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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탕평정치에 대한 고찰
Ⅰ. 서 론 1
Ⅱ. 탕평론 등장의 배경 2
1. 탕평의 의미와 탕평론의 대두 2
2. 숙종대의 탕평론의 전개 5
Ⅲ. 영조대의 탕평정치의 전개 8
1. 탕평의 강화를 위한 제도개혁 9
2. 영조대 탕평의 특징 : 완론주도의 탕평 11
3. 영조대 탕평의 의의와 한계 13
Ⅳ. 정조대의 정국의 동향과 탕평정치의 전개 14
1. 정국의 동향 14
1) 전 반 기 : 대리청정(1775) - 정조 12년(1788) 14
2) 후 반 기 : 정조12년(1788) - 정조24년(1800) 17
2. 정조대 탕평의 특징 : 준론주도의 탕평 19
3. 정조대 탕평의 의의와 한계 21
Ⅴ. 결 론 2
Ⅰ. 서 론
조선초기는 국왕권을 정점으로 구축된 관료체제의 정치가 운영되었으며,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정치세력으로서의 사림(士林)이 중앙정치에 등장하게 된다. 사림은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붕당(朋黨)이라는 정치집단을 형성하였다. 붕당을 당쟁으로 인식하고, 파당을 일삼았다고 보는 견해는 식민사관(植民史觀)에 근간을 두고있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일반인에게 뿌리깊게 자리잡고있어 문제가 되고있다. 역사학계에서는 1970년대 후반 당쟁(黨爭)이라는 인식의 전환을 촉구하는 이태진․이우성(李泰鎭․李佑成)의 논문이 제기되었다. 특히 이태진은 공론의 대결에 입각한 조화라는 붕당정치(朋黨政治) 이념이 이이에 의해 제기되었으며 이는 조선중기의 특징적인 정치형태로 성립되었다는 관점을 제기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치사 연구는 그 대상이 다양해지면서 연구시각과 방법을 새롭게 모색하기 시작하였으며 1980년대 후반에는 정치사를 구조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그리하여 조선후기 정치세력에 관한 연구는 1990년대에 들어와서 환국과 탕평정치기에 중심적인 위상을 갖게된 왕권을 중심으로 왕실의 구성과 활동이 관심의 대상으로 부각하게 되었으며 반면 이 시기와 그 이후의 민의 동향에 관한 연구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1 정치운영면에서는 1990년대에 숙종대부터 철종연간까지의 정치운영을 포함한 종합적인 연구가 산출되었다.
조선중기의 붕당정치는 조선후기로 들어가면서 붕당간의 균형이 깨어지면서 환국(換局)이 자주일어나기 시작하였고, 환국의 불안정성을 왕이 중심이 되어 정국을 운영함으로써 해결하려는 탕평정치(蕩平政治)가 나타났다. 붕당정치가 변질되면서 나타난 일당전제화의 현상은 공론을 토대로한 붕당사이의 역학관계에 균열을 일으켰고, 왕권의 상대적 약화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제기된 탕평론은 영조․정조대에 걸쳐서 꾸준히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 관한 연구는 역시 1980년대에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숙종대의 환국정치에 관하여 체계적으로 연구되기도 하였고,2 탕평정치가 숙종대부터 시도되었음에 주목하여 영․정조 탕평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연구성과도 나왔다.3 탕평정치가 본격적으로 실시된 영․정조대에 관한 연구는 크게 두가지 측면으로 나뉜다. 하나는 영․정조대의 정국을 탕평이 아닌 노․소당쟁의 연속으로 이해하는 경향이고,4 다른 하나는 영․정조대 정국은 완론과 준론에 의한 탕평정국이고, 영조대와 정조대의 탕평의 주도세력이 다르다는 연구성과를 들 수 있다.5
이러한 전체적인 연구외에 개별적 연구를 검토해 보면 대개 영조대로 연구가 한정되어 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영조대의 연구도 주로 초기에 집중되어서 영조대의 탕평정국이 척신정치화(戚臣政治化)하는 후반기에 대한 체계적인 개별연구는 없다고 볼 수 있다.
정조대에 관한 연구는 탕평정국에 관한 연구보다는 제도개혁이나 문화정치에 관한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왔다. 그러나 탕평정국에 관한 개별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다. 단지 앞에서 언급한 박광용 교수의 연구를 통해 정조대 탕평정국의 실상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본고에서는 붕당정치, 환국정치, 탕평정치로 이어지는 조선후기 정치사의 흐름중에서 탕평정치에 관하여 연구하고자 한다. 탕평의 개념과 탕평론의 변천과정을 통하여 탕평론이 등장하게된 배경을 이해한 후 영․정조대의 탕평정국에 관한 이해를 확대하려고 한다. 영․정조대의 정국의 동향을 몇몇 중요한 사건, 처분을 기점으로 재구성해보고, 탕평의 강화를 위한 왕의 제도개혁에 관하여 알아보려고 한다. 그리고 영․정조대의 탕평의 특징을 개별적으로 분석하고, 그 의의와 한계를 지적하려고 한다. 영․정조대의 탕평정치가 그 이전의 오랜 붕당정치와 환국정치의 폐단을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하고, 사회를 안정시키려는 시도였음에도 그러한 정국은 지속되지 못하고, 정조 사망 이후 세도정치로 옮아가는데에는 분명히 영․정조대 탕평정치가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본고는 영․정조대 탕평정국을 재구성하려는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고,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앞으로 개별연구의 바탕이 되었으면 한다.
Ⅱ. 탕평론 등장의 배경
1. 탕평의 의미와 탕평론의 대두
‘탕평’이란 《상서》〈홍범구주〉에 나오는 말로서 왕의 대중지정한 정치를 수사적으로 표현한 말이었다. 따라서 국왕이나 신료는 자신의 정견주장에 특별한 의미없이 이를 상용하였다. 시기적으로는 〈홍범구주〉의 저자로 알려진 기자가 숭배되면서 〈홍범구주〉가 인용되기 시작한 조선전반기부터 사용되었다.6 기자에 대한 숭봉이 강화되는 중종년간에 홍문관(弘文館)에서 유여림(兪汝霖)들이 올린 상소문을 보면, 황극지치는 ‘탕탕평평지도’ 를 가져야 하는 것으로 이는 적합한 인재를 쓰는 ‘택인’ 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지적하고 있다.7
황극이란 ‘유황건극’ 즉 임금이 건극한다는 뜻이며, 탕평은 그러한 임금의 건극이 최상의 경지에 이른 상태를 말한다. 건극은 극을 세운다는 것이다. 여기서 극은 그 주체가 도달해야 할 최종의 경지를 말하며 그것은 중용이다. 즉 군신상하가 각각 그 마땅한 중용을 얻고 제법의 설치와 시행이 과․불급이 없이 중용의 효를 얻는 것이 곧 탕평의 경지이며, 홍범의 규모에 합치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탕평의 효란 군심의 지공무사함과 군신상하의 명분의 확립뿐만이 아니라 때에 따른 정사가 그 시선을 잃지 않아야 이루어질 수 있다고 인식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탕평은 중용의 원리에 입각하여 그것은 백성에게 시행해 주는 것이다. 탕평의 원리를 살펴보면 진정한 탕평이라는 것은 구체적인 사안에 즉하여 어떠한 것이 때에 맞는 중용일 수가 있는가 하는 가치관 또는 경세관의 문제라는 점이다. 그리고 중용의 해석을 임금이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탕평기에는 붕당체제에서 거의 절대적 권위를 지녔던 산림의 비중이 부정되고, 경연을 중심으로한 학자관료들의 정책판단의 권위와 간관의 비중을 약화시키려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8
‘탕평’이란 용어가 구체적인 정국운영론으로 등장하게 된것은 선조대 부터였다. 이때는 붕당이 형성됨과 동시에 붕당간의 대립이 문제되기 시작하였다. 동서인으로의 분열은 구양수․주자의 군자소인변을 중심으로 붕당론(朋黨論)으로 일단 합리화되었다. 그리하여 동서인은 서로를 군자소인당(君子小人黨)으로 지목하여 자당을 옹호하며 상대당을 배척, 붕당으로서의 존재를 정착시켜 나갔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사림의 분열이 가져오는 정치적 위험성을 우려하여 이를 수습함으로써 다시 하나의 사림으로 결속시키려는 시도도 없지는 않았다. 이때에 이이에 의한 조제론(調劑論)이 나오게 되었다. 그것은 주자의 군자소인론을 부정하지는 않으나, 동서인은 모두 사류이기 때문에 군자붕 소인당의 논리를 적용시킬 수는 없으며, 따라서 당 차원이 아닌 개인차원의 변별에 의한 진용이 이루어져야 조정의 인협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조제론이 현실에 적용된데 있어서는 집권당에 의한 상대당 인물의 조용형태여야 하며, 공시공비가 아닌 한 당인 사이의 개인적인 사시비는 굳이 변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조제론의 주장이었다.9
즉 李珥는 ‘타파동서’‘보합사류’를 통한 파붕당(破朋黨)을 주장하면서 그 구체적 방법으로 붕당이나 인재의 ‘조제보합론’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조선시대 탕평론의 시발이었다. 탕평론이란 선조대 이이의 주장이래 시대에 따라 조금씩의 차이는 있지만 붕당간의 당쟁을 극복, ‘파붕당’을 통한 정국안정을 궁극목표로 하면서 그 구체적 방법으로 붕당이나 인재의 ‘조제보합’을 내세운 정국운영론이라 할 수 있다.10
이와같이 선조대에 확립된 군자소인론 및 조제론 중심의 붕당론은 이후의 정치운영에서도 나타났다. 광해군대에는 파붕당론을 중심으로 잠시 전개되었으나 인조에서 현종대까지는 조정론, 군자소인론, 조제론의 세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조정론은 왕과 그 측근세력에 의해 추진되던 조용책에 대한 신료들의 비판으로부터 그것을 옹호하기 위한 대응논리로서 그때 그때마다 필요에 의해 마련된 것인데, 붕당 자체를 망국적 현상으로 보아 극히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타파되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조정책의 구체적인 방향은 당연히 붕당적 요소를 타파하는 쪽으로 추진되어야 하였다(그런 의미에서 조정론은 한편으로 타붕당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먼저, 어느 한편에만 치우치지 않고 붕당간의 균형을 유지하는 인사정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피차부억의 방식을 취하지 않을 수 없고, 다음으로 붕당 이래 참된 시비 즉 공론이란 있을 수 없으므로 당쟁과 관련된 논쟁에 대해서는 그 시비를 가리지 않아야 당쟁의 격화를 막아 조정을 진정시킬 수 있다는 것이며, 세째, 호당직붕(護黨直朋)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이를 징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정론은 인조 때까지는 임금의 강력한 타붕당 의지와 또 공신계인물들의 지지를 받아 비교적 유력하였다고 할 수 있으나, 효종대(孝宗代)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던 산림계 인사들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고, 이어 현종대에 이르러 산림계의 정치이념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는상황속에서는 왕의 권위로서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한는 데 급급할 정도로 그 영향력이 약화되었다.11
군자소인론(君子小人論)은 주자의 붕당론에 쫓아 군자소인변(君子小人辨)에 의해 군자당의 진용과 소인당의 퇴척을 강조하는 붕당론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주자를 신봉하는 산림계 관료들이 당시에 추진되었던 조용책(調用策)을 비판하는 이론적 근거였으며, 동시에 그 대안으로서 제시된 정치이론이기도 하였다. 군자소인론은 효종대 산림계 인사에 의한 조정론 비판을 통하여 시비명변 위주로 제기되었다가 현종대(顯宗代)에 들어와 서인정권에 의한 남인공척의 이론적 근거로서 퇴소인론을 중심으로 성행했으나, 내용적으로는 주자붕당론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지녔다고 할 것이다.
조제론(調劑論)은 선조년간 동서붕당시 이이가 주장했던 조제수용론(調劑收用論)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 조제론은 국왕중심의 조정론이 처음에 성하다가 뒤로 갈수록 쇠퇴하고, 산림계가 주장하던 군자소인론은 뒤로 갈수록 성행하던 것에 비해서 인조 이후 현종때까지 별다른 차이를 나타내지 않고 일반 관료들에 의하여 꾸준히 논의되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구양수․주자의 군자진붕․소인붕설 자체는 인정을 하면서도, 붕당이 수반하는 여러가지 폐단을 들어 반드시 긍정적으로만 인식하지는 않고있으며,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군자소인론의 일률적인 적용은 불가하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었다. 주자의 붕당설을 원칙적으로는 인정하면서도 우리나라 붕당의 현실적 특성을 내세워 그것의 획일적인 적용에는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서인 산림계와는 상이한 인식의 차이를 나타내고있다. 이점은 이이가 동․서인 모두를 사류(士類)라 하여 조제의 근거로 삼은 것과 대비된다.12
이상과 같이 이이의 조제론 이후의 정국운영에서 나타났던 여러가지 붕당론과 탕평론은 숙종대의 탕평책의 바탕이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숙종대의 탕평론의 전개
조선후기의 선조대 이래 점차 형성, 발전되던 붕당 중심의 정치형태는 숙종대(肅宗代)에 이르러 그 대립이 극심해지고, 붕당정치의 이념이 파행화 되면서 ‘환국’이라는 정치형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환국’은 붕당정치(朋黨政治)에서 ‘탕평정치’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나타난 정치집단의 대폭적인 교체현상이다. 권력의 독점욕이 강화되면서, 대항적 정치집단의 존재를 인정하는 바탕위에서 유지되던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무너지고, 정치적 사활을 걸고 상대방을 철저히 제거하는 정치행태가 나타난 것이다. 이는 정치참여세력이 축소되고, 권력의 집중으로 말미암아 정치운영이 경색되었다는 점에서 정치의 퇴행으로 평가된다.13
숙종치세 46년간의 정치는(1674 - 1720) 즉위년의 갑인환국(甲寅換局)으로 부터 42년의 병신환국에 이르기까지 5차례의 환국으로 점철되고있다. 숙종 즉위년에는 서인을 축출하고, 허적을 영상으로 하는 환국으로 인하여 남인정국이 구성되었다. 숙종6년(1680) 경신환국(庚申換局)은 탁남이 지나치게 치성하게 된것에 대한 숙종의 경계와 이에 대한 청풍김씨 김석주계와 광산김씨 김만기계등 척신계(戚臣系)의 호응에서 비롯하였다. 집권한 서인은 윤휴 등을 처형하여 이때부터 당색의 대립은 상호보복의 국면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정국은 서인중에서도 경신환국의 주체로서 역할을 하여 훈신으로 책봉된 김석주(金錫冑), 김만기(金萬基), 김익훈(金益勳), 이사명(李師命) 등 훈척신계가 주도하였는데, 이들 훈척신계의 정치행태에 대한 시각차는 서인을 노․소론으로 분기시키게 되었다.14
이 즈음에 이이의 탕평론이 박세채 등에 의해 재론되었다. 경신환국 직후 산림으로 징소된 윤증은 숙종 9년경 박세채와 대담하면서 서인과 남인 사이에 맺힌 원독을 빨리 풀어버리는 길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현안이라고 주장하였다. 두 당파의 조제론을 폈던 것이다. 또 당시 산림으로 징소된 박세채(朴世采)도 윤증의 말에 동의하였다. 그런데 박세채는 이를 숙종 9년 2월에 ‘탕평’의 논리를 세워 국왕에서 진언하였다.
무릇 황극의 도는 인륜의 큰데서 시작하여 사물에까지 이른다고 말합니다. … 그 서민(庶民)에서부터 군자에 미치기까지 마땅히 치우침이 없게 됩니다. … 우리나라 동인과 서인의 색목은 선조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백과 흑이라든지 음과 양같은 뚜렷하게 분별되는 군자와 소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일찌기 세조진정(洗條鎭靜)의 뜻을 선조에게 진언했습니다. … 그러나 그 사이에 이른바 남인은 중립을 지켜 조금 별립하여 역시 명유석보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인조께서 즉위하시자 서인과 다름없이 많이 등용하셨던 것입니다.
곧 일차적으로는 서인과 남인의 인재가 함께 참여하는 정치를 복원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인조의 등용방식을 모범으로 하면 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서인당의 우월한 지위를 부정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원래 동인과 서인은 같은 사류 군자들이 갈라선 것이었고, 동인 일부가 패할때 남인의 경우는 중립을 지킨 자들이 많으므로 서인과 시비의 차원에서 비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이 곧 권간의 당과 색목의 당을 분간하는 것이었다. 시비(是非)의 차원은 권간의 당여(黨與)에게만 적용해서 처벌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부터 당여(黨與)에게 죄를 내릴 때는 죽인 자는 단지 그 심복하는 당여뿐이었읍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색목(色目)에까지 미쳐서 한 부류의 사람들은 모두 합쳐서 의심하며 유배시키고, 파직․삭직시킬 때도 반드시 이 색목(色目)으로서 구실을 삼습니다.
라고 말했던 것이다. 결국 당쟁의 폐단은 권력을 장악한 후 출현하는 권간의 당에 있지 사류들이 표방하는 색목의 당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었다. 이는 각 당 인물을 함께 모아서 공경하는 분위기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붕당이 함께 살아가는 길을 찾는 정국을 추진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주자의 시비분별론(是非分別論) 대신 이이의 조제보합론(調劑保合論)을 사용하는 정국을 추진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세채의 이러한 제안은 당시에는 재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지만 그 영향력은 상당히 컸다.
이후 박세채는 숙종 14년에도 자신의 탕평론을 이이의 조제보합론(調劑保合論)에 근거한 주장이었음을 명확히 하면서 탕평을 재차 건의하였다. 이때도 그는
대저 황극의 도는 호악를 바로 가리는데 있습니다. 호오(好惡)가 마땅함을 얻으면 사정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대저 갑인년의 청남 탁남과 경신년의 노론(老論) 소론(少論)은 바로 나누어져서 패한 것이니 … 그 나누어짐이 현사가 아주 현격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의론(議論)이 서로 격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 동인과 서인이 갈라선 이래 이이는 그것이 필경 국가에 해가 될 것을 알고 탕조보합(蕩條保合)의 계책을 크게 썼습니다. … 무진년에 출사한 것은 특히 이 조제보합(調劑保合)의 계책을 설명하여 그 本心을 밝히려함에 있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황극의 도를 세워 호악의 원칙을 마땅하게 함으로써 청남․탁남․노론․소론 안의 인재 모두를 조제보합하는 계책으로 삼자는 것이었다. 의론이 격한것을 가지고 현사․시비 분별론으로 몰아가서는 안된다는 제안이기도 했다. 그래야 국가에 해가 되는 사태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15
박세채(朴世采)가 주장한 탕평의 내용을 요약하면 붕당망국적(朋黨亡國的) 견해에서 파붕당을 주장하면서 우리나라 붕당이 세수지업(世守之業)이며 참여범위가 넓고 또 현사가 함께 존재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에 주자붕당론(朱子朋黨論)의 일방적 적용이 불가하므로 결국 당색에 관계없는 진현퇴사와 유재시용을 중심으로 탕평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으로서 앞시대에 주장되었던 조제론을 취합, 정리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주장의 특징은 첫째, 주자의 붕당론 그 자체를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였으며, 둘째, 군주에게 인물 변별이나 시비판정을 귀속시킨 황극설을 들 수 있다. 시비와 용사출척의 기준을 군주의 황극에 귀속시킨 박세채의 황극설은 이를테면 신료중심적(臣僚中心的) 붕당론으로 부터 군주중심적(君主中心的) 붕당론으로 전환시키는 기초논리로서의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숙종과 후일의 영조가 그 내용이야 어떻든 탕평을 표방하며 이를 정책으로까지 추진하였던 배경은 여기에 있지않은가 한다. 세번째 특징은 用人에 있어서 붕당단위가 아닌 개인단위의 출척을 주장한다는 점이다.16
숙종대의 탕평은 갑술환국(숙종20 : 1694)이후 추진되었다. 환국직후 숙종의 탕평교지가 반포되었는데 이 교서는 인조 이후 정국을 본받는 조제론을 써서 일진일퇴(一進一退) 정국을 탕평 정국으로 전환시키겠다고 밝히고 있었다. 갑술환국 이후 탕평의 주요과제는 남인수합 문제였다. 소론은 ‘조정론’으로써 이에 적극적이었으나 박세채계․노론은 탕평의 원칙에 공감하면서도 대남인 토역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시비명변론’을 주장하여 탕평에 대한 입장차이를 보였다. 송시열계 노론은 시비명변론을 빌려 반탕평적(反蕩平的) 입장을 표현하였다.17
그러나 숙종의 탕평추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갑술환국 이후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숙종 치세 후반으로 가면서 점차 세력균형이 위태로워지고 탕평의 명목이 퇴색하고있었던 것이다. 숙종이 시도한 탕평책은 명목상의 탕평에 지나지 않았으니, 평형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 탕평의 근본의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예컨데 공평을 내세운 그 자신이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시에 내몰고, 상대 당파에 정권을 전적으로 위임하는 편당적 조처를 취하였다. 경신환국․기사환국․갑술환국 등의 조처가 계속된 것은 그의 탕평론이 지니는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더구나 병신처분이후 노론 중심으로 일당전제화가 추진되면서는 탕평책이 더 이상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18
Ⅲ. 영조대의 정국의 동향과 탕평정치의 전개
숙종대의 거듭되는 환국과 경종대의 신임옥사(辛壬獄事)를 거치면서 정국의 혼란은 가중되고, 이런 와중에 경종이 즉위 4년만에 승하하자 왕세제가 즉위하니 그가 영조(1724 - 1776)이다.
영조는 왕세제때에 모해의 위험을 직접 겪었으며, 택군설(擇君說)로 인하여 군주의 지위가 논란이 되는 등 신변의 불안을 실제로 체득하였으므로 명분상 왕도의 회복을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왕권의 확립을 위한 조처를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는 왕권강화를 정국의 수습책으로 여기고 이전에 언급된바 있던 탕평책을 시행하였다. 영조대의 정국은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계속되는 상황이었으나 왕이 개입하여 조제함으로써 정치의 파행을 막았으며, 이러한 왕의 의지는 왕권강화로 귀결되었다.
1. 탕평의 강화를 위한 제도개혁
영조는 16년 경신처분과 신유대훈으로 자신의 정통성을 확인한 후 탕평정국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에서 청요직(淸要職)혁파 정책을 추진하였다. 즉 이조전랑과 한림제도의 개혁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영조가 이랑과 한림 제도를 개혁하기로 결정했던 것은, 17년 조현명(趙顯明)의 주선으로 소론 준론계 유수원과 대담하는 과정에서 감명을 받아 결정한 것이었다. 당시 유수원은 「관제서승도설」을 바치면서,
明나라 관제는 周나라 관제의 오묘한 이치를 가장 잘 얻었습니다. 오늘날 이를 행한다면 반드시 그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淸나라 사람들이 비록 오랑캐이지만 명나라 제도를 오로지 사용하였으므로 나라를 세운지 백년이 되었는데도 당쟁의 폐단이 없습니다.…전하께서는 매번 기강을 세움을 선무(先務)로 삼으시지만…臣의 생각으로는 기강(紀綱)을 세우고 공도(公道)를 넓히는 요점은 실로 서승법 가운데에 있습니다. 아국의 옥당을 가지고 이를 설명한다면…만약 서승법을 쓰면 正字 3년에 교리로 오르고 교리 3년에 응교(應敎)로 올라서, 참봉과 봉사의 서승제와 같으니, 어찌 王命으로 부를 때 나오지 않는 사람이 생기겠습니까. 서승의 법은 옛부터 이와 같으니 대저 근신하면서 公을 행하게하려 함입니다.
라 하였다. 明․淸의제도인 차례대로 승진하는 서승법을 써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당쟁의 폐단을 없애서 무당(無黨)의 경지를 만들수 있고 기강을 세울 수도 있다는 견해였다. 당시 영조는 기강을 세우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해 왔다. 그래서 유수원의 견해를 긍정하였고, 당시 우의정 조현명도 동의하였다. 청요직 타파는 ‘당론’ 곧 ‘자작의리’로 좌우되는 타락한 일진일퇴(一進一退)의 정치 규모를 변화시키려는 영조의 의중과 부합된 것이다.
영조 17년 4월에 한림을 천거하는 과정에서 당파 간의 쟁단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이랑통청’의 법과 ‘한림회천’의 규칙이 혁파되었다. 영조는 혁파 교문에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었다.
기강이 위에 있으며 다스려지고 권병(權柄)이 아래에 있으며 어지러워진다. …권한과 기강이 아래로 이동되므로 왕의 정사가 떨치지 못하니, 그에 대한 계획과 결단은 상위자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곧 이 개혁은 군주권을 정점으로하는 기강의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청의로 상징되는 유신을 양성한다기 보다 위계질서를 강화하여 직업적 관료를 양성한다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는 영조의 탕평정책이 관료제의 강화를 지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랑통청권의 혁파의 표면적인 이유는 선출과정에서 당파간의 쟁단이 발생하는 폐단을 없애버리겠다는 것이었다. 즉 이랑이 가지고 있었던 통청권(通淸權)을 제거하고, 그 권한을 수당과 아당인 판서와 참판에게 권한을 집중시킨다는 선택이었다. 또한 玉堂에 선발된 사람은 모두 돌아가면서 이조 낭관으로 추천되므로, 추천받기 위한 경쟁의 필요성을 없애버린 것이었다. 영조 탕평책의 특징인 ‘쌍거호대’의 조제(調劑) 정신을 살리겠다는 의미였다. 결국 이러한 판서 권한의 강화는 판서를 출천하고 임명하는 권한을 가진 군주권과 재상권(宰相權)의 강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림회천법 혁파문제를 살펴보면 표면적인 이유는 역시 당파간의 지나친 경쟁을 없애버리겠다는 것이었다. 영조는 당시 탕평으로 여러 당파가 같이 근무하게 되면서 당파끼리 서로 ‘패천’시키는 혼란이 계속 나타나자, 유수원의 관제서승제도를 따라 경장하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
영조는 자신이 추진한 ‘조제’탕평의 실을 얻기 위해서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청요직을 혁파해버렸던 것이다. 개혁된 제도들은 관료제 운영에서 나타나는 쟁단은 차단함으로써 관료체제를 안정시키자는 것이었고, 군주권과 재상권의 강화를 바탕으로 상하 위계질서를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조는 이로써 언론이 평온한 ‘세록지신’의 화합은 어느 정도 이룰 수 있었겠지만, 언론이 준엄한 재야의 사대부(士大夫) 인재들을 조제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이러한 ‘청류’로 불리는 신진 사대부의 몫이었던 청요직의 권한을 혁파해 버림과 동시에 완론(緩論)계 인물로 채워진 재상의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시간이 지날수록 영조의 탕평정국은 척족 및 이들과 연결되어 권귀(權貴)로 변해간 세칭 ‘탕평당’에게 권력이 독점되어가는 과정으로 전이되어 갔다.19
2. 영조대 탕평의 특징 : 완론주도의 탕평
영조대의 탕평은 완론이 주도하는 탕평이었다. 온건한 입장을 취했던 완론 탕평파는 영조가 즉위하자 붕당의 타파를 기본으로 하는 탕평을 정국운영 윈칙으로 표방하도록 보좌하였고, 1728년 무신란을 계기로 조문명등이 노론 완론계 정파를 끌어들여 탕평정국 형성에 성공함으로써 완론이 본격적으로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노․소․완론은 영조 7년 전후부터는 ‘탕당’으로 불릴정도의 결집력을 가지게 되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완론 중에서도 자신을 탕평당이라고 자칭하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다. 군주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완론계는 영조 16년 이후 완전히 대세를 장악하였다. 탕평파를 이끌면서 탕평론을 이론화하고 정국운영에 적용하려 노력했던 인물로서 소론은 조문명․조현명 형제와 정석삼․송인명․정우량 들이 있었고, 노론은 홍치중․김재로․원경하들이 있었다.
소론 완론계 탕평론자중 가장 먼저 탕평론을 주창했던 인물은 조문명(趙文命)으로 박세채(朴世采)의 이론을 이어받아서 탕평을 주장하였다. 그는 영조 원년에 올린 탕평소에서 현재 국가를 병들게 한 근원은 붕당이라 지적하고 ‘타파붕당’을 제일의(第一義로) 내세웠다. 그는 붕당의 폐해를 다섯조목으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는데,20 첫째는 是非가 진실하지 않다는 점. 둘째, 용인의 길이 젊지 않다. 셋째, 기강이 서지 않는다. 네째, 언로가 개방되지 않는다. 다섯째, 염치가 크게 상실되었다는것이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왕도를 확립해아 한다고 하였다.21
조문명은 탕평정국에서 모범으로 삼아야 하는 시기는 인조년간이라고 지적하였다. 인조는 붕당을 군자당․소인당으로 구분하지 않고 각 당의 인재를 등용함으로써 40년 태평을 이룩하였다고 칭송하였던 것이었다. 인조년간을 탕평정국의 모델로 지목했던 입장은 소론 완론계 정파가 공유했던 생각이라고 판단된다. 인조년간 정국운영 방식을 본받아서 조제론에 입각한 탕평정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그의 처신과 견해는 영조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22
조문명은 탕평정국이 본궤도에 오르기 전인 영조 8년에 사망하고 그의 정치적 입지는 동생인 조현명이 이어받았다. 조현명은 송인명․김재로와 함께 영조 16년 이후 시작되는 영조 득의의 탕평을 보좌하였다. 조현명도 구양수(歐陽修)와 주자의 붕당론은 당이 갈라져서 이미 5대 이상이 지난 당시 조선의 현실에는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곧 군자당․소인당의 구분은 무의미하다고 하여 오로지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박세채와 마찬가지로 붕당이 모두 사류에서 나왔다는 점을 긍정한 것이었고, 이이의 조제론을 수용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관료제 운영 방식을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명․청의 서승법 도입을 주장한 유수원의 견해를 칭찬하고, 이를 적극 추진하여 성사시켰다. 이랑통청권 혁파문제는 일찌기 조문명도 주장한 바 있다.
완론탕평파의 또 하나의 기둥이었던 송인명 역시 ‘파붕당’을 앞세우고 조제보합(調劑保合)을 우선한 점에서는 위의 두 사람과 같다. 그러나 그는 준론에서 완론으로의 견해변화를 긍정하고 있어서 의리에 가치를 두지 않는 인물로 지목되었다. 또 영조의 입장과 같이 붕당만을 싫어한 것이 아니고 사대부 자체, 즉 사론 내지 청의에 의해 움직이는 정치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으므로 더욱 심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말년에는 스스로 이른바 탕평당의 형성으로 야기된 폐해를 느껴서 이제까지의 완론 중심의 탕평을 바꾸어 준론의 조제라는 방향으로 변화를 기도하던 중에 死去하였다.
탕평정국에 우선 참여해야 한다는 노론 온건파인 완론은 소론 완론과는 달리 처음부터 노론(老論) 사대신(四大臣)의 신원을 주장하였다.
노론 완론에서 주목되는 이론가는 원경하(元景夏)였다. 그는 원래 준론에 속했던 인물이었으나 인조의 외손이라 하여 영조 12년 문과장원으로 급제한 이후 영조의 깊은 지우를 받게 되자 그 견해를 바꾸어서 영조의 탕평을 적극 보좌해야 한다는 완론으로 돌아섰다고 한다. 이후 그는 소론 완론 임연․정우량과 준론 윤유, 당시 청남의 지도자인 오광운들과 가까이 지냈고, 이들과 함께 영조 16년에 이른바 대탕평론을 본격적으로 내세웠다. 그는
탕평의 정치가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만약 노론과 소론만을 서로 대하게 할 뿐이라면 어찌 능히 인심이 복종할 수 있겠습니까? 동인․서인․남인․북인을 물론하고 인재라면 등용한 이후에야 公道를 넓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23
라고 건의하였다. 이제까지 노론과 소론의 보합에 치우친 인재 등용을 넓일 것을 주장한 것이었다. 특히 노론 중에서는 처음으로 남인과의 조제보합을 주장했다.
3. 영조대 탕평의 의의와 한계
소론정권하에서 즉위한 영조는 이전 시기의 폐단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즉 붕당정치의 와해와 환국정치의 폐단에서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고, 각 당파간의 조제를 통한 탕평정치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영조의 노력은 초기 무신란으로 인하여 현실을 직시하게 되면서 그후 탕평파를 중심으로 한 탕평책이 실시되어 각 당파의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는 ‘쌍거호대’형식으로 탕평이 추진되었다.
특히 영조의 탕평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왕이 자신의 의도에 따라 인재를 보합하였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은 달성되었다고 할수있다. 혼란된 정국을 수습하고, 조제를 통한 인재의 등용,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왕권강화는 영조대 탕평의 의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은 영조 즉위전에 일어난 신축․임인옥에 대한 명분싸움에 이용됬다고 생각한다. 영조 3년 정미환국(丁未換局)에서는 신축․임인옥 모두 역으로 처리했는데, 이는 소론(少論)의 정치 명분을 나타낸 것이었다. 영조 5년 기유대처분(己酉大處分)에서는 신축은 비역이고, 임인옥은 역으로 규정하였으며, 영조 16년 경신처분(庚申處分)으로 신축․임인옥 모두 非逆으로 판정하였다. 이는 즉 노론의 명분의 승리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상과 같이 영조는 자신의 왕통상의 정통성확립을 위하여 여러번의 처분을 단행하였고, 인재의 보합도 그러한 그의 의도에 의해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원래 노론세력을 기반으로 하였던 영조는 위의 과정을 통하여 탕평을 진행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였는데, 이는 동시에 노론의 명분을 마련해 준것과 동일한 것이다. 이러한 나의 분석은 이후 정국이 노론 전제화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데에서 증명된다고 할 수 있다. 영조 후기의 정국은 노․소 연정이라기 보다는 노론내 척신당과 비척신세력의 대립으로 대표될 수 있다.
즉 탕평의 추진동기가 순수하지 못하였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정통성 확립과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였던 노론의 명분을 위한 탕평이었으므로 이후 척신세력의 등장이라는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 영조대 탕평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Ⅳ. 정조대의 정국의 동향과 탕평정치의 전개
1. 정국의 동향
영조대에 추진되었던 탕평책은 정조 즉위후에도 계속 이어져서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한 시대를 이끌어가고 있다. 정조는 영조말년에 척신당이 등장하고, 친부인 사도세자가 임오화변으로 제거당하는 정국에서 왕위계승여부가 불투명하였으나, 1775년(영조 51) 12월 대리청정이 결정되고, 대리청정을 시행한지 3개월만에 영조가 병사하자 즉위하였다.
정조대의 정국에 대하여 탕평정책 추진과정과 시․벽파분립문제를 고려하여 4시기로 구분하여 이해하려는 견해가 있고, 사도세자에 대한 의리문제를 중심으로 3단계로 구분하여 이해하려는 견해가 있다.
이 글에서는 정조가 즉위하여 척신들을 제거하고, 제도를 정비하여 탕평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준비기간으로 생각되는 정조 12월까지를 전반기로, 채제공을 등용하여 정조득의의 ‘의리’탕평이 시행되었고, 시․벽파의 갈등을 해소하려고 노력하였던 나머지 시기를 후반기로 설정하기로 하였다.
1) 전 반 기 : 대리청정(1775) - 정조 12년(1788)
1776년 즉위한 정조는 당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한 상황이었으므로 선결해야 할 초미의 정치적 과제는 정국주도권을 장악해야 하는 일이었다. 정조는 세손시절 직접 경험했던 권력집단내부의 갈등구조를 타파하기 위한 정책시행에 착수했다. 따라서 정조는 즉위와 동시에 자신이 사도세자의 자식임을 천명하고 나섬으로써 향후 정국운영에 대한 정책방향을 암시했다.
첫째, 탕평책 시행을 강력하게 추진하고자 하였다. 영조가 탕평책을 시행하여 정치적 효율화를 꾀했다고 하나 실질적으로는 노론에 의한 일당 독재체제가 계속 유지되었고 이른바 임오화변 이후에는 탕평당으로 불리는 소수의 척신세력이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많은 정치적 폐단을 노출시켰다. 따라서 정조는 전대(前代)의 이러한 정치적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보다 합리적이고 강력한 탕평책을 시행하고자 하였다.
탕평은 의리에 해롭지 않고 의리는 탕평에 해롭지 않은 연후에야 크고도 공평한 대의리를 발할 수 있다. 지금 내가 말하는 바는 의리의 탕평이지 혼돈의 탕평이 아니다.
정조는 탕평을 의리와 동일선상에서 인식함으로써 이른바 준론중심의 탕평을 표방했다. 따라서 이것은 노론청류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여 자신의 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척신세력을 제거하겠다는 정조의 의지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정조 자신이 영조조 탕평의 의미를 반감하게 한 이유가 척신세력에게 있었음을 인식한 결과이며, 따라서 정조 초기의 탕평책은 척신세력에 대한 숙청과 맞물려 시행되었다.24
정조는 왕세손 대리청정이 시행되기 이전부터 척신세력에 의해 그 지위에 위협을 받고 있었다. 당시 정국운영을 주도하면서 정책결정에 참여하고 있던 권력집단 내의 핵심세력은 홍인한․정후겸 및 김귀주 일파 정도였다. 이들은 세손과는 적대적인 대립관계를 견지한 척신세력으로서 상호간에 견재와 협력관계를 통해 세손을 견제하고 정국운영을 주도하였다. 이들 세 집단은 권력집단내에서 삼각체제를 형성하면서 서로간에 정치적 성향과 이해관계에 따라서 견제하거나 협조체제를 유지하면서 정국운영을 주도하고 자신들의 세력확장에 부심하였다. 그러나 이들 척신세력이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영조의 사후에 대비한 정치적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상황에서 세손이 즉위한다면 이들의 정치적 입지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세손에 대한 정치적인 공세를 더욱 강화했으며, 특히 홍인한․정후겸 일파는 세손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들의 정치적 역량을 총동원하였다.25
영조 말기에 세손에 대한 압력은 홍인한․정후겸 일파가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세손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려는 시도와, 세손의 친위세력 특히 홍국영에 대한 제거계획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척신세력의 공세는 1775년(영조51) 좌의정 홍인한이 이른바 동궁삼불필지지설「東宮三不必知之說」을 제기함으로써 그 정점을 이루었는데, 이는 세손의 권위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나선것으로 대리 청정에 대한 문제제기 자체를 봉쇄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에대해 서명선은 세손을 옹호하고 홍인한을 탄핵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으며 영조가 서명선의 상소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함으로써 세손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었다.
이처럼 척신세력은 홍인한이 「東宮三不必知之說」을 제기한 이후 세손과의 명분싸움에서 패배함으로써 사실상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상실했다. 반면에 서명선의 상소건 후 영조의 지지와 명분론에서 앞선 세손측의 정치적 입지는 한층 강화되었다. 결국 영조 51년(1775)에 대리청정이 결정되었고, 대리청정을 실시한지 3개월만에 영조가 병사(病死)함으로써 세손은 정국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즉위하였다.
정조는 집권초기에 탕평책을 통해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고 이를 뒷받침해줄 제도적 장치로서 규장각을 설치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구현하고자 했다. 이미 고착화된 자신과 척신세력간의 대립구도를 해소하고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먼저 정조는 척신세력을 제일의 숙정대상으로 함았다. 즉 정조는 역절(逆節)에 대한 각종 윤음(倫音)을 반포하여 척신숙정을 위한 명분을 마련하는 한편 세손시절부터 자신을 보위하는데 전력해 온 홍국영을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東副承旨)로 발탁한 후 다시 도승지(都承旨)에 임명하여 홍국영으로 하여금 척신세력에 대한 숙정작업을 대행케 했다. 정조는 홍인한과 정후겸을 유배에 처한 것을 시발로 하여 대대적으로 국청을 개설하여 이들의 잔여세력들은 숙정해 나갔다. 결국 정조는 일련의 숙정정책을 통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함은 물론이고 자신의 정치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기반을 확립해 나갔던 것이다.
이렇게 척신세력을 제거한 정조는 홍국영이 노론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그의 누이를 원빈으로 궁궐에 들이면서 세력을 확대하자 홍국영도 제거를 하고 자신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면서 탕평정치를 전개하게 되었다.
정조 6년에는 서명선(徐命善)을 영의정에 이복원(李福源)을 우의정에 임명하고, 원자 정호를 계기로 윤선거․윤증 부자를 복관시켰다.26 소론 준론의 정계 진출을 지원한 조치였다. 노론 청명당계로는 홍락성(洪樂性)과 김립을 임용하였는데, 이때 서명선이 주도한 소론 준론계 정파를 강화시켜 노론 청명당계 정파와 보합하려고 하였다. 정조 8년부터 시벽파의 분립과 대립 양상이 시작되었다. 8년 7월경 김하재(金夏材)의 상소 이래 비로소 ‘시’와 ‘벽’의 색목의 명칭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상에서 정조 초기의 정국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이 시기는 정조가 그의 왕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시기로 볼 수 있다. 즉 영조말 척신 정권하에서 대리청정을 실시하게 되고, 척신들의 제거 계획하에서 정조가 즉위하게 되었다. 즉위후 정조는 척신세력을 제거하고, 이후 홍국영을 제거하면서 정조 자신의 지위를 확립하려고 노력하였고, 영조대의 탕평정책을 이어서 정조도 탕평을 기본정책으로 삼았다. 그러나 정조의 탕평은 영조대와는 달랐다. 정조는 1776년 즉위하자마자 그의 정치적 입장을 천명하여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선언하였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선대왕께서는 종통의 중함을 위하여 나에게 명하여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잇게 한 것이다. 오호라 전일에 선왕에게 올린 장문에는 본이 들일 수 없다는 나의 뜻을 크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예(禮)는 비록 가벼히 할 수 없지만 情 (情) 또한 풀지 않을 수 없다.27
이러한 선언은 사도세자의 정치적 입장의 계승 - 辛壬事에 있어서의 노론의 입장의 부정, 경장을 통한 새로운 지배질서의 지향을 표방한 의미가 있다. 즉 영조와는 다른 ‘의리’탕평(蕩平)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2) 후 반 기 : 정조12년(1788) - 정조24년(1800)
정조 치세의 후반기는 이전에 형성되기 시작한 시파와 벽파의 대립이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고 이런 가운데 탕평을 시도하여 갈등을 해소하려는 정조의 노력으로 점철된 시기라 할 수 있다.
정조 12년 2월에 정조는 친필의 특지로 남인 채제공(蔡濟恭)을 우의정에 임명하였다. 당시 영의정은 노론 김치인(金致仁), 좌의정은 소론 이성원(李性源)이었으므로, 정조는 당파가 분열된 이래 처음있는 일이라고 자찬하였다. 13년 8월에는 채제공을 좌의정으로 임명하고, 김종수를 우상으로 임명하였다.
정조 16년부터는 사도세자에 대한 의리 문제를 놓고 시․벽파의 상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윤4월과 5월에 사도세자 30주기를 맞아 올린 「영남만인소」와 17년 5월에 채제공이 영상으로서 올린 「미토」를 청하는 상소는 모두 사도세자에게 씌워진 누명을 신원해야 정조의 군권이 천양된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같은 달에 이와 반대되는 상소를 올린 노론계 윤구종(尹九宗)이나 김원행(金元行)의 문인 유성한(柳星漢)의 상소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당시 소론 박하원(朴夏源)등 760여인도 연명소를 올려 영난만인소에 동조함으로써 임오의리 주장이 표면화되었다. 노론에서도 서유린(徐有隣)․이병모․정민시 등 정조 측근 신하들이 이를 지지하고 나서자, 노론 청명당계가 시벽파로 완전히 갈라서서 상호 공격하는 심각한 혼란 상황이 야기되었다.
정조 12년 부터 18년 사이에는 정치제도상에서도 여러가지 변화가 나타났다. 이때는 재상권한을 다시 강화하는 정치개혁을 선언하였다. 따라서 이조낭관 통청권이 다시 혁파되어 청요직의 권한이 규제되고, 비변사의 권한도 중요사항의 경우 정승이 다시 의를 붙여서 국왕에게 올리는 형태로 운영함으로써 견제되었다. 곧 국왕과 재상 중심의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관료체제가 채택된 것을 의미한다. 규장각 기능이 활성화되고 문체반정을 표방하였으며, 성균관 대사성 구임법을 실시하는 등 관료세력의 재교육을 강조해서 새로운 관학풍의 진작이 있었다. 또 군제는 백년이상 계속될 수 없다고 하여 오군영제를 개편하기 위하여, 장용영을 창설 강화하는 방식으로 궁극적으로는 군영의 일원화를 추진하였고, 수원성 축성을 시작하였다. 또한 서얼허통이 확대되고 노비제도에 대한 개혁이 추진되어 도망노비를 탕척하였으며, 도시의 새로운 상품유통체제를 인정하는 신해통공정책들이 이 시기에 실시되었다.28
정조 19년 부터는 尹蓍東(尹蓍東)으로 대표되는 노론 산림의 폭넓은 지지를 받는 노론에서 중도를 표방한 정파를 등용하여 시․벽파 갈등을 해소하려고 하였다. 윤시동은 김종수․심환지와 함께 영조 말년부터 청명당계의 핵심이었지만, 노론 내의 갈등은 조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때 채제공도 다시 상신에 임명되었다. 청남계 정파와 노론계 정파를 다시 화합시키려 했던 것이다. 순조 이후의 기록은 대체로 정조 19년을 시․벽파 상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은 변환기로 지목하고 있다.
정조 21년 2월 시․벽파 조제에 노력하던 영의정 윤시동이 사망한 후 벽파 지도자 심환지를 상신에 임명하였다. 동시에 규장각에서 성장한 국왕 측근인 노론 시파 이병모(李秉模)와 소론 시파 이시수(李時秀)를 상신에 기용하였다. 시․벽파 대립을 준론 의리를 조제하는 탕평으로 해결하겠다는 결정이었다. 당시 소통정책을 넓게 실시하여 사대부 정치 참여 폭을 확대한 것은 벽파 견제 정책과 연결된다. 이 시기 초엽에 수원성이 준공되고 장용외영이 설치됨으로써 장용영 체제가 완성되어 군권이 군주에게 일원화되었다.
그러나 정조 23년 시․벽의 두 머팀목이었던 채제공과 김종수가 거의 같은 때에 죽었고, 정조 24년 5월 준론을 조제하는 자신의 통치 규모를 자세히 밝힌 이른바 오회연교(五晦筵敎)직후 정조가 사망함으로써 분열된 준론계를 조제하는 ‘의리’탕평은 계속되지 못하였다. 이후 정순왕대비와 연결된 벽파가 권력을 장악하여 정국이 일당 전제로 전환되면서 ‘탕평’이 표방되는 정국은 끝났다. ‘의리’탕평 추진과정에서 나타난 시․벽파의 대립이 정조사후 탕평 정국을 무너뜨렸던 것이다.29
2. 정조대 탕평의 특징 : 준론주도의 탕평
정조는 의리를 우선하는 탕평을 추진하였다. 각 당파에서 ‘자호자’ ‘청류’ ‘준론’으로 불려지면서 의리와 명절을 앞세웠던 인물을 조제함으로써 탕평의 실을 얻겠다는 정치론이었다. 이는 영조년간에 내세워진 조제보다도 의리를 앞세웠다는 측면에서 ‘의리’탕평이라고 규정하였다.
정조는 즉위 직후 영조년간 조제를 중심으로 하는 탕평 정국 추진으로조성된 정치 풍토 전반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그 시절에 보좌했던 신하는 실로 임금의 뜻을 받들지 못하고 다만 미봉함으로써 사업을 삼았다. 심지어 자리하나 추천하는데도 이쪽 저쪽을 나란히 섞음으로써 조정하는 계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이 정말로 말이 되는가.
정조는 영조년간 완론계 정파가 견지했던 ‘쌍거호대’ 방식의 ‘조제’탕평을 미봉책에 머물렀을 뿐이라고 비판했던 것이다. 정조는 이어서 이런 식으로 탕평을 추진한 결과 척신과 그들에게 붙은 권간 당여의 권력 독점을 부려 왔고, ‘탕평’의 표방은 정치를 어지럽히고 남을 억누르는 방편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군주의 깊은 심중을 헤아리지 않고 표면적인 뜻에서만 영합하여 권력유지에 부심한 때문이었다.
정조는 영조대의 탕평이 융성하고 지대한 것이었다고 평가하면서도 혼돈의 혐의도 적지 않았음을 아울러 지적했다. 그는 군자․소인의 명확한 구분없이 당색에 따라 호대하는 것은 탕평에 害가 될 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그의 이러한 판단은 영조대 탕평책의 일단의 오류에 대한 반성의 토대에 의한 것으로 이는 결국 탕평정책의 본질적 궤도수정의 의지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즉 그는 탕평을 자신이 직접 주도하고 미봉적인 호대를 지양해 관직에 집착하는 붕당의 대립을 의리의 논의로 전환시킴으로써, 군권을 강화함과 동시에 당색을 희석시켜 궁극에 보합을 실현하기 위한 포석으로 영조대 탕평의 한계를 지적했던 것이었다.
정조 초년의 탕평규모는 근본적으로 노론 주도의 정국을 긍정한 것이었다. 이런 선택은 노론 내의 청류를 자임했던 청명당계 인사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당시 북당과 남당이라고 불린 홍봉한과 김귀주가 주도하는 두 척신당을 즉위한 그 해에 일거에 재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곧 정조는 세칭 탕평당의 폐단을 일소하여 의리를 앞세우는 새로운 탕평을 추진하였다. 이는 숙종이 병신처분(丙申處分) 60주년을 맞아서 먼저 3년 정도 노론의 의리를 적용해보겠다는 선택이기도 했다. 정조 14년 8월부터는 3년간 남인 채제공의 독상기간이 주어졌다. 곧 의리의 인재를 가려서 보호하되, 한 당파의 의리 주도 기간을 3년정도 주어 시험함을써 그 실력 곧 장점과 단점을 함께 보고 조제하겠다는 선택이었다.30
정조는 21년에 쓴 조문명 문집 서문에서 당론을 불러 일으킨 원인으로 시비의 출사문제 뿐 아니라 문벌의 상하 문제를 또한 중요하게 지적하였다. 특히 숙종․경종년간 당화는 전쟁보다 심해서 「세록지예」가 많이 죽었기 때문에, 영조가「탕평」정치를 시행하여 만품과 사방을 함께 아우르려고 노력했다고 설명하였다. 결국 문벌의 차별성과 지역의 차별성을 타파하려는 것이 탕평의 목적이라는 지적이다. 그리하여 경연 등에서 측근 신하들과 대담할 때 ‘우리나라의 사대부는 바로 「세령」이라고 하면서 요즈음 세가자제는 사대부 자질이 전혀 없으면서도 쉽게 청직을 거친다고 한탄하였고, 백여년 이래 고질이 된 문벌만 쓰는 인재 등용법을 고쳐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정조의 붕당인식과 군자소인론은 당연히 일진일퇴(一進一退) 정국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정조는 정치는 환국이 반복되는 식의 ‘일진일퇴’의 정치와 경륜없이 어울리는 ‘조오미륜’의 정치가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두가지 모두 눈앞의 효과는 있지만 폐단이 크기 때문에 ‘보합대화’의 정치만 못하다고 하였다. ‘일진일퇴’는 분별론(分別論)을 사용하는 정국이며, ‘조오미륜’은 조정론(調劑論)을 사용하는 정국을 의미한다. 정조는 인재의 보합을 우선하면서 의리에 곧은 자를 변별하는 정치인 ‘보합대화’의 정치가 자신의 정치규모라고 규정하였던 것이다. 곧 시비분별론(是非分別論)과 조제보합론(調劑保合論)을 함께 사용하는 정국 운영 방식이었다. 붕당을 타파하되 의리를 지키는 준론을 조제하는 탕평을 실시하겠다는 것이었다.
정조는 자신 득의의 탕평은 무신년(정조 12년) 특지로 채제공을 상신에 등용하면서부터 시작된다고 술회하였다. 이때 그 대전제로서 “국가 정사는 모두 대신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여 대신의 책임을 무겁게 하겠다.”라고 하였다.31 상신의 권한을 강화하고, 이 바탕에서 탕평의 정치를 이끌어 나가겠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정조의 준론 조제보합(調劑保合)이라는 의미는 정조의 통치론을 통하여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정조는 즉위년에 사도세자 죽음 문제에 대한 임오의리(壬午義理)를 내세우면서 환국을 도모한 인물들을 모두 역적으로 몰아 처단하였다. 왕실 외척이나 궁중 세력과 연결되었고, 이른바 ‘자작의리’를 내세워서 군주권을 등에 없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정조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병신년에는 ‘이열치열’로서 역적을 다스렸기 때문에 살아남은 자가 있었다. 만약 이수치열을 썼다면 살아남은 자가 없었은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또 정조 11년 채제공을 등용할 때도, “이시기에 부른 뜻이 어찌 제멋대로이기 때문이겠는가. 지금은 불가불 ‘이열치열’의 시기이다. 내가 최근 준비하고 깊이 헤아려서 경을 한점의 잘못없는 깨끗한 위치에 두었으니, 경 또한 그 보람을 보답하는 길을 생각하라.”고 말하였다.
정조가 채제공에게 말한 ‘이열치열’의 의미는 조금 뒤에 밝혀졌는데, 곧 준론의 조제를 통한 탕평 추진이었다. 정조 13년에는 서로 양극에 서있는 준론인 채제공과 김종수를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19년부터는 채제공과 윤시동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출범시켰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조가 처음부터 의중에 두었던 준론이 주도하는 ‘의리’탕평의 국면이었다. 영조년간 세가벌열(世家閥閱)의 조제(調劑)를 우선하고 사대부 유신의 조제(調劑)는 소극적이었던 점을 반성한 데서 나온 방식이었다. 여기에서 ‘이열치열’이란, 곧 한쪽의 ‘비’나 ‘역’은 다른 쪽의 ‘비’나 ‘역’과 대비시켜 분별하고, 한 쪽의 ‘시’나 ‘충’과 대비시켜 조제하는 통치술을 써서, 의리를 깊이 있게 제시하여 세도를 만회하겠다는 의미였음이 분명하게 밝혀진 것이다.32
3. 정조대 탕평의 의의와 한계
정조대의 탕평은 영조대의 탕평을 지적하고 나름대로의 의지를 통한 준론 중심의 의리탕평이라 할 수 있다. 정조는 즉위전 부터 척신세력에 의해 고통을 겪었으며, 이러한 과정이 정조 치세에 왕권강화를 제일로 삼는 정국을 형성하였다고 생각한다.
정조는 탕평책 실시와 수반하여 왕권강화를 위한 여러가지 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왕권의 보좌를 위한 규장각, 군권을 장악하기 위한 장용영의 설치가 그 대표적인 것이며, 이외에도 서얼허통, 신해통공정책등 사회경제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개혁을 단행하였으며, 학문을 숭상하는 등 유교적 군주로서의 위엄을 쌓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조대의 탕평도 역시 오랜 붕당의 벽을 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영조대에 비하면 환국과 처분으로 인한 정국의 변화는 없었으나 시파와 벽파와의 대립이 끊이지 않았고, 이것이 정조 사후에 벽파의 승리로 귀결되고 세도정권이 출범한것을 보아 탕평이 실시는 되었으나 정파간의 벽을 넘지는 못하였다는 한계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Ⅴ. 결 론
이상에서 조선후기(朝鮮後期) 탕평정치(蕩平政治)에 관하여 대략적으로 알아보았다. 16세기 이후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성립되면서 탕평이란 의미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이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된 조제론(調劑論)은 그 이후 조정론(調停論)․군자소인론(君子小人論)․조제론(調劑論)의 세가지로 전개되었으며, 숙종대에 이르러서는 붕당의 본질이 변질되어 일당전제화되는 환국정치(換局政治)로 옮겨가게 되면서 탕평론이 본격적으로 대두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박세채에 의한 조제탕평론(調劑蕩平論)이 숙종에 의해 받아들여졌는데, 박세채의 탕평론은 이이의 조제론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숙종대에는 이러한 탕평이 실제 정국에 운용되지 못하였고, 그것은 영․정조대의 과제로 넘어가게 되었다.
영조는 즉위후 탕평을 표방하였으나 영조 5년 이전까지는 환국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영조 4년에 일어난 무신란은 왕으로 하여금 일당전제(一黨專制)의 정치를 청산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조치세 전반의 과제는 신임옥에 관한 왕의 처리와 그 과정에서 각 당파간의 명분이 엇갈리면서 탕평이 진행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영조 16년 신유대훈(辛酉大訓)으로 신임옥에 관한 비역 판정으로 인하여 노론은 정치적 명분을 얻었으며, 이는 동시에 영조에게도 정통성을 부여해주는 조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은 이 이후 노론전제화의 경향을 띠게 되면서 척신세력(戚臣勢力)에 의한 정국운영과 이런 과정에서 일어난 임오화변(壬午禍變)이라는 사건을 통하여 탕평은 사실상 실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척신정치의 폐단을 극복하고 다시 탕평을 천명한 정조는 왕세손때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즉위초 척신세력을 제거하고 또한 자신을 보호하였던 홍국영이 다른 마음을 품고있음이 밝혀지자 그도 역시 제거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그는 영조의 탕평정국을 비판한고, 의리를 중시하는 탕평을 실시한다. 정조대는 여러가지 제도의 개혁을 통하여 왕권이 강화되었으며, 사회경제적으로도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는 이열치열(以熱治熱)을 통치의 이념으로 삼았던 정조의 탕평의 효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조대에도 역시 당파간의 이해를 완전히 통합하는데에는 실패하였다. 이것은 시파와 벽파와의 갈등으로 나타났고, 결국은 정조대의 탕평정국은 그의 사후 이어지지 못한채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여 세도정치로 이행되게 되었다.
이상이 본고의 요약이다. 본고는 목적이 탕평정국을 재구성하고 그 의의와 한계를 알아보는 것을 기본으로 하여 앞으로의 개별연구의 기본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시기는 조선후기 정치사상에서 그 중요성에 비하여 연구가 뒤늦게 시작되었고, 이제 본격적인 연구성과가 나오고 있다. 그러므로 영․정조대 탕평정국에 관한 논쟁과 그러한 논의를 통한 역사상의 확립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이미 서론에서 언급한 바 있으나 이 시기의 연구성과는 미비한 편이고, 특히 정조대의 탕평정국에 관한 체계적인 개별연구는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고를 작성하는데에도 특히 한 연구자의 견해를 비판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수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이 논문의 가장 큰 한계가 아니었나 하고 반성해본다.
영조대의 연구에서는 주로 탕평론자(蕩平論者) 중심으로 논지를 전개했으나 사실 이에 버금가는 반탕평론자(反蕩平論者)들이 있었음에도 그에 대한 연구를 이끌어내지 못한점, 영조 후반기의 정국의 동향에 관한 구성이 체계적이지 못하였던 점이 과제로 남게 되었다. 정조대의 연구에서는 시파․벽파간의 갈등을 자세히 다루지 못하였고, 제도개혁 부분에서 신해통공, 서얼허통, 균역법, 대동법 부분이 다루어지지 못하였는데, 이는 이 논문의 주제가 탕평정국의 이해였고, 위에서 언급한 제도의 개혁은 그 자체가 각각 너무나 중요한 사안이므로 개별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자세히 다루지 않았다.
이상과 같은 한계점과 미비한 부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고는 조선후기 정치사에서 이전시기와 달리 국왕의 권한이 강화되고, 당파간의 대립이 완화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사회경제적으로도 근대사회를 향하여 진보할 수 있는 계기가 바로 탕평정치 시기를 거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고, 그런의미에서 미숙하나마 숙종대 탕평책 등장에서 영조․정조대의 탕평정국에 이르기까지 개괄적으로 재구성해보려고 노력하였다. 이는 앞으로의 연구를 위한 기초작업이었다는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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