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ultural Logic of the Late Capitalist Museum
후기자본주의 미술관의 문화논리
by Rosalind Krauss in October, spring 1991 (special issue. High/Low: Art and Mass Culture)
이 글은 1991년 옥토버 특별호에 삽입된 크라우스의 논문이다. 1990년 모마는 <High/Low: Art and Mass Culture>라는 야심한 전시회를 기획하였다. 19세기 사진자료부터 20세기 고급미술에 차용된 대중미술, 키치의 소스를 취합하고 정리한 모마의 큐레이터, 커크 버나도(kirk Varnedoe)수고는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마의 "sublimation model", 즉 대중문화의 소재들이 미술가들의 작업에 의해서 고급미술로 다시 태어났다는 논지에 대해서 로잘린드 크라우스를 위시한 옥토버 필자들은 분명한 반대의 의사를 표현하고 싶었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91년 봄 옥토버는 모마 전시를 분명히 연상시키는, High and Low: Modern Art and Popular Culture라는 특별호를 기획하였다.
그러한 배경에서 크라우스는 80년대 이후 자본주의 논리에 잠식되어가는 미술관이, 90년 소더비 옥션에서 분명한 징후를 보였다고 우려하면서, 자본화된 미술관과 그에 영합하는 후기 미니멀리즘의 냉담하면서도 퇴행적인 성향을 비판한다.
두 개의 에피소드
*1983년 5월 1일 노동절, 파리 바스티유광장에서의 시위 회상. 미테랑 정부의 늦은 공약이행, 채무를 변상하라는 시위, 그러나 90년대 "casino capitalism"시기에 회상해보면 오히려 자본주의에 대한 순진한 발상
*1990년 7월 17일 큐레이터, 수잔 파제 Suzanne Pagé와 함께 파리 현대미술관의 Panza Collection 이탈리아계 Giuseppe Panza di Panza 부부의 컬렉션으로 2500여점에 달한다. 주로 1966에서 1975년 사이의 미니멀, 개념, 포스트 미니멀, 대지미술의 후원자였다. 판자 콜렉션은 1991년과 1992년 뉴욕의 솔로론 구겐하임에 350점을 팔렸고, 350여점은 대여 중이다. 작품을 판매하거나 전시회에 대여하는 과정에서 미니멀, 개념미술, 장소 특정적인 미술을 복제하는 경우가 발생하여 작품의 원본성에 관한 논쟁을 일으켰다.
관람
파리 현대미술관 Musée l'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의 전시실을 당당하게 점령한 판자 콜렉션 Panza collection은 ‘미니멀리즘’에 걸맞는 공간을 창출하기 위해 ‘미술관 벽’에서 다른 모든 것들을 몰아내었다. 큐레이터 수잔 파제 역시 이러한 반들거리는 중립적인 공간(burnished neutrality-white cube)이 댄 플레빈과 칼 안드레, 모리스의 작품의 설치를 위해 중요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점, ‘구체화되고 추상적인 통일체 reified and abstracted entity'로서의 현대 미술관 공간에 크라우스는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p.412
이 전시회 중 가장 하이라이트는 댄 플래빈의 작품이 설치된, 리모델링된 두 전시실이었다. 그러나 그 전시실에서 크라우스와 수잔파제가 실제 대면할 수 있었던 것은 플래빈의 작품이기 보다는 경계를 넘어선, 초월적인 미술관의 벽이었다. 그 곳에서 플래빈의 작품은 갤러리의 기하학적인 건축 형태를 틀잡는 ‘공업화된 후광industrialized haloes’으로서의 분명한 하나의 사인 sign으로 작용하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크라우스는 하나의 오브제로서 미술관의 텅비고 과장된 공간을 경험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볼 때, 이제 강력한 존재로 떠오른 것은 미술관 그 자체이며, 미술품들은 미술관에서 퇴출된 것 같다. 이러한 공간이 주는 효과는 매우 압도적이어서, 왜 최근에 회화작품들이 걸린 전시실을 보기 힘든지 자명하다. 미니멀 작품의 규모에 비교해 볼 때 과거의 회화나 조각이 설치된 전시실은, 골동품 상점처럼 문화적으로 한물간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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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우스는 이러한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미니멀화한 미술관 공간에 관심을 가지며, 왜 미술관이 이렇게 변화하는가 하는 문제에 천착한다. 그리고 그 핵심 키워드로 자본과 미니멀리즘의 결탁을 지적한다.
“후기 자본주의 미술관의 문화논리 cultural logic of the late capitalist museum”를 고찰하고자 할 때 이 두 장면은 나(크라우스)를 성가시게 하는데, 이 두 국면의 차이(과거의 미술관과 현재의 미니멀화한 화이트 큐브로서의 미술관)에 고리를 찾을 수 있다면 현재 미술관에서 벌어지는 작동논리(자본주의적인)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p. 413
1. 문화적인 자산가치에서 유통 가능한 자산으로 변화한 미술
1990년 Art in Ameirca 7월호에 실린 “처분되는 소장품Selling the Collection”에서는 미술관의 오브제들이 이사회 임원들에게 뿐 아니라 학예사들에게도 교환가능한 “자산 assets”으로 인식되고 있는 점에 대해 지적되어 있다 Philip Weiss, "Selling the Collection", Art in America, July 1990, pp. 124-131
.p.413 1986년 세법개편(기증미술품들에 대한 세금공제를 삭제)으로 야기된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위 아티클의 저자(Philip Wiss)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는 대부분 1980년대 ”자유시장 기조free-market spirit" 때문에 발생한 미술관의 위기이다. 공공자산 public patrimony 혹은 문화자산 cultural patrimony의 관리자라는 과거 미술관의 개념은 이제, 매우 시장성 있는 상품을 구비한, 성장을 지향하는 기업체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크라우스가 보기에) 이 아티클은 글의 말미에 이르러서야 문제가 되고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의 자산의 매각, 즉 단순히 작품을 사고파는 것 이상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최근의 세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고 있지만 1990년에는 뉴욕 소더비 경매에 참가한 주요 미국의 미술관들의 매각에 대한 논쟁이 일었다. 가장 심각한 예는 구겐하임의 경우로서 톰 크렌스는 미술관의 기업적인 경영의 대표주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구겐하임은 모딜리아니, 샤걀, 칸딘스키의 3작품을 처분하고는 폭등한 미술품 시세에 힘입어 판자 콜렉션의 상당부분과, 전시장의 확장을 위한 자금을 확보하였다. 이처럼 미술관의 확장과 현역 작가들의 작품을 구입하기 위해 옛 콜렉션을 처분하는 것은 미술관의 기능이 자본의 원리에 잠식당한 것으로 많은 논자들이 인식하고 있다. Pilip Weiss, 앞의 글
. 충분히 논점을 파고 들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Art in America 같은 호에는 "매각되는 소장품 Selling the Collection" 과 함께 또 다른 글 "Remaking Art History"가 실려 있다 Susan Hapgool, "Remaking Art History", Art in America, July 19990, pp. 115-123, 181
. 이 글은 비로소 최근의 활황을 맞은 미술 시장에서 배태된 특정 미술운동, 즉 미니멀리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글에 의하면, 미니멀리즘은 “산업화된 생산기술 technoloty of industrial producton”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과거의 미학적인 오리지널의 경계를 침범할 수 있는 복제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실제 여러 작가들의 계획은 수집가들에게 팔린 후에 공장에서 제작되었으며, 장소 특정적인 미술의 경우에도 뉴욕의 주류미술관에서의 전시를 위해 작가의 동의 없이 복제되었다. (미니멀 작품들의 복제는 작가들에 따라 입장을 달리하였다. 예를 들면 모리스나 저드의 경우는 반대하였으나, Alan Saret나 부르스 나우만의 경우는 별 문제가 없었다.) 이글의 저자(Susan Hapgood)는 결국 미니멀리즘의 이러한 복제가능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회화의 유일성의 미학esthetics of originality이 균열을 일으킨 것은 미니멀리즘 자체의 미학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그의 논지는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 확인된다. “우리가 미술작품의 유일무이함에 대한 기존의 입장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복제를 단순히 위조라고 생각한다면, 1960, 70년대의 핵심적인 작품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p.414
그러나 문제는 복제를 단행한 장본인들이 관객이나 미술가가 아니라, (Panza Collection의 예에서 보듯) 소유자들(개인 소장가나 미술관)이라는 사실이다. 이 글의 저자 역시 미술시장이나 “시장의 압력의 증가”에 대해서 이슈를 제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정은 뒤로 미루고 있다. 여기서 크라우스가 제기하고자 하는 논점은 미술을 “자산”으로 변화시키거나, 혹은 대량 생산기술을 통해 유일성의 미학을 재편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미술시장의 활동이라는 것이다.
2. 미술의 종말과 미술관의 변화 그리고 미니멀리즘의 등장
두 번째 고리는 토니 스미스의 회고와, 1990년 봄에 이루어졌던 구겐하임 관장 톰 크렌Tom Krens와의 인터뷰에서 발견된다.
토니 스미스는 1951-52년 경 뉴저지의 Turnpike를 밤에 차로 지나던 중 무한한 확장감을 경험하였는데, 그러한 경험을 통해 그는 이젤화의 “회화주의 pictorialism”를 버리고 미니멀 아트로 들어서는 동기를 발견했다고 했다고 회고한 바가 있다. "talking with Tony Smith: Conversation with Samuel Wastaff, Jr. (1966)" in Theories and Documents of Contemporary Art: A Source Book of Artists' Writings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토니 스미스의 “회화의 종말”이 동시에 개념적으로 미니멀리즘의 등장의 배경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p.416 1980년대 Tom Krens는 쾰른 외곽에서 공장을 개조한 미술관을 보고는 MASS MoCA를 기획하게 되었다고 회고하였다. 크라우스는, 90년 구겐하임 미술관 관장으로 미술관사업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였던, 문제의 크렌스와의 대화에서 그의 사업가적인 태도와 발상을 보았다. 크라우스가 특히 주목하는 점은 그가 새로운 사업으로서의 미술관 공간에 걸맞는 미술로 미니멀리즘의 담론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크렌스는 새롭게 변화될 미술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이제 ‘백과사전식 미술관 encyclopedic mature of the museum'은 끝이 났다. 미술관은 많은 현대 작가들 중에서 소수만을 엄선하여 그들에게 작품의 집적된 효과 cumulative compact를 체험할 수 있기에 충분한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그것은 통시적인 것 diachrony에서 공시적인 것 synchrony으로의 변화이며, 관객들에게 미술의 역사를 제공하는 차원을 넘어 극단적으로 공간적인 미학, 누적되고, 연속적이며, 점차 고조되는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크라우스에 의하면 크렌스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미술양식은 미니멀리즘인데, 공교롭게도 미니멀리즘은 회화주의와 회화주의 미술관의 종말과 그 시기를 함께 하게 되었다. 여기서 크라우스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같다. 왜 사업화한 미술관의 공간에 걸맞는 미술이 미니멀리즘이 된 것일까? 미니멀리즘의 미학의 어떠한 양태가 후기자본주의 미술관의 생리와 맞아떨어지게 된 것일까? p.. 416
미니멀리즘의 역설과 모순
미니멀리즘 미학에 분명한 내부적인 모순이 존재한다. 크렌스가 지적했던 것처럼 “현상학적인 의도 phenomenological ambition”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복제, 연재문화culture or seriality, 원본 없는 대량생산과 같은 딜레마가 공존한다.
먼저 문제삼을 수 있는 것은 미니멀리즘의 미학적 기반이다. 미니멀리즘은 작품과 관객이 이미 ‘고정된 완결체 fixed entity’로서 대면하게 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리차드 세라의 <House of Cards>는 시간이 지나면서 중력의 영향을 받는 과정의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로버트 모리스의 <L-Beams>은 관객의 지각영역 viewer's perceptual field에서 각기 다른 반응을 일으키는 세가지 경우로 제시되었다. 이러한 작품과 관객사이의 관계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오브제의 형태적인 완결성 formal wholeness이나 절대적인 작가의 권위 authorial absolute는 제거되어야 했다. 그렇다고 미니멀리즘이 작가의 죽음대신 전능한 독자 all-powerful reader를 생산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모리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오브제는 새로운 미학용어이다......관객은 이전보다도 훨씬 더, 다양한 배치와 다양한 빛의 조건과 공간의 문맥에 따라 그 사물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Robert Morris, "Notes on Sculpture", in G. Battcock, ed. Minimal Art (New York, Dutton, 1968)
미니멀리즘의 주체는 옛 데카르트적인 주체도 아니고, 전통적인 생물학적인 주체도 아니다. 그는 "스스로 관계를 형성하는 he himself establishing relationships 주체”이며(p. 417), "순간 순간 지각의 행위를 계속해 나가는 주체 moment-by-moment, in the act of perception"이다. 다시 말하면 미니멀리즘의 주체는 메를로퐁티가 다음과 같이 기술할 때 말했던 바로 그러한 주체이다.
“경험의 구조는 내가 전능한 신이 된 것처럼 내 면전에 정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는 시점에 따라 나에 의해 흔들린다(lived). 나는 관찰자가 아니며, 나는 관여자이다.” Maurice Merleau-Ponty, Phenomenology of Perception, trans. Colin Smith (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1962)
그가 말하는 것은 “신체에 의해 실제로 경험되는 지각 lived bodily perspective”으로 이러한 신체의 개입으로 인해 미니멀리즘은 추상회화의 절대적인 자율성 absolute auotnomy와 결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미니멀리즘의 현상학적인 주체의식에 대해서 크라우스는 다음과 같은 자신의 새로운 견해를 더한다. 즉 미니멀리즘이 재구성한 주체가 비록 과거의 이상화된 주체를 공격하고 있기는 하지만, 미니멀리즘은 모더니즘의 완결성보다 더 나아간 ‘유토피아적인 의도와 몸짓’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니멀리즘의 주체는 자신의 신체로 회귀했으며, 과거의 시각회화의 목표였던 얄팍한 자율적인 시각성 paper-thin layer of an autonomous visuality보다 오히려 더 풍부해진, 농집된 경험의 기층 richer, denser subsoil of experience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퇴행적 이동은 고도의 산업 문화환경에서 도구화된 존재로 살아가는, 그리하여 점차로 고립되고 전문화되어가는, ‘파편화된 주체의 경험’에 대한 보상이라도 볼 수 있을 것이다. p. 418
미니멀리즘은 이처럼 미디어와 같은 대중문화나 진부한 소비재들을 양상해내는 소비문화에 대한 저항으로 인식되어 왔음에도, 결국 그것이 후기자본주의의 생산을 가능케 하는 “복제 refabrication”의 문턱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생산의 방식 뿐만 아니라 재료와 형태의 선택, 연속적 구성방식에 있어서 미니멀리즘은 산업사회의 미술로서 기계화된 생산방식을 흉내 내고 있다. 미니멀리즘은 플랙시 글래스, 알루미늄, 스티로폼같은 것을 사용하여 나무나 석재와 같은 전통적인 재료를 밀어냈으며, 단순한 기하형태의 오브제들은 대량생산되기 편이한 형태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기업의 로고에 적합한 일반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전통적인 구성을 피하기 위해 채택한 연속적인 형태 serielity라는 것이 결국 소비자본주의에서 차이가 사멸된 소비재 commodity의 생산체계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원본에서 멀어진 오브재의 연속성이라는 점에서 시물라크라의 세계와 연결된다.
모더니즘과 자본주의
이제 우리가 던져야할 질문은, 상품화와 기계화에 저항하고자 했던 미술운동이 어떻게 이미 소비사회의 조건의 약호codes들을 다시 따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p.419
그러나 이러한 모순은 모더니즘의 역사 즉 자본주의 시대의 미술의 역사에서는 일반적인 현상일 뿐 아니라, 저항하든지, 따르든지 간에 이는 자본과 관련된 모더니스트 미술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더니즘에서 작동하는 자본의 논리 capital-logic를 추적하고 있는 프레드릭 제임슨 Fredric Jameson은 반 고흐의 예를 들고 있다. 그에 의하면 반 고흐는 남루한 농부의 세계를 오히려 매혹적인 색채의 표면으로 표현해낸다. 이러한 반전은 그에 의하면 유토피아적인 추구 Utopian gesture에 다름아니다. 반 고흐로 대변되는 현대미술에 있어서 (상실된 주체의) 보상행위는 결국 ‘시각 sight, the visual, the eye’이라는 최고의 감각중추 즉 새로운 이상적인 영역을 구축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것이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노동의 분업을 흉내내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본주의 전문화와 분업화를 재생산하는 새로운 감각중추의 파편 fragmentation을 생산한다.)
이러한 분석에서 드러나는 것은 "문화의 재조직 cultural reprogramming" 혹은 제임슨이 언급하였던 문화혁명의 논리이다. 즉 예술가들은 산업화와 소비화에 의해 야기된 악몽을 보상하기 위한 이상적인 대안을 창안하고자 하지만, 그들은 결국 더욱 진행된 차원의 자본이 관여된, 다음 단계의 자본주의로 이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Fredric Jameson, "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 New Left Review, no. 146 (july-august 1984)
그러한 예를 우리는 낙후된 구시가에 불쑥 솟아 강력한 미래의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였던 건축가 Le Corbusier의 unités d'habition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p.420 르 코르뷔지에의 재건축물은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지향했지만,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다양한 문화의 패턴으로 조직되어 있던 구 도시를 파괴하고, 교외로 뻗어나가는 문화의 익명성과 쇼핑센터와 같은 동질성(획일성)에 자리를 내어주는 결과를 맞게 되었다.
미니멀리즘 역시 언제나 그러한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어서 ‘특별한 오브제’는 소비재의 생산논리에 발목 잡히고, ‘미니멀리즘 주체’는 고도의 ‘파편화된 포스트모던 주체’로 변절될 수 있는 것이다. 크라우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파리의 판자 콜렉션에서 대면한 것은 1960년대 미니멀리즘이 주장하였던 것과 같은 "신체의 직접성에 의해 변화하는 주체the subject of lived bodily immediacy"가 아니라 1980년대 후반 포스트모더니즘의 엄청난 사인들과 시물라크라에 파묻힌 "분산된 주체dispersed subject"였다는 것이다.
60년대와 70년대 초반 미니멀리즘의 주변부에 있었던 James Turrell이 1980년대 후반 재편된 미니멀리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이러한 “초공간 hyperspace”에 대해서 “병적인 숭고 the hysterical sublime”라고 불렀다 .p.422 이러한 미니멀 공간에서 과거의 주체는 억압되고, 감동은 스러지는 대신 "장식적인 쾌감", "비인격화된 병적쾌감 imposonal euphoria"이 그것을 대신하였다. 이제 수정된 미니멀리즘은 분절되고 기계화한 새 주체들을 생산하고, 아찔한 ‘초공간’으로서 미술관을 경험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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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ling the Collecton"의 저자는 구겐하임 미술관의 매각이 미술관을 재구성하려는 전략의 일부이며, 크렌스는 미니멀리즘의 달라진 미학적 “담화discourse”에서 이러한 전략들을 구상하고 정당화하였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이제 우리는 질문하고자 하는 것은 미니멀리즘이 이렇게 달라진 미술관 공간에서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점이다.
포스트모던 문화 비평가들이 언급하는 것 중에 하나는 “공업생산시기 era of industrial procuction”에서 "소비사회comsumer society 혹은 정보 미디어 사회"로의 전환기에, 자본은 아직 그 한계를 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후기공업생산 사회 postindustrial society” 나 혹은 “후기이념 시기 postideological era"에 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p 423. 막시스트 경제학자 Ernest Mandel에 의하면 후기자본주의 보다는, 과거의 일용품 생산과 같은 방식이 사회체제의 전 부분에 스며있다.”
후기 자본주의의 특징은 미처 투자되지 못한 과잉자본noninvested surplus capital"은 교역과 신용을 통해 산업의 확장을 꽤하세 된다. 이러한 “미처 투자되지 못한 독점자본”은 바로 미술관들이 토지와 미술품을 점유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설명해 주는 열쇠이다. 톰 크렌스는 미술관 운영을 “합병” “인수”, 혹은 “자산관리”가 필요한 “매우 자본화된” “사업 museum industry"이라 여겼다. 그리고 미술관은 이러한 시스템에 맞게 기업화해야 했다. 그 방법은 첫째는 자산을 늘리는 것(판자 콜렉션을 들여오는 것), 둘째 상품을 팔기 위한 매장을 확장하는 것(베니스와 잘츠부르그의 전시장), 콜렉션의 대여와 같은 기법이었다. 그리하여 이렇게 산업화된 미술관은 디즈니랜드와 같은 레저산업과 공통분모를 지닌다.
미술관이 미니멀리즘으로 귀환하였던 것은 그것이 미술관의 변화에 적합한 미학적인 원리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산업화한 미술관은 기계화된 주체를 요구하였고, 이러한 주체는 또한 더 이상 역사가 아닌, 공간 그 자체의 경험을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