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원, 「낸시 랭」
친구는 병풍과 같은 것 / 김홍기
페이스북 '좋아요' 버튼을 누르던 날
얼마 전 윤기원 작가의 그림을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이 그림들이 걸렸던 전시 제목은 <FRIEND
Season5: 십이지신十二支神>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주변 인물들을 그리고 해당 인물들의 이름과
별명을 작품의 타이틀로 내겁니다. '시즌 5'라고 적혀 있는 걸 보니, 이런 테마로 작품을 한 구력이
꽤나 긴 듯합니다.
미대생들이 가장 싫어하는 부탁 중 하나가 친구들이 가볍게 던지는 '내 초상화 좀 그려줘'라는 말이
랍니다. 그런데 오히려 윤기원은 친구들의 얼굴을 굵직한 선과 원색적인 컬러를 이용해 독특하게 그
려냈습니다. 특히 친구의 얼굴을 열두 폭 병풍에 붙여놓은 작품을 보고 '이것이야 말로 한국판 페이스
북'이라며 온라인의 지인들이 '좋아요' 버튼을 마구 눌러주었네요.
윤기원은 인물의 외곽선을 선명하게 처리하고 그 속을 한 가지 색으로 채웁니다. 마치 어린 시절 엄
마와 함께하던 색칠공부를 연상케 하기도 합니다. 피부색과 머리칼 빛깔도 천차만별입니다. 분홍과 짙
은 갈색, 심지어는 회색까지. 친구들의 개성을 캔버스 위에 돋을새김하기 위해 작가가 전략적으로 선
택한 색상일 것입니다.
예전 이 작품을 갤러리에서 봤을 때는 한국적 팝아트란 미명하에 앤디 워홀의 초상화 작품들을 본뜬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독창적이란 느낌도 받질 못했죠. 그래서 이름은 기억해뒀지만 저로서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던 작가였습니다. 하지만 병풍 속에 위치한 친구들의 얼굴이 유독 기억에서 지워
지지 않더군요. 왜 그는 친구들을 십이지신으로 표현해냈던 걸까요? 병풍 속 친구들의 얼굴이 마치 제
친구들처럼 다가왔습니다. 작가를 통해 그의 친구들과 소개팅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윤기원, 「유의정」
인생의 벽을 넘는 방법
한국의 십이지는 시간과 방향에서 오는 사특한 기운을 막는 수호신입니다. 현실과 초현실의 세계를 연
결하는 열두 가지의 띠 동물로 우리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통일신라시대부터입니다. 조상들은 띠 동물
을 그 짐승의 외형과 습성, 성격에 따른 의미체계에 따라 해가 바뀔 때마다 다가올 시간을 대비하고 예
측하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윤기원의 병풍 속 친구들은 띠 별로 구성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새해를 맞을 때마다의 결심을 함께 지켜나가는 우정의 연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읽어보면 어떨까요?
괴테는 생산적인 기분을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고 합니다. 예술을 창조하는 것은 예술가의 내면에
잠재하는 '자연의 힘'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내부에서 자연이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분이
내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고 하죠.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에 생산력이 축적된다고 믿었던 것
입니다. 그는 고독, 이른 아침, 봄철, 몸의 움직임, 음악이 내는 좋은 효과, 특정 빛깔 등 생산력을 끌어
올리기 위한 기술적인 세부사항의 목록을 작성하고 이것을 맘껏 누리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작가 윤
기원은 이 괴테가 만든 목록에 친구라는 가변적이고도 견고한 이중의 모습을 한 자연의 산물을 집어넣
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 윤기원이 작품 속 주인공을 선택하는 기준은 '개성'입니다. 여기서 개성은 개인적 성향이라기보
다는 작가와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각각의 빛깔을 선택했다는 뜻입니다. 그는 이 빛깔에 따라 친구의 얼
굴을 채웁니다. 작가는 말합니다. "제가 잘 아는, 잘 통하는 사람들을 택하는 것은 제가 평소에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는 거, 별로거든요. 인물들과의 소통이 있어
야 그림으로 그릴 수가 있어요. 잘 알지 못하는데 그림을 그리는 것은 뭔가 가식적인 것 같은 느낌이 들
어서요."
영어에서 생산을 뜻하는 '프로덕션 Production'은 '보이도록 끌어내다'란 뜻의 라틴어 동사 '프로두체
레Producere'에서 왔습니다. 윤기원 작가에게 친구란 그들의 개성을 끄집어내 작품으로 형상화할 수 있
는 훌륭한 재료이자 관계를 맺으며 곁에 있어줌으로써 상상력을 '생산'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친구는
우리의 삶 속에 생산적 관계를 만드는 지표가 됩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싶습니다.
윤기원, 「십이지신」
병풍 같은 친구가 되자
윤기원의 그림에서 제 시선을 사로잡은 다른 하나는 바로 병풍이라는 형식입니다. 캔버스라는 틀을 넘
어, 병풍 속 아름다운 풍경으로 친구들의 얼굴을 자리매김한 것입니다. 왜 작가는 굳이 병풍이란 오브제
를 사용한 걸까요?
병풍의 역사는 중국 한나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병풍은 동이나 목조의 넓은 판을 그대로 이용
하는 통병풍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처럼 나무로 틀을 만들고 종이나 비단을 씌워 나비 날개처럼 펼
칠 수 있도록 하는 형태로 진화한 것입니다. 외풍을 막고 공간을 만들고 그림을 넣어 장식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변한 것이죠. 병풍은 집 안에 또 다른 공간을 창조합니다. 접고 펼침을 자유롭게 하여 신축
성 있는 보호벽을 만듭니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벽을 만들고 그
안에 거주합니다. 인간은 광막한 자연에 노츌된 상태로 살아가면서 인위적으로 벽을 만들었습니다. 자
연에는 벽이 없으니까요. 인간은 벽을 통해 안과 밖, 내부와 외부라는 개념을 개발합니다. 한자의 쉴 휴
休 자를 보면 쉼이란 인간이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는 형상입니다. 이것은 인간은 등을 기댈 수 있을 때
비로소 안도감을 얻게 된다는 뜻은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의 이러한 욕망이 건축물에서 벽이란 요소를 만들게 된 것이죠. 벽mural이란 단어는 한 도시의 울타리, 나아가 보호와 안전을 의미하는 '무루스murus'
에서 왔거든요. 하지만 일상에서 벽이란 단어는 단절이나 고립, 제약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로 통할 때가
더 많죠. 타인과 소통이 안 될 때, 우리는 타인을 '벽창호 같다'라고 말하거나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난
관에 부딪힐 때 '벽에 부딪히다'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벽은 장애물이란 부정적인 은유로 사용될 때가
많습니다.
예전에 제주도 섭지코지 내에 일본의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지은 명상박물관 지니어스 로사이Genius
Loci에 간 적이 있습니다. 제주의 자연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다양한 벽면을 사용합니다. 끊임없이 물이
흐르는 벽을 만들어 공간을 촉촉하게 정화하는 자연의 힘을 표현하는가 하면 건축가 자신이 즐겨 쓰는
노출 콘크리트 벽면에는 범접할 수 없는 영혼의 깊이와 견고함을 담았습니다. 구멍 숭숭 뚫린 제주산 현
무암으로 쌓은 벽면으로는 자연과 일체를 이루며 내주하는 모든 이들을 따스하게 껴안는 봄의 미풍을
끌어당기는 듯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벽에 등을 기대고 발을 뻗은 채 한동안 앉아 있었죠. 윤기원의 「십
이지신」병풍 그림이 제게 준 묘한 '안도감'은 바로 지니어스 로사이의 벽에 등을 기대었을 때 느꼈던 감정과 닮아 있습니다. 나와 소통하며 공감을 주고받는 친구들이 인생의 보호벽이 되어준다면 얼마나 멋
진 인생일까요? 병풍처럼 언제든 손쉽게 펼칠 수 있으니 기동성도 충분히 확보할 수 있고 말이죠. 윤기원이 만든 12폭짜리 십이지신도 병풍에서, 저는 마치 병풍의 각 한 폭 한 폭이 1년 12개월을 의미하듯
나의 1년을 지켜줄 것만 같았습니다.
그림은 그리움에서 나왔다고 하지요? 그리움으로 응결된 우정의 기호를 마음 벽에 붙여둘 수 있는 인
생이고 싶습니다. 매일 페이스북에 들어가 글을 남기고 온라인 친구들과 정담을 나눈 지 꽤 시간이 흘렀
습니다. 비록 온라인 공간이지만, 이곳에서 나는 얼마나 병풍 같은 친구가 되어주고 있는지 자신에게 물
어야겠습니다.
-『댄디, 오늘을 살다』 (아트북스, 2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