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연배시모음 9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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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까이 더 가까이
구연배
나를
순한 물이 되게 하신 이여
부서지고 깨져
당신의 사랑만큼 깊고 푸른
강물이 되겠습니다.
나를
꽃이 되게 하신 이여
두 손 모아
당신의 눈물만큼 아름다운
향기가 되겠습니다.
날마다
한 걸음
가까이 더 가까이
나를
눈멀게 하신 이여
오직 한 숨결
당신을 통해 세상을 보는
가슴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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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을 밤
구연배
배고픈 메뚜기
달 속에 뛰어들어
달을 갉아먹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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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을 산길에
구연배
우거진 풀숲일 때는
무어라 보이지도 않더니
서늘한 바람에 모습을 드러낸
하얀 구절초
우리도 그렇다
어디서 사는 누군지도 몰랐더니
생각지 못한 인연으로 다가와 친구 된
그대와 나
가을 산길
지천에 구절초 피고
내 마음엔 주단 깔리고
아무도 몰래 꽃 피어
온 산이 향기롭듯이
마음 나누어
한 뼘만이라도 따뜻할 수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다 늙어서
뒤따라오는 이 있다면
이래서 사랑은 아름답다고
지그시 힘주어 말 할 수 있는
추억 한 자락 환히 내보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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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을 선물
구연배
가을이 되면
혼자되는 연습을 하는 시간
열매들은 떨어져 제 갈 길로 굴러가고
꽃씨는 바람에 흩어진다
.
혼자서도 넉넉한 저녁
새들이 부리를 다듬던 나뭇가지에
별이 걸리고
산그늘 도타운 품안에서
마른 풍경으로 새롭게 깨어난다.
기울어 진 삶도
흔들리던 다짐도
맨 얼굴로 비탈에 선 나무들처럼
꿋꿋하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겨울로 가야 한다.
외롭다는 것은
아직도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
그리움이 저물지 않았다는 것
사라지는 것은 겉모습일 뿐
단단한 설렘으로
오래오래 기다려줘야 한다.
쓸쓸함을 견뎌야 한다.
혼자이면서 혼자이지 않은
빛나는 눈물로
그대에게 가는 길
그것이 나를 키우는 힘이고
따뜻한 희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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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을 숲에서
구연배
말없이 떠나간 꽃들아
새들아
이별연습으로 요란 했을 그대들의
마지막 날을 나는
귀 기울이지 못했다.
눈치 채지 못했다.
나무들도 쓸쓸함을 견디려
옷을 벗어버렸다.
가진 것이 많으면 더 외로워지는 세상
힘이 되어준
따뜻한 그늘을 추억하며
꽃자리 언덕에 서서
올려다보는 하늘 저 멀리
날아간 길이 보이고
그 곁에
흰 구름 흘러간다.
안개 깔리며
지우고 또 지우는 풍경 속으로
낙엽을 밟으며
씨앗을 묻는 흙바람 소리 들리고
아무도 빈 둥지 허물지 않는다.
돌아올 믿음을 간직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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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가을 숲의 풍경
구연배
나무를 잡고 우는 바람 소리인지
바람을 잡고 우는 나무 소리인지
마음을 잡아당기는 낭자한 소리
생비늘 같던 낙엽과
풍경을 흔들어놓기 일쑤인 바람이
그늘을 내려놓고
적요를 빚고 있다
철새들 떠나고
풀벌레 사라진 골짜기에서
생 이끼를 얹고
찬 물에 발을 씻는 바위의 침묵을
한 모금 마신다
꽃 피는 아침과
꽃 지는 저녁을 함께한 씨앗들도
제 갈 길로 가버리고
마음의 뿌리만 남아
기다림을 믿고
시간과의 싸움을 끝내면
바람도 잎도 다시 오겠지
물관을 닫고 빈 몸이 된 나무에
귀를 대면
나이테를 감는 비밀한 시간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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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강가에서
구연배
강은 서두르지 않는다.
건너뛰어도 될 들판이나 산맥
지름길을 버리고
자아를 빠져 나온 물방울 하나 하나
온 몸으로 굴러와 얼굴을 묻을 때까지
고요히 기다린다.
지류들이 옆구리에 혈관을 뚫고
맑은 물을 수혈하는 동안에도
강은
세상이 건널 수 있는 깊이만큼
깊어지기 위해
자갈을 옮기고 바닥을 다지는
노동을 멈추지 않는다.
숲이 죽고 둑은 무너져도
알을 품다 떠나버린 물새를 위해
푸른 이마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강
세상을 적실 때만 흐름을 서두르는
강가에서
누군가 싱싱하게 물 오른
제 목숨을 투망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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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강과의 대화
구연배
당신을 띄워놓고
강과 대화하고 있어요.
흘러 흘러 바다까지 가야겠다고
다짐 돌 놓고
사랑 실은 종이배를
척후선처럼 띄워 보내고 있어요.
오늘 밤 당신 꿈에
비밀리 정박할 지도 모르겠네요.
강이 끝나면
우리의 바다가 시작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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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거목의 비결
구연배
뿌리째 뽑혀 쓰러진 나무
안쓰러워 쓰다듬다가
모든 뿌리가 바위를 감싸고 있음을 보았다.
아무 것도 아닌 돌을 껴안고
백년을 살았을지 천년을 살았을지
그 생각을 하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쓰러지지 않도록
나무는 바위를 바위는 나무를
중심 잡아 줬구나.
거목일수록 큰 바위를 끌어안고 서 있다는 것
그렇다! 신념도 돌 같이 무거워야
마음의 중심이 되는 것
큰 사람일수록
큰 근심을 품고 사는 것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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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거미줄
구연배
나방이 붙자
출렁출렁 춤추는 거미
생사가 한 줄에 걸렸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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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걸음마
구연배
마른 낙엽을 밟아도
소리 내지 않는 발목이
눈밭을 지나갔다
얼마나 시렸을까
흔들림 없이 걸어간
노루 발자국
짐승도 저리 반듯하거늘
똑바로 따라갈 수 없는
어지러운 걸음걸이
눈발자국 겹쳐 걸으며
마음 되잡는다
온종일 다시 서는 걸음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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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겨울 아침
구연배
하얗게 무서리 내리고
하늘 점을 찍으며 허공을 긋는 기러기 떼
무리 지어 날면 따뜻 하려나
흩어지지 않으려 뒷 선을 문 날개 짓이 눈물난다.
시린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등교하는 꼬맹이들
종종거리는 걸음 소리가 맑게 들려오는
아침은 언제나 희망.
잎을 다 떨구지 못한 플라타너스
가지에 낮아
날아갈 곳을 가늠하는 이름 모를 철새도
귀한 손님으로 노래 한 소절 불러 올린다.
찬바람 웅 웅 거리고
길가에는 쓸쓸히 뒹구는 낙엽들
풀벌레 떠난 숲에 무엇이 사려나 해도
어둔 밤을 휘어 감고 자리 잡은
겨울 안개가
메아리처럼 은근한 옛 얘기를 모락모락 지펴준다.
멀리 사는 형제들 머리 위에도
밤 새 무서리 내렸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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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겨울 편지
구연배
겨울 한가운데서 안부를 묻는다.
아름다운 그림 한 장 남기지 못한 채
허물 많은 날이 사라지고
셀레임에 떨던 살가운 것들
찬바람에 엉엉 운다.
늦은 인사가 미안하다.
아프지 말고
슬픔에 갇히지도 말고
곧추 세운 마음의 뿔 닦으며
잘 지내라.
빚진 사랑 갚으며 살겠다.
소설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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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고요를 찾아
구연배
숲으로 가라
숲에 가면
살아있는 소리들로 가득한
고요를 만나리니
새가 울고
나뭇잎이 흔들리고
계곡 물 흐르는 소리
낙엽 썩는 소리
썩어서 흙이 되는 소리
들어 보라
저 끝없이 맑은 소리의 합창
삶이 없으면 고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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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골목 풍경
구연배
술 취한 긴 그림자 끌며
후적후적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가난도 힘이 되는 곳
벌떡 일어나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별빛이 묻어 있는 새벽어둠
싸리비로 쓱쓱 쓸어 모으면
삶의 뒷얘기들이 반짝반짝 되살아나는 곳
다닥다닥 붙어 있는 처마 밑
허름한 담 사이로
옆집 온씨 아저씨 밤마다 비밀스럽게 힘쓰는 소리
아 귀 막아도 사정없이 들려오는 곳
술내가 그리워서
아픈 뒷얘기가 많아서
터놓고 살 비비며 살아가는
비린 소리 듣고 싶어서 하고 싶어서
찌그러진 세간살이 잔뜩 싣고
누군가 이사를 온다.
골목 안이 후끈 달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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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광장
구연배
광장에 가면
섬 하나 외로운 바다를 만난다.
출렁이는 쓸쓸함과 건널 수 없는 외로움이
한 가득 밀물 든 충만.
사람들이 모여들수록
자꾸만 비어가는 광장의 알 수 없는 품 안에서
눈물 나게 이기적인 설움을 꺼내 놓고 끝없이
끝없이 얘기하고 싶은 마음들.
사람은 왜 외로워져야 사람다워지는 걸까.
모일수록 혼자가 되어 떠도는 섬, 광장에서
적의의 시간들을 우적우적 되새김질하는 우리는
얼마나 더 쓸쓸해지는 연습을 해야 하나.
성찰할 줄 아는 한 마리 새가 되어
언젠가는 저 바다를
바다의 광막함을
날개 밑에 죄 품을 날이 오겠지.
뼈를 드러낸 그리움을 남기고 우리는
머물렀다 떠난다, 파도처럼
저 푸른 물길을 걸어
바다의 광장, 그 섬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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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구도
구연배
한 번도
꽃 속의 꽃으로 피어나
약시의 눈 속으로 흘러든
그 얼굴 보지 못하네.
바람 속의 바람으로 부서져
난청의 귀를 열게 한
그 목소리 듣지 못했네.
가던 길 멈추고
뒤돌아보면
꼭 한 사람의 발자국 있어
외로움에
엉엉 울어버린 날이 얼마던가
아 나는 몰랐네.
그것은 길보다 먼저
길이 된 당신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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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그녀
구연배
비가 내린다고 전화를 했다.
나도 안다.
그런데 그녀의 전화를 받고 난 뒤의 빗소리는
곡조를 타고 내리는 노래로 들린다.
눈이 온다고 전화를 했다.
나도 안다.
그런데 그녀의 전화를 받고 난 뒤의 눈발은
하늘을 겁없이 날아다니는 춤이 된다.
멋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나
생각 또한 가멸다.
그런 나에게 전해주는 그녀의 한 마디 말은
구석진 마을의 꽃을 떠오르게 하고
강물에 잠긴 풍경 속으로 풍덩 빠져들게 한다.
무시로 나를 힘들게 하고
잠시도 나를 평화롭게 놔두지 않지만
가난한 마음의 뿌리를 톺아주고
버림받은 말들을 되살아나게 한다.
함께 있어도 쓸쓸하다.
떨어져 있어도 함께 한다.
그래서 더 절실히 그녀가 필요하다.
이것이 힘들어도 깊어만 가는 사랑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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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그대 등에 기대어
구연배
봄 숲에 들어가
나무에 등을 기대보면
수관을 타고 오르는 물소리가 들린다.
젖살을 더듬는 아이처럼
바람의 온기와
흙 속의 물기를 발아들이는
넉넉한 뿌리의 힘
저 소리가 터져 꽃잎이 되느니
저 온기가 퍼져 그늘이 되느니
봄 나무 같은
그대 등에 기대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붉디붉은
그리움 소리를 듣고 싶다.
슬픔이 터져서
절정의 노래가 되는
그리움이 차 올라
꿈길 환히 열리는
비밀한 사랑을 우거지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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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그대
구연배
그대가 부어주는 물길로
내 안의 풀잎은 일어서고
그대가 부어주는 물길로
내 안의 갈증은 풀려
초록 길 열린다
그대는 눈부시고
온종일 걸어도 지치지 않는
마법의 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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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그리움
구연배
얼마를 흘러야
그대에게 닿을 수 있습니까
시작이 없으므로 끝도 없는 길
흘러흘러 나를 지우며 갑니다
그대는 아시겠지요
스스로 일어나
스스로 눕는 바람을 따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물결 그 아래의 깊고 고요한 슬픔을
터진 하늘 사이로
나를 부르는 목소리 있어
다가가면 언제나 저만치에
그대인 듯 달이 뜹니다
달은 여백 많은 눈동자에 부서져
어느새 멀리까지 길을 비추고
이것이 그대와 나의 사랑
전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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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금잔화
구연배
당신을 향한 겹겹의 마음을
맨 처음부터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밤마다 나를 휩쓸고 가버리는
폭우 같은 그리움과
굳게 다문 붉은 입술의 떨림.
집으로 가는 길은 이미 저물어버리고
물기 어린 당신의 눈동자 속에서
나는 그만 익사해버렸습니다.
애오라지
당신을 통해서만 씨앗이 되고 싶은
금잔화 사랑
떼어도 줄지 않는 겹꽃잎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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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꽃
구연배
꽃이 터진다
터지는 것은
주체할 수 없는 아픔
그러므로 꽃피는 정원에서는 누구나
생각에 어지럼병이 든다
꽃이 핀다
핀다는 것은
세상에 알려야 하는 상처
그러므로 꽃그늘에서는 누구나
추억의 피를 흘린다
그대 그리운
생각이 터지고
추억이 터지고
터져서 마침내 꽃이 되고야 마는
간절한 사랑이야기
상처가 꽃이 된다
아픔이 향기가 된다.
꽃피는 날에
꽃피니 알겠다
네게서 한 걸음도 벗어날 수 없었던
부드럽지만 단단한 그 겨울의 폭설과
정신을 몰아치던
그대의 찬 눈빛이 모두
아름다운 마음이었다는 걸
나 이제
가슴에 핀 꽃으로 향기로우니
봄꽃이라 불러다오
무섭고 쓸쓸한 삶의 벼랑에서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기다리느니
노을이 지면
찾지 않아도 반짝이는 별
떠오르는 것은 모두 그대임을
꽃피니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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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꽃들은 모두 다르게 산다
구연배
누구나, 살면서
꽃이거나
향기 나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때론 격렬히 때론 우아하게
마음을 살피고 몸을 드러내지만
꽃이 되고 향기가 되는 일이 어디 쉬운가.
그런즉 들로 나가 꽃을 만나 보라.
향기를 맡아 보라.
그대가 바라는 꽃들, 향기들
지천으로 피어나고
공간 구석구석 은은히 깃들여 있다.
그리고 자신에게 물어 보라.
무엇을 보고 느꼈는가를.
꽃들은 모두 다르게 산다
다르게 사는 것이 꽃이고 향기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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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꽃 무릇
구연배
올곧은 채로 살다가
외로워지는 날이 오면
꽃이 되는 마음도
타래처럼 얽힌 인연으로
가슴이 탄다
흔적은 있는데
찾을 수 없는
만날 수 없는
내 안의 그대
그대 안의 나를 위하여
부지런히 일궈놓은 꽃밭에
선명히 찍힌
새벽새 발자국
상사화!
누가 붙인 이름인가
불같고
얼음 같고
영영 이별인
먼 인연의 걸음으로
앉은자리에서
마음만 흔들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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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꽃바람
구연배
꽃바람은
하늘을 향한
가장 극렬한 몸짓
그러므로 꽃밭에서는
두 마음을 품지 마시라
불붙거나
얼어붙거나
사랑이거나 치정이거나
오직 한 마음만
꽃일 수 있고
향기일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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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꿈꾸는 밤
구연배
나는 밤마다 눈 번히 뜨고
꿈을 꾸는 새가 된다.
삶과 죽음의 피안을 날아다니며,
추억의 먼 별 밭을 찾아
날개 저어가는 아득한 지평 어디쯤에
나의 꿈을 뉘일까.
산다는 것은
곰팡내 찌든 지난날의 누추한 방에
아름다운 미래를 초대하는 것.
오늘 하루
낙서로 얼룩진 내 삶의 낙장(落張)을
빈 시간에 끼워 넣고
조용히 묵상하는 시간 속으로
불면의 밤이 찾아와
광막한 어둠의 형틀로 쥐어짤 때
거기 내 소망의 별 하나
등대처럼 떠오르나니 아,
나는 오늘밤도
한 소절의 노래 부르면서
부르면서 꿈을 물어 나르는 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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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나무 이야기
구연배
은천 공방에 가면
나무가 말을 한다.
어두울수록 더 환한
들불 같은 말씀을
강물처럼 풀어놓는 서각목
문을 열면
새김 된 글자들이 튀어나와
조곤거리는 소리로 귀가 뜨거우니
나이 든 소나무는
산의 침묵을
젊은 단풍나무는
꽃보다 붉은 나비의 그리움을
수줍은 은행나무는
바람의 옹알이를 전해준다.
죽은 나무에
신화를 새겨
천년을 사는 문자꽃을 피우는 사람들
은천 공방에는
나무가 이야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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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낮달
구연배
빛을 잃고
허공을 떠도는
실명의 달처럼
사랑을 잃고
삶 밖을 떠도는
실연의 나
사나 죽으나
당신을 떠나지 못하는
낮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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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누에
구연배
투명한 몸으로 죽고 싶다면
뽕잎 하나만 먹는 누에의
식성을 가질 것
열반에 드는 일도 집이 있어야 하느니
고치비단 집 지어
늙은 몸 수습해 영면에 든 누에처럼
뽕잎 외에는 일체의 맛을 버릴 것
고치에 들어앉아
입도 닫고 다리도 떼고
기는 몸마저 버려
죽은 듯이 그러나 아주 죽은 것은 아닌
꿈꾸는 번데기
눈을 뜨기 위해
날개를 얻기 위해
몸도 아니고 정신도 아닌 벌레가 되어
천만번을 꿈틀대야 하네.
스스로 발광하는
어둠을 만나야 하네.
그래야 날개를 얻는다네.
기던 몸이 나비가 되는 우화!
누에의 자유는
뽕잎 하나만 먹는 일편단심
혀에 있으니
외식하는 몸이여
잡식하는 정신이여
순결한 부활은 꿈꾸지도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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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눈뜨는 아픔
구연배
내 눈 속에 들어와
내 눈동자를 씻는 그대여
당신의 눈빛만큼 나는 투명해지고
내 영혼 속에 들어와
핏물 고이는 그리움이여
기다림으로 나는 날마다 뜨겁다
그리움이란
내 안에 네가 눈뜨는 아픔.
내 가슴에 물꼬를 트고
강물처럼 흘러드는 노래여
당신의 음성을 듣는 귀 맑은 새가 되고
먼 기억의 잠 속으로 들어와
영원을 잣아 올리는 꿈이여
당신의 손길로 열리는 새벽은
언제나 눈부시다
사랑이란
네 안에 내가 눈뜨는 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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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눈오는 날
구연배
엽서를 습니다.
폭설의 함박눈처럼
그리움을 꾹꾹 눌러씁니다.
싸드락 싸드락
쌓이는 눈 소리
엽서를 쓰는 글씨 소리.
제 발자국 소리를 듣는 마음은
그래서 하얀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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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눈이 되어 내리고 싶다
구연배
눈이 내린다.
꽃잎과 함께 사라져
우리를 스산케 했던 나비 떼들
분분히 날아와 스스로 꽃이 된다.
납작 엎드려 치러야 하는 죄
그래서 눈꽃엔 향기가 없다.
눈은 소리 없이 녹을 것이고
녹아서 누군가의 피톨로 흐를 것이다.
그때 나는 보리라.
우쭐우쭐 돋아나는 새싹과
맨발로 걸어도 좋을 향톳 길에
싱싱한 꽃대를 거침없이 밀어 올리는
들꽃의 씩씩한 이름들을.
과음 뒤의 속 쓰림 같은 절망의 힘도
없어서는 안될 하루 분의 양식
새벽길의 눈으로 내리고 싶다.
어지러운 발자국으로 얼룩진
불온한 길을 하얗게 표백시키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마음 속 그리운 풍경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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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늦매미
구연배
뒤늦게
애벌레를 벗고 우화한 늦매미 한 마리
처서 백로를 훌쩍 지난
가을 나무를 잡고 운다.
높다란 가지 끝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저 극진한 울음.
친구들은 가고
사랑도 찾을 수 없고
녹음을 훑어 내리는 찬바람만 불어와
단풍잎들 하염없이 뚝뚝 떨어지는데
하마 귀까지 어두워 졌는지
외로워 말라고 매앰 맴 맞소리를 내주니
포르릉 내 곁까지 날아와
때동나무를 잡고 다시 운다.
산 도랑물에 지는 하얀 때동나무 꽃잎처럼
극진한 울음을 남기고 매미는 진다.
그렇게 꽃잎 지는 봄과 생이별이더니
내내야 그 도랑물에 울음 떨어져
여름이 간다.
세월이 흘러간다.
☆★☆★☆★☆★☆★☆★☆★☆★☆★☆★☆★☆★
《35》
단풍 안개
구연배
파스텔이다.
바람과 단풍과 안개가 어우러진
몽환의 별천지.
안개 속에 단풍과
단풍 속의 바람과
바람 속의 안개가
아침 얼굴을 닦아주며
고요를 물질하고 있다.
부챗살처럼 일렁이는 풍경을 떠다가
그대 창가에 걸어주고 싶다.
☆★☆★☆★☆★☆★☆★☆★☆★☆★☆★☆★☆★
《36》
도둑일기
구연배
솔 그늘에서
남몰래
그대를 안았다.
장승처럼 꼿꼿해진 마음
내 몸에 솔 향내나거든
붉은 입술
훔친 줄 알아라.
☆★☆★☆★☆★☆★☆★☆★☆★☆★☆★☆★☆★
《37》
독도 사랑
구연배
온 누리에 비치는 장엄의 일출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
너 있음으로 우리가 있는
공존의 핏줄,
언제나 험한 역사의 물결에 쓰러지지 않는
무게 중심이 되어주었고
때로는 어둠을 분연히 떨치고 일어서는 횃불이 되어
함께 나아갈 길을 비추는
꺼질 수 없는 등대지기로
한 몸 이룬 어진 섬.
그런 까닭에 너는
수수만년 겨레의 빛이요
지성의 인중이요
우리 민족의 나아갈 바
형형한 눈 같은 것이니
너의 스러짐은 우리의 고난이요
너의 근심은 우리의 고통이라.
죽음으로 지켜야 하느니
영원토록 힘 다해 지켜내야 하느니
어찌 감히 탐나게 놔둘 것이며
목숨 보배를 빼앗길 것이냐.
너의 이름 아래에서 우리는
한 배달 한 겨레가 되고
너의 존재함으로 우리는
공존의 운명이 된다.
그러므로 겨레여! 민족이여!
빼앗기지 말자.
털끝도 넘보지 못하게 하자.
세세 무궁토록 명심하고 자랑하자.
독도여!
사랑하는 독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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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동백 봄을 만나다
구연배
제 신명에 불을 지핀 동백꽃
꽃심지를 끊고 툭, 툭
길에 눕는다.
입술 앙다문 채
눈물 떨구는 애인처럼
무엇이 저리 붉어지게 했는지
수줍음 활활
절정에서 눈감아 버렸는지,
바람은 알까
몸살 난 사람들이 꽃잎을 읽다
봄을 맞고
봄을 보내고
또 찾아 온 올동백 앞에서
맥없는 봄꽃만 하염없이 올려다 본다.
꽉 다문 입술에
붉은 피
비명처럼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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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만개의 꽃
구연배
그대 만 개의 꽃으로 피어
내 품에 뛰어든다
피폐한 삶이 환해지는 봄날
너를 받을 푸른 잎을 피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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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먹 자두
구연배
그녀는 한 가지 옷만을 입습니다.
아니 한 가지 색깔만을 고집해
무얼 입어도 그 옷이 그 옷 같아 보일 뿐입니다.
머리도 미장원이 아니라 쓱쓱 손수 깎아버리니
오히려 가발을 멋으로 얹고 다니는 사람 같습니다.
화장은 하지도 않고 할 줄도 모릅니다.
그녀는 돈도 없습니다.
아니 많이는 버는데 누군가가 다 가져가는 모양입니다.
자선 사업가는 아닌데 먹여 살려야 할 식구가 많답니다.
당연히 통장도 없고 그 흔하디 흔한 카드 하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한 가지 색깔의 옷만 입는데 언제 봐도 맵시가 있고
선머슴 같은 더벅머린데 건강한 스타일러 같고
맨 얼굴에 맑은 실 정맥이 이목구비와 절묘하게 어우러져
마치 가을밤의 화한 박꽃 같습니다.
빈털터리가 분명한데 다녀온 곳이 여간 아닙니다.
(시시할까봐 얘긴데 프랑스 이태리 뭐 이런 곳들이랍니다)
산양 뿔처럼 당당하고 얌전한 발목에
웬 호기심이 그리도 많은지
뭐라고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자두를 먹습니다.
그것도 붉은 핏기가 뚝뚝 묻어날 것 같은 싱싱한 먹자두를.
아시겠지만 자두는
비를 맞으면 금방 빗물 맛이 배고
햇볕을 쬐면 금새 단맛이 드는 과일이지요.
그녀가 그렇습니다.
하늘이 주는 침묵과 말씀에 마음을 반응하는 여자.
그리하여 그 계절의 바람 맛이 나는 여자.
하늘이 잘 익힌 먹 자두 같은 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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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멈춘 시계에 대한 단상
구연배
멈춘 시계를 본다.
화석이 되어버린 시간을 본다.
가야할 길이 아직도 멀다는 듯
시침은 새벽을 가리키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새벽 앞으로 내달렸을 것인가.
생의 마지막 날을
가슴에 새겨 넣은 멈춘 시계여.
너를 들여다보면
그리운 내 유년을 만날 수 있을까.
시디신 허무를 끌어안고
새벽 가로등 불빛을 하염없이 쬐던
창백한 청년을 만날 수 있을까.
고장난 마음
불통의 시간을 교체할 요량으로
시계 방 유리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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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무겁지 않을 만큼
구연배
조그만 웃고
조금만 아파합시다.
그리움에 지쳐
당신을 내려놓지 않도록
천천한 걸음으로
미열을 앓으며
생이
무겁지 않을 만큼만
사랑하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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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무인도
구연배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도
마실 물이 없고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어도
너와 나
마음의 닻을 내리지 못하고 떠도는
외로운 섬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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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물의 간극
구연배
물길은
어디가 끝이고 처음인지 모르지마는
바라보는 여기서
나를 흘러가고 또 그렇게
내게 흘러온다는 것이
물속의 달을 보면 보다 분명해진다.
달이 뜨거든
강둑을 거닐어 보라. 그리고
내일 다시 그 자리에 가서
무심히 강물을 들여다 보라.
강은
한 잠 자지 않고 밤새
그대가 알지도 못할 곳까지 흘러갔다가
흘러와 강기슭을 찰싹거리며
어두운 발밑을 비춰 주리니
그대 빈산을 휘감는
파도 소리를 들어보라
강은 광막한 여행의 감동을 못 잊어
온몸을 들썩이며 얘기하고
신비의 노래를 끊임없이 쏟아놓으리니
그렇게 흘러가고 흘러와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영원하게 하는
강물에 나를 밀어 넣고
처음이면서 끝인 물길의 간극 없는 사이를
깊이깊이 헤아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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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뭉게구름
구연배
가을이면, 너희들을 부를 이름이
뭉게구름 말고는 없다.
올올이 잘 짜여진 푸른 비단 같은 녹음도
한순간에 사라지고
장한 기백으로 넘실대던 강물도
속절없이 들녘에 저물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저 혼자 깊어간다.
외롭지 않은 것이 무엇 있으랴
생각도 추억도 온통 뭉게구름
빈 하늘에 돋는 총총한 별도
그대 떠난 밤에야 뭉게뭉게 빛나고
홀로 걷는 발부리에 낙엽도
뒹굴며 시선 밖으로 사라진다.
가을은 왜 모든 게 뭉게구름 같을까
꽃 하나도 피워낼 수 없는
서늘한 쓸쓸함으로
세상의 모든 그늘이 자취를 감추고
길 위의 사람들은
젖은 고독을 빳빳이 다림질 해
마음 줄에 걸기 바쁘다.
사는 일이 뭉게구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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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미리내 가는 길
구연배
매주 봐도
매주 그리운 사람
끈적이지 않고
비린내 나지 않아 좋다
있는 대로 찍어내는
사진쟁이라서 그런가
(언필칭 작가님이시다)
숨기고 자시고가 없는
앞 뒤 투명한 사람
무거움도
그 앞에서는 끝없이 명랑해지는
그래서 가난한
지긋한 그 사람이 좋다
재미 진 얘기와
술맛도 아는
인간 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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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민들레
구연배
옆 축이 헤지고
밑창마저 닳아
길 풀 섶 어딘가에 던져버린 검정고무신 속에
민들레꽃 한 송이 피어 있다.
나 모르는 사이
빗물 고이고 흙먼지 쌓여
씨앗의 보금자리가 됐다는 말인데
발바닥이 화끈화끈 저려오고
핑그르르 눈물이 돈다.
맨발로도 허물없이 좋은
민들레꽃을 바라보며
모진 뉘우침을 갖느니
어디선가 예쁜 꽃을 피우고 있을
내가 버린 인연들!
깊은 정에 신물 낸
내가 밉고
버림받은 그 인연에 뿌리내린
이름 모를 꽃 마음에 자못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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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바람꽃
구연배
향기 없이는 만나지 말자
목마름만 주는
물기 없는 말로는 더 이상
그립다 말하지 말자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는가
그러면서 너 때문이야 라는 참담한 말을
듣거나 해야 할 때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이려 말고
덩그렁 혼자가 되자
앞산도 모르게 피고지는 바람꽃처럼
이게 아닌데 하고 느낄 때쯤이면
너무 늦다
사랑은 말할 수 있을 때 향기롭고
이별은 말하지 않을 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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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바람이 불면
구연배
바람이 불면
숲 속의 나뭇잎들이 일제히
한 곳으로 쏠린다.
사람의 눈으로는 알 수 없는
비밀한 그곳으로
온 들판의 풀잎도 몸을 누이고
물결은 끊임없이 밀려가는데
무엇이 저들의 시선을
한 꼭지점으로 묶는 걸까
그 같은 바람 나에게 불어와
오직 한 사람 그대를 향해
애오라지
기울어진 모습으로 살고만 싶다.
바보일기
구연배
시로 전하는
그 아름다운 말을 알아듣지 못해
사랑을 잃었다
허영이 되어버린 그리움
시로 알리는
그 분명한 신호를 풀지 못해
너를 잃었다
눈물도 아까운 회심
하늘의 말
예언의 말
풀도 듣고 미물도 아는데
깜깜한 귀로 너를 듣는다.
바보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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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버스가 온다
구연배
가는 곳
어딘 지를 알면 고향
그리움 안고 버스가 온다.
내릴 곳
어딘 지를 모르면 타향
설레임 싣고 버스가 온다.
갈아타고 싶어도
구르는 바퀴 위에서 뛰어내리기는
어렵고 두려워
정들지 못한 객지인데
머물 곳을 찾아 떠나야 하는
나그네의 삶
그래서 사랑했던 가난과 자유가
생의 자존심 아니던가
가야 할 길을 끌고
저기 버스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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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벌레의 가르침
구연배
나뭇잎 위에서 마음껏
세상을 재고 살았던 자벌레들
농익은 몸을 툭, 툭
허공에 던진다
살아온 길을 되밟아가기엔
너무 먼 그곳
마음의 눈을 뜬 자에게 열리는
허공의 지름길로
목숨 걸고 투신한 자벌레만
땅 속에
제 알을 묻는구나
거듭 사는 비밀이 예 있느니
벌레에게서 배운
아침 정신이 달고 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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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봄 안개
구연배
차라리 거대한 한 송이 꽃
가늠할 길 없는 깊이의 안개 속으로
사람들이 걸어가고
자전거 바퀴가 구르고
닫힌 창문들이 하나 둘 꽃잎처럼 열린다.
안개를 마시며 아련히 비치는 길을 걷는다.
조심하는 눈빛으로 허공을 날던 새들이
처마 밑에 웅크려 젖은 깃털을 말리고
마실 나온 실바람이
사람들의 삽짝 앞을 기웃거릴 뿐
누구도 선뜻 안개 속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포근한 안개 속에서
하루치의 햇볕이 꿈틀대며 번져간다.
들녘을 가로지른 강둑 너머로
범람하는 개구리 울음소리
모든 이름 있는 것들이
아름다운 하루의 삶을 위하여
세상의 아침 식탁에
노래를 준비해 올린다.
풀잎마다 매달린 이슬방울들이
흔들리며 소리를 낸다.
선한 세상, 안개는 그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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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봄날 풍경
구연배
탄탄한 엉덩이가 바쳐주는
소 등목에 멍에를 얻고
잘 벼린 쟁깃날을 땅에 콱 물려가며
한바탕 무진 힘을 쓰고 나서
농부는 쪼그리고 앉아 담배 한 대 물고
힘에 부친 황소가
방울눈을 치뜨고 올려다본 하늘엔
쨍쨍한 하루해가 중천에 걸렸고
이랴
시퍼런 쇳 날이 흙 살을 먹어 들어갈수록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싱싱하게 되살아나는 밭고랑
흙 다루는 재미를 누가 알랴
소는 밭을 갈고
밭은 노인을 갈고
노인은 세월을 간다
풍경이 슬어놓은 어둑 살이 환하다
☆★☆★☆★☆★☆★☆★☆★☆★☆★☆★☆★☆★
《54》
불두화
구연배
한번은 꼭
알몸으로 만나야지, 했다.
찾아가면 언제나
그리움보다 먼저 달려와
환히 안기는 꽃 몸.
아, 얼마나 부끄러웠겠느냐.
옷 벗지 못한 나는 무례했다.
용서해다오.
그대를 탐한
한 마리 짐승이 이제
알몸이 되어
그대를 마중하리라
네가 그랬던 것처럼
꽃으로 달려가
눈부시게 안기리라.
불두화여,
욕정도 순해지면 알몸이 될까, 몰라.
끌려가는 짐승처럼 가슴 졸이느니
불인두로 먼저 눈을 지져놓고
모로 서는 네 손 뒤의
푸른 쇠망치
긍휼한 달밤에 자욱이 피 어린다.
☆★☆★☆★☆★☆★☆★☆★☆★☆★☆★☆★☆★
《55》
비문을 뜨다
구연배
이끼 낀 돌기둥 한가운데 박혀
묵묵히 의미를 지켜온 문자들
세월이 흘러도 세긴 뜻은 꼿꼿한데
행간을 읽는 나그네 눈빛 자못 숙연하다.
천금의 맹세도 지금에 와서는
한낱 조롱거리일 뿐인 세상 인심 앞에서
닳고 깎인 글자들이 울음을 운다.
목숨보다 중히 여긴 정조도
죽음으로 지켜낸 명분도
바람의 흔적만 남긴 채
돌문에 갇혀 풍화되어 가는 어처구니.
바위에 금을 긋는 무심한 세월을
먹지로 떠놓고
손 짚어가며 읽고 또 읽느니
비바람에 녹슬지 않는
마음의 획 하나 붙잡아 두고 싶은 까닭이다.
☆★☆★☆★☆★☆★☆★☆★☆★☆★☆★☆★☆★
《56》
빗방울은 깨져야 바다가 된다
구연배
모든 꿈들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
어둠을 벗고 일어서는
아침 눈동자를 들여다보아라.
깨지고 남은 알맹이가 비로소
빛으로 부활하고 있다.
깨지면 물이 되는 빗방울.
빗방울은 낮은 데로 흘러 강을 이루고
이윽고 파도치는 바다에 이른다.
바다는 햇볕에 닳아 짠물이 되고
날마다 부서져 영원히
바다로 자리매김을 한다.
깨진다는 것은 아름답다.
그것은 하나의 아픈 몸짓에 불과하지만
또 다른 세계를 이루나니
꽃망울은 터져야 향기로운 꽃이 된다.
터진 꽃은 더 큰 공간을 담는다.
오늘 완벽하게 부서진 사람은
결코 절망하지 않으리라.
깨져야 다시 사는 생명
내가 나로부터 멀어졌을 때
내가 보인다.
빗방울은 깨져야 바다가 된다.
☆★☆★☆★☆★☆★☆★☆★☆★☆★☆★☆★☆★
《57》
사랑
구연배
사랑은
그 사람의 눈빛에
흐려진 마음을 닦는 일입니다.
마주하면
보는 모든 것이 새롭고
생각하는 것마다 깨끗해지는
당신의 눈빛
사람들은
눈멀었다고 말을 하지만
나는
그대 안에서 행복합니다.
고백하거니와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꼿꼿해질 수 있는 것은
그대를 바라보며 매일매일
약시의 마음을 씻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그 사람의 눈빛에
흐린 마음을 닦는 것
그리하여 나는 말마다 환해집니다.
☆★☆★☆★☆★☆★☆★☆★☆★☆★☆★☆★☆★
《68》
사랑의 마음
구연배
꽃을 보고 울었던 그 눈물
꽃으로 피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향기로울까
이슬을 보며 황홀했던 그 눈동자
이슬로 맺혀 눈뜰 수 있다면
얼마나 투명할까
향기롭게 다가가
투명한 가슴으로 만나야 할 사람
낙엽을 보며 노래했던 그 목소리
낙엽으로 다시 뒹굴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강물을 보고 깊어졌던 그 마음
강물이 되어 흐를 수 있다면
얼마나 고요할까
아름답게 타올라
고요한 영혼으로 꿈꿔야 할 사람
☆★☆★☆★☆★☆★☆★☆★☆★☆★☆★☆★☆★
《59》
산딸기 꽃
구연배
단박에 눈멀었대도
너무 많은 것을 가르쳐주려고 애쓰지 말아요
미열을 앓으며
한 번에 하나씩 사랑을 배울래요
그래서 알게된 간절함일랑
빨갛게 익혀가며 오래오래
당신을 제 곁에 머물게 하고 싶어요
당신의 사랑을
한목에 다 알고 싶지 않아요
종종 상처를 준다는 것 알아요
잘 길들여지지도 않아요
종종 상처를 준다는 것 알아요
잘 길들여지지도 않고요
하지만 기대치를 낮추고 지켜봐 주세요
당신 곁을 지키는
억센 가시울타리가 될게요
☆★☆★☆★☆★☆★☆★☆★☆★☆★☆★☆★☆★
《60》
산에 들다
구연배
불어나는 것은 강물이 아니라 초록이었다.
반짝이는 것은 잎이 아니라 녹음이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골골의 이름 없는 마을을 감싸고 꿈틀대는 산맥
굽이쳐 살아있음을 알리고 때때로 울음 우는 것은
여울이 아니라 나무들이었다.
떼 지어 숲을 헤엄치는 새들과
물결치는 무수한 야생초들
쪽배를 타고 물이랑을 일구는 어부들처럼
산 살림은
누가 누구를 거느리지 않는 등 푸른 살림이다.
그렇다.
강이 흘러서 바다에 이른다면
산은 흘러서 하늘에 닿는다.
오늘도 나는
마음의 낚싯대를 끌고 산으로 간다.
☆★☆★☆★☆★☆★☆★☆★☆★☆★☆★☆★☆★
《61》
새벽길
구연배
누가
바람 속에 바람으로 불어와
순결한 풀빛이 되고
꽃 속에 꽃으로 다가와
투명한 향기가 되는지
눈뜨는 아침보다 먼저 깨어나
숲으로 가는 새벽길을 걸어보면 안다.
누가
씨앗 속에 씨앗으로 떨어져
뜨거운 뿌리가 되고
흙 속에 흙으로 부서져
고요한 땅울림이 되는지
새벽 강물보다 먼저 일이나
나를 홀려간 우물을 들여다보면 안다.
아 침묵보다 더 고요한 말씀으로
묵은 귀를 씻는 내 비밀한 당신.
☆★☆★☆★☆★☆★☆★☆★☆★☆★☆★☆★☆★
《62》
수련 피는 아침
구연배
물결을 딛고
수면 위로 올라선 수련.
젖꼭지를 문 아기처럼
강물을 움켜쥐고
볼이 미어지도록 해시시 웃는다
굽이굽이 잠긴
산맥의 발목을 씻으며
바다로 가는
강물의 노래는 깊어 가는데
수련 핀 아침
빈 하늘 가득
흰 구름 몰려간다.
☆★☆★☆★☆★☆★☆★☆★☆★☆★☆★☆★☆★
《63》
심우도
구연배
신축년 새해
올해는 꼭
숲 속의 소 한 마리 잡아서
마음의 외양간에 매놔야지.
잡힐 듯 잡힐 듯 매번
놓치고 만 심우心牛
함께 살 허청도 마련했으니
싱싱한 꼴 베어 살찌게 먹여 봐야지.
젊었을 때 못 본
발자국 좇아
천릿길 소 등에 올라봐야지.
☆★☆★☆★☆★☆★☆★☆★☆★☆★☆★☆★☆★
《64》
아름다운 소리
구연배
얼어붙은 강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쩍,
쩍 금이 간다.
본래 부드럽고 순한 강물을
누가 단단한 얼음장으로 만들었나.
쇠망치로 부서지지 않던
철벽 빗장을 풀고
본래 모습을 찾아가는
아름다운 소리.
좋다!
때맞춰 꽃필 날 싣고
봄 오겠다.
☆★☆★☆★☆★☆★☆★☆★☆★☆★☆★☆★☆★
《65》
아버지 제삿날
구연배
하늘 집에서는 필시 생일날일 터
누군가 준비해줬을 잘 차린 아침상 물리시고
타고 갔던 꽃상여 손수 몰고
일 년에 한 번 집에 다녀가시는 아버지를 만나러
오빠와 함께 시골가는 길
생전에 좋아하시던 고사리나물과
쇠고기 두어 근 끊어놓고
입 짧은 시부 저녁진지 준비하느라 애쓰는
두 올케가 고마워 티셔츠 한 벌씩 샀다
곱게 지어 드린 단벌 수의를 입고
후여후여 집으로 걸어오실 아버지
걸음은 정정하신지
뽀얀 얼굴에 막새 삼베옷이 여전히 잘 어울리는지
마음이 먼저 달려가
아랫녘 산모롱이까지 눈마중을 나간다
한 번 절에
십 년 동안 못 찾아뵌 불효를 빌고
두 번 절에
툭! 문을 열어젖히며
앞 산 찔레꽃이 참 예쁘게 피었구나, 말씀하실 것 같아
지지리 복도 없으시다
목이 메어 울먹임인데
아랫목 어머니 제사상으로 목을 길게 빼시고는
아버지 좋아하시던 조기찜을 가리키며
연신 젓가락을 바꿔 올리라신다
생전에는 입에 대지도 못하던 술을
벌써 몇 잔 째 비우신다
형제들 둘러앉아 함께 음복하고 제삿밥을 비비는데
어머니, 아무도 몰래
한 그릇 곱게 퍼담아 고샅으로 나가신다
아버지 혼자 얼마나 쓸쓸하실까
내 얼른 따라가야지 하시는 어머니 말씀에
별 걱정 다 하신다며 막내가 화르르 성을 내는데
일 년에 한 번 만나
저만큼이라도 정 나눌 사람 하나 만들어놓은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하시냐
못난 딸이 속 꾸지람을 해본다
서둘러 길 떠나는 아버지
산소 뒷산에
소쩍새 피울음이 길게 들려온다.
☆★☆★☆★☆★☆★☆★☆★☆★☆★☆★☆★☆★
《66》
아침 뜨락에서
구연배
바람이 쓸고 가는 어둠 사이로
물안개 타고 오는 새벽
아직 깨어나지 않은 속 뜰을 걷는다.
이적 지 열지 못한
의식의 눈동자 뜨고 보면,
잠긴 하늘 열리는 마른 목에
삼투압 되는 동력의 빛
이승에 매인 이름 풀어놓고
하나 둘
꽃이 되고 나무가 되는
부활의 축복으로
나무는 손 흔들어 환호하고
온몸에 물결치는 아침 교향악
이제 가진 것 없어도
비워냄로 더 맑은 샘물 속에
오늘 하루 영혼의 물꼬를 트고
능소화 핀 울안
아침 속 뜰의 잡풀을 뽑아낸다.
☆★☆★☆★☆★☆★☆★☆★☆★☆★☆★☆★☆★
《67》
안개가 내리면
구연배
갯내음이라고도 하고
물비린내 같기도 한 안개는
강 중에서 시작해 들판을 덮치고
아무도 익사시키지 않으면서
마을 전제를 고스란히 잠기게 하더니
언덕을 지우고
언덕 위의 길을 지우고
길 위의 숱한 꿈도 지워
지운 모든 것
뿌리는 뿌리로 줄기는 줄기로
재살 차오르게 하느니
안개가 내리면 사람들은
가장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바다보다 더 웃자란 고독과 침묵을
한 움큼 움켜쥐고
아침 수면 위로 떠오른다.
한 사람 또한 사람
떠올라 숲이 되고 그늘이 되는
노동의 들판으로
안개를 걷고 세상이 다리를 놓는다
☆★☆★☆★☆★☆★☆★☆★☆★☆★☆★☆★☆★
《68》
어리 연꽃
구연배
사는 일이
먼지바람 같다고 하더니
손 한번 잡은 인연이 무거워 훌쩍
인도印度로 간 사람
잘 다녀오란 말도 못하고
어리연꽃 핀 강가에서 허허로이
눈물로 바래느니
꽃잎 몇 장으로 강물을 움켜쥔
저 환한 꽃불
부디 성불成佛하시라.
☆★☆★☆★☆★☆★☆★☆★☆★☆★☆★☆★☆★
《69》
어린 연꽃
구연배
사는 일이
먼지바람 같다고 하더니
손 한 번 잡은 인연이 무거워 훌쩍
인도로 간 사람
잘 다녀오란 말도 못하고
어린 연꽃 핀 강가에서 허허로이
눈물로 바래느니
꽃잎 몇 장으로 강물을 움켜 쥔
저 환한 불꽃
부디, 成佛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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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어머니와 봄볕
구연배
연둣빛 어른대는 봄볕 마루에서
상추쌈을 먹다가
언제나 감싸주시던 어머니 생각에
입을 크게 벌려
볼때기가 미어져라 울었습니다.
어머니는 봄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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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어부의 고독은 바다보다 깊다
구연배
수평선 너머
그리움보다 더 멀리 있는
시원의 바다를 찾아
어부는 오늘도 등 푸른 삶을 건지러 간다.
까마득한 허공을 깊이 감추고
둥둥 떠 있는 벼랑 위에 서서
보이지 않는 물짙
가라앉은 삶을 훑노라면
그물에 걸려 올라오는 것은 언제나
해파리 같은 마음 밖의 하얀 그림자들.
어디선가 불씨를 물고 날아온
새 한 마리
초점을 잃어버린 눈동자 속으로
깊숙이 내리꽂힌다.
가슴에 잠긴 어둠이 활활 타오르고
타올라 재가 되는 바다.
절망도 목숨을 사라앟는
뜨거운 한 벙법임을 배우며
파도를 쓸어 모으는
어부의 고독은 바다보다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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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엉겅퀴 꽃
구연배
한 몸으로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
긍휼함이니
엉겅퀴 꽃을 보라
한 뿌리에
한 대궁만을 뽑아 올린
붉은 빛 꽃숭어리
그리운 그 날
꽃잎 포개는 날
죽어도 아니 떨어질
가시돌쩌귀를 가슴에 박고 산다
뿌리도 하나 꽃도 하나
상처를 입었다면 용서하시라
오직 그 사랑을 위한 씨방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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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이브의 맛
구연배
길을 걷다 목이 말라
남의 밭 사과를 땄다.
덜 익은 푸른 사과
하얀 속살을 베어 물자
입 안 가득 신물이 차올라
목마름은 오간데 없이 사라졌는데
아스슴 눈꺼풀이 감기고
손끝이 짜르르 오그라든다.
어! 할 새도 없이 동시에
불끈 바지를 당기는 힘.
푸른 사과 속의, 신 맛 속의 무엇이
몸의 목마름은 삭히고
정신의 목마름을 주는지
향기로운 모순의 맛에
연신 어린 사과 속살을 깨문다.
아사삭 씹히며 눈뜨는 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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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일도 사랑도
구연배
이거 아니면 죽을래! 하던 마음이
어느 날
다른 일감 다른 사람을 찾는 순간
나는 비겁하게 나이를 먹는
세월의 하이에나가 된다.
염치도 없이
나는 나를 용서하겠지만
너는 나를 용서하지 말아라.
그렇게 해서 얻은 지혜로
순결한 세상을 능멸하는 나이여
늙음이여.
살겠다고 눈감아버린 등뒤에서
버림받은 추억이 울고
잊혀진 사랑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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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입춘 그 후
구연배
밥 한 그릇에 김치 하나
냉이국 한 사발
찬 없는 아침상을 받아 놓고
창 밖에 마른 풍경을 본다.
두 눈에 안개 그득히 들이찬다.
입춘 대문 저 멀리
흙 살을 움켜쥔 봄 뿌리들이
눈서리에 찢기고 무너진 대지의 상처를
얼마나 열심히 깁고 얽어매는지
밭이랑을 걷는 맨발이 뜨겁다.
산 안개와 들 안개
떼를 지어
볼록볼록 돋은 꽃눈을 뜯어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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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자문자답 1
구연배
당신은
달빛소리에 귀 기울이다가
울컥해서
마음의 편지를 쓰고
나는
울컥해서
달빛소리에 귀 기울이다가
편지에 마음을 쓴다
헤어져 다만 그리운 채로
너는 허공을 건넜고
나는 밤을 건넜다
밤새 당신을 자문자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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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잠들어도 그리움은 쉬는 날이 없네
구연배
당신은 나를 위해
단 한 번도 깨끗한 얼굴로 다가오지 않았네.
때묻고 땀 젖은 모습이어도
그림자 짙게 드리워진 당신의 넓은 등이
하얗게 빛나도록 닦아드리리니
아주 가끔씩 일지라도
나를 찾는 그 마음 내 알기에
뼈가 닳는 아픔도
살 깎이는 고통도 기꺼이 즐겁네.
거품이 되어 슬픔을 안으로 감추는 동안
당신은 나를 말끔히 씻어내네.
오, 티 없이 맑은 당신. 이제 나
그대 마음 속 그늘도 지워버리고
생생히 윤(潤)을 내리니
흙 묻은 모습으로 다가와 눈부신 속속들이
깊고 그윽한 향기로 남아
그대 우울한 머리맡을 떠나지 않으려네.
꿈꾸소서, 끝없이 나를 덜어냄으로
고이는 행복
잠들어도 그리움은 쉬는 날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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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장 맛
구연배
간장독에
고인 달
몸 바꿔가며
익고 있다
몇 보름
몇 그믐을 견뎌야
장으로 우러날까
간장 맛은 달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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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지는 꽃
구연배
하르르 떨어진 꽃잎이
반기던 걸음에 짓밟히고
서운한 어떤 것은 진물을 흘리는
꽃나무 그늘에 가면
그 날 그 밤의 환하던 몸이
어금니 깨물고
어떻게 세월 속으로 녹아들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숨을 멈추고
제대로 한 번 뜨거운 목숨이 되게 하신
그 짧은 열정으로
비로소 긍휼한 삶이 열리느니
그런 까닭에
꽃 같은 사랑을 받는 일은 언제나
쓸쓸하고 황홀한 것!
발등에 떨어지는
꽃잎의 얘기를 자분자분 듣다보면
상처는
저절로 아무는 게 아니라
스스로 채우는 그리움이란 걸
알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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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직립이 불편하다
구연배
보약 먹는 셈이라 해서
등산 갔다
무릎은 시지
숨은 가쁘지
장딴지는 땅기지
땀은 퍼붓지
앞으로 5°허리 숙여
하나 둘 하나 둘
山도 生도
고지가 저긴데
직립이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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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진달래
구연배
눈멀었어라.
범람하는 붉은 꽃 빛에 그만
약시의 눈동자 캄캄하게 눈멀었어라.
멍들었어라.
진달래 꽃잎 따먹고 밤새
울어 쌓는 소쩍새 파랗게 멍들었어라.
어이없이 길을 잃은 누이에게는
헤엄쳐 나가지 못할 꽃 사태
황톳길 언덕이 힘없이 무너지고
처마까지 차 오르는 붉은 산그늘
봄이 오면 꽃 사태에 깔려죽은 예쁜 내 누이
무더기로 떠내려 오고
곱디고운 사람들 기다리는 오월
홀연히 떠내려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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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철 새
구연배
황도의 기울기를 어떻게 알았을까
여름 숲의 새들
무리지어 날며 떠날 채비를 한다.
봄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광막한 언덕에 노래를 더하고
잊혀진 나무와 꽃들을 기쁘게 하더니
풀잎 끝에 차가운 이슬 맺히고
그늘마다 서늘한 깊이를 더하는 처서 아침,
훌훌 털고 숲을 빠져나간다.
다 있어도 노래가 없으면 삭막한 세상 잔치에
짧게 때로는 길게
따뜻한 풍경이 되게 했던 새떼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는 듯
집 한 채 갖지 않은 두견이
울음 한 번 울어 주지 않고 휙!
허공을 긋고 멀리 사라진다.
떠나는 것은 새들인데
나만 슬피 회한을 갖는다.
저만치서 가을이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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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첫눈
구연배
기다리던 전보이고 설레는 만남이다.
하늘 가득 쌓아둔
그리움을 펄펄 날리는 언표
그러므로 첫눈은
대지에 쓰는 연서다.
들판의 백지에
상형문자 같은 나무들이 전하는 이야기가
그대 창가에 쌓여
말로는 다 하지 못한
비밀한 눈빛을 해석할 줄 알고
내 가슴에 지워지지 않은 발자국을 찍은
당신이
오늘 밤 첫눈처럼 찾아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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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청음
구연배
지렁이 울음소리 듣느라
밤잠을 놓친
새벽 이브자리
앞산이 밝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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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초승달
구연배
한 달에 한 번
제 몸을 업고
하늘을 건너야 할 업보 있어
다 상한 몸을
굽은 허리에 얹고
서산에 누웠다
무겁다고 내가 나를 버릴 수 있나
미친 걸음으로 밟고 간 허공 구만리
오늘밤만 넘기면
이승 길 환하게 열리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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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추신
구연배
밤새워 쓰고도
빠뜨린 마음 있어
눈길 발자국 찍듯
꾹꾹 눌러 적은
추신 한 줄
떨치지 못한 간절함
동봉해 놓고
군더더기 아닐까
가슴 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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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파도여 파도여
구연배
파도가
바람을 타고 떠내려 온다
더 이상 갈 곳도
숨을 곳도 없는 바다를 주름잡는 파도는
자유를 사랑한 보헤미안
재갈을 거부하는 야생마다.
울어라 파도여
울부짖어라
너를 가둔 바다의
검푸른 심장이 항복할 때까지
너를 홀대한 세상
지저분한 몰지성이 사라질 때까지
소리쳐 울고 부셔버려라
숙명은 없다
내 안의 파도가 나를 치며
성난 맹수처럼 달려들 뿐
그러나 꺾이지 않는 무릎으로
끝내 바다를 건너리라.
건너 주리라 파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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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풍경
구연배
한번을 다녀가도
마음 같은 것말고
껴안을 수 있는 몸으로 와주시는
당신이 눈물납니다.
무시로 나를 흔드는 이여
당신의 손길 닿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아, 나도 모르게
노래로 울음으로 황홀케 하시니
고맙습니다.
한 아름 안고 토닥이며
사랑에 겨워하시는 말씀이
심금을 울립니다.
사랑은
눈뜨자마자
그 사람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마음의 풍경을
가슴에 내다 거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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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풍장
구연배
어떻게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라지느냐를 생각한다.
바람을 읽고
바람과 싸우다
바람에 눕는 가벼움이라니,
마지막 숨을 찍는
낙엽의 투신이 긍휼하다.
나무처럼
내가나를 풍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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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하늘수박 꽃
구연배
치정이라 욕하지 마라
그대를 칭칭 감고도 모자라
뿌리까지 감아버린 실팍한 인연이다
욕정이라 비웃지 마라
그대가 죽으면 나도 따라죽는
목숨건 사랑이다
삶이란
허공에 매달려서까지 키워내야 할
목숨 값이 있고
죽음으로도 바꾸지 못할
넝쿨 사랑 법이라는 게 있다
한 몸 이룰지니
극진한 사랑을 꿈꾸거든
절정의 순간 눈감지 마라
죽을지라도 감은 손 풀지 마라
나무 허리를 마음껏 죄는
하늘수박 꽃
한여름 폭염이 먼저 지치는
목하 열애 중이다
☆★☆★☆★☆★☆★☆★☆★☆★☆★☆★☆★☆★
《91》
한 문장의 봄
구연배
“초록이 펄럭인다.”
이 한 문장 써놓고
더 이상,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어
봄 숲엘 갔다.
바다에 빠져
바다는 보지 못하고
익사 직전의 깊이만 만나고 오듯
숲에 빠져
숲은 보지 못하고
아찔한 초록향기만 묻혀 왔다.
사춘기 청춘처럼
뜨거워서 아픈 봄바람과
살이 터지는 상처로 흔들리는 나무들
는개처럼 녹음이 피고
야생초들 수군수군
햇빛을 튕기며 꽃말을 터트린다.
펄럭이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햇빛 수북이 짊어진 나뭇잎
초록이었다.
☆★☆★☆★☆★☆★☆★☆★☆★☆★☆★☆★☆★
《92》
한바탕 울음
구연배
비 내리니 좋다.
뒤집어진 항아리 뚜껑이 넘치고
옴팡진 연꽃 배꼽이 넘치고
앙증맞은 달개비 잎줄기가 넘치고
논배미 물꼬가 넘치고
강둑이 넘치고
편들어 주기 힘든 슬픔도 넘친다.
수런대던 잡담들 떠내려가고
쓸쓸한 빈터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차오른다.
흐리다 만 하늘도 한 바탕 울음
깨끗이 비워지니 가볍겠다.
☆★☆★☆★☆★☆★☆★☆★☆★☆★☆★☆★☆★
《93》
항로를 찾아서
구연배
나사는 곳 하늘 위
항로가 있는지
비행기가 지나간다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신작로 버스처럼
흰 연기를 내뿜으며 날아가는 비행기
조용한 동네가 들썩이고
그 설렘으로
마음의 버스를 훔쳐 타고 떠났듯이
저 비행기 타고
맑고 가난한 오지
그대 사는 곳으로 날아가고 싶다
항로를 찾아서
하늘로 껑충 뛰어올라
가뭇없이 사라지고 싶다.
☆★☆★☆★☆★☆★☆★☆★☆★☆★☆★☆★☆★
《94》
해빙
구연배
당신
말 한 마디에 풀어지는
얼음 있다
당신
눈빛 한 줌에 넉넉해지는
가슴 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슬픔과 기쁨
노래 한 소절
당신
안부 편지 한 통에 꽃피는
봄 있다.
☆★☆★☆★☆★☆★☆★☆★☆★☆★☆★☆★☆★
《95》
해오라기
구연배
중심을 꿰뚫어
생각나무 한 그루 심어놓을 듯
바위에 앉아
혼신의 힘을 쏟아 붓는 해오라기
강물이 잠시 굽이칠 때
미동도 않던 눈꺼풀이 깜빡
닫혔다 열린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
물고기 한 마리
그림자 질 틈도 없이
쏜살처럼 달아나고
날개를 폈다 접는 해오라기
깊고 쓸쓸한 숨소리가
강물 위에 멎는다
☆★☆★☆★☆★☆★☆★☆★☆★☆★☆★☆★☆★
《96》
화전놀이
구연배
마음이 데인 것으로는
성이 안 차서
곱게 부쳐먹는다.
뱃속에서 그 꽃이 피면
그 날은 뒤집어지는 날
환장도 좋은 꽃놀이 패다.
☆★☆★☆★☆★☆★☆★☆★☆★☆★☆★☆★☆★
《97》
훈계
구연배
가볍게 드나들 것.
소박하지만 난 늘 실패다.
집으로 돌아올 땐 주머니 가득
구겨진 지폐와
온기 없이 나눈 차가운 악수
그리고 한 없이 얇은 희망 부스러기들뿐
깔끔하게 오늘 하루와 결별하는 데 실패했다.
주머니가 깨끗한 사람이 되고 싶다.
종잇장처럼 가볍게 나를 내려놓고 싶다.
더 크고 넓고 높은 것을 쫒아
정신 없이 세상을 구겨 넣는 자신과
몇 번이나 마주했던가.
이젠 염치도 없고 부끄러움도 모른다.
겨우 한다는 짓이
구석진 방에 퍼질러앉아
구겨진 지폐를 다려 통장에 담고
서늘해진 손등을 비벼 온기를 충전하고
은총에 눈감아 버리고 희희낙락!
목숨치고는 실로 가소롭고 가련하다.
☆★☆★☆★☆★☆★☆★☆★☆★☆★☆★☆★☆★
《98》
휴식
구연배
한낮의 나무그늘에 마음을 내려놓고
웃자란 생각들을 다듬는데
오늘 숲엔 새들이 몰려들어 귀가 아프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울음은 극렬하고 나래 짓 또한 거칠고 위험하다.
나무둥치를 뻥! 찼다.
포르릉, 그늘을 물고 날아가는 새떼들.
숲은 적막하고
흔들렸던가, 휘청거리는 나무 아래로
쏟아지는 금침의 따가운 햇살.
이발한 날처럼
그늘에 앉아 생각이 졸다 온 날은
하루 종일 상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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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흐르는 풍경
구연배
창밖은 언제나 붐빈다.
스러지고 일어서는 것들
작고 투명한 유리창 안에 들어와
흔들리고 있다.
쓰러짐으로 일어서는 것들을 밀어올리고
일어섬으로 쓰러지는 것들을 껴안은
따뜻한 세상.
흔들린다는 것은 그러므로
삶과 죽음의 중간쯤에서 나부끼는
역동의 몸부림이다.
살아 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의식의 끄트머리에 매달려
늘 목마른 사람들은
무너질 것을 예비하고
일어설 것을 준비하며 흔들리는
창밖의 세상을 쓸쓸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고 감이 아름다운 세월이 꽃수레에
제 몸을 싣고 묵묵히 따라 흐를 뿐
흐르며 저도 세상도
까마득히 잊고 잊혀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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