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유는 가축들의 밥그릇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모셨다 해도, 구유는 포근한 요람이 아니라 구유일 뿐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구유에 누우신 까닭은 구유를 요람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닙니다.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 사람 사는 세상의 가장 낮고 천한 자리를 찾아오신 아기 예수님을 모실 곳은 구유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피곤에 지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추위와 맞서며 캄캄한 밤을 지새우는 가난한 목자들에게 주님의 천사들이 주님 탄생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주님께서 구유에 누워 계실 것이라는 슬픈 소식과 함께. 하지만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압받는 이들에게 이 역시 기쁜 소식입니다. 간절히 고대하던 메시아에게서 바로 자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기 예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하루에도 수십억 원씩 거래되는 주식 시장의 거래 현황판도, 돈과 권력, 학벌과 지위가 아귀다툼하는 죽음 같은 경쟁의 자리도, 신문을 뒤덮는 세일 광고도, 연말연시 분위기를 휘어잡는 백화점 진열장의 값비싼 물건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왜 오셨는지, 어떠한 모습으로 오셨는지 아는지 모르지만 울긋불긋 시내 곳곳을 수놓은 요란한 크리스마스 장식등도, 공허한 캐롤소리도 아닙니다. 가난하고 약한 이웃들의 고통스런 울부짖음을 외면하고, 나눔과 베풂의 정신을 상실한 채, 자신만의 안락과 구원을 추구하는 교회공동체도 아닐 것입니다.
치열한 경쟁에 내몰려 숨조차 편히 쉬기 어려운 아이들의 상처받은 마음에, 자기 탓 없이 일자리 빼앗긴 이들의 축 쳐진 어깨에, 보금자리를 빼앗긴 이들의 피맺힌 가슴에, 인간의 탐욕으로 짓뭉개진 이 산하에, 생명 평화 정의를 보듬으려는 우리의 작은 몸짓에 아기 예수님은 태어나십니다.
아기 예수님을 모시기 위해서, 우리는 사치스런 요람이 아니라 소박한 구유를 준비해야 합니다. 2000년 전 아기 예수님을 소중히 받아 모셨던 거친 구유는 오늘도 여전히 구유여야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