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5일(금)
* 시작 기도
주님...
주님은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만민을 판결하십니다.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는데 주께서 그들의 요새가 되시기 때문입니다(시 9:1, 3).
주님을 아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주를 아는 것이 바로 주님의 뜻인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미련한 자는 주님의 뜻을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 힘쓰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이 땅에서의 삶에 천착하며 그 삶만 잘 되면 최고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렇게 이 세상 곧 만물 안에 있는 것에 마음을 쏟을 때 나의 삶은 혼란스러웠고 혼탁해졌습니다.
어느 것 하나 정돈 된 것 없이 뒤죽박죽이었습니다.
내 뜻대로 잘 되어 가면 기분이 좋았으나 삶이 흔들리면 온갖 상념에 빠져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임을 나는 미처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때 주님께서는 복음을 듣게 하셨고 이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만물 안에 있는 것 아니라 영생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인 영생으로 인하여 주님과의 교제를 이어갑니다.
이 말씀으로의 교제가 나의 의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주님과의 영생의 현재성이 되게 하소서.
나는 부족하여 끊임없이 자아성취에 매몰 되어 있으나 그것은 내가 하나님처럼 되려는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임을 입증하는 것이오니 오늘도 이런 나의 옛 사람과 나의 의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이렇게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사는 이 하루가 되게 하소서.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아내길 원합니다.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전투구식의 진흙탕 싸움이 지속되고 있는 여야의 정당들이 자기들의 속내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기에 영합하는 우를 범하지 않게 하시고 진정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선량들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왕상 2:1-12
제목 :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1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2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3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4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들이 그들의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
5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그가 그들을 죽여 태평 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를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6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의 백발이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7 마땅히 길르앗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그들이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여하게 하라. 내가 네 형 압살롬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그들이 내게 나왔느니라.
8 바후림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너와 함께 있나니 그는 내가 마하나임으로 갈 때에 악독한 말로 나를 저주하였느니라. 그러나 그가 요단에 내려와서 나를 영접하므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내가 칼로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였노라.
9 그러나 그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지어다. 너는 지혜 있는 사람이므로 그에게 행할 일을 알지니 그의 백발이 피 가운데 스올에 내려가게 하라.
10 다윗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워 다윗 성에 장사되니
11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40년이라. 헤브론에서 7년 동안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33년 동안 다스렸더라.
12 솔로몬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왕위에 앉으니 그의 나라가 심히 견고하니라.
* 나의 묵상
다윗의 넷째 아들 아도니야는 실질적인 장자가 되어 다윗 왕의 분부를 듣지도 않은 채 자기 스스로 왕이 되려고 모반을 계획하였다.
이에 다윗의 군대장관이었던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을 자기 신복으로 삼아 그들과 함께 모의하여 왕의 대관식을 진행한다.
이 일을 알게 된 나단 선지자는 다윗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다윗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했던 솔로몬을 다윗을 이어 왕위에 앉힐 것을 청원한다.
그 약속을 기억한 다윗은 자신의 신복들에게 왕의 명령을 내린다.
솔로몬을 자기의 노새에 태우고 기혼으로 가서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선포하도록 한다.
그렇게 다윗을 이어서 왕이 된 솔로몬은 왕권 찬탈을 시도했던 아도니야가 제단 뿔을 붙잡고 있을 때 그를 부른다.
그리고 집으로 돌려보낸다.
한편 다윗이 노쇠하여 죽을 때가 되자 솔로몬을 불러 여호와의 이름으로 명한다.
자기는 이제 죽게 되었으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켜서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잘 지킬 것을 당부한다.
그렇게 하면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형통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그는 다시 한 번 솔로몬에게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쉐마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면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자를 네게서 끊어지지 않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이룰 것이라고 전한다.
그리고 요압에 대하여는 그가 두 사령관 곧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였기 때문에 너의 지혜로 행하여 그가 평안히 죽음으로 가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게라의 아들 시므이에 대해서는 비록 그가 나를 저주하였지만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에 나를 영접하여 그를 칼로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렇다고 그에게 죄가 없는 것이 아니므로 너의 지혜로 그에게 행하여 그를 단죄할 것을 명한다.
하지만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는 은총을 베풀어서 그들이 왕의 식탁에서 함께 먹을 수 있도록 당부한다.
바르실래는 압살롬을 피하여 다윗이 도망할 때에 그를 극진히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윗은 죽어 다윗 성에 장사되었다.
그가 왕이 되어 헤브론에서 7년, 예루살렘에서 33년, 총 40년을 다스리고 죽었다.
솔로몬은 다윗의 왕위에 앉아 다스렸는데 그의 나라가 아주 견고히 세워져갔다.
다윗 왕은 솔로몬에게 유언을 하면서 형통을 언급한다(3절).
그가 형통할 수 있는 근거는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모세에게 주신 율법에 기록된 대로 잘 지키는 것이다.
그러면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형통할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다윗이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한 말이다.
일반적으로 형통이란 나의 소원과 뜻이 내가 원하는 대로 잘 이루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이런 형통이 모든 일에서 잘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차원에서 ‘만사형통’이라는 말도 나온 것이다.
형통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사실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다 잘 풀리고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정욕과 탐심의 극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아성취와 자아실현을 위하여 달리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나의 종처럼 부려먹기도 한다.
아니 내가 아예 하나님처럼 되고자 아담처럼 제2 제3의 아담이 되어 신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신다.
(요 10:34-3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너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이 말씀은 시편 82:6절에 기록된 말씀을 주님께서 인용하신 것이다.
(시 82:6-7)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아담과 같이 선악과를 따먹으며 사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히브리어로 ‘무트 타무트’인데 다시 말하면 너는 ‘죽고 또 죽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렇게 신이 된 자들이 7절에서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게 살아서 이 땅에서 형통한다 한들 그것이 과연 그들에게 어떤 유익이 되겠는가?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인데 말이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여전히 행하시는 일은 성전이요 교회 그 자체인 내가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삶, 아니 하나님을 내 종처럼 부리면서 사는 자라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위에서 상위권위가 되어 군림하고 있음을 폭로시키신다.
내가 있을 자리는 죽은 흙의 자리인데 내가 하나님보다 더 높아져서 하나님을 종으로 부리는 나야말로 무트 타무트 되어야 할 자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요셉에게 형통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신다.
(창 39:2-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형통이란 내 뜻을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곧 형통임을 천명하신다.
그리고 그 형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인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가신다.
나는 형통을 완전히 오해한 자였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루어주시는 줄로 알았다.
그것이 형통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완전히 헛 다리만 짚었다.
내가 아무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에 순종한다 할지라도 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나는 예전에 미처 몰랐었다.
이런 개념과 사상은 지극히 도덕 윤리적이며 종교라는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은 자기들의 열심과 치성을 통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는 절대 그런 종교가 아니다.
무엇보다 아무리 우리가 열심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지라도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그 말씀을 다 순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가 다 죄인이요 죽은 흙이며 배설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자기의 의로 열심을 내면 낼수록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날 뿐이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가 이어진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진노와 분노는 우리를 진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한 징계이다.
그 징계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믿고 수용할 때 그 안에서 나도 알지 못하는 평강을 얻게 된다.
그렇게 얻은 평강이야 말로 이 세상이 주는 어떠한 만족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은혜이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형통은 내 안에서 나와 함께 하시며 주시는 평강이다.
오늘도 그 평강으로 주의 이름을 높이는 형통의 삶을 살아간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형통을 오해했던 자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도 못한 채 나 중심적으로 사고하고 나 중심적으로 살아왔던 죄인 중에 괴수가 바로 나입니다.
그런 나를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공의로 심판하셔서 다시 주님 품에 안아주셨으니 그 크신 은혜 앞에서 내가 뭐라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저 두 손으로 입을 가릴 뿐입니다.
욥의 고백과 같이 내가 티끌과 재 가운데서 내게 주신 징계를 받아들이며 회개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그리하여 세상적인 형통에 매몰되지 않고 오직 주님의 뜻을 이루는 하늘의 형통으로 다시 서기를 원합니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오직 우리 주님을 믿는 믿음이 바르게 설 수 있게 하옵소서.
부족한 이 종을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