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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강해 제 28장 사울과 접신녀의 만남
본장부터 31장까지는 본서 전체의 결말 부분으로 사울과 그의 왕국의 몰락을 가져온 길보아 전투가 언급된다. 사울은 수넴에 진 친 블레셋 군대를 보고 군급한 나머지 접신녀를 찾았으며, 그녀를 통하여 사무엘의 혼을 불러내고 위로와 도움을 받으려 하였으나 오히려 비극적 예언을 듣고 낙심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사울의 인격적 하자와 학정에 대해 논하였으나 여기서는 사울의 종교적 타락을 보여줌으로써 사울 왕국의 붕괴의 원인이 인간적인 동기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며 실정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1. 곤경에 처한 다윗과 사울 (28:1-7절)
블레셋은 그동안 준비해 왔던 전쟁을 드디어 개시한다. 이로 인하여 다윗과 사울은 모두 곤경에 처하게 된다. 즉 출전을 앞둔 아기스로부터 다윗이 전투에 참여할 것을 강요당한 것인데 다윗의 거짓말이 화근이 되어 자기 동족을 향해 칼날을 겨누어야 하는 지경에 처하게 된 것이다. 블레셋의 대공세를 맞게 된 사울은 접신녀를 찾아갈 정도로 군급하게 되었다. 이러한 두 사람의 곤경은 모두 그들이 저지른 죄악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다윗은 구원을 얻었고, 사울을 버림을 받았으니 여기서도 하나님 구원의 선택의 원리를 보게 되는 것이다.
블레셋이란 가드 왕 아기스를 포함하여 다섯 방백 모두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전투는 블레셋 전체의 연합군의 공격이었으며 아벡 전투 이후 번번히 패전했던 데에 대한 복수의 차원에서 대대적 규모의 군사력을 총동원했던 것이다. 이에 아기스는 다윗에게 전투에 참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같은 아기스의 요구는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아기스는 위험 부담을 안고 다윗을 자기 수하에 두었으며 그동안 다윗이 자기 동족을 침략하여 그들과 원수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기스의 명령을 받고 다윗은 애매한 응대를 하였는데 ‘당신의 종이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라고 한 이 말은 아기스의 요청대로 전투할 수도 없고 또 그 요청을 거절하여 배신자가 될 수도 없다는 말로서 참으로 애매한 대답인 것이다. 아기스는 다윗의 답변에 대해 그가 전투에 기꺼이 참전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고, 또 그가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으로 이해하여 전투에서 승리할 경우 영원히 아기스의 머리 지키는 자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즉 왕의 시위대장, 경호 대장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왕국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한낱 이방 성읍의 왕의 경호를 맡게 된 것은 다윗 스스로가 자초한 비극의 결과였다. 다윗이 모압 땅에 있었을 때 선지자 갓은 다윗에게 ‘유다로 돌아가라.’고 권면했다. 사실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의 손길을 끝까지 의지하고 이스라엘 땅을 떠나지 말아야 했다. 그가 이스라엘 땅에서 환난을 당하고 가난하고 핍박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연단하시기 위한 훌륭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은 더 이상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당장 목전의 유익과 일신상의 안전을 위해 블레셋 땅을 찾은 것이다. 마치 기근을 피해 언약의 땅 가나안을 등지고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실패한 아브라함의 경우와 같은 것이다.
여기서 잠시 사무엘의 죽음과 그의 장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사울이 이미 수 년 전에 죽고 없는 사무엘의 혼을 불러내려고 노력하는 사실과 연결시키기 위함이다. 사실 대선지자 사무엘이 죽었을 당시 사울은 이스라엘 땅에서 종교적 숙정을 단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있었다. 사울은 사무엘로부터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지킬 것을 명령받았으며, 무당과 박수를 쫓아내는 일은 백성의 지도자에게 강력히 요구되던 중요한 계명이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사라진 때에 백성들이 신접한 자나 무당, 박수들의 꾀임에 빠져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대대적인 무당 퇴출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신접한 자’는 사후 세계와 교통하는 자로서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어 살아 있는 사람과 교통하도록 중개자 역할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박수’는 점쟁이, 마술사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울은 백성들이 이런 더러운 일을 할 수 없도록 단호한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블레셋 군대는 수넴에 진을 쳤는데 ‘수넴’은 ‘두 개의 휴식처’라는 뜻으로 이스르엘 계곡을 사이에 두고 한 쪽은 길보아 산이며, 다른 한 쪽은 헬몬 산 서쪽 경사지대인 수넴이다. 블레셋 군대는 이곳에 진을 쳤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수넴은 다윗의 동녀 아비삭의 고향이며. 엘리사를 영접한 귀한 여인의 고향이기도 하다. 사울은 불과 수 마일 거리에서 진을 치고 있는 블레셋의 엄청난 대군을 보고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두려워’라는 말 ‘야라’는 사울이 다윗을 보고 점점 더 큰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할 때 사용된 말이다. 이는 사울이 극심한 두려움에 빠져 떨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크게 떨었다.’는 말은 전일에 요나단이 블레셋을 급습했을 때 블레셋 진영에 나타난 큰 떨림과 같은 것으로서 당혹스럽고 어쩔 줄 모르는 심리적 반응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이는 사울의 절망감을 보여 주며, 그동안은 소규모 전투를 벌려 왔지만 엘라 골짜기 전투 이후 가장 대규모의 전투를 보고 패배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사지를 떨었던 것이다. 이때 사울의 나이는 80세인데 아직도 그가 왕위에 앉아 전투를 지휘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아들 요나단이 정권을 이어받아도 벌써 받아야 하는데 이를 무시하고 왕좌를 지킨 것은 사울의 욕심이 화를 부른 것이다.
사울은 블레셋 군대를 물리칠 수 있는 방법에 관하여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사울이 허둥지둥 여호와를 찾는 모습은 그의 공포심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 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응답하시지 않으셨다. 이것은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계시를 받기 원하지만 하나님의 계시는 희귀하여 어느 시대, 어느 인물에 대해 징벌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응답하시기도 하고 불응하시기도 하는 것이다. 사울은 여러 가지 방법을 다 동원하여 하나님의 뜻을 물었으나 끝내 응답받지 못했다. 하나님 계시의 전달 방법은 꿈, 우림과 둠밈, 선지자를 통하여 응답되지만 사울에게는 영성이 없었기 때문에 신령한 꿈을 꿀 수 없었으며, 사울이 놉 제사장들을 다 죽였기 때문에 그에게는 제사장들이 거의 없었다. 다만 우림이 없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은 제사장 대학살 사건 이후 성막을 기브아 궁성으로 옮긴 후 엘르아살 계열의 아히둡의 아들 사독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대상16:39 제사장 사독과 그의 형제 제사장들에게 기브온 산당에서 여호와의 성막 앞에 모시게 하여..
그렇다면 모세가 만든 진짜 우림과 둠밈은 아닐지라도 모조품은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사울 이후 다윗 시대에 두 명의 대제사장이 있었다는 사실로 입증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들의 물음에 응답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사무엘 선지자 이후에 그의 제자들인 선지자들은 사울을 피하여 다윗에게 합류하였기 때문에 선지자도 없었던 것이다. 사울은 여호와의 뜻을 물을 방편을 찾지 못하자 자신이 그렇게도 금하고 막았던 일을 명령했는데 자기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시고 자신이 세운 규범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가 완전히 단절된 사울에게는 비신앙적 행동이지만 필연적으로 택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사울의 명령에 따라 신하들이 신접한 여인을 찾았는데 그가 엔돌에 있다는 것이다. 엔돌은 수넴으로부터 북동쪽 약 6km 지점에 있으며 무당들이 거처하기에 좋은 동굴이 많이 있다고 한다.
2. 사무엘의 혼을 불러낸 사울 (28:8-19절)
사울은 왕복을 벗고 평상복인 다른 옷을 갈아입고 두 명의 수행원만 데리고 엔돌을 찾아가서 무당을 만났다. 옷은 그 사람의 신분을 상징하기 때문에 사울은 왕의 표시가 나는 일체의 옷과 장식물을 제거하고 완전한 평민의 복장을 취했던 것이다. 즉 아무도 자신의 신분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변장을 했던 것이다. 또한 엔돌은 불레셋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는 수넴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적군의 눈을 피하여 잠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별히 밤을 택하여 비밀리에 엔돌을 찾아갔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영적 간음에 해당하며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사울은 여인을 만나 명하기를 ‘신접한 술법으로 나를 위하여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올리라.’고 하였다.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유령으로 점을 치라.’는 것이다. 무녀는 사울의 정체를 몰라보고 사울이 보낸 부하가 자신의 무당 행위를 현장에서 적발하고 잡아 죽이려 한다고 오해하였다. 이는 사울이 이전에 복술 행위를 엄히 금지시켰으며, 낯선 남자들이 한밤에 은밀히 찾아왔고, 그녀에게 유령을 불러올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녀는 신통한 복술로 유명한 신녀였던 것이다. 사울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녀에게 맹세하며 이 일로 인하여 어떤 처벌도 받지 않는다고 하여 무녀를 안심시켰다. 사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복술 행위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요청하고 맹세한 것이다. 실로 사울의 완악하고 굳은 심령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고대 히브리 사람들의 음부관은 사람이 죽으면 일단 스올에 내려간다고 보았다. 그곳에서 대기했다가 메시야가 오시면 심판을 받아 어떤 사람은 낙원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지옥으로 간다고 믿은 것이다. 그러므로 접신자는 죽은 자의 세계 또는 죽은 자의 혼과 교통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죽은 자의 혼을 불러올릴 수도 있다고 믿었다. 사울이 사무엘의 혼을 요구한 이유는 블레셋 사람과의 전투에서 조언을 받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지난날 사울이 무당이나 접신녀를 이스라엘 땅에서 쫓아낸 것이 그의 신앙과 신념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준다. 사울은 하나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기 위함도 아니요, 미신은 절대로 믿을 것이 못 된다는 신념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는 사무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그런 정책을 시행했던 것이다.
무녀는 신접한 술법으로 사무엘을 불러 올렸으며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사무엘을 불러올리라고 명령한 사람이 사울 왕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가 사무엘을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실제로 사무엘의 혼을 무녀가 보았다는 견해이다.
둘째, 거짓 혼이 사무엘을 가장하여 나타났다는 견해이다.
셋째, 무녀가 사무엘의 형상을 본 것이 아니라 그의 이름만 듣고 추측했다는 견해이다.
넷째, 아무 형상도 보지 못했으나 본 것처럼 위장했다는 견해이다.
첫째 견해는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영혼을 무당의 술수에 이용하실 리가 없다는 것이며, 둘째 견해는 혼이 땅에서 올라왔다는 것은 성도들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성경적 개념과 배치된다는 것이고, 셋째는 원문에 ‘보고’라고 되어 있는데 이를 ‘듣고’라고 수정해야 하기 때문에 타당하지 않고, 넷째의 견해는 무녀가 사무엘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무녀의 말이 아니라 본서의 기록자의 언급이라는 점과, 무녀들은 자기 나름대로 어떤 환상을 보기도 한다는 점에서 타당성이 더욱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둘째의 견해가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즉 사탄이 사무엘을 가장하여 나타난 것이며 무녀가 이를 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에 사탄이 왜 나타났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왜냐하면 사탄은 믿는 자를 미혹하여 믿음에서 무너뜨리고 하나님께 거짓 사실을 고발하는 등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하는 존재인데 15절 이하의 내용을 보면 그 내용이 전혀 상반되기 때문이다.
무녀가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의 신분을 밝힌 것은 그녀가 지금까지는 사울의 신분을 몰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어떻게 사무엘을 불러달라고 요청한 사람이 사울인줄 알게 되었을까. 그녀는 사무엘의 형상을 보는 순간 그를 부른 주인공이 사울인줄 알았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세 가지 의견을 제시한다.
첫째, 나라가 블레셋의 침공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사무엘의 혼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 전쟁으로 인해 최악의 곤궁에 빠져 있는 사울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둘째, 그녀는 사울의 큰 키와 용모, 그리고 수행원을 데리고 온 사실을 보고 그가 사울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셋째, 사울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왕의 금령을 위반한 무녀가 이 일로는 벌을 당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듣고 그가 사울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녀는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와서 즉각 큰 소리로 사울이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물론 무당들이 눈치가 빠르고 사태를 짐작하여 추리하는 능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인간의 이성적 판단일 뿐 실제 사실과는 큰 연관성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사울은 이스라엘 땅에서 무당과 박수를 축출시켰던 장본인이다. 따라서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는 현장을 목격당한 무녀의 두려움은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울은 그녀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며 안심시켰는데 이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무녀가 무엇을 보고 놀랐을 때에 사울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녀가 본 것은 초자연적 현상 혹은 심리적인 환상이었기 때문에 사울이 못 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사울의 질문에 무녀는 ‘내가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영’이라는 말 ‘엘로힘’은 ‘신’이라는 말이다. 즉 어떤 신적인 존재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유령’이라고 하나 적절한 해석은 아니다. 왜냐하면 ‘유령’을 ‘엘로힘’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사탄 역시 성경에서 ‘엘로힘’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또한 ‘초혼술’ 역시 성경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은 죽은 자와 산 자의 교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눅16: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가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욥14:12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
*욥17:16 우리가 흙 속에서 쉴 때에는 희망이 스올의 문으로 내려갈 뿐이니라.
만약 초혼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결코 죽은 자의 혼이라 할 수 없고 다만 죽은 자의 혼으로 가장한 어떤 신적인 현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신접자, 초혼자, 무당 등을 그 존재 자체부터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런 이유에서 본다면 무녀가 불러올린 사무엘은 죽은 사무엘의 혼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땅에서 올라온 그 ‘영’은 사무엘의 형체를 입고 나타난 ‘영’이었던 것이다.
사울은 무녀가 실제로 사무엘을 보았는지 궁금하여 ‘그 모양이 어떠하냐.’고 물었다. 이는 무녀가 사무엘을 보았다고 하는 말을 믿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무녀는 말하기를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다.’고 대답했다. 사무엘이 85세 정도의 나이에 죽었으므로 노인이라는 말은 자연스럽다. ‘겉옷’이라는 말 ‘메일’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망토 같은 가운으로서 특수한 계층의 사람이 입는 옷이다. 특별히 자신의 신분을 구별하고 나타내기 위하여 입었던 옷이다. 사무엘 역시 생전에 선지자로서 이 옷을 입고 다녔다.
*삼상15;27 사무엘이 가려고 돌아설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무녀는 자기 앞에 환상으로 나타난 형체가 노인이라는 것과 그가 제사장의 옷, 혹은 선지자의 옷인 겉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당장에 사무엘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그 사무엘의 형체가 무녀의 접신술에 의해 나타난 것인지, 아니면 접신술은 그 자체가 가짜이기 때문에 무녀의 초혼과는 상관이 없이 나타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또한 사무엘로 나타난 영은 사무엘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나타난 형체가 실제로 사무엘이었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었던 사무엘이 일개 무녀가 부르는 초혼에 의해 나타날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무녀들은 하나님의 백성들만 보아도 혼비백산하여 도주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거룩한 선지자요 제사장인 사무엘을 좌지우지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둘째, 사무엘은 하나님과 친히 대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던 선지자로서 그의 육신은 비록 흙으로 돌아갔으나 그의 영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그 영이 땅에서 올라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또한 그가 육신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사명을 감당했으나 죽은 후에는 그 사명이 다했기 때문에 다시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는 것이다.
사울은 무녀의 말만 듣고 그가 사무엘이라고 확신하고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그에게 절했다. 무녀가 암시하는 곳을 향하여 경외와 존경의 표시로 넙죽 절을 한 것이다. 이것은 사울이 그 누구보다도 사무엘을 두려워했으며, 그의 말을 믿었고, 그를 존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꿈으로나, 우림으로나, 다른 선지자로 사울에게 말했더라고 그는 그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15절-19절에 선포된 사무엘의 말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은 사탄 혹은 악령의 말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거짓 선지자도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에 따라 예언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내용을 종합하여 분석해 보면 이는 사탄의 말이나 역사가 아닌 것임이 분명하다.
북이스라엘 왕 아합이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아람과 전쟁하려 할 때에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빙자하여 거짓 예언을 하였고 다른 모든 선지자들도 그와 같이 예언하여 아합의 승리를 확신하였다. 그러나 참 선지자 미가야는 하늘의 어전 회의를 보고 증거하기를 ‘한 영이 여호와 앞에 나아와 자기가 가서 아합을 꾀어 전쟁을 하도록 충동질하겠다고 하자 여호와께서 이를 허락했다.’고 하며 ‘여호와께서 이제 왕에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왕 아합이라 할지라도 그를 생각하여 거짓 영도 보내시고, 그에게 옳은 분별을 할 수 있도록 참 선지자 미가야를 통하여 길을 열어주신다. 이와 같이 사무엘의 형체로 나타난 영의 실체 역시 하나님께서 보내신 영인 것이다.
첫째, 선포된 이 언급들은 사무엘이 살아 있던 동안에 실제로 사무엘과 사울 사이의 관계 속에서 일어났던 일들과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다.
둘째, 이 언급들은 하나님의 선지자에 의하여 예언된 것처럼 실제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언급들은 하나님의 신령한 간섭에 의하여 사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비록 사울이 신앙적으로 극히 타락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아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그의 방법을 통하여 사울의 과거의 잘못을 지적해 주시고 그의 최종 심판을 선포하셨던 것이다. 실로 하나님은 만유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에 그 어떤 방법이라도 사용하시며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일례로 하나님께서는 이방의 거짓 술사 발람을 통하여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에게 주권적으로 역사하여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셨고, 나아가 열국의 장래와 메시야 예언까지 선포하도록 강권적으로 역사하셨다. 심지어 발람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그가 타고 가는 노새의 입을 열어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타락한 사울일지라도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시고자 한 것이다. 즉 지난날의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지금이라도 사울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도록 마지막 기회를 주시고자 한 것이다. 사실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을지라도 그의 아들 요나단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이요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 부자에게 최후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자 이 방법을 활용하신 것이다.
사무엘로 나타난 영이 말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기시게 하느냐.’고 하였다. ‘성가시게 한다.’라는 말의 뜻은 ‘안식을 방해한다.’라는 의미로서 죽음을 평안의 안식처로 생각하는 내세관에서 나온 말이다.
*욥3:17-19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피곤한 자가 쉼을 얻으며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호통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그러므로 음부에서는 경건한 자나 불경건한 자나 막론하고 휴식을 취한다는 히브리식 사상이다. 이 계시가 점점 발전하여 신약시대 관점에서 엄밀히 말하면 성도는 낙원에서 위로와 안식을 누리고 불신자는 지옥에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사울은 자신이 지금 심히 군급하다고 하였다. 대적의 맹렬한 공격으로 인하여 커다란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 군급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떠나서 응답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인 사무엘을 찾아서 블레셋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라고 한 것이다. 사울의 생각에는 사무엘의 혼이 있다면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하나님의 뜻과 블레셋을 막을 수 있는 방책을 가르쳐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참으로 어리석은 인간의 생각이요 미련함이었다. 사무엘이 살았을 때에도 전해 주지 않았던 하나님의 말씀을 죽은 자가 전해 줄 것이라고 믿는 사울이야말로 무지하고 미련하기 짝이 없는 불신자였던 것이다.
사무엘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응답은 네 가지였다.
첫째,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사울의 대적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블레셋을 불러 사울을 징계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 되시며 사울과는 원수가 되는 것이다.
둘째,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다윗에게 이미 넘겨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무엘이 생존했을 때에 예언한바 그대로 여호와께서 이루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요, 지도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왕권과 왕좌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버린 후였다.
셋째, 사울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않은 대가라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고 불순종했기 때문에 이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즉 블레셋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것이다. 사울은 블레셋의 침공을 단순한 국가 재난으로 보았고 왕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지만 사실은 그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던 것이다.
넷째, 내일 벌어질 길보아 전투는 필연적인 것이며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하나님께서 블레셋의 손에 붙여 응징하신다는 것이다. 즉 사울과 그의 아들들과 가문이 멸절될 것이며 이스라엘 군대가 전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는 말은 그들 모두가 사무엘처럼 죽을 것이라는 말이다. 곧 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아를 가리킨다.
3. 낙담하는 사울 (28:20-25절)
사무엘의 형체로 나타난 영으로부터 심판적 예언을 선고 받은 사울은 크게 낙담하고 만다. 그는 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질문을 했지만 대답을 모두 듣고 나서 정신을 잃을 정도로 낙담하고 쓰러져버렸다. 사울은 자기가 기대했던 해결책을 얻지 못하고 자신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듣게 되자 큰 두려움의 엄습과 육체적 탈진으로 땅에 엎드러지고 말았다. 이것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자행자지하던 사울의 비참한 종말의 전조였던 것이다. 사울은 전투에 앞서 금식하던 습관이 있었다. 그는 전투를 앞두고 엔돌에 있는 접신녀를 찾아 올 때 혹시 부정한 일이 있을까 하여 몸을 단정히 하기 위하여 금식했던 것이다. 사울이 있던 진영에서 엔돌까지는 불과 6km 밖에 되지 않았고 사울이 밤에 왔기 때문에 낮에는 일부러 금식한 것이 분명하다.
무녀가 사울에게 이르렀다는 표현은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는 동안 무녀는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 무녀는 사울의 반응을 자세히 관찰했는데 사울이 극도의 공포에 떨고 있으며 탈진으로 기력이 쇠하여 일어나지 못하자 그를 동정하여 떡을 대접하기를 원했다. 사울은 처음에는 먹지 않겠다고 거절했으나 무녀와 신하들의 권고를 받고 땅에서 일어나 침상에 앉았다. 무녀는 살진 송아지를 잡고 가루로 무교병을 구워 만들어 그것을 정성스럽게 사울에게 대접하였으며 그들은 먹고 진영으로 돌아갔다. 사울은 아들들과 백성들의 죽음과 전쟁의 패배에 대해 괴로워하고 슬퍼하기에는 그의 양심이 너무나 둔감해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의 책망을 받고도 조금도 회개할 줄 모르고 그 강퍅한 심령을 이끌고 자신의 운명을 맞으러 나간 것이다.
비록 무녀의 집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사무엘의 형체로 나타난 영으로부터 나온 말씀은 구구절절이 옳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 말씀을 듣고 후회해도 이미 늦었지만, 그래도 진실로 회개하고 눈물로 통곡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더라면 그 영혼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이 임했을 것이다. 지난 40년 동안 허물 많고 죄 많은 자신에게 베풀어주셨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더라면 비록 길보아 전투에서 목숨을 잃고 이스라엘이 패배하는 비운을 겪었을지언정 그 영혼은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께서 축복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선택하시고 기름을 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사울이 처음 이스라엘 왕으로 즉위했을 때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셨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축복을 누렸던 적이 있었다. 그런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이처럼 절망감 속에서 마지막 회개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의 비참한 최후를 맞으러 간 것은 실로 불행 중의 불행한 일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사울이 무녀를 찾아간 목적이 무엇이었나 하는 것이다. 대개 사람들이 무녀를 찾아가는 것은 무녀를 통하여 무녀가 전해 주는 말을 듣고 자신이 처한 문제를 해결 받으려고 가는 것이다. 즉 무녀가 섬기는 귀신이나 유령의 지시를 받아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녀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사울이 무녀를 찾아간 목적은 무녀를 통하여 선지자 사무엘을 만나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한 것이다. 비록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옳지 못했어도 사울은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기어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사태를 해결해 보자고 하였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한 영을 보내주시고 그가 처한 모든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예언하여 주셨다. 그러나 사울은 끝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으며, 그 말씀에 순종하려는 의지도 없었다. 그는 오로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방법만 찾았던 것이다. 그 문제 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전혀 귀에 들리지 않았고 마음에 새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사울 왕의 불행이었다. 모름지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한다. 그 말씀이 나를 주장하고 인도할 때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아가게 될 것이다.
사울의 밤중의 행보는 끝까지 회개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스승인 예수를 떠나가는 가룟 유다의 발걸음과 같았다. 돌처럼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시려고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히시고 떡을 떼어 입에 넣어주시며 끝까지 사랑해 주셨던 예수님의 마음이 사울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났지만 그는 우둔한 마음을 깨지 못한 채 하나님을 멀리 떠나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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