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타불이自他不二’
쇠는, 가만히 방치해 놓으면,
저절로 녹이 슨다.
인간도 그냥 놔두면, 자기만의
행복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타자는 어떻게 되든 관계없다고
하는 삶에 빠지는 일이 많다.
그래서 ‘남을 사랑하라’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마라’ 등,
윤리도덕은 가르친다.
그러나, 강제받는 듯한 그런 형식적인
가르침으로는, 자신의 행복을 본위로
하는 인간의 습성은 좀처럼 불식시키기가 어렵다.
류시화는, 자신의 책 안에서
토머스 무어의 『영혼의 돌봄』
이라는 책을 소개하고 있다.
‘영혼의 돌봄’이란,
몸을 위해 좋은 음식을 먹고
규칙적인 운동을 하듯이,
자기 영혼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것이다.
토마스 무어에 의하면,
영혼을 소홀히 하면,
의미 상실, 무기력, 관계에 대한 환멸,
자기 비난, 폭력성과 중독 증세가
나타난다고 한다.
플라톤은, 영혼의 돌봄을
‘삶의 기술’이라 말하고 있다.
류시인은 이런 일화를 소개한다.
한 남자가 너무 일을 많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 중에 잠이 깬
그 남자는 숨이 막힐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음 날 그 남자를
진찰한 의사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영혼이 주인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어서 다른 어딘가에 떨어져 있소.
(…)
자기만의 장소를 찾아 그곳에서
당신의 영혼을 기다려야만 하오.”
그 외에도, 시인은 영혼을 돌보려면,
명상이나 독서뿐 아니라, 여행, 예술 활동,
자연과 가까워지는 일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상 속에서는 건강한 음식,
만족스러운 대화, 기억에 남을 뿐 아니라
감동을 주는 경험들도 영혼에
자양분을 선물한다고 한다.
그리고 예술 감각을 가지라고 한다.
예술은 세계를 더 심층적으로
보게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아주 간단하다
‘자타불이自他不二’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제법무아諸法無我’
등의 가르침을 설하고 있다.
쉽게 말한다면,
‘자신은 타자와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는 존재이다.
타자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 한,
자신도 구극적으로는 행복하게 될 수 없다.’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 ‘타자’라고 하는 것도,
인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천지만물 전부를 가리키는 것이다.
나와 당신은, ‘불일불이不一不二’
‘둘이기도 하지만, 하나이기도 하는
그것만을 꼭 인지하고 잊지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