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10월 중순에 강원도 春川 102보충대로 입영했다.
安東역에서 집결하여 입영열차를 타고 강원도 春川역에 도착했다.
열차가 역사에 도착을 하니 한무리의 제대군인들이 건너편 열차 출입문 난간에 매달려 의기양양 우리를 향해 소리치며 외친다.
"아이고 니들이 제대하는 그 날이 오겠냐고.." ㅠㅠ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들뜬 마음에 아무거리낌 없이 내뱉은 말이었지만, 우리는 희비가 교차되는 그 광경에 마음이 무척이나 착찹하고 암담하기만 했었다.
아!! 우리도 저런 날이 과연 올것인지.........
그 당시 1988서울올림픽 유치로 88년이 와야 제대 할 수 있다며 우리를 88 꿈나무 군번으로 불렀었다.
춘천 102보충대에서 며칠을 머물며 군용물품과 인식표 등을 지급받고 각 사단훈련소로 배치 되었다.
양구, 인제, 화천, 홍천 등지로, 잘 뽑히면 수도방위사령부 기타 부대에서 자원들을 뽑아갔다.
우리는 강원도 양구땅 방산면에 위치한 "백두산부대신병훈련소"로 배치되었다.
그 시절 떠돌던 말중에 "인제가면 언제오노 원통해서 못살겠다(인제.원통), 입이 두개라도 할말이 없다(양구)" 라는 말을 나중에야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소양강댐 선착장에서 LST라는 軍用 수송배를 타고 양구로 이동했다.
배에 올라 조금 지나니 황소머리 부대마크가 달린 수송병사들이 훈련병 몇몇을 시범케이스로 다짜고짜 후려치며 군기를 잡는다.
기세등등한 그들의 위세에 눌려 쥐 죽은 듯 웅크리고 앉아 숨소리 조차 내 쉴수 없었다.
소양강 호수위를 한참을 거슬러 올라 드디어 신남선착장에 도착을 한다.
선착장 인근에 군용트럭 몇 대가 줄지어 우리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더블백을 메고 60트럭 위에 올라 뽀얀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쓰고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어디론가 쉼 없이 달린다.
시월중순이었지만 강원도 산골짜기에는 벌써 낙엽이 진 앙상한 참나무 가지에 을씨년스런 바람소리가 매섭게 몰아 치고 있었다.
산등성이 긴 백호터널을 지나니 저 멀리 송현리 백두산부대 신병훈련소가 나타난다.
황량하고 썰렁한 분위기 산기슭에 낡고 빛바랜 훈련소의 모습이 무척 낯설기만 했다.
80년 서슬퍼런 5共 초창기 三淸교육대에 끌려 온 피교육생들이 이 곳에서 생활하며 정신순화교육을 받았던 곳이다.
이 곳은 山岳지형 외부와 차단되어 있는 첩첩산중이다.
밖으로 나가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훈련소 연병장에 도착하니 트럭에서 꾸물거린다며 빨간모자를 쓴 독사같은 조교들의 불호령과 함께 축구골대를 돌아 선착순 한 명을 외친다.
잔뜩 긴장감으로 움츠려 있는 상태에서 운동장 뺑뺑이를 몇 바퀴 돌리니 기진맥진 목이 쉬어 잠겨버린다.
악바리 처럼 이를 악물고 훈련을 받으라는 것인지 중대막사 팻말도 "악바리 13중대" 라고 쓰여있다.
한 낮의 뙤약볕에 뒹굴고 한 밤의 찬서리에 고단한 몸을 움츠리며 단잠에 빠진다.
기상점호와 함께 단체구보로 훈련소 앞 냇가로 뛰어가서 세면을 하고 아침을 먹고나면 하루일과 훈련을 시작한다.
함께 뒹굴며 훈련받은 동기생들이 군생활 동안 소중한 존재인지를 그때까지도 잘 느끼지 못했다.
훈련을 마치고 퇴소식을(방산147기) 거쳐 자랑스런 이등병 약장을 모자에 달면 군생활을 다한것 처럼 뿌듯함을 느끼고 모두가 기뻐했었다.
그러나 뿌듯함도 잠시, 본격적인 병영생활이 시작되는 자대배치가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5주간 훈련을 마치니 동기들이 속속 자대로 배치되어 각자 뿔뿔이 흩어진다.
사단본부, 사단수색, 63연대, 65연대, 66연대로..
66연대본부 보충대에 며칠을 대기하고 있으니 고향친구가 어떻게 알았는지 나를 찿아왔다.
연대 작전과에 말년병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66연대 작전과 탁해균병장)
그곳에서 고향친구를 만났지만 이등병 계급장에 군기가 바짝 든 신병으로서 병장계급을 보니 가물가물 하늘처럼 느껴진다.
며칠후 저녁을 먹고 내무반에 있으니 상병계급을 단 병사가 한 밤중에 우리를 인솔하러 왔다.(6중대 행정병 구연철상병)
동기 3명이랑(1소대 황영민, 2소대 정용암, 화기소대 김종필) 닷지트럭에 태우더니 캄캄한 밤중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채 그냥 어디론가 무작정 실려 갈 뿐이다.
음침하고 적막한 산길 한참을 둘러 어딘가에 도착한다.
더블백을 메고 모두 내리라고 한다.
산 정상 부근 평평한 둔덕에 있는 부대막사 주위는 세상천지가 온통 하얗게 눈으로 뒤 덮여 있었다.
태풍같은 눈보라가 부대막사 주위를 사납게 휘몰아 친다.
그 곳은 우리나라 대대급 군부대 중에서 가장 높은 해발1000m고지에 주둔하는 백두산부대 도솔대대 막사였다.
휘 몰아 치는 눈보라에 말문이 꽉막힐 정도로 완전히 압도 당한다.
6,26 동란 때 귀신잡는 무적해병 정신이 서려있는 도솔산!
도솔지구 그 천연요새 바로 아래에 있는 부대가 백두산 도솔대대다.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광경은 난생 처음으로 보았다.
시베리아 벌판에 불어오는 그 폭풍같은 눈보라에 얼굴은 물론 눈 조차 뜰수가 없었다.
인솔 상병을 따라 희미한 불빛이 보이는 막사에 들어서니, 그곳은 도솔대대 매점 PX였다.
따뜻한 난로가에 옹기종기 모여 우두커니 아무 말 없이 그냥 서 있을 뿐이다.
긴장과 두려움에 떨고있는 초라한 이등병의 모습..
밤 늦은 시간 눈쌓인 험한 길을 잠시 머물며, 차량지원을 다시 받아 GOP 자대로 이동한다.
저 멀리 구비구비 펼쳐 진 황홀한 GOP 경계등 불빛, 가까이 다가 갈수록 으시시하고 음산한 분위기 드디어 천봉대대에 도착한다.
차가운 밤 공기 카랑카랑한 거친 북한말투의 대남방송이 쩌렁쩌렁 산하에 메아리 져 울려 퍼진다.
근처 낡고 비좁은 소초에 비집고 들어가니, 겨우 새우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다.
하룻밤을 자고 오전 일찍 중대 인솔상병과 함께 좁다란 시멘트 블록길 순찰로를 따라 가칠봉 중대본부로 향한다.
加七峰(1242m) 이곳 일곱 봉우리들을 더해 금강산 일만이천 봉우리가 된다는 곳이다.
이곳이 대한민국 휴전선 GOP라인 최고봉에 위치한 가칠봉중대 OP다.
북한 초소와의 직선거리 680m
여명과 함께 아침 햇살이 밝아오니 기묘하고 신비로운 장엄한 광경들이 눈 앞에 펼쳐진다.
가칠봉에서 내려다 본 펀치볼(Punch Bowl)의 운해가 무아지경을 이룬다.
右측으로 우람하게 솟아 있는 대암산 봉우리 左측에는 을지전망대가 북녘땅을 바라보며 솟아 있다.
전입신고식을 위해 펀치볼 해안마을을 바라보며 1시간여 핏대세워 목청소리를 가다듬는다.
차렷!
중대장님께 경례!
단결~!!
OOO외 2명은 대대본부로 부터 6중대로 전입을 명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단결~!!
백두산 부대가 아니면 결코 이런 광경을 그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펀치볼, 해안분지 이 곳은 민간인 통제구역이다.
民通線!
군생활 하며 민간인을 접할 수 있고 볼수 있다는 것은 그나마 행운이다.
고립된 생활에서 오는 바깥 세상에 대한 동경, 그리고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위안이 될수 있다.
그러나 이 곳에서는 민간인을 구경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바라 볼 수 있는 것은 하늘 높이 자유롭게 나는 갈가마귀 떼만 보일 뿐이다.
이등병 시절에는 소각장에 쓰레기 버릴 때가 유일한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혼자서 쭈그리고 앉아 잠시나마 고향의 가족들을 떠올리며 생각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GOP에서 가장 큰 기쁨과 즐거움은 고향에서 날아오는 소포와 편지들, 그리고 한 달에 두어번씩 찿아오는 황금마차라고 하는 이동PX 차량, 꼬불쳐 둔 비상금을 털어 그 황금마차를 손 꼽아 기다리곤 했다.
지금도 가끔 안성탕면과 다이제스트 비스킷을 사서 먹어본다.
그 때 그 맛인지..ㅎ
그렇게 해서 이등병 때와 병장시절을 GOP 백두 1소초에서 두 번이나 근무하며 병영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전역했다.
1988년 3월 가칠봉을 뒤로하고 조금의 미련도 남김 없이 홀가분히 그곳을 떠나 왔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그 땅을 밟아 보고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땀과 눈물 회한이 서린 그 곳을 찿고 싶어진다.
간혹, 그 시절을 되새겨 보기도 한다.
아직도 머리속에는 소대서열이 (소대장 김광태. 선임하사 홍희중. 왕고참 병장 이기철. 병장 김장오. 병장 강석천. 병장 강봉석.....)
소대원들의 이름을 읊조려 본다.
그 시절 모든것이 힘들고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니 소중한 추억이기도하다.
양구에서나 맛 볼 수 있는 곰취며 더덕과 두릅, 거점방어훈련이나 거점보수작업 나가면 지천으로 널려있던 산나물을 고추장에 쌈싸 먹던 쌉싸름한 추억들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내일이 지나고 모레가 되면 사랑하는 아들이 군에 입대를 한다.
사랑하는 나의 소중한 아들아 !
너의 군생활 동안 함께 할 수는 없겠지만, 네가 당당하게 무사히 군생활 마치고 사랑하는 가족 곁으로 돌아오는 그 날까지 마음 든든히 너를 보듬어 주고자 한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
파이팅!!
大韓의 모든 장병들아!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들아!
항상 씩씩하고 건강하시라..
첫댓글 30년 전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름니다 감사함니다.
선배님 고맙습니다.
무적태풍중대에서 생활하셨군요.
반갑고,반갑고 또 반갑습니다
선배님! 저도 반갑고 반가움이 그지없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그시절을 회상하게 됩니다..
백호 터널 앞에서 하차 죽어라 뛰어서 넘어가던 기억이 새록새록~~
논산 군번은 방산 훈병들과 2주를 더 받았어요..
2월군번...조금 빠르네요...암튼 반가워요....
한선배님 반갑습니다~^^*
백호터널은 우리사단 모든장병들이 통과해야 되는 첫 관문이 아니던가요!
훈련소 들어갔다가 다시 거쳐 나와야 하는 곳..
그당시 논산훈련소에서 자대로 온 병사들도 방산 송현리 훈련소에서 몇주 더 받고 자대로 갔었죠.
우리들은 논산훈련소에서 온 병사들이 신기하게 느껴졌답니다.
깔끔한 모습이 왠지 부럽기도 했고, 시설좋은 논산훈련소(우리는 그곳을 호텔이라 불렀어요)에서 탱자탱자 하다가 왔다며, 괜한 시기심도 생기더군요 ㅎㅎ
여튼, 21사 백두산부대에서 동시기에 생활하며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아!! 어찌 그때 우리도 82년 초겨울에 먼저온 고참님(아마도 79년 군번선배님들로 기억..)들과(그땐 예비군복 에 통일화 착용)서로 극과극에 마주치며, 차마 상상도 할수 없는 선배 고참 분들이였네요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또다시 울 후배님들이 우리 동기생(전역병)들을 뱃터 에서 마주 쳤네요.. 참 세상은 돌고 돌아 가네요.. 이글을 읽어 보니 저희가 하는 프로그램 이랑 글짜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네요
저를 비롯하여 선, 후배님들 참 그땐 너무나 고생 많았죠.. 지금 생각 하면 아련한 추억 거리 아닙니까..
21사단 서 전역한 선,후배님 너무나 고생 많아습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요 단결!!!
김선배님! 생활했던 시간은 비록 다르지만, 피끓는 젊은 청춘들이 백두산부대에서 군생활했던 추억을 더듬으며 이렇게 함께 공감해 주시니, 피를 나눈 형제와 같은 끈끈한 전우애를 느낍니다.
1985년 10월16일 춘천역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제대장병들과, 춘천역에서 내려 102보충대로 향하는 입대장병들.. 구구절절 그상황에서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제가 휴가나와서 버스탈려고 서있는데.. 버스기사님이 " 백두산부대 아저씨 타세요" 하더군요. 마침 제가 가는 뱡향이라서 버스를 탔더니 요금도 안받더군요, 기사아저씨 알고보니 우리 21사단 백두산부대 출신이더군요. 이심전심 알아주는 사람은 우리부대 선배님들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