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폴더에 올렸습니다. 아이디는 21romeo 입니다.
2004년도 작품이고 스케일은 그리 크진 않지만 재밌더군요.
로마군단병은 레기오나리 코호르트처럼 보이더군요. 근데 게임과는 달리
갑옷이나 장비가 상당히 허뎝해 보이는 -ㅅ-;;
암튼 로마에 관심있는 분들께 강추 입니당!~
스파르타쿠스 Spartacus ?~BC 71.
트라키아에서 출생하였다. 중부 이탈리아 카푸아의 노예 검투사(劍鬪士) 양성소에 소속된 검투사였는데, BC 73년 70여 명의 동료 노예와 함께 양성소를 탈출, 목자(牧者) ·농노(農奴) ·빈농(貧農)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정부에서 보낸 진압군 2개 군단을 차례로 격파하고 남부 이탈리아를 지배, 전성기에는 군세가 12만 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남이탈리아에서 시칠리아섬으로 건너가려다가 실패하고, BC 71년 원로원에서 파견된 크라수스의 군단에게 루카니아에서 패사(敗死)하였다. 이 반란은 로마의 지배계급을 전율시켰으며, 후에 그에 관한 갖가지 전설이 생겨났다.
스파르타쿠스의 난과 노예제도
미항 나폴리 북쪽 2마일 지점에 잇는 도시 카푸아에 살던 렌툴루스 바티아테스라는 사람은 수백명의 검투 노예를 갖고 있었는데, 노예들에 대한 대우가 매우 잔학하였다. 그의 검투 노예 중의 하나였던 이가 바로 쓰라키아 출신의 스파르타쿠스였다.
그는 대담하고 지혜를 갖춘 고상한 바탕의 지도자적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끄는 일단(70여명 정도)의 검투사들은 BC 73년 카푸아에서 병사를 뛰쳐나온 후, 베수비오스 화산 기슭에 정착하여 조직적인 무장 집단으로 성장하였는데, 전성기에는 10만의 병력에 달하였다고 한다. 마리우스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와 있던 킴브리아 족과 튜톤족, 쓰라키아인 들이 이들 무장 집단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
고도로 훈련받은 검투사들이 지휘하는 이들의 군대에 로마 군대들은 연패하기에 이르렀다. 정무관 클로디우스, 바리누스 등과 집정관 렌툴루스 등이 이끄는 로마 군대들이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노예군대에 계속 패하게 되자, BC 71년 드디어 로마에서는 삼두 정치가의 일인이었던 크랏수스를 토벌 대장으로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스파르타쿠스는 로마를 벗어날 것을 결심하고 고향을 향해 북쪽으로 향하였고, 실제로 갈리아 키살리나에 까지 도착하였으나, 웬일인지 (식량의 부족, 혹은 그의 노예군 대다수가 이탈리아에 머물기를 원하였다고도 함) 다시 이탈리아로 되돌아 왔다. 그 후 시칠리아 섬으로 건너가서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자기들을 섬으로 실어줄 배를 빌리기로 소아시아 실리시아 해적들과 계약을 맺었으나, 해적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드디어 그의 군대는 레기움에서 크랏수스의 군대, 이어서 폼페이우스 군대에 의해 궤멸되었다. 스파르타쿠스는 전사하고, 포로가 된 6000여명이 아피아 가도에서 모두 십자가 형에 처해 짐으로써 3년여에 걸친 이들의 봉기는 끝이 나게 되었다.
이후 노예 하나가 주인을 살해하면 그 가정에 있는 노예 전원을, 설사 그것이 몇백명이 된다 하더라도, 사형에 처한다는 내용의 엄격한 법률이 선포되었다. 커크 더그라스와 진 시몬스 주연의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스파르타쿠스는, 공산주의자 카알 마르크스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스파르타쿠스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프롤레타리아 봉기를 뒤에서 후원하는 일종의 상징적 존재로 간주되었으며, 독일 공산당은 제 1차 세계 대전 말기에 결성된 스파르타쿠스단에서 나타난 것이다.
로마인들 사이에 '모든 노예는 적'이라는 말이나 '주인의 허락없이 발을 내미는 노예는 100번의 매질을 가한다'라는 말도 생겼지만, 그러나 스파르타쿠스의 난에서 불 수 있는 검노나 라티푼디움 노예들이 전반적인 노예의 상은 아니다. 로마시대의 노예계층은 노동자 계층이나, 일정 카스트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살아있는 도구'로서의 일정한 형태를 가진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사회 각 분야에 폭넓게 산재해 있었다. 대체로 광산 노예나 농장노예는 그 생활이 비참하였으나, 가내 노예, 숙련 노예 등 많은 노예들이 상당한 부를 누렸고, 높은 행정적, 재정적 지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많은 로마시민들은, 아주 가난하지 않다면, 적어도 한명의 노예를 소유하였다. 노예의 별명은 'Statius', 즉 '서서 기다리는 자'로서 주인의 명령을 대기하는 노예의 삶을 상징적으로 잘 드러낸다. 특히 가내 노예의 경우 사랑도 우정도 아니지만, 주종간에 특별한 애정관계가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노예 유모에게서 양육받고, 노예 스승에게 배우고 노예 친구와 놀고, 성욕을 손쉽게 채워주는 대상이었으며, 죽을 때 주인의 자살까지 도와주는 노예 없는 사람은, 마치 무기없는 군인과 같이, 벌거벗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노예의 존재는 처음 전쟁 포로, 영아 유기, 자식 매각의 관습 등에서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노예란 말 'servus' 의 어원이 'servare[(장군이 포로의 목숨을) 살려주다]'에서 나온 것으로도 추측할 수 있다. 부채 노예도 있었는데, 시민이 빚에 쪼들려 노예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Poetelia Papiria법(326BC)이 생겨 부채 노예제를 폐지하기도 하였다.
기원전 4세기 이래는 구매 노예들이 대량으로 나타났다. 로마인들은 비용이 많이 드는 양육노예보다는 구매 노예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였는데, M.Weber는 이를 가리켜, "노예 보충은 노예를 계속 구매하는 데 의존한다. 고대의 노예제경영은 근대의 석탄 용광로가 석탄을 소비하듯 노예를 소모시킨다."고 하였다.
노예인구의 추정은 사료의 부족과 방법론의 차이 때문에 학자마다 다르며, 그리고 물론 시기에 따라 큰 폭으로 변동하였다. T. Franks는 기원전 209년경 전체 인구 180만명-270만명, 노예수 27만 정도로 본데 비해, P.A. Brunt는 기원전 225년 경 전체인구를 500만 정도로, 노예수를 60만 정도로 보고 있다. 대체로 기원전 220년경에는 총 노예수는 30만에서 60만 정도, 총 인구에 대한 노예비율은 10-15% 정도였다고 보여진다. 다시 P.A. Brunt에 의하면, 기원전 43-2년경이 되면, 전체 인구 750만, 노예수 200만 -400만, 총 인구에 대한 노예비율은 40%정도로 노예는 증가일로에 있었다.
그 이유로서는 전쟁포로의 증가, 양육노예의 증가. 노예무역의 흥성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노예무역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노예시장으로는 지중해 동부나 델로스 섬이 유명하였고, 이곳에서는 하루 일만명의 노예가 이탈리아로 매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대체적인 노예 가격으로는 네로 황제 시기의 Petronius에 의하면 재치있는 유태인 한 소년의 가격 300 데나리우스라고 쓰고 있고, Horatius는 저질의 보통 노예의 값은 500드라크마(* 450 드라크마= 600 데나리우스, 끝에 첨부된 부록 참조)라고 기술하고 있다. Martialis에 의하면 창녀 1명의 가격은 600데나리우스, 희랍어 교육을 받은 미소년은 2000 데나리우스였다고 한다.
따라서 제정 초기 미숙련 성인의 보통가격은 대체로 500-600 데나리우스였는데, 참고로 그 당시 로마 병사의 1년 양식비는 60 데나리우스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해방되는 노예들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았으며, 단지 예외적으로만 피해방민에게 시민권이 주어졌는데 비해, 로마의 경우에는 노예 해방이 더욱 빈번하였고, 또한 노예 해방자에게 시민권이 주어졌다. 그 이유는 아마 도 로마인들의 개방적 성격이나, 전쟁시 병력 보충의 필요성으로 노예 및 종속자들의 지지가 필요하였던 데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는 이방인들을 로마 사회에 통합시키는 역할도 하였을 것이다. 후일 Manlia법에서는 주인이 노예 해방시 노예가치의 5%에 해당하는 노예 해방세를 납부하도록하는 하는 등 여러 노예제에 관한 사회적 규제들이 나타났다.
노예의 종류로서는 먼저 농장 노예가 있다. 초기 이들 노예의 상태는 고된 작업의 연속. 가혹하고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는데, 기원전 2세기 전반 카토는 "늙은 황소와 출산력이 없 양, 낡은 수레, 낡은 농기구, 늙은 노예, 병든 노예 등은 판매하라"고 충고하고 있다, 그 다음 가내 노예이다. 이들은 청소, 요리, 시중, 정원 관리, 회계, 서기, 유모, 가정 교사 등이며 가장 좋은 대우를 받았고 운이 좋으면 양자로 입양되었다. 검투사노예도 있었는데, 이들은 훈련이 가혹하였으나 운이 좋으면 최고의 인기를 누렸으며, 자유인이 될 수도 있었다.
광산 노예들은 죄수 노예들이 많았으며 가장 가혹한 대우를 받았으므로, 오히려 죽기를 선호하였다고 Diodoros는 증언하고 있다. 그 외 상업 및 수공업자 노예 등도 있었다. 이렇듯 노예의 층은 다양하였으며, 그 종류에 따라 생활의 질이 판이하게 달랐다.
대체적으로 노예는 가족이 없고, 재산(cf. peculium)도 없고, 종교생활도 어렵사리 인정되었으며, 신분은 세습되었다. 노예의 해방을 "vindicta"라고 하였는데, 이는 호구 조사과정을 통한 불법적(으로 소유된) 노예의 자유화, 혹은 유언 등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적어도 법적 견지에서 노예는 물건 혹은 동물로 간주되었는데, 울피아누스는 "시민법에 관해서는 노예는 무인격으로 간주된다."(혹은 "노예는 아무런 인격도 소유하지 않는다." Instilutes, I, 16.4)라고 하였다. 스파르타쿠스 난 이후 노예들의 처지가 조금 개선되었다고 하는데, 노예주들은 당근과 채찍 정책을 병행하여, 한편으로는 노예에 낙인 혹은 목걸이 착용시킨다든지 지하 감독 운영하면서도, 동시에 노예 처우를 개선하였다. 예컨대, Varo는 감독 노예에게 보상이나 특유 재산(peculium) 허용할 것이며, 일반 노예들도 채찍보다 회유책 쓸 것을 조언하고 있다. Columela도 농장 주인들이 "스스로 노예들의 빵맛을 보고 음료를 마셔볼 것... "을 충고하고 있다.
또 기원 후 2세기 가이우스의 {제도집}에서는 이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I,52. (옛날에는) 이처럼 노예들은 자기 주인의 권위 아래 있었다. 이 권위는 사실상 만민법에 속하는 것이었다. ... 주인들은 노예들에 대해서 생살 여탈권을 보유했다. 그리고 노예의 것은 모두 주인의 것이었다.
I,53. 그러나 오늘날에는 로마 시민이건 아니면 로마 제국 영내의 그 어느 곳에 사는 사람이건 자기 노예들을 과도하게 또는 아무런 이유없이 학대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주인의 지나친 엄격함조차도 이 군주(Antonius Pius)의 법에 의하여 처벌된다. ...황제의 이러한 조치는 두가지 이유에서 일리가 있는 것이다. 첫째 우리의 권리를 오용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둘째, 낭비자에게는 자기 재산 관리가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특히 마지막 구절을 통해서볼 때, 노예의 학대금지는 순수 인도적 차원이라기보다, 노예주 계급의 전반적 이익의 점을 들어 정당화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라고 하겠다. 노예제도는 계속 옹호되고, 계서적 사회구조는 강화되어갔는데, 小플리니우스는 서한집(IX,5)에서 "평등보다 더 불평등한 것은 없다"고 하였다.
참고 문헌)
M.I. Finley, {고대 노예제}, 김진경 역, 탐구당, 1979.
M.I. Finley, {고대 노예제도와 모던 이데올로기}, 송문현 역, 민음사, 1998.
차전환, 로마시대 노예제의 발달, {서양 고대사 강의}, 한울 아카데미, 1996.
김경현, 고대 노예제의 기원과 발전, {서양 고전학 연구}, 1, 1987.
H. 파스트, {스파르타쿠스}, 장문평역, 동녘, 1982.
P.R.C. Weaver, "Social Mobility in the Early Roman Empire : The Evidence of the
Imperial Freedmen and Slaves", Studies in Ancient Society, ed. M. I. Finley, London, 1974.
Women and Slaves in Greco-Roman Culture, Ed. S. R. Joshel, London,1998.
첫댓글 대사도 멋진게 많아요 예를들면...../당신을 사랑하는거 같아 /지금은 오직 나만이 당신의 기적이고 나만이 당신/ 이런거..재미없다는 분도 계시는데 저는 재밌더군요
예전 것인줄 알고 뒷북이라고 할라 했던 -_-;;
스파르타쿠스와 끝까지 대립하던 녀석 골족인가요~? 대략 황소고집이던데 ㅡ,ㅡ
트로이 무지 재미있었는데.. 대규모전투 정말 재미있죠..
골족인데 갈라지자 마자 죽는다는..
스토리도 좀 엉성하고..... 특히 비주얼면에선 거의 b급 3류영화던데요..-ㅁ-;; 정말 어설픈 멜로와 어설픈 스펙타클의...그야말로 어설픈 영화 -_-;;
이거 스탠리 큐브릭 감독 1960년도 작품인가 그럴꺼에요. 이번에 나온 거는 편집판
영화중에 이런대사가 나오죠,,,로마의 한 사람이아프리카 놈들은 전부 머리를 쓸줄 몰르는 놈들이야,,,,,,하지만한참뒤 하는말,,, 한니발은 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