채, 그렇게 운명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생애 내내는 물론이고 마지막 순간까지 놀라운 청빈과 겸손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추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부단히 자신만의 왕국, 자신만의 안락한 공간을 포기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참된 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언제든 어디로든 기꺼이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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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이 세상의 부귀영화도 중요하지만, 저 너머에서의 부귀영화도 생각합시다!>
복음서 전반을 살펴볼 때 부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시선은 그리 매끄럽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 당신의 인생 전체가 일관되게 가난했기 때문에 그런가 싶습니다.
탄생부터 시작해서, 유년기, 청소년기, 장년기, 그리고 공생활 기간 내내 가난하셨습니다. 마지막 운명하실 때는 더 이상 가난할 수 없는 가난의 끝판왕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표현을 하시며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유랑생활을 계속하셨습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고 오늘 복음을 통한 예수님의 부자들을 향한 질책과 경고는 아주 매섭습니다.
그래서 때로 부자로 살아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좀 더 심사숙고해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정직하고 성실한 부자, 열심히 일해서 벌은 돈을 아낌없이 ‘살아계신 하느님’이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봉헌하는 부자들은 예수님께서 아낌없이 칭찬하시는 부자입니다.
매서운 질타의 대상이 되는 부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돈이라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돈의 위치를 하느님보다 위쪽에 설정해놓은 사람들입니다. 죽어도 자선 한번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돈 많다고 함부로 가난한 사람들 업신여기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 무서운 말씀, 섬뜩한 말씀입니다. 개념 없는 부자가 강한 경고를 받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또 다른 한 가지 반성을 해보게 됩니다.
돈이라고는 땡전 한 푼 없는 수도자들, 그리고 가진 바가 없어 나눌게 없는 분들에게 오늘 말씀은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 하는 묵상입니다.
재물 외에도 ‘부’라고 칭할 수 있는 대상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매일 주어지는 24시간이라는 시간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긍정적인 측면들입니다. 장점들, 경쟁력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좋은 재능들, 어떻게 보면 재물보다 훨씬 가치 있는 ‘부’입니다.
이런 ‘부’를 공동체와 이웃들을 위해, 세상을 위해 기쁘게 내어놓는 노력, 그것이야말로 칭찬받는 부자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다시 한번 설레는 마음으로 공동체와 이웃, 그리고 세상과 하느님을 위해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부귀영화도 중요하지만, 저 너머 세상, 하느님 나라에서의 성공과 부귀영화는 몇천 배, 몇만 배 더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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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가위는 탐욕의 종말인 성체성사의 재현>
오늘은 한가위 명절입니다. 추수가 시작되는 이때는 풍요의 절기입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보릿고개와 같은 시절을 보내야 하지만, 적어도 한가위 때는 함께 가진 것을 나눠야 한다는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절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도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로 시작합니다.
사람은 다 행복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것을 볼 때 더 커집니다. 그래서 나누고 싶지만, 또한 보릿고개가 걱정됩니다. 이 때문에 갈등합니다. 결국 지금 나누어도 또 채워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나눌 줄 알게 되고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아이가 가난한 이와 잘 나눌 줄 안다면 그만큼 사이가 좋고 열심히 일하며 사랑 가득한 부모가 있음을 증명해줍니다. 반면 나눌 줄 모르고 자기 욕심만 내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부모로부터 받은 게 없음을 증명하는 사람이 됩니다. 탐욕은 부모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이고, 만약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느님께 화살을 돌리는 것입니다.
영화 ‘블루 재스민’은 전 뉴욕의 부유한 사교계 명사 재스민의 이야기입니다. 뉴욕에서 재스민은 부유한 남편 할과 함께 초상류층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할이 결국 금융 사기 혐의로 체포되고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빈털터리가 된 재스민은 유일한 가족인 여동생 진저와 함께 살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옵니다.
진저는 언제나 언니를 부러워하였습니다. 이혼은 했지만, 그래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 중입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재스민은 자신의 부와 지위를 잃은 문제와 씨름하며 새로운 삶에 적응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녀는 과거에 사로잡혀 정신적으로 점점 더 불안정해집니다. 그녀는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희망을 품고 접수원으로 일하고 컴퓨터 수업에 등록하면서 자신의 삶을 재건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드와이트라는 부유한 남자를 만나며 그와 관계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전 결혼 이야기도 하지 않고 자녀도 없다고 거짓말을 시킵니다.
청혼받고 결혼 준비를 하던 중 재스민의 거짓말이 폭로됩니다. 그리고 드와이트에게 버려집니다. 그녀는 집을 나간 아들이 악기점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갑니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는 것을 엄마가 알고 아버지를 FBI에 신고하여 아버지가 죽게 된 것을 알고 엄마를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재스민은 자신보다 항상 열등했던 진저가 수수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하는 것을 보고는 질투가 나서 자신은 드와이트와 결혼한다고 거짓말하고 집을 나와버립니다. 그렇게 길거리 노숙자가 됩니다.
재스민은 왜 그리 탐욕적일까요? 얼굴도 예쁘고 돈도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남편은 절대 바람을 피워서는 안 된다는 자존심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남편도 죽게 만들고 아들에게도 버려졌습니다. 또 동생이 자신보다 더 행복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노숙자가 되기를 선택합니다.
사실 재스민과 진저는 둘 다 입양된 자녀들이었습니다. 아무리 양부모가 사랑을 해 주어도 자녀들은 ‘피해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은 더 가져야 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미 다 받은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항상 덜 받은 사람이기에 더 받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 피해의식이 탐욕을 부르고 그 탐욕이 삶을 망가뜨립니다.
이미 다 받은 사람만이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의 탐욕은 부모나 하느님을 향해 활을 당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재산을 쌓아놓으려는 부자가 바로 오늘 죽는다는 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존재라고
일깨워줍니다. 생명도 받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하느님을 알게 된 것만 해도 충분한 은총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다 받았음을 깨닫고 느끼기 위해 최선을 다합시다.
저는 성체를 영할 때 예수님으로부터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조금이나마 내어줄 수 있는 존재가 되어감을 느낍니다. 우리에게 추석은 커다란 성체를 영하는 때와 같습니다.주님께서 모든 것을 채워주심을 느낌은 성체를 영하면서 느끼는 것이나 풍요를 누리며 느끼는 것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한가위는 성체를 영할 때처럼 하느님께서 다 주심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그것으로 탐욕이 사라질 때 그 삶 자체가 주님을 찬미하는 삶이 됩니다.
덜 받았다고 믿기 때문에 나누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미 다 받았다는 자존감으로 이웃을 행복하게 해 줄 때 삶이 변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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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민족의 명절인 ‘한가위’입니다. 예전에 본당에 있을 때는 강론 대신 어르신을 모시고 ‘덕담’을 들었습니다. 어르신들은 오랜 연륜과 경험을 바탕으로 가슴이 따듯해지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오늘 저는 덕담으로 ‘농부망서(農夫亡鋤)’에 대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한 농부가 밭에서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것을 본 아내가 호미를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물었습니다. 농부는 큰 소리로 이야기했습니다. ‘잃어버리지 않았어요. 밭에 두고 왔어요.’ 화가 난 아내는 그의 팔을 당기며 말했습니다. ‘좀 작은 소리로 말해요. 누가 듣고 호미를 가져가 버리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러고는 어서 밭으로 가 호미를 가져오라고 재촉했습니다. 농부가 밭으로 가보니 호미는 이미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온 그는 아내에게 바짝 다가가 아내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없어졌어요.’ 예전에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사오정’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도 깜빡깜빡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브루클린에서 플러싱으로 오려면 동쪽으로 가야 하는데 서쪽으로 가는 바람에 한참을 돌아왔습니다. 묵주반지를 브루클린 사제관에 놓고 왔는데 플러싱의 신문사에서 찾느라고 진땀을 흘렸습니다.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추석‘ 전날이면 어머니의 심부름을 하였습니다. 외할머니 댁, 고모님 댁으로 신문지에 싼 고기를 갔다 드렸습니다. 그러면 외숙모와 고모도 제게 추석에 쓸 전과 음식을 주셨습니다. 비록 모두가 어려웠지만 작은 것이라도 나누는 것이 추석의 인심이었습니다. 동네에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정겨운 놀이를 저녁 먹을 시간까지 하였습니다. ‘술래잡기, 망까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자치기, 이름의 유래는 잘 모르지만 오징어가이상, 말뚝박기’를 하며 놀았습니다. 그때는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존경이 있었습니다. 쉬는 시간이면 모두가 운동장에 나와서 뛰어 놀았습니다. 형편에 따라서 공고도 가고, 상고도 갔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처럼 모든 것이 풍족하고, 모든 것이 빠르게 성장하지는 않았지만 삶에 여유가 있었고, 친구들은 우정이 있었습니다. 성당 친구들과 성탄 때면 연극도 하고, 예술제도 하였습니다. 공부 잘 하는 것이 벼슬도 아니었고, 공부 못하는 것이 그리 창피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잘살면 잘사는 대로, 못살면 못사는 대로 그렇게 서로 어울리면서 지냈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산으로, 들로 놀러 다녔습니다. ‘낭만, 여유, 우정, 나눔, 만족’이라는 호미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2023년 추석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풍족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집에는 자동차가 있고, 손에는 스마트 폰이 있습니다. 마트에는 먹을 것이 넘쳐납니다. ‘한류’는 바람을 타고 움직입니다. 한국의 제품들이 당당하게 세계의 시장에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한국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당당합니다. 외국 사람들도 한국의 위상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풍요속의 빈곤이라고 우리가 잃어버린 ‘호미’들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희망도 잃어버렸습니다. 일어날 힘도 잃어버렸습니다. 우울증 환자가 늘어나고, 자살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삼포세대가 등장했습니다. 연애, 결혼, 출산, 직장, 집을 포기하는 오포세대도 등장했습니다. 연애, 결혼, 출산, 직장, 집, 대인관계, 희망을 포기하는 7포 세대도 등장했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호미를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호미를 찾자고 큰 소리로 외치면 좋겠습니다.
추석 둥근 달에 우리가 찾아서 채워야 할 호미는 무엇일까요? 끝까지 변함없는 믿음의 호미입니다. 절망 중에서도 놓지 않는 희망의 호미입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는 사랑의 호미입니다. 추석 둥근달에 우리가 찾아서 채워야 할 호미는 무엇일까요? 궁핍한 속에서도 잃지 않는 낭만과 여유의 호미입니다. 가난함 속에서도 버리지 않는 나눔과 헌신의 호미입니다. 각박한 현실 속에서도 놓지 않는 친교와 우정입니다. 우리가 믿음, 희망, 사랑의 호미를 간직한다면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낭만과 여유, 나눔과 헌신, 친교와 우정의 호미를 간직한다면 이 땅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추석을 맞이하면서 무엇보다도 조상과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풍요와 여유로움의 이면에는 땀 흘리는 노력과 수고가 있었음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겠습니다. 아울러 말뿐인 사랑보다는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추석이 감사와 고마움의 축제가 되고, 풍요와 기쁨의 축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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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15-21: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 일 년 동안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면서, 또한 우리에게 생명을 얻고, 생명의 길을 가도록 신앙을 전해주시고, 이 땅을 물려주신 조상들의, 또 친지들의 영혼들을 위해 이 자리에 함께 모였다. 우리 조상들은 오늘 추석을 지내면서 일 년 동안 제때 비를 주시고, 태양을 비추어 주시어 오곡이 풍성하게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주심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또 조상들의 은덕을 기억하면서 제사를 지낸 분들이다. 그리하여 이날은 모두가 넉넉한 마음으로 술과 음식을 서로 나누며 지냈다.
지금 이 자리에는 고향을 찾아 부모님께로 많은 분이 가기도 했지만, 또한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이때를 기해서 자리를 함께 한 가족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그분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면서 더욱 가족들 간에 화목한 사랑의 성가정이 되도록 기도하여야 하겠다. 이렇게 서로 가족들이 만나는 것은 기쁘고도 감사하여야 할 일이다. 그러니 우리도 언제나 감사드리며 사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저녁에 하루 동안의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고, 한 주간을 마치면서 주일미사를 봉헌하면서 감사드리고, 한 달을 감사하면서 지난날 모두를 감사드릴 수 있는, 그래서 오늘 추석,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더 잘 살 수 있도록 해야겠다.
이렇게 지나간 모든 것에 감사드리면서 우리는 우리 선조들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할 수 있다. 또한, 우리의 형제들, 은인들과 친척들 모두를 기억해 드릴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 신앙 안에 우리의 모든 형제였던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모든 일에 있어 감사드리는 마음을 갖고, 먼저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기로 하여야 하겠다. 아무리 조그만 일이라도 인도해 주신 하느님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며 그분께 찬미와 영광을 바칠 수 있을 때, 우리는 보다 적극적인 신앙생활도 할 수 있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에서도 먼저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드리도록 하면서 그 외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더불어 주실 것을 믿으며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는 모두 우리가 가진 바를 이웃과 나누며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다짐하는 오늘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기쁨이 넘치는 한가위가 되도록 하자.
오늘 복음에서 이 부자가 왜 어리석은 자가 되었는가? 세상의 재물이 모든 것이라고 믿었던 때문이다. 자기의 재산이 자신의 모든 것을 보장해 주는 것으로 생각을 하였다. 그 순간에 그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 영적으로 파산을 했다고 하셨으며, 하느님의 눈에는 그가 전혀 부자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장 큰 비극은 육체적 죽음보다도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재산은 무엇이건 좋은 것이다. 주님께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옛 성인은 재물이란 것이 사용하는 데 있는 것이지, 소유하는 데 있지 않다고 하였다.
지금까지의 모든 주님의 은혜,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돌아가신 조상들과 부모 형제 친척 은인들이 주님의 생명에 참여하시도록 기도하자. 또한, 지난 1년간의 모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면서, 지금 우리와 함께 제사를 봉헌하지 못하며, 이 기쁨의 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이들도 기억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면 잠깐 머리 숙여 눈을 감고, 우리 공동체를 위하여 뜨거운 마음으로 각자 기도드리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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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먹고사는 문제’에 관해서, 구약성경 잠언 저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저는 당신께 두 가지를 간청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 30,7-9)
여기서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라는 기도는, ‘모든 일’이 다 주님의 손에 달려 있고,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이라는 믿음을 나타냅니다. 내가 잘나서 부자가 된 것도 아니고, 내가 못나서 가난하게 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섭리를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모든 일에는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라는 말은, 인간의 나약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인간의 선한 의지보다 재물 속에 숨어 있는 마성(魔性)의 힘이 더 강해서, 재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본래의 의지와는 다르게 자꾸만 악한 쪽으로 가는 것이 인간의 나약한 모습입니다.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라는 말은, ‘가난’은 극복해야 할 ‘악’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재물이 없을 때에도 재물 속에 숨어 있는 ‘마성’은 인간을 악한 쪽으로 끌어당깁니다. 가진 것이 없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밖에 있는’ 재물의 악한 힘이 ‘내 안에 있는’ 욕망과 욕구를 자극해서 나를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성직자와 수도자의 ‘청빈’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기 위해서 가난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어쩔 수가 없어서 가난하게 사는 것과는 다른 일입니다. 그 경우에도 ‘재물 없음’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욕망과 욕구를 억제하는 일과 재물의 악한 힘을 물리치려고 노력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런 노력 없이는 청빈도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7-10)
여기서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라는 말은, ‘나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원래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잠시 맡겨 주신 것, 즉 ‘하느님의 것’입니다. 재물이든지 시간이든지 목숨이든지 간에...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믿음, 사랑, 겸손 같은 ‘성덕’뿐이고, 세속의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 등은 모두 버려야(포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가지고 갈 수 없는 것들인데도 그것들을 버리지 않고 악착같이 움켜쥐고 있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그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라는 말은, 탐욕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지 노동을 비롯해서 인간 사회의 건전한 경제 활동을 부정하는 말은 아닙니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16-20)”
자기 것이 아닌 것들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이 비유에 나오는 부자의 첫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재물도, 목숨도, 시간도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그것들을 언제 어떻게 되찾아 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주님만의 권한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현세에서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만 생각하는 것이 그의 두 번째 어리석음이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지 않은 것이 세 번째 어리석음이고, 이웃에게도 하느님께도 감사드리지 않는 것이 네 번째 어리석음이고,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 다섯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여기서 ‘어리석다.’라는 말은, ‘멍청하다.’라는 뜻이 아니라 ‘악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악한 자’, 즉 ‘죄인’입니다.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라는 하느님 말씀은, “어느 누구도 차지하지 못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 악한 부자를 곧바로 처벌하지는 않으시고,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오늘 밤에’라는 말은, 그가 회개하도록 ‘몇 시간’의 여유를 그에게 주셨음을 나타냅니다. 그가 얻은 ‘몇 시간’은, 그에게는 마지막 기회이고 유일한 기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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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리라”(제1독서). 한 해 동안 공들인 수고의 결실을 거두는 명절 한가위입니다. 오늘 밤 떠오를 한가위 보름달처럼, 여러분들의 마음 또한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수확의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처럼 추석은 풍성함을 만끽하는 명절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가 거둔 풍요로운 결실을 어떻게 사용할지 고민하여 보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둔 부유한 농부가 그 소출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는 모습을 그립니다. 그의 생각을 드러내는 표현들 속에서 우리는 그의 관심사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여기서 ‘모아 두다’ 또는 ‘쌓아 두다’라는 표현이 두드러지게 많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유한 농부의 관심사는 수확한 것을 모아 두고 쌓아 두는 일이었습니다. 모아 둔 것을 앞으로 어디에 쓸지에 대한 고민은 크게 없어 보입니다. 그의 고민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장소가 좁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이전 곳간들을 허물고 더 큰 곳간들을 짓겠다는 계획을 세우는 데에 그치고 맙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모으는 데만 마음을 쓸 뿐, 그것으로 무엇을 할지는 별로 고민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아 두고 쌓아 두는 것 자체가 목적일 수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우리가 지향하여야 할 바는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되도록 현세에서 누리는 풍요로움을 어떻게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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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신중호 베드로 신부님]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나에게서 사라지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삶은 여행>
예로니모 성인은 당신 어머니 장례미사 때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성인의 행동은 죽은 이들이 단순히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사라지지 않으며, 하느님 품으로 돌아간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욕심을 채우는 일에만 온 정성을 쏟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고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우리가 하느님 품으로 돌아갈 때가 언제일지 모르니 허상을 좇지 말고 참된 것에 힘을 쏟으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새 신부 때 은퇴를 앞둔 70대 신부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한번은 식사 시간에 신부님께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라고 했더니, 신부님께서 “신 신부 시간은 30km로 가지만, 내 시간은 70km로 지나가.” 하셨습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시간의 속도를 절감하게 됩니다.
우리 삶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입니다. 영원을 생각할 때 삶은 잠시의 여행에 불과합니다. 하느님 품으로 먼저 가신 우리 가족들이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매일의 시간이 본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임을 알고, 눈에 보이는 형제들을 사랑하며 참 부모이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선물을 들고 고향집으로 향해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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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휘영청 밝고 아름다운, 축복 가득 찬 한가위 되세요. 오늘 말씀전례는 하느님의 축복에 대한 찬양과 감사로 가득합니다.
입당송에서는 “온갖 열매 땅에서 거두었으니, 우리 하느님이 복을 내리셨네.”라고 노래하고, 본기도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섭리하시는 하느님, 해와 비와 바람을 다스리시어 저희에게 수확의 기쁨을 주시니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께 오롯한 감사를 드리고, ~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제1독서에서 요엘 예언자는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요엘 2,26)고 노래하고, 제2독서에서는 때가 될 때, 구름 위에 앉아계시는 분이 땅 위의 곡식을 수확하시는 환시를 들려줍니다.
복음 환호송에서는 “뿌릴 씨 울며 들고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고 노래하고, 복음에서는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는 것, 곧 생명이 재물에 달려 있거나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사실 인류 역사는 베풂의 역사로 시작되었습니다. 곧 하느님의 창조와 축복과 선사로 시작된 역사입니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외아드님을 건네주심으로 구원을 베푸시고, 우리는 그 베풂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렇게 은총에 은총을 덧입은 이들로서 그 은혜에 감사하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또한 그렇게 하여 은혜를 입고 이미 새 생명으로 태어난 구원된 존재라는 사실에 더 더욱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가 만난 모든 것들 안에서 저희와 동행하시며 승리로 이끄시는 당신의 현존과 활동에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러한 은혜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를 깨닫지 못하는 부자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비유 안의 이 '어리석은 자'(αφρων: 정신없는 자, 무분별한 자)인 부자는 내일이라는 시간이 마치 자기 손에 있는 것인 양 '여러 해'를 계획하지만, '오늘 밤'이라도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이 세상을 하직해야 한다는 것을 통해, 탐욕이 얼마나 허망하고 헛된 것인지를 일깨워줍니다.
이는 재물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기보다 재물에 대한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곧 그 모든 것을 주신 주님께 대한 감사와 의탁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재물에 의탁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자신만의 것인 양 여겼고, 이웃들에게 무관심하고, 마치 자신이 자기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인 양 오만했습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 곧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루카 12,21)은 어떤 사람일까? 그것은 자신이 하느님의 재물이 되고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늘의 곳간에 재물을 쌓는 사람'(루카 12,33) 입니다.
묘하게도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의 소유가 되면서 주님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가지면 전부를 가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가지면 전부를 가진 것입니다.”(안토니오 더블유)
그러니 자신의 재물보다 자신의 영혼을 관리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의 재물이 무엇인가를 보기에 앞서, ‘나는 누구의 재물인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누구의 소유이고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꽉 찬 보름달처럼 주님의 이름이 우리 안에 꽉 차올랐으면 좋겠습니다.아멘.
<오늘의 샘 기도>
주님,
제 마음의 곳간에 탐욕이 아니라 사랑을,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채우게 하소서.
오직 저의 전부이신 당신이 저를 차지하소서.
제 자신에게 부유한 자가 아니라 당신께 부유한 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께 온전히 소유당한 자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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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손수건 같은 만남 >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추석명절을 맞이하여 기쁨과 평화가 충만한 날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은 무엇보다도 감사하는 날입니다. 하느님과 조상님들, 부모 형제 친지들을 기억하고 서로의 만남을 감사하는 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혈육의 조상뿐 아니라 천상의 삶에 눈을 뜨게 한 신앙의 조상들도 기억하며 만남을 이룹니다. 특별히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합니다.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부모와 친지, 이웃에 감사하는 마음을 주고받는 가운데 행복한 명절 보내시길 바랍니다.
정채봉 프란치스코 시인은 만남을 5가지로 표현했습니다.
1.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입니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오니까
2.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입니다. 피어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3. 가장 비천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입니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닳아 없어질 때에는 던져 버리니까
4.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입니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5.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입니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니까.
명절에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과의 관계가 손수건 같은 만남으로 이어지길 기도합니다. 서로에게 위로와 희망, 기쁨이 되어주길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떤 부유한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혼자 속으로 고민하고 궁리한 끝에 곡식과 재물을 모아두기로 작정합니다. 그런데 그날 그의 생이 끝나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모은 재산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가 혼자 궁리하지 않고 자기를 지으신 분을 기억하고 그분과 함께 의논했더라면 그런 잘못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귀에 들리는 것만 들으면 누구나 어리석은 부자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기도하며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이시라면 과연 어떻게 하실까?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히브11,3) 보이는 몸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몸이 이끌어야 합니다.
우리는 추석 명절에 미사를 봉헌하며 세상을 떠난 이들을 특별히 기억합니다. 유교적으로는 제사를 올립니다. 제사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 하겠습니다. 한국천주교 사목지침서에는 “제사의 근본정신은 선조에게 효를 실천하고, 생명의 존엄과 뿌리의식을 깊이 인식하며, 선조의 유지를 따라 진실된 삶을 살아가고, 가족공동체의 화목과 유대를 이루게 하는 데 있다”(제134조1항)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다종교 사회이므로 종교의 신념을 표현하는 ‘제례 방법’이 다릅니다. 그 다름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모처럼 만난 가족, 친지 이웃이 서로 자기의 신념을 강요한다면 갈등만 커질 것입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다름에 대해 배려하는 가운데 성숙한 사랑이 넘쳐나길 희망합니다.
우리는 우리 생명의 근원이신 부모의 은혜에 대한 보은에 남다른 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부모에 대한 효의 실천은 세 가지 양상으로 생각하였는데 첫째가 부모로부터 받은 신체를 잘 보전하여 후손에게 길이 전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벼슬길에 올라서 부모의 이름을 드높여 부모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를 정성껏 봉양하고 공경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부모님을 정성껏 봉양하고 효도함은 돌아가신 후에도 제사를 통해서 계속되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으로써 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지 생이 계속됨을 믿었고 살아계실 때와 같이 가족공동체와 계속적인 유대 관계를 유지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사는 죽은 이들을 계속 공경함으로써 효도를 이어가는 방법이며 결국 제사의 의의는 은혜를 갚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하느님의 계명과 아무 마찰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이나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절을 하고 예를 드리는 것은 신앙에 위배 되지 않습니다. 이는, 죄나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존경과 사랑으로 인사 방법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살아계실 때‘성균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는데 매스컴은 추기경님께서 과연 성균관의 예법에 따라 절을 할 것인가? 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추기경님께서는 서슴없이 절을 하셨습니다.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를 갖추었다면 그게 우상숭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우리 천주교는 제사문제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조상공경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우상숭배로 판단하였기 때문에 조상제사를 철폐하였고 이는 부모의 은덕을 망각하는 인륜을 저버린 짐승만도 못한 무리라고 하여 천주교신자는 죽어야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1939년 12월8일에 이르러서야 교황청은 “조상의 제사는 우상숭배가 아닌 조상에게 효성을 표시하는 미풍양속이며 민족의 훌륭한 유산이므로 수용해야 하고 토착화해야 한다.”는 평가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아픔이 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사를 지냄에 있어서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신주 문제입니다.
신주는 밤나무로 만들었는데 구멍이 뚫려있습니다. 그 신주에는 조상의 혼이 마물러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음은 혼백(넋)의 갈림길이라고 믿었고, 이 혼이 의지할 곳이 없어서 떠돌아다니는데 떠돌아다니게 그냥 두는 것은 자식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혼이 머무르도록 하기 위한 안식처를 만들어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신주의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 때는 바로 그 신주를 모셨습니다. 신주를 모신 것은 돌아가신 이를 섬기기 위해서는 볼 수 있는 상이 필요했고 신주는 바로 돌아가신 이의 상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돌아가신 이를 만나는 하나의 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그 영혼이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히브9,27). 그리하여 천국이나 지옥, 아니면 연옥에 가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따라서 죽은 이의 혼이 떠돌아다닌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과 근본적으로 대치됩니다. 만약 죽은 이의 혼이 떠돌아다닌다면 세상은 난리판이 될 것입니다. 그 말은 곧 지옥으로부터의 탈출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런 일이 가능하다면 하느님은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그렇게 허술한 하느님을 누가 하느님으로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살아있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다 하느님의 권능 안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주를 모시는 것은, 잘못입니다. 위패를 만들지 않습니다. 이번은 제대 앞에 기억하는 분들의 이름을 봉헌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제사날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 음식을 잡수시러 온다는 사상과 조상들을 잘 공경하면 조상이 복을 준다는 사상은 바꿔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돌아가신 분들이 음식을 잡수러 오시기 때문에 음식을 차렸다면 신앙과 위배 되는 것입니다. 다만 그분이 좋아하셨던 음식을 차리며 기억하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분은 음식을 잡숫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생전에 좋아하셨던 음식이나 못해 드린 음식을 차려 대접함으로써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기억하는 것이지 조상이 와서 잡숫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복을 주고 안 주고는 조상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혼을 부르고 음식을 차리고 거기에 복을 기원하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분들이 천상에 들지 않았다면 천상에 오르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천상에 계시다면 그분들이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심을 믿습니다. 제사의 핵심은 효요, 웃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 천주교회의 전통적인 제사는 무엇입니까? 미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바치신 십자가의 죽음을 제사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하시며 이 제사가 계속 이어지기를 명하셨습니다. 명절에는 특별히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며 아직 천상의 영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 연옥에 계시는 분이 있다면 우리의 기도와 희생으로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위령미사는 바로 교회공동체가 한마음으로 세상을 떠난 분들을 위해 자비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주 미사봉헌을 하여 효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고유한 미풍양속인 제사를 봉헌하며 세상을 떠난 조상이나 부모, 형제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꼭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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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불교의 49재를 말씀 드립니다. 49재는 한마디로 사람이 죽은 뒤 49일째에 치르는 불교식 제사의례, 즉 불공입니다. 석가모니께서는 25세에 출가하여 6년의 고행을 한 후 득도하여 48년간 설법을 하셨고 49년째에 세상나이 80세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49라는 숫자가 중요하고 또 불교에서는 윤회설을 믿는데 사람이 죽은 날로부터 49재를 치르는 날 사이의 기간을 ‘중유’라고 하여 이 기간에 생전의 업에 따라서 다음세계가 결정된다고 봅니다. 즉 모든 중생은 천상, 인간, 축생, 아수라(싸우다), 아귀(다툼), 지옥의 여섯 세계를 윤회하며 이 가운데 아수라, 아귀, 지옥을 ‘삼악도’라 하여 고통과 지옥으로 가득찬 세계로 보고 있습니다. 바로 49재는 죽은 자가 삼악도에 들어가지 않고 보다 나은 세상에 태어나기를 비는 불공입니다. 49일째 모든 것이 마지막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그날을 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49재 미사를 봉헌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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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뉴스에서 우리나라 합계 출산율이 곧 0.6명 대까지 떨어진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는 성당에 나오는 아이들 숫자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1990년대만 해도 웬만한 성당의 초등학생 숫자는 모두 100명 이상이었습니다. 큰 본당의 경우는 거의 1,000여 명의 아이들이 주일학교에 나왔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아이 보기 힘들다면서 어린이 미사 자체가 없어지는 본당도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전 세계 출산율 최하위인 우리나라, 그래서 많은 학자가 인구소멸 국가 1호로 우리나라를 꼽는다고 합니다. 정부에서도 또 각 지자체에서도 많은 출산 장려 정책을 내놓지만, 그 효과는 거의 미미해 보입니다. 아이를 가짐으로 인해 생기는 희생을 떠올리면, 자기들뿐 아니라 결국 아이에게도 좋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형제님께서 자녀를 가져야 할지 말지 아내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자녀 갖는 것이 갖지 않는 것보다 더 큰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자녀 갖는 것이 가치의 여부를 따져야 할 것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저는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표어가 가득했습니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께서는 국가 정책에 반하는 여섯 번째 자녀를 낳아야 할지 고민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치를 따지지 않고 낳았기에 지금의 제가 있게 되었습니다.
생명에 관한 부분, 또 미래에 관한 부분은 우리 영역이 아닙니다. 분명히 불행할 것이라며 인간적인 판단을 내세우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결국 생명과 미래에 대한 부분은 하느님께 맡겨드리면서 지금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한가위입니다. 한가위는 수확의 풍요로움과 더불어 보름달처럼 밝고 훈훈한 사랑과 정을 나눌 수 있는 가족을 만나고 하느님과 조상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드러내는 날입니다. 사실 자신이 이 자리에 있음 그 자체로 커다란 은총이며 감사할 이유로 충분합니다. 만약 세상 사람들이 따지기 좋아하는 세속적인 기준을 가지고서 판단했다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과연 창조하셨을까요? 죄악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인간을 오히려 창조하지 않음이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조상님들이 없었다면 마찬가지로 자기 존재를 이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전 표어를 살펴보다가, ‘무서운 핵폭발, 더 무서운 인구 폭발.’이 있더군요. 지금은 무엇이 무섭습니까? 당시에는 인구 증가가 무서웠나 보지만, 그때 생각했던 가치의 결정이 잘못되었음을 지금 우리는 이야기합니다. 결국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생명과 미래는 하느님 아버지의 것입니다.
하느님과 조상님께 감사를 드리며, 또한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하는 즐거운 한가위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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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한가위만 같기를>
루카 12,15-21 (탐욕을 조심하여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한가위만 같기를>
나
높푸른 하늘이 되어
고운 벗님들
정성껏 품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
나
넉넉한 땅이 되어
고운 벗님들
고이 모시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
나
둥그런 보름달이 되어
고운 벗님들
부드럽게 감싸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
나
소담한 송편이 되어
고운 벗님들
살맛 돋우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
나
도란도란 밥상이 되어
고운 벗님들
오붓하게 보듬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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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한량없는 은총 안에서>
설 명절이 한 해의 시작을 함께 기뻐하는 명절이라면 한가위 명절은 한 해의 결실을 함께 기뻐하는 명절입니다.
그러니 한가위 명절은 수확의 기쁨이 있어야 하고, 그 기쁨을 같이 나눌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둘 다 없으면 말할 것도 없고 한 가지만 없어도 명절이 전혀 명절이 아니거나 기쁘지 않고 오히려 쓸쓸하고 슬픕니다.
그래서 수확의 기쁨에 대해서 먼저 보려고 하는데 수확이란 씨 뿌리는 것으로부터 가꾸는 것까지 다 포함하는 농사의 그 마지막 단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농사를 잘 지어야 하고, 무슨 씨를 뿌려야 하며 무슨 씨를 가꿔야겠습니까?
우리는 곡식 농사도 잘 지어야 하고 자식 농사도 잘 지어야겠지만 무엇보다도 행복 농사를 잘 지어야겠습니다.
이 말은 행복의 씨를 뿌려야 한다는 말이고, 우리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어야 한다는 말이며, 돈이나 명예가 목적이 아니라 행복이 목적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행복이 아니라 불행의 씨를 뿌립니다. 행복이 목적이어야 하는데 돈이 목적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사랑이 아니라 욕심을 씨 뿌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돈이 목적이고 그래서 욕심을 씨 뿌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돈 때문에 일의 노예가 되고, 돈 때문에 늘 근심 걱정이고, 돈 때문에 늘 불평불만이고, 돈 때문에 사람을 미워하고 죽이기까지 할 것입니다.
반대로 행복이 목적인 사람은 늘 충만합니다. 일에 쫓기지 않고 마음에 여유가 있고, 불평불만 대신에 늘 감사할 것이고, 미움 대신에 사랑이 늘 충만하기에 행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이 목적인 사람은 고통 가운데서 행복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고통은 불행이라고 애초에 고통에 지고 들어가고, 고통 때문에 미리 불행해지고 마는데 행복이 목적이고 행복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고통이 사랑과 행복 단련이고 행복의 결실을 위한 수고입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지 않는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한때 유행했지요. 고통으로 단련되지 않은 행복은 허약한 행복이고, 수고하지 않고 거둘 수 있는 열매 곧 기쁨과 행복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쁨과 행복은 하느님 안에서의 기쁨과 행복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수고와 노력도 있어야겠지만 우리의 수고와 노력이 헛수고가 되지 않으려면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수고와 노력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권고하지요.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주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 준다. 이전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 준다.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리라.”
비, 바람, 햇빛이 없으면 우리가 아무리 씨를 많이 뿌리고, 아무리 애를 많이 써도 씨가 싹이 트지 않고
간신히 싹이 트더라도 이내 말라 죽듯 하느님 은총 없으면 모든 것이 헛수고지요.
그런데 하느님 은총이 내게 왜 없습니까? 하느님께서 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까? 우리가 받지 않고 걷어차기 때문입니까?
우리는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은총을 주신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가위에 기쁨과 행복이 없다면 은총 안에 있지 않음을 반성하고, 기쁨과 행복이 있다면 은총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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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
-참 거룩하고 아름다운, 부유하고 자유로운, 지혜로운 삶-
"한가위를 맞이하여 오곡백과를 지어내신
주님께 어서 와 조배드리세."
우리 요셉 수도원 수도자들은 새벽기도시 초대송 후렴을 힘차게 노래함으로 "한가위"를 활짝 열었습니다. 9월 순교자 성월 가을부터는 수확의 계절이자 기도의 계절입니다. 오늘은 4천만이 움직인다는 한국인의 최대 명절인 한가위 추석이자 축일미사는 봉헌하지 않지만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세 분 천사들 축일이니 참 경사스런 날입니다. 오늘도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서 성호경과 주모경을 바친후 만세육창으로 하루를 시작하니 힘이 샘솟습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여러분은 6째 항목에 “우리가정 만세!”를 넣어 바쳐도 좋겠습니다. 양손을 번쩍 치켜올려 만세육창하며 기도하면 영육의 건강에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8월 중순부터 9월 순교자 성월은 하루하루 만세육창으로 시작했습니다. 면담성사차 집무실을 찾는 분들은 보속으로 말씀처방전을 받았고, 이어 하느님 사랑하는, 나라 사랑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애국가 1절을 부르도록 했습니다. 참으로 기도로 시작하는 하루, 끊임없이 깨어 기도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사람입니다. 하느님과 소통의 관계를 깊이하는데 기도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기도는 사랑이요 생명입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니라, 기도해야 인간 본연의 존엄한 품위를 지닌 참사람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전쟁 치열한 광야인생여정중 누구나 악마나 괴물, 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한민족은 그리스도교가 전래되기 태고적 예전부터 하늘님을 믿었고 평화를 사랑한 백의민족(白衣民族)이었고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숭고한 하늘나라 이상을 실현해온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문화 민족이었습니다. 오늘 한가위 미사전례중 입당송과 본기도가 참 좋습니다.
*입당송: “온갖 열매 땅에서 거두었으니, 하느님, 우리 하느님이 복을 내리셨네.”
*본기도: “계절의 변화를 섭리하시는 하느님, 해와 비와 바람을 다스리시어, 저희에게 수확의 기쁨을 주시니,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께 오롯한 감사를 드리고, 조상을 공경하며 가족과 이웃과 화목하여,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
참으로 추석에 우리의 모든 소원이 가득 담긴 참 아름다운 기도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 참 좋은 응답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얼마전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기억할 것입니다. 주위 여건이나 환경에 일희일비함이 없이 한결같이 “땅에서 씨뿌리는 삶”이 참으로 멋진 참삶입니다. 여기에 하나 추가 합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날마다 한결같이 땅에서 씨뿌리는 삶에 충실하고, 날마다 한결같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에 충실하다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겠는지요!
날마다 한결같이
“땅에 씨뿌리는 사람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람들”
바로 이런 이들이 궁극의 희망을 하늘의 하느님께 둔 가난하고 겸손한, 진실하고 순수한 무욕의 영혼들입니다. 말그대로 진선미의, 신망애의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참삶을 살라고 하느님께 선물로 주어진 참 소중한 인생들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문득 떠오른, 참 은혜로운 강론 제목은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였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죽는 그날까지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방법을 알려 드립니다.
첫째, 찬양과 감사의 삶입니다.
하느님을 온맘으로 온몸으로, 온힘으로 온정신으로 사랑할 때 저절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께 감사하기 마련입니다. 바로 끊임없이 바치는 하느님 찬양과 감사의 기도와 삶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돈이 없어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하늘에 보물을 쌓을 기회는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이런 이들이 정말 행복하고 자유로운 이들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제1독서 요엘 예언자가 말하는 영적 시온의 자손들입니다.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준다. 이전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준다.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리라.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이래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란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양과 감사의 삶을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할 때 저절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에 샘솟는 기쁨과 즐거움이요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의 실현입니다. 눈들면 어디나 하늘이듯 하늘을 바라볼 때 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찬양과 감사의 기도와 삶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150장 마지막 구절이 더욱 하느님 찬양의 삶에 충실할 것을 부추깁니다.
“숨쉬는 것 모두 다 주님을 찬양하라. 할렐루야!”(시편150.6)
둘째, 나눔과 섬김의 삶입니다.
나눔과 섬김은 이웃 사랑의 표현입니다. 마음만 있다면 무궁무진한 나눔과 섬김의 기회입니다. 나눔과 섬김의 사랑 역시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이래야 하루하루 날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의 실천입니다. 이런 나눔과 섬김의 사람들이 정말 자유롭고 존엄한 품위의 사람들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이 우리 모두 정신 번쩍 들게 합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탐욕으로 얻은 것은 재물이요 돈인데, 잃은 것은 건강이요 삶이요 생명이라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지요! 생명을, 건강을, 사랑을, 삶을 잃었는데 그까짓 재물이, 돈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지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잃어버린 생명을, 사랑을 찾을 수는 없으니 얼마나 어리석고 후회스럽겠는지요! 후회해도 이미 늦습니다. 바로 하늘이 아닌, 땅에 보물을 쌓은 탐욕의 결과요 자업자득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우리에게는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탐욕에 눈이 멀어 하느님도 이웃도 보이지 않습니다. 온통 땅에 보물을 쌓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고립단절의 자기 감옥에 갇힌 수인(囚人)의 삶입니다. 아, 천국인 듯하나 지옥입니다. 땅에 보물 쌓기에 여념이 없는 삶의 자리, 바로 거기가 지옥입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어리석은 부자의 독백에 이어, 어김없이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의 말씀이 뒤따릅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땅에 보물을 쌓는 삶, 부자같으나 하느님 앞에서는 참 가난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삶입니다. 나눔과 섬김의 활동에 재물을 사용함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이었다면 가난한 듯하나 실상 하느님 앞에 참으로 부유하고 행복한 삶이었을 것입니다. 이 비유 또한 땅에 보물을 쌓으려는 탐욕의 본능을 지닌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귀한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문득 영국의 19세기 작가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 소설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구두쇠 스쿠르지 할아버지 일화가 생각납니다. 성탄전 하루밤 꿈중에 죽은 영혼들을 만나 자기의 과거 현재 미래의 삶을 보면서 개과천선해 착한 스쿠리지가 됐다는, 이제부터 땅에 보물을 쌓는 삶에서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일화가 생각납니다. 흡사 오늘 복음의 일화가 어리석은 부자의 하루밤 꿈이 아니었겠나, 꿈에서 깨어난 어리석은 부자는 전격적 회개를 통해 이웃과 나눔과 섬김의 삶으로 전환이 이뤄지지 않았겠나 하는 유쾌한 상상을 해봅니다.
땅에 보물을 쌓는 삶, 참으로 탐욕으로 인해 잘못 선택된 자기 중심의 참 어리석은 삶입니다. 반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 참 잘 선택한 하느님 중심의 지혜로운 삶입니다. 참으로 자유롭고 부유한, 아름답고 거룩한 행복한 삶이요, 이미 오늘 지금 여기에서 시작된 영원한 생명의 천국의 삶이니 심판은 추호도 걱정 안해도 됩니다. 이런 이들은 제2독서 묵시록의 성령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았던 이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시작된 천국의 지름길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눈만 열리면 하늘에 보물을 쌓을 선택의 기회는 무궁무진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찬미와 감사의 미사전례 시간 역시 하늘에 보물을 쌓는 복된 시간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에 항구할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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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12,15)
<또 다른 천사들이 되자!>
오늘 복음(루카12,15-21)은 '탐욕을 조심하여라.'는 말씀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입니다.
오늘은 민족 고유의 명절인 '한가위'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오늘은, 꼭 잡고 있는 것들을 잠시 내려놓고, 8월의 한가운데 떠오르는 둥근 보름달 만큼이나 사랑과 평화와 기쁨이 넉넉한 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넉넉한 날에 우리는 우리에 앞서 떠나가신 조상님들을 기억합니다. 조상님들은 우리(나)의 뿌리입니다. 조상님들이 계셨기 때문에 내가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가위, 추석명절은 조상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그리고 조상님들의 영혼과 부모와 가족, 친지들의 영혼이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기를 기원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탐욕을 조심하지 않는 어리석은 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12,20)
오늘은, 한가위 명절에 밀려 기념하지 못하게 된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의 날'이기도 합니다.
대천사 이름 끝에 붙어있는 '엘'은 히브리어로 '하느님'을 뜻하는데, 천사들은 하느님 없이 존재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천사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으로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영적 존재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일하는 인간 구원의 협조자'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또 다른 천사들이 되어봅시다!
조용히 다가가 손을 잡아주는 천사!
위로를 건네며 토닥여주는 천사!
꼭 안아주며 울어주는 천사!
생명과 환경을 지키는 천사!
너를 위해 기도하는 천사!
"그렇다, 그들은(또 다른 천사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묵시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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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96g4jH7FL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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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 15)
아름다운 빛깔을
나누는
추석이라는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하늘의
보름달이
우리
온 마음을
두루 비춥니다.
명절은 언제나
고향과 함께
시작됩니다.
고향을 만나면
흐뭇한 삶의
이야기로
더욱 풍요롭고
더욱 정겹습니다.
영원한
마음의 고향을
찾아 떠나는
우리들 삶입니다.
풍성한 사랑의
마음을 배우고
배려와 친절을
배우고
삶의 지혜를
배우는 시간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하느님께서 몸소
가르쳐주십니다.
모든 생명은
하나같이
하느님의
소중한
생명입니다.
생명존중은
바로
생명중심입니다.
위험한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함께 행복하고
함께 평화로운
삶을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기에
행복이 있고
여러 가치들이
있는 것입니다.
생명은 탐욕에
있지 않습니다.
한계를 넘어
집착하는 것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죽입니다.
한가위는
생명이신
하느님과 함께
얽매임에서
벗어나는
오늘을 감사로이
사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는 진리의
말씀이
지나친
욕심으로
마음의 참된 고향을
잃은 우리들에게
고향을 되찾아주시는
우리의 진정한
희망이 됩니다.
생명을 바쳐
생명을 사랑한
모든 조상님들께
감사드리는
오늘입니다.
당연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에
진심으로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추석이 주는
교훈은
생명의 길은
진심어린
감사임을
알려줍니다.
사랑으로
생명들이
어울리고
감사로
가족들이
풍요로워집니다.
당연한 사람의
도리를 실천하는
한가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잊고 지냈던
삶의 소중함을
되찾아주시는
한가위의
하느님이십니다.
맑고 정겨운
한가위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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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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