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인터넷을 서핑하다 개같은 글을 하나 읽었습니다. 아니니 다를까 신라사관 주창자로
고구려는 한국사가 아니다라고 지 나름대로 자료를 제시하며 씨부리고 있는데 빼도박도 못하게 반박 좀 해주세요.
댓글로 아무리 말해도 고구려가 한국사인 근거 대라고 씨부리기만 하니 참 어이가 없더군요.
고수분들께서 제 글에 댓글이나 답글 중 아무 형식으로나 반박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한국은 신라가 모체가 된 나라로서, 고구려사를 자국사로 주장할 근거가 없다. 신라와 고구려는 서로가 다른 민족이었다. 735년까지 신라는 경기도 이북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곳의 고구려 주민은 전부 중국,발해로 갔으며 신라가 흡수한 고구려 유민은 전라도 익산 하나에 몰아넣을만큼 그 수가 미약했다. 신라는 고구려 땅도 차지못했고, 유민도 차지못했다. 고구려와 같은 민족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고구려사가 한국사가 되는가?
역사란 사물이 형성되는 과정이라고 이해할때, 중국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고구려 말갈 등의 토지와 인민은 모두 현대 중국을 형성하는 재료가 되었다. 그들의 영토는 대부분 중국의 영토가 되었고, 그 인민은 중국 소수민족의 조상이 되었다. 따라서 고구려사 발해사 등은 당연히 중국사의 일부다.
고구려가 한국사라는 근거가 뭔가? 예맥족 부여족 등 고구려의 주 종족이 삼국통일로 신라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같은 민족이 됐고 한국사라는 것이다. 그런데 신라가 고구려를 통일하지 않았다면 그같은 주장은 결정적인 근거를 잃게 된다. 이에 대해 '국사' 교과서는 '통일신라시대' 대신 '남북국시대'로 시대구분을 함으로써 신라의 고구려 통일을 부정하였다. 실제 신라는 고구려를 통일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인은 예맥이나 부여의 후손이 아니다.
어글리 코리안(대륙빠)들의 역사 날조.
1. 고구려는 강대한 독립국이었다? 凸
2. KOREA라는 이름은 고구려를 계승했으므로 고구려는 한국사다? 凸
3. 고구려와 신라는 고조선에서 갈라져 나온 같은 민족이었으므로 고구려는 한국사다? 凸
4. 발해=고구려인데, 발해 유민이 10만명 고려에 내투했으므로, 고구려사는 한국사다? 凸
5. 통일신라엔 고구려 유민이 매우 매우 많았다? 凸
6. 고구려는 한국 땅에서 활동한 한국 국가였다? 凸
1.한국사학계는 고구려가 중국 정사의 '열전'에 기재된 외국, 혹은 독립국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사라고 주장 하는데, 이것은 궤변이다. 고구려 이외의 허다한 독립적 강대 국가들, 예컨대, 흉노 돌궐 북위 몽원 요 금 만청 등도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되어 왔다. 과거의 중국을 기준으로 고구려를 중국과 구별 하는건 옳지 않다. 진 목공은 서융으로 취급받아 중국 제후의 회맹에도 참여하지 못했으며, 제나라를 연 강태공은 동이족이었다. 초나라는 남만으로 불렸으며, 초 장왕은 스스로를 '만이蠻夷'로 자처했다. 그렇지만 관중(진) 산동(제) 형주(초)가 현재 엄연한 중국이고 그곳의 역사는 중국사이듯이, 고구려 역시 '이적夷狄'이 지배한 만맥지향蠻貊之鄕 이었지만, 현재는 엄연히 중국사이다.
참고)고구려가 강대한 자주국가였다는 것은 잠꼬대에 불과하다. 동아시아에는 춘추시대 이래로 자소사대의 원리가 국제외교의 원칙으로 자리했는데, 이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의 명령을 받고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구제해주는 시스템으로,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의 모든 국가는 이 원칙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고구려 역시 중원 국가에게 절대 자주적이지 않았다. 사실 고구려는 조공의 달인이었다. 오죽하면 위서魏書의 찬자들이 "(장수왕 시절) 고려는 매년 공직을 닦아, 동쪽 번국들 가운데서 으뜸이었다"고 할 정도였겠는가?
2.왕건은 국호를 KOREA로 짓고 고구려를 계승했으므로 고구려는 한국사다? 그럼 이씨조선은 기자조선을 계승했으므로 이조 500년사는 중국사겠네? 이조는 기자조선을 계승하기 위해 국호마저 기자조선을 따라했다. "옛날 기자의 시대에서도 이미 조선이란 칭호가 있었으므로, 이에 감히 천자께 아뢰어 조선으로 정해주시기를 청했는데, 유음이 곧 내려졌으니 특별한 은혜가 더욱 치우쳤다"[태조실록] 이조가 단군조선을 계승했다는 억지는 부리지 말자. 기자사당에 합사되어 부록처럼 취급받다가 한참 뒤에야 독립된 사당이 지어졌지만, 제사의 격은 현저히 낮아서 기자에게 일년 24번 제사하는 동안 단군에게는 단2회만 제사하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그나마 세조시대를 고비로 단군 계승의식은 사대부들 사이에서 완전 퇴조하고 만다.
러시아 이반3세는 비잔틴제국의 황녀와 결혼한뒤 황제 칭호를 '짜르(어원은 라틴어)'로 칭했으며, 로마제국과 비잔틴제국에 이은 '제3의 로마제국'으로 자처했다. 이렇게 러시아는 로마에 대한 계승의식과 혈통이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 사람들이 로마사를 자국사로 주장하고 자신들을 로마의 후손으로 여기나?
3.조선유민이 사로육촌(신라의 전신)을 만들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은, 한민족이 단군조선과 관계있다는 뜻이 아니다. 김부식이 기절한다. 김부식 시대에는 오직 기자조선만 있었다. 김부식이 말한 조선유민은 기자조선의 유민이었고, 중국인이 한국인의 선조라는 당시의 사대모화 사상의 표현에 불과했지,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단군조선은 고려 중기에 말기에 한두번씩 나왔다. 전통 시대 '조선'하면 으례 '기자조선'이었다.
고구려는 주축이 예맥족이고, 신라는 한족인데, 예맥족과 한족이 동족이라는 근거는 전혀 없다. '동이족'이란 것도 단순 방위개념일 뿐이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한(韓)조와 왜(倭)조가 함께 있는데, 그럼 한국과 일본이 서로 동족인가? [이조실록]에는 '동이 평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외람되이 환란을 일으켰다'거나, 원숭환이 명 황제에게 '동이(누르하치)를 쳐서 요동을 회복하겠다'는 말이 나오는데, 그럼 일본과 만주족이 같은 민족인가?
4.발해 유민 10만명을 흡수해서 한국사라면, 발해사는 더더욱 중국사다. 왜냐면 중국은 발해 군인만 최하 수십만을 얻었으므로. 발해를 고구려의 별종이라고 기록한 [구당서]외의 모든 사료가 발해를 말갈국가로 기록했다. 그런데 말갈은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고구려에 동화되지 않은 민족이었다. 지금도 남북한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발해를 한국사로 인정하지 않는다.
참고) "아보기는 발해왕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5천리 땅과 수십 만의 병력을 얻었다"[요사]. "(태조가 이르기를), '여진과 발해는 본래 같은 일가라'고 했는데, 이는 처음에는 모두 물길 7부였기 때문이다"[금사]. 금나라는 해릉왕과 세종의 모계가 모두 발해계였다. 고려가 발해유민들을 천민구역에 격리시킨 것과는 달리, 금나라는 발해인에게 동족의식을 가지고 우대했다.
5.당서에 따르면, 성력2년(699년) 보장왕의 아들 덕무를 요동의 안동도독으로 임명해서 고구려 유민을 다스리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고구려인들은 전부 돌궐, 발해로 가버려서 고씨의 왕통이 끊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바로 698년에 발해가 건국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신라가 차지한 고구려 영토의 고구려 유민 역시 발해로 이동했음이 확실하다. 신라는 735년에, 발해가 건국된지 수십년 뒤에 패강 이남을 차지했는데, 수십년동안 그 곳의 고구려 유민들이 국가 행정력도 안 미치는 그곳에서 보호도 안받고 살수 있겠는가? 전부 발해로 갔지.. 따라서 신라가 고구려 영토를 일부 차지했지만, 유민은 차지하지 못했고, 한국에서 고구려계는 없다.
6.고대에는 평양이 한국이 아니었다. 따라서 고구려를 한국 국가로 볼 수 없다. 평양에 살던 고구려 영양왕은, 자신을 '똥 같이 더러운 요동에 사는 신하 아무개'라고 했으며, 고구려를 정벌하는 신라 문무왕은 '요동을 치러 간다'고 했다. 삼국시대까지 북한 지방은 요동이었지 절대 한민족의 땅, 한국이 아니었다. 고대 한국은 한강 이남의 성읍 국가를 가리키는 것이고, 한강 이북의 경기 황해 평안 함경은 한국이 아니었다. 심지어 충청이북까지 한국이 아니었다는 주장(나)도 있다.
요동사는 한국사도 아니고 중국사도 아닌 제3의 영역인가? 김한규 교수는 '동북' '만주'라는 용어의 지리적 범위가 '요동'과 근사하지만 애국주의자들과 일제어용문인에 의해 남용된 용례라며, 오랜 역사적 용어인 '요동'으로 부를 것을 주장했다. 즉 '요동사'란 지리적으로 '동북사'와 같으니, 곧 중국사이다.
참고)한반도 북부가 중국(요동)이었다는 증거
중국 학계의 가장 대표적인 '동북사' 연구자였던 김육불은 그의 불후의 저술 '동북통사' 상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북의 다른 이름 가운데 하나로서 요동이라는 이름이 있다. 동북의 땅은 옛날에는 요동이라 칭하였고 그 기원이 매우 오래되었다..."
요동은 지명과 군명을 동시에 겸했다. 지명으로 사용될 때는 만주 전역과 북한 땅 모두가 포함되었다. 고구려인들도 한반도 북부가 요동이라고 생각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평안도 평양에 살던 고구려 영양왕은 수 문제에게 자신을 "똥 같이 더러운 요동에 사는 신하"라고 소개하며 분명히 평안도 지역을 요동이라 표현했다. 반대로 수 당 시대 중국이 평양에 웅거한 고구려를 정벌할때는 '정요동' 혹은 '사요동'이라 했다. 신라 문무왕 역시 고구려를 치는 것을 '요동을 치러간다'고 하였다.
진한 양대에는 요동군(군명으로 사용된 예), 현도군(자강도 함경도), 낙랑군(평안도) 대방군(황해도) 등지를 모두 아울러 '요동'이라 불렀다. 후한서 군국지는 "대방현(황해도 봉산군)은 요동에 속했다"고 했으며 거기서 대방태수 장무이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이병도는 경기도 역시 대방군에 속했다고 한다. 요동 공손강은 낙랑을 분리해 남쪽에 대방군(帶防郡)을 설치했는데, 한강 이북까지였다고 한다. 한강은 원래 대수(帶水)라고 불렸다. 그런데 중국사책에는 백제가 대방에서 건국되었다고 하는데, 백제 건국지로, 경기도 광주, 천안 등이 거론되므로, 이 지역이 모두 대방군이었다는 주장(나)이 있는 것이다.
자치통감 진기에서는 "건흥 원년(313년)에 요동의 장통이 낙랑(평안도) 대방(황해도) 2군에 의지하며 고구려왕 을불리(미천왕)와 해를 이어 서로 공격하다가 형세가 불리하여 그 民 천여 家를 거느리고 모용외에게 의탁하게 되었다"고 함으로써, 평안 황해도가 '요동'이라 불렸음을 입증했으며, 역시
후한서 광무제기의 "건무 6년 초에 낙랑사람 왕조가 군에 의거하여 불복하였다"는 기사를 당나라 사람 이현이 주해하면서, "낙랑군(평안도 황해도)은 옛 조선국으로, 요동에 있었다"고 하였다. 이 말은 낙랑군이 대륙(요동)에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평안도 황해도 등이 요동에 포함되었다는 뜻이다.
신원사 포선만노전에서는 (동북3성지역인)요녕성과 길림성 일대를 점유한 금 말의 동하국을 가리켜 '요동'이라 칭하고 그것에 대한 공격을 정요동이라 했다.
명 태조가 고려왕 우에게 "(강원도 이북의)철령 이북은 요동이 통할하고, 철령 남쪽은 고려에서 통할할 것"을 요구했을 때의 요동 역시 광의의 요동을 가리킨다. 명대의 '요동지'에서는 "요동은 요서를 겸하였다" 했고,
청대의 요동도 광역의 지리적 범주를 표시했다. 예컨대 해룡현지 권2에서는 청말 동북3성 방면의 정치적 위기 상황을 설명하면서 "봉화 연기가 요동 전역에서 피어올랐다"고 하였다.
이처럼 진한 이후 청대에 이르기까지 요동의 범주는 대체로 산해관 이동에서 만주 북한까지였다. 요동에 대한 이러한 용례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인들은 요동에 대한 기록에서 '대륙설'이란 판타지를 창조하기도 한다. 한 예로 역사학자 이덕일은, '경기도는 중국 대방군'이라는 이병도의 설을 반박하고자 군국지를 인용해 대방군이 요동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기도는 요동에 포함됐기 때문에 군국지와 이병도의 설은 모순되지 않는다.
첫댓글 위의 주장은 백제의 중시조인 위구태설을 중심으로 하여 백제 한성의 위치로 대방의 위치를 찾는 것입니다.
현재의 학계에서는 백제 한성의 위치를 한강유역으로 보기 때문에 공손씨의 대방의 위치가 따라서 황해도로 남하하는 것으로써 여기에 대한 답변의 책임은 사학계인 강단이 져야 합니다.
먼저 공손씨의 대방의 위치를 밝히면 백제의 위치도 밝힐 수 있는데, 백제의 위치를 학계가 스스로 한강유역으로 한정한 탓에 황해도가 대방이 되고 평안도가 낙랑이 됩니다.
드라마 근초고왕에서도 역시 이런 설을 따르고 있는데 뭐라 딱히 꼬집을 말이 없습니다.
잘못된 학설에서 파생된 것이기에 우리의 학계로서는 자기모순을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중국의 사서에서 보이는 백제와 북위와의 전쟁, 백제 고이왕(백제본기 기준), 책계왕, 분서왕, 위덕왕과 성왕대의 수나라와 백제의 위치. 신구당서에 보이는 백제는 신라와 발해말갈로 나뉘었다는 기록은 위의 기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기록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조선이라 뭉텅거려 말하는 것은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3종이 있다.
삼한은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이 위만에게 습격을 당하여 남으로 한의 땅에 이르러 세운 나라이며 백제, 신라, 금관국에게 멸망하여 계승되었다.
그러므로 마한은 서쪽에 진한은 동쪽에 변한은 남쪽에 있으므로 백제, 신라, 가야의 영토와 유사함이 있다.
고구려의 평양은 옛 왕검성이다. 위만의 왕험성이 아니다.
평양은 전한의 낙랑군이며, 후한의 낙랑군이 아니다.
뒷날 이맥(맥족)의 침입을 받아 구려의 서북으로 옮겼다.
여기서 맥족이란 훗날의 최리낙랑이다.
맥에는 3종이 있으니 맥, 양맥, 소수맥이라 한다. 평양이 곧 맥이다.
예국의 서쪽에 낙랑이 있는데 곧 최리낙랑을 말하는 것이고 통칭하여 예맥이라고 한다.
예국은 한무제가 설치하려고 하였던 창해군의 땅이며 수년후에 파하게 되었는데, 예군 남려의 땅이다.
이들은 곧 진나라 진시황때 역을 피하여 달아났는데 기자조선(마한)이 마한의 동쪽을 분할하여 살게 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남옥저의 땅 곧 죽령 이남의 땅이다. 이곳의 남쪽이 진한 곧 신라의 고지다.
죽령(남옥저)의 길은 고구려의 신라의 교통로로 발해 남경남해부다.
중국의 漢族과 맥족은 근본이 다릅니다. 핏줄도 그렇고 언어도 그렇습니다. 요동을 만주, 북한을 포함한다고 정의를 해도 그 요동은 고구려의 故地이고 金의 고지이고 元의 고지이고 淸의 고지이지 중국의 영토가 아니었습니다. 몽고족이나 거란이나 만주족은 우리의 형제족이지 漢族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민족입니다. 맥족은 만주에서 한강변까지의 넓은 지역에 살았습니다. 고구려 멸망 후 일부 맥족이 중국으로 강제 이주되었지만 오늘날 중국에서 맥족의 후손은 전체 인구의 10분의 1도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인구 중에는 그 후손이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인은 말하자면 韓族과 맥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국이 고구려를 자신들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지하에 있는 고구려사람들이 들으면 통탄할 것입니다. 그리고 후손인 우리가 못난 것을 한탄할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요하 동쪽의 요동 전체가 중국령이지만 그곳은 우리의 고지이고 언젠가 우리가 수복해야 할 땅임에 틀림없습니다. 元. 明. 淸代의 중국인들은 만주와 한반도를 포함한 요동 전체를 三韓이라고 불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