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화시모음 4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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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월의 아픔
김영화
아이들은 늘
이별을 슬퍼하며 운다
다시 만나니 슬퍼하지 말라 하면
눈치만 힐끔힐끔 보던 아이마저
슬픔을 만끽한다.
그 투명한 늪에 빠진 나는
그대로 투명한 별이 되어
하늘을 난다.
3월!
또다시 그리움으로
아이들을 안으려 달려가면
아이들은
이미 오래전 익힌 망각의 솜씨로
눈을 가늘게 뜨며 낯설게 도망간다.
뚜벅뚜벅 다가오는
3월의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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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5월 분노의 하늘아래
김영화
바보인 당신!
새벽 미명에
남의 집에 허락도 안 받고 들어 온 손님들이
온 집안을 쓰레기통 뒤지듯 파헤치는데
그 옆에 순순히 앉아서,
순진한건가요?
내가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
조국의 부름도 아닌데
그렇게 순순히 끌려가시다니…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는 나에게
아무 죄도 없이 떳떳하다고요?
조사만 받고 금방 돌아올 테니
걱정 말고 있으라고요?
마음이 저려 옵니다.
그러나,
포로된 나라에서 감옥에 갇힌 다니엘은
열린 창문을 향하여 하루 세 번씩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며
큰 소리로 기도 했대요.
사방이 막혀 흑암에 쌓여 있지만
하늘문은 열렸으니까요.
마침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을 머리털하나 건드리지 않고 살려 주셨잖
아요?
당신!
우리의 억울함을 주님은 아십니다.
고통도 기쁨도 다 지나가는 것이라면
그 믿음 하나로 아직껏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누가 당신께 돌을 던져도
누가 당신을 짓밟으려해도
들풀처럼 견디십시오.
오월의 항쟁이 귓가에 마구 외쳐대는
분노의 하늘아래
혹독한 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파아란 싹을 틔워낸 저 오월의 나무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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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을 마이산의 아침
김영화
청아한 새소리에 잠을 깬다
밤새 내린 낙엽 비 탓일까?
오색단풍 속옷마저 벗어버린 나무들이
부끄러운 듯
아침안개를 홑이불 삼아
눈부신 나신을 감춘다.
그리고
아주 오랜 동안 그래왔듯
허겁지겁 달려오면서
숲 속 다람쥐도 못 보고
반짝이는 강물도 못보고
아름다운 여인이 춤추는 발을
바라볼 틈이 없었음에
잠시
깊은 사색에 빠져본다.
벌써 해가 중천에 솟았나보다.
짖궂은 만추의 햇살이
기어코 아침안개를 걷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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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을 사랑
김영화
종종
아파트 놀이터 단풍나무 아래 벤치에
깨끗한 노부부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본다
들은 바로는
몇 년 전에 나이 마흔에 가까운 아들을
교통사고로 먼저 보낸 뒤
이곳으로 이사 와서 사신다고 한다
스칠 때마다 가슴이 아프지만
여태까지 나는 그분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언젠가 슬며시 눈인사를 건넸다가
노부부의 너무 맑은 눈동자에
내가 그만 주눅이 들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절절하게 슬픔을 참아내야
그 슬픔이 저렇게 투명해 질 수 있을까?
어떤 마음으로 서로 보둠어 달래주어야
저렇듯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빨간 단풍나무 잎이
가을햇살에 더욱 투명하다
노부부의 사랑처럼
가을도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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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을 산을 내려오며
김영화
해질 녘, 하산 길은
오랜 산의 오름으로 인해
신께 경배하지 못한
화해의 시간이다.
모든 창조의 영혼으로부터
자유하는
평화의 시간이다
밤새도록 살아있을
빛의 아름다움을 보는
자비의 시간이다.
고요한 황무지 너머 더욱 고요한
바다의 침묵을 건너다보는
겸손의 시간이다.
분노의 늪에서 꿈틀거리는
카인을 잠재우는
용서의 시간이다
가을, 하산 길은
또 다른 산행을 준비하는
희망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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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가을이 맺히다
김영화
이슬
눈물
한
열매
가을은
살아온 시간과 화해하는
그리스도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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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간병일기(4)
-임종-
홀로 남겨진
안타까운 세월이
너무 길까 걱정했습니다 .
흰옷을 입혀라.
그러나
운명을 거부하고싶은 이별이
이토록 빨리
현실로 다가올 줄 몰랐습니다.
......
......
힘들게 유언하려 하지 마세요
질펀하게 풀어놓을 가난의 기억도
죽도록 미워했던 형제의 기억도
다
사랑할게요
세상의 완성 위에
마침표로 가시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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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고맙다 코로나19
김영화
엄마,
온종일 밥을 못 먹었어.
눈에 치킨이 아른거려
이 코로나 정말 지겹네요
통장에 모든 수입 칸이 막힌 지 오래여요
오랜만에
사업하는 아들에게서
온종일 굶었다는
그래서 만 원짜리 치킨이
눈에 아른거린다는 전화를 받은 어미는
손에 힘이 풀리고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듯
눈앞이 흐려졌다.
그리고
어느새 내 손은 폰뱅킹으로 가 있었다.
아들아
엄마도 여유가 없어 크게 보태주진 못하지만
우선 밥은 먹어라
엄마,
고마워요.
치킨 안 사 먹고 라면 사다 끓여 먹었어요
그래, 너만 힘든 게 아니니 우리 모두 잘 견뎌보자꾸나.
당분간 집에 와 있으면 엄마가 밥걱정은 안 할 텐데….
그리고 며칠 후
사랑하는 아들은
집에 내려와 일주일을 있으면서
대학 졸업 후 참으로 오랜만에
일주일 동안 따스운 엄마 밥을 먹고 갔다
하마터면 나만 배부르게 먹을 뻔했다.
고맙다, 코로나19!
힘내라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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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광야에서 1
김영화
얼어붙은 차가운 시맨트 바닥에서
하얀 맨발로 춤을 추네
저 여인, 미쳤나?
저기 광야에 서서 떨고 있는
저 남자도
시커먼 맨발이네?
이 추위에, 어쩌나?
빙글빙글
사뿐사뿐
춤추는 여인 곁으로
엉거주춤
춤사위를 하며 파고드네
낮아짐으로
고독함으로
울고있는 여인 곁에
웃고있는 저 남자.
광야에서 손을 잡고
춤을 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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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광야에서 2
김영화
오후 네 시에 춤추기로 한 날
아침부터 비가 세차게 내린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춤은 추어야한다는 약속아닌 명령이다
그것도 광야에서
빗줄기는 전혀 잦아들지 않고
어디선가 우산을 받은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든다
그것도 이 빗속으로
명령처럼 음악이 흘러나온다
아, 이것은 차라리 선전포고다
우리는 지체없이 하얀 날개옷을 무기처럼 치켜들고
빗속을 뚫고 전진한다
저 광야속으로
물이 흥건히 고인 바닥에 꿇어 엎드려 절한다
일어나 빙글빙글 돈다
꽃이 되었다가 새가 되기도 하고
산이 되었다가 골짜기가 되기도 한다
대낮부터 술에 취한 한 남자
춤꾼들 속으로 파고 들어
나름대로 음악에 맞춰 비틀비틀 춤을 춘다
그 누구도 정제되지 않은 저 춤사위를 제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찬 빗줄기 사이로
흑백이 하나 되어 살랑거린다
누가 저들을 이 장대빗속에 광야로 내보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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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광야에서 3
김영화
오후 네시에 춤추기로 한 날
아침부터 비가 세차게 내린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춤은 추어야한다는 약속아닌 명령이다
광야에서!
빗줄기는 전혀 잦아들지 않고
어디선가 우산을 받은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든다
이 빗속에 무슨 먹앗감이 있나?
명령처럼 음악이 흘러나온다
아, 이것은 차라리 선전포고다
지체없이 하얀 날개옷을 무기처럼 치켜들고
빗속을 뚫고 광야로 전진하는 저 무리들
물이 흥건히 고인 바닥에 꿇어 엎드려 절한다
일어나 빙글빙글 돈다
꽃이 되었다가 새가 되기도 하고
산이 되었다가 골짜기가 되기도 한다
대낮부터 술에 취한 한 남자
춤꾼들 속으로 파고 들어
나름대로 음악에 맞춰 비틀비틀 춤을 춘다
그 누구도 정제되지 않은 저 츔사위를 제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찬 빗줄기사이로
흑백이 하나 되어 살랑거린다
누가 저들을 이 장대빗속에 광야로 내보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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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
김영화
2등도 안돼.
내가 아니면 안돼
안전 불감증 환자처럼 가속 페달을 밟아대며
풀 섶에 이슬방울도
잔잔히 피어있는 들국화도
바라다 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별빛 쏟아지는 용담호수를 바라다볼 마음도,
그리고
덧없는 세월을 아쉬워하며
포효하듯 울부짖는 한 여인을
안아줄 여유도 없는
가난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
세모마음이든 네모얼굴이든
변덕스럽지 않은 진실함
힘겨운 시련이 닥치더라도
쉽게 좌절하지 않고 견디어내는 참을성
나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미냐며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심으려는
늘 푸른 소나무 같이 한결같은 그대를 사랑합니다.
의리를 배신한 친구보다는
공동의 선을 선택한 선배를 따르겠다며
고통도, 아픔도 함께 하다
골목길 후미진 곳에 숨어
아무도 모르게 눈물 흘리던
한 청년의 가을 들녘처럼 겸손한 마음을 사랑합니다.
미망의 운명이 하 기구한데
정부보조금으로 살게 해준 은혜가 감사하여
허리에 디스크밴드를 동여맨 채
앞치마를 입고 봉사의 현장을 찾는
머리가 허연 할머니의 수수한 마음을 사랑합니다.
신은 모든 곳에 계실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고 했던가?
장갑 없는 맨손에 겨울바람이 스치고
버스를 기다리는 승강장엔
고된 삶의 무게만큼
두고 온 자식들을 깊이 사랑하는 어머니
사랑의 심지를 깊이 묻어둔
등불처럼 따뜻한 그 여인의 마음을 사랑합니다.
“선생님은 글씨 안 쓰니까 좋겠다.”고 투덜거리고
“‘어머나’같은 노래는 어린이가 부르는 노래가 아니다”
“그래도 나는 좋은데요?”하며
하루 종일 흥얼거리는
초등학교 1학년 우리 반 아이들의
첫눈처럼 순결한 마음을 사랑합니다.
누구나 결국 이 세상을 떠나게 되지만
‘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이라는 걸 믿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는 것 같아
외롭지 않은 새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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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리운 아버지
김영화
불효막심하게도
홀로 남겨진
안타까운 세월이
너무 길까 걱정했습니다
.
희-인 오-옷을 입혀라
그러나,
운명을 거부하고 싶은 이별이
이토록 빨리
현실로 다가올 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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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힘들게 유언하려 하지 마세요
질펀하게 풀어놓을 가난의 추억도
죽도록 미워했던 형제의 아픔도
다
사랑할게요.
세상의 완성위에
마침표로 가신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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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그리운 아버지
김영화
어느 여성합창대회 날
그리운 아버지, 당신을 뵈었어요.
퇴직교사들이
당신들의 살아온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손풍금을 가슴에 안고도
봄날의 향기에 흠뻑 취한 뻐꾸기처럼
바알갛게 상기된 얼굴로
날아갈 듯 은빛 청춘을 노래하던 그 모습
바로
생전의 아버지, 당신이었어요
세상의 완성 위에
마침표가 되는 인간
그리운 아버지. 당신 모습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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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금식을 하며
김영화
아침 햇살에 굳게 빗장 걸린
마음 문을 들여다보니
내 눈이 근심으로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인하여 이글거린다.
탐욕에 배부른 저 항아리
냄새나는 강과 산이
그 속에 기어 들어가
병든 짐승처럼 헐떡인다.
피 흘림을 심문하는 간절함이여
부끄러워 빗장 걸고 숨었더니
그리하여
뱃속에 가득 들어찬 것들
다 토해내는구나.
숲도 절벽도
구름 위로 날아가는 새도
물도 섬도 지나가는 배도 들어내어
내 모든 원수가
내 발 아래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니
이윽고
흉악의 결박을 풀고
심히 떨며 홀연히 물러가는 도다.
아, 영혼의 자유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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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기다리는 마음
김영화
초승달의 설레임을
숙우에 부어놓고
티 없는 고독의 기다림을 즐긴다.
눈가에서 시작한
그리움의 미소가
입술로 번지는 것조차 성급함일까?
어둠은
그의 무게만큼이나 큰 발로
하얀 별들을 떨어뜨린다.
마지막 고요 한 조각마저
청자빛 다관에 부어놓고
흔들리는 은총의 홍포를
두 손으로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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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기도
김영화
채찍처럼 살속을 파고들어도
나 휘날리는 눈 사랑했다고
모든 아름다운 걸 사랑했다고
그 아픔을
기쁘고 착한 미소로 받아들이려고 애썼다고 했던
어느 시인의 기도처럼
나 죽어갈 때 말할 수 있게 해주소서
나
비가 오면 옷이 젖을까
다가가지 못하고
버림받을까봐
사랑하지 못하고
가시에 찔릴까봐
안아주지 못하고
상처받을까봐
용서하지 못하고
그렇게
어영부영 살다가
눈감지 않게 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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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길 그리고 길
김영화
위선
사람들은
가난하다고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한다
가난하다고 하지나 말지
사람들은
부자들을 욕하고 미워하면서
부자가 되려고 바둥거린다
욕이나 말지
나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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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꽃둥이 탄생
김영화
온누리에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새해,
그리고
그 설레임으로 아직도 들썩거리는 초여드레 날
가난한 부부의 손을 꼭 잡고
우리곁에 온 어화둥둥 꽃둥아!
너는 이억만리 머나먼 타국에서
엄마의 용기라는 배를 타고
꽃잎처럼 둥둥 떠내려 왔지
도톰한 이마는 사랑스런 에미를 닮았구나
오똑한 코는 씩씩한 애비를 닮았구나
그렇게 지혜롭게
그렇게 씩씩하게 자라서
축복의 통로가 되고
인류의 등불이 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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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나 = 당신
김영화
이리 와요.
아무도 몰래
담장아래서 울고 있는 그대
어젯밤, 나도
얼굴 없는 목소리가 비수되어
내 가슴을 난도질하는 바람에
억울함에 한 잠도 못 잤다오.
그대 눈에는
내가,
감미로운 낭만으로
자신감에 가득 찬
당당한 멋쟁이로 보일지 몰라도
속지 마세요,
그대.
나는 다만 가면을 쓰고 있을 뿐
나도 그대처럼, 늘
외롭고
슬프고
방황하고
놀라고
그리고 추운 사람이라오.
하여, 나는 두렵다오
그대가 날 안아주지 않을까봐.
그대가 가장 잘 아는 사람
나는 곧 울고 있는 당신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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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나무처럼
김영화
새벽에
건지산 능선을 타고 헉헉대며 오르면
어서와. 잠시 쉬었다 가.
하늘을 찌르듯
거침없이 뻗은 편백숲이 사랑으로 맞이한다
언제, 누가 숲을 만들었을까?
마치 열병하듯 줄 맞추어 서있는 왕의 근위대들이다
얼마나 많은 세월동안
묵묵히 풍파를 견디었을까?
지상으로 얼기설기 튀어나온 뿌리가 안쓰럽다 못해 아름답다
저 앞에서 환자복을 입은 갸녀린 노인이
생명처럼 나무의 날숨을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천천히 걷는다
있어야할 자리에서
겸허히 세상을 껴안아주는 나무!
지친 영혼들에게 한 그루 나무가 되고 싶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달이 걸리고 해가 뜨는 나무는
오직 신만이 지을 수 있는 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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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누가 시를 읽는가?
김영화
연인과 함께 폭설에 갇혀
오오 눈부신 고립을 찬미한 ‘한계령을 위한 연가’를
남편과 죽도록 싸우고 온 그녀가
이게 말이나 되는겨? 하면서도
능숙하게 낭송한다
“밭에서 고추나 따지, 시는 무슨 놈의 시여?”
시어머니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뛰쳐나온
까칠한 며느리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를
능청스레 연기한다
가을밤, 눈빛 한번 부딪힘으로 시작되어
형체를 알 수 없는 상태로 머물다간 슬픈 사랑을
남편을 먼저 천국 보낸 미망인이
화석처럼 읇조린다
그녀는
늘 ~
작업복을 벗지도 못한 채 허기진 모습으로 나타나
꼭 목마를 닮은 숙녀처럼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난 사랑을
쉼표 없이 읽어나간다
꿈 많던 소녀시대를 상기하듯
눈을 지긋이 감고
칠순을 지나 팔순을 바라다 본
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반듯한 할머니가
‘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라고
또랑또랑 외치신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너그들이 외로움이 뭔지나 알아?
머나먼 타국에서 지긋지긋한 외로움으로
수백 날을 보낸 그녀가 수선화처럼 속삭인다
나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그것도 팔 남매의 맏며느리였어
나의 살아온 삶이 곧 슬픈 노래여
그녀는 외줄 타기 삐에로 처럼
늘 화려한 외출이다
그녀의 낭송은 차라리 절규하는 외침이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물이 되어 흐르자며
남편의 출퇴근 시간이 정확하지 않아
늘 혼자였던 그녀가
애교 있는 편지로 전송한다
그녀,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통받는 이웃을 위하여
입으로만은 부족해
새처럼 훨훨 온몸으로 노래하며 날아간다
누가 시를 읽는가?
질문하는, 살아 있는 존재가 읽는다.
살아 있겠다고 선언하는 존재들이 읽는다.
비록 땅에 살지만
별에 살고 싶은 하늘바라기들이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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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담장 밖의 이야기
김영화
전주 태조로를 휘돌아 올라가 본
동산에 뜬 음력 칠월 열여드레 달은
아직 휘영청 밝았어요.
우리 아줌마 셋은
굽이굽이 도심 속을 흐르는 실개천을 따라 걸으며
화석처럼 굳어버린 사랑 이야기를 꺼내어
서로의 가슴과 가슴으로 보듬었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듯
첼로의 선율을 따라 빨려 들어간
어느 고즈넉한 산사 같은 찻집에선
잃어버린 옛사랑의 향기를 맡듯
흠
흠
……
우린 시공을 잠시 잃어버렸어요.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리는 기우는 달그 림자가 아쉬어
덕진 연못으로 달려갔어요.
연잎사이에 꽃송이가 보일 때마다
뽀뽀한 번 하자고 했다며
남편과의 아름다운 추억을 부끄럼 없이 끄집어내는
귀여운 아줌마의 닭살 섞인 너스레가
초가을 저녁
연못에 뜬 달처럼 외로워 보인 이유는 어인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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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더욱 낮은 곳으로
김영화
당신!
몇 장 남지 않은 캘린더가
더욱 더 내 마음을 바쁘게 합니다.
인생은 아쉬움의 연속이라고 했던가요?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 왔건만
문득문득 뒤돌아 볼 때마다
진한 아쉬움에 조용히 한숨 집니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어느새 10월이 우리 앞에 와 있습니다.
봄에 피어나 한여름을 보냈던 나뭇잎들도
이제는 조용히 이별을 준비하고
여름내 땀 흘린 농부의 마음을 담아
들녘도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습니다.
진정 풍성한 가을이 우리 앞에 와 있건만
흐르는 세월 앞에 무기력한 우리의 마음은
뻥 뚫린 가슴만큼이나 허해집니다.
마지막에 피는 꽃의 향기가 더 진하다고 합니다.
낮은 곳으로 임하셔서
죄인들의 낙엽이 되신 예수님처럼
가을, 나뭇잎들도 단풍으로 마지막의 아름다움을 뿜어내지요
지금 우리의 9월이
지금 우리의 10월이
9월을 보내는 나뭇잎처럼
마지막 아름다운 모습으로 땅을 덮고
그 땅을 기름지게 하는 겸손한 낙엽이 되어야하겠지요
9월은
가는 시간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가는 세월과 친해지라고 합니다.
☆★☆★☆★☆★☆★☆★☆★☆★☆★☆★☆★☆★
《25》
따뜻한 편지
-사랑하는 엄마께
김영화
엄마!
TV에 손 모델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나왔는데
희고
손가락이 가느다란 그녀는
손가락마다 예쁜 반지를 끼고
손톱엔 반짝거리는 돌기 매니큐어를 얹어놓고
그 고운 손을 간직하기 위해
집안 일은 모두 남편이 도맡아 하고
손에 행여 상처가 날까 봐
손을 상전처럼 모시고 산다고 자랑하네
내 손은 검고 손가락 마디가 굵어
거기다
흉터도 있는 거 기억하시나요?
엄마,
나의 고향이신 엄마!
그 날도 마을 앞 냇물을 건너 비탈진 산으로
삭정이를 꺾으러 가셨지.
눈 덮인 산길에서 몇 번이나
쭈르륵 쭈르륵
미끄러지면서
삭풍은 가지 끝에 부는데
서툰 낫질을 허공에 휘둘러도
나뭇단은 불어나지 않았어.
어린 내가 작은 삭정 나무 한 개라도 보태려다 그만…
힘든 세상을 살면서 엄마를 생각나게 해준 그 흉터
세월이 흘러
흉터가 흐릿해질수록 엄마의 모습도 희미해져
슬프지만
엄마,
엄마의 주름진 손처럼
저도
희고 고운 손이 아니어서 자랑스러워요.
이 흉터 있는 투박한 손으로
얼마나 많은 지친 사람들을 안아줬는지 아시잖아요?
☆★☆★☆★☆★☆★☆★☆★☆★☆★☆★☆★☆★
《26》
마이산에서
김영화
힘들더라
마이산 오르는 길
마음 한 번 비우듯
돌 한 개 쌓던 영혼인가?
헉헉대는 하늘 아래
가볍더라
호롱호롱 산 새 한 마리
왼 손 모르게
오른 손이 지은 죄
저 돌탑만큼 많아
새가 되고 싶지만
내 몸은 너무 무거워
오른손 알게
왼손이 지은 죄
저 봉우리만큼 높아
나는 새가 될 수 없다
☆★☆★☆★☆★☆★☆★☆★☆★☆★☆★☆★☆★
《27》
방치된 기쁨
김영화
마당 한켠 두엄자리에
저절로 돋아난 호박 새싹을
비탈진 울타리에 대충 옮겨 심었지
살거나 말거나
어느 날
온갖 잡초들의 전쟁이 한창일즈음
노랗고 펑퍼짐한 꽃이
평화를 선언하대?
그러거나 말거나
평화는 사랑이야
작고 앙증맞은 열매를 매달고
세찬 빗줄기와 바람 부는 벌판에서
꿋꿋이 지켜낸 모성
싸우거나 말거나
소리내어 울 명분도 없다
오직 숨어서
누렇게 익어갈 뿐
살거나 말거나
그러거나 말거나
헐벗고 약한자의 간절함
그러나
평화의 나눔
가진자의 오만함
아, 방치된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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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백두산을 오르며
김영화
멀리 차창 밖으로 보이는
마치 흰 눈이 내린 듯
하얀 자작나무 나뭇가지들
하늘로 곧게 뻗은 미끈한 흰 나무들이
고개를 들어야 저만큼
작은 이파리들이 보인다.
뒤돌아볼 여유도 없이
사냥꾼에게 쫒기는 사슴처럼
숨 가쁘게 달려온
지난 세월을 비웃기나 하듯
땅위의 나무들은 미동도 없는데
가지 끝 푸른 이파리들만
저희들끼리 바람에 재잘거린다.
속살을 애무하듯
비 오는 백두산을 천천히 오른다
길은 빗속에서도 아이들 소풍 길처럼 어여쁘다
산 아래에서부터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안개 속으로
초록 구릉은 끝 간 곳이 없다.
능선은 부드럽게 흐르다가
한 순간 급한 주름이 잡혀있고,
주름 속에는 실개천 같은 빗물이 흐르다가
다시 꽃들이 흐르다가
빗물과 함께 또다시 꽃들이 흐른다
꽃이 흐르는지
바람이 흐르는지
산이 흐르는지
내가 흐르는지……
꽃들을 핑계로 잠시 서서
호흡을 고른다.
찰나의 짧은 생을
영롱한 빛으로 표현한 저 꽃들 앞에서
오욕칠정에 찌든 내 모습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
꽃들은 짙은 안개 속에 더욱 애틋하고
비바람은 사선으로 내리달린다.
동행한 초등아이와 함께
순간을 영원으로 간직한 채
꽃 속에 얼굴을 파묻는다.
저기,
천지가 있으니
고독한 순례자처럼
또 지팡이를 들고 묵묵히 산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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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생명 있음에
김영화
눈만 뜨면 우리는
탐욕의 눈을 번득이며 먹고 또 먹어댔다.
입만 벌리면 우리는
쓰레기, 또 찌꺼기들을 토해내곤 했었다.
우리의 죄악은 마침내
하늘의 창을 열고야 말았으니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네 가족도 아닌데
우리는 분노의 강을 헤쳐 나왔다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덮어주지 못하고
감싸주지 못한
회칠한 무덤 같은 우린데 ....
나, 유대인도
너, 이방인도
숨을 헐떡일 겨를도 없이
진흙더미 속이라도
생명 있음에 감사하며
손에 손을 잡고
탐욕의 찌꺼기들을 씻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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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손자의 종이컵
김영화
유치원에 다니는 손자녀석의 꿈은 아쿠아리움 사장이었다
왜 하필이면?
고작 꿈이 고건가?
내심 실망스러우면서도 이유를 물어보질 못했다
얼마 전
과학학원에 다녀온 손자 손에 실전화기가 들려 있었다
할머니 저하고 전화놀이해요
하며 실이 매달린 종이컵 하나를 준다
이게 웬 떡이냐?
평소 손자녀석은 할머니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거실에 계셔요 저는 제 방에 있을게요
실을 팽팽하게 하고 종이컵을 입과 귀에 잘 대세요
오냐 알았다
아 아 할머니 잘 들리세요?
응 잘 들린다
할머니, 우리 아빠는 어렸을 때 무엇하고 놀았어요?
밖에서 친구들하고 신나게 놀았지
우리 아빠 꿈은 뭐였어요?
공부를 잘해서 내가 의사가 되라고 했었지
우리 강아지도 의사가 되면 좋겠다
아니예요. 제 꿈은 과학자예요
그으래?
아쿠아리움 사장은 수족관 속으로 떠나보냈나?
난 속물처럼 속으로 웃는다
......
잠시 통화가 멈추었다
우리 강아지 사랑해
내가 먼저 얼른 고백했다
저쪽에서 모기만한 소리가 들려온다
저도 사랑해요.
일회용 종이컵이 이어준
뜻밖의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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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손주 탄생
김영화
빨간 덩쿨 장미가 담을 넘어 기웃대며
생글대는 계절
‘고추도 크고 매우 건강합니다
울엄니, 할머니 되신걸 축하드려요!‘
아들의 목소리는 상기되었다
하얀 포에 팔뚝만한 생명체
다소곳이 눈을 감고 잠든 천사
고운 이마와 눈매 그리고 코
오물대는 입
형언하기 힘든
작고 앙증맞은 손과 발
눈물이 난다
'수고했다. 이쁘구나' !
며느리에게 내 마음을 전한다
이때처럼 진솔할까
어쩌면 저렇게 깨끗할까?
이마를 찡그리더니 ,
응애! 응애! 고고한 울음
허 허 허, 저놈 봐
울음 소리가 힘차네
그래, 감찬아!
그렇게 이 세상을 호령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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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슬픈 피서
김영화
나는 오늘도
경남 거제 외도로 꽃구경을 가는 인파와
해수욕장에서 피서를 즐기는 인파와
꽉 막힌 피서길 고속도로위의 서 있는 차량들과
고속도로 휴게소의 돈 먹는 인파와 함께
교도소로 피서를 떠난다.
그곳에는 비록
빵빵한 에어컨은 없어도
얼굴만 봐도 냉기가 팍팍 도는
표정 없는 교도관들이
나를 오싹하게 만든다.
그곳에는 비록
아름다운 꽃밭도 없고
시원한 바닷길을 가르는 유람선은 없어도
바깥세상의 온기를 맡으려
유리벽에 손바닥을 대며
애써 미소를 지어보이는 남편의 얼굴이
나를 슬프도록 썰렁하게 만든다.
나는 오늘
두근거리는 8분의 피서를 마치고
회색빛 0.5평 밖을 빠져 나와
아무도 없는 도심의 인파속을
양산도 받지 않고
무섭도록 외로운 피서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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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여호와 이레
김영화
유난히도 무더웠던 여름날
안양 교도소 담벼락 밑에서 올려다본 괴로운 나날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지만
결코 기억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창세기 22장 1절로 14절 말씀으로
고통의 8월을 한방에 날려보냅니다
100세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귀한 아들을
바치라 하신 하나님,
그러나
내 아들,
100세에 얻은 귀한 아들을 어떻게 바치라하십니까?
라고
한마디 원망도 하지 않았지요.
번제나무와 불과 칼을 들고
아들 이삭과 동행하는 순종의 아버지 아브라함.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버지?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
사랑하는 아들아, 네 아들 이삭에게 칼을 대지 말아라
그 귀한 믿음 하나님이 아시고
수풀과 숫양을 번제로 준비하셨지요
여호와 이레!
준비하신 하나님!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준비하신
고마우신 하나님!
나의 눈물의 기도를 번제로 받으소서
여호와 닛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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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아버지 사랑하는 아버지
- 영결식장에서-
김영화
굽이굽이 살아온 날이 그러했듯이
지나온 이야기들이 그러했듯이
아버지,
참으로 많은 꽃들의 행렬입니다.
여기
외로움을 달래주던 친구도
사도를 같이 걷던 동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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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안개꽃
김영화
그대
눈부신 햇빛 받아
빛나는 장미라면
난 그저
빛나지 않아도 좋소
그저
나로 인하여
그대가 더욱 아름다워진다면
난
그대 축복 속에 스며드는
잔잔한 안개이고 싶소
먼 훗날
부름 받은 목숨 다해
그대와 나 함께 묶여 시든다면
그대로 인하여 빛났던 안개였노라
속삭일 것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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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엄마
김영화
무어라
텅빈 세상에 외쳐대야
아들은
메아리 되어 달려올까?
그러나
곧게 다문 입술에
혀를 차든, 침을 뱉든
이젠 침묵을 거역하긴 싫다.
차라리 그리운 마음으로 눈감으면
찬란한 옛 그림자의 환상으로
행복하다
모두 다 빼앗겨
쭈그러진 알몸으로
세월의 나래 접으니
남아있는 부스러기 한 조각
아,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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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엄마의 항구
김영화
엄마는 목청이 고왔다
봄날 고추밭을 매면서
여름날 열무김치를 담그면서
가을 날 고추를 따면서
겨울날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
목포의 눈물을 구슬프게 부르면
죽은 이난영이 살아온 듯 하다며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셨었다
홀시아버지 부양에
한량같은 남편 시집살이에
정신줄 놓은 친정엄마 간병에
엄마의 뇌졸중은 예견되어 있었다
수술을 하고
엄마의 시계는 그렇게 쉰 살에서 세 살 어린아이로 돌려놓았다
직장에 다니느라
주말에나 오는 딸을 기다리는지
바지춤이 흘러내리는지도 모르고
뙤약볕 여름 한낮에
동네 어귀에 나와 매일 같이 서성인다고
이웃집 할머니가 일러주셔서야
엄마의 까매진 얼굴
그 이유를 알았다
오늘
문인협회회원들과 길다란 목포항 해안선을 걷는다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목포의 눈물은
그리운 엄마의 항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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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요양원의 웃음
김영화
와, 오늘은 정말 즐겁다
어머니는 2년째 요양원에 계신다
오늘은 93번째 어머니 생신 날
서울에서 온 시누이 둘과 어머니를 뵈러 요양원엘 갔다
나지막한 산밑으로 커다란 냇물이
굽이마다 세월을 싣고 흐르고 있다
낮을 밤 삼아 침상에서 주무시는 어머니 어깨를 흔드니
반가움인지 서러움인지 큰소리로 흐느끼신다
아이고 우리 김영화 장로님 오셨네?
어? 우리 딸도 왔네?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딸아. 네가 고집이 세서 내가 힘들었던 거 아냐?
너 학교보내느라 내가 쌀을 머리에 이고 십리를 걸어갔었지?
살아온 날이 그러하듯이
손등의 주름살마다 사연이 숨어있다
밥 먹으면 하루종일 사람이 그리워
갈 데도 없고 할 일도 없는데
오늘은 기쁜 날
오늘은 행복한 날
내 볼을 만지시고 내 팔다리를 주무르시며 박수를 하시는 어머니
요양보호사가 웃는다
요양원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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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인천 소래포구에서
김영화
“내일로 방 뺍니다.”
담당교도관의 음성은 사뭇 고조되어 있었어요.
무작정
소래포구로 향하는 우린
꽉 막힌 도로에서도
영혼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서서히 서서히
인파 속으로 빠져 들어갔어요.
아픈 기억들일랑
두 번 다시 나를 기웃거리지 못하도록
멀리멀리
갈매기 나래 위에 실려 보내고
선택된 미래만이
정지된 고깃배 깃발에 휘날리니
서러움의 눈물로 반짝이는
은빛 물결 위에
새로운 하늘이 춤추며 내려와
또 다른 서곡을 통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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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추운 여름
김영화
비 비람이 무섭게 부는
어느 여름 밤,
친구는
다 지어놓은 농사가 걱정이라며
하룻밤 함께 지내자고 붙잡는 손을
한사코 뿌리치며
훌훌 떠나가 버렸다.
전력 사용량이 사상 최고라고
어제도 그랬고
또,
그 전 날도 그랬고
아마 벌써 며칠째 그런 것 같다.
적당히 비가 내려주고
뜨거운 태양이 잘도 비춰 주어
금년 농사는 대풍이 예상된다고
배우 같은 방송인은
잘도 떠들어댄다.
가까운 날 다시 오마하고
떠났던 친구는
한번쯤 올 때도 되었는데…….
아직도 한 여름인데
나는 참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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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편지 1
-보내는 마음
김영화
선생님!
누구나 이 세상 끝나는 날엔
떠나고 남는 자들의 아쉬움에
마음 아파하지만
유난히도 금년에는
보내드리고 싶지 않은 마음
일렁이는 마른 가지들처럼 애잔합니다
제 나이 불혹을 훠얼씬 넘겼음에도
때로는 응석으로
때로는 투정으로
때로는 원망으로 다가갔으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어루만져주시고
등 토닥거려주신
당신은 사랑이셨습니다.
넓은 운동장에서
선생님의 우렁찬 목소리가 뒹굴고
아이들 책걸상마다 스승님의 자상함이 묻어 있으며
후배들 책상마다 선배님의 향기가 살아 숨쉬니
아!
어쩌면 좋아요.
당신이 안 계신 빈들에서
한동안 그리움에 몸살을 앓을 것입니다.
선생님!
타오르는 열정으로
식지 않는 사랑으로
아무 댓가없이 뿌린 당신의 정성
보람은 밝은 태양이 되리니
부디
한 자루 작은 촛불로
제 마음 지켜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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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편지 2
-가을, 운일암 반일암에서
김영화
친구야!
가을, 운일암 반일암은
여름을 시치미 떼듯 적막하다
언제 죽도록 물 몸살을 앓았냐는 듯
청아한 소프라노로 노래한다
마치
홀로 당당한척 서 있는 바위위의 정자
비웃기라도 하듯
외로움의 끝이 어딘지 모른 채
마냥 즐겁게
흘러, 흘러가기만 한다.
삶에 지친 여인처럼
성급하게 떨어진 한 잎 낙엽
버려진 듯 그리움이 뒹구는구나
☆★☆★☆★☆★☆★☆★☆★☆★☆★☆★☆★☆★
《43》
편지 3
-진홍 가슴 새
김영화
여보
아들 때문에
며칠 밤을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 모습
나에게 들킨 줄 모르셨죠?
가시면류관에 찔려
얼굴이 피로 뒤범벅된 사람위에 앉은
새 한 마리가 있었대요
작은 부리로
가시 한 개를 뽑으니
새의 깃털에 피가 튀겼고
그렇게 가시를 다 뽑다 보니
하얗던 새는 어느새
진홍빛 새가 되었다네요.
그런데, 여보!
그 새가 새끼를 낳았는데
가슴 부분의 털이 진홍색인
아기 새가 나왔대요
어젯 밤
뒤틀린 현실 속에서 고민하는 아들을 보고
젊은 날의 당신을 보았지요.
☆★☆★☆★☆★☆★☆★☆★☆★☆★☆★☆★☆★
《44》
하필이면
김영화
하필이면
왜 당신은 나를 부르셨슴니까?
골방에 틀어박혀 홀로 울고있는
나에게 다가와 토닥토닥
속절없이 진한 아픔과 기쁨이 교차되고
시커먼 바람에 노란 색깔을 칠해준
당신,
“이봐요, 내가 여기 있잖아요?”
내가나를 버려도 나를 포기하지 않는
고마운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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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행복과 시험지
김영화
아버지 술 마시고 들어오시는 날
그 날이
우리는 가장 행복했다.
저 멀리 고갯마루에서
아버지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면
행복의 앞치마를 입고
우리는
가난한 자유를 기다렸다.
어설프지만
어색하지만
우리의 공연을 보신 아버지는
참으로 오랜만에
어린 우리들의 아빠가 되었다.
이만하면 100점인데…….
화려한 단어를 능숙하게 나열해도
행복에 허기진 우리 자식들 앞에
내 답안지는
언제나 0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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