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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250 天命, 茶山의 하늘
조선시대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1762∼1836)의 학문과 사상을 밝히는 친필 저술, 글씨와 그림 등 유물 150여점을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는 기획전이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천명(天命), 다산(茶山)의 하늘’이라는 제목으로 열리고 있다.
다산 정약용 초상화
좌☞ 1992년 안보선이 그린 <다산 인물상> 개인 소장
좌1☞ 2009년 4월 김호석이 그린 <다산 인물상> 강진군 다산기념관 소장
좌2☞ 1935년 7월 16일자 동아일보에 수록된 삽화
우☞ 장우성의 <다산 인물상>을 토대로 설경숙이 그린 <다산 인물상> 강진군 다산기념관 소장
<[여유당집(與猶堂集)] 목민심서(牧民心書)>
다산의 500여권의 저작 중 하나를 꼽으라면 다산초당 ‘송풍각(松風閣)’에서 저술된 《목민심서》
목민관, 즉 수령(首領)이 지켜야 할 지침(指針)을 맑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저서.
부임(赴任), 율기(律己: 자기를 다스림), 봉공(奉公), 애민(愛民), 이전(吏典), 호전(戶典),
예전(禮典), 병전(兵典), 형전(刑典), 공전(工典), 진황(賑荒), 해관(解官: 관원의 면직)
12편으로 나누었으며, 각 편은 다시 6조로 나눠 모두 72조로 구겅되어 있다.
부패의 극에 달한 조선후기 지방의 사회상태와 정치의 실제를 민생문제 및 수령의
본무(本務)와 결부시켜 소상하게 밝힌 명저이다. 이 책은 다산이 신유사옥으로
강진에서 19년간 귀양살이 하던 1818년(57세) 완성되었다.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조선후기의 문신,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저술을 정리한 문집으로 활자본 154권 76책.
정약용의 대표적인 저술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흠흠신서(欽欽新書)> 등
이른바 1표 2서(一表二書)에서 시문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저술을 총망라한 문집이다.
외현손 김성진 편집하고 정인보·안재홍이 교열에 참가하여 1934~38에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간행하였다. 그후 신조선사편 <여유당전사>를 저본으로 해서 2종의 영인본이 더 간행되었는데,
1962년 문헌편찬위원회가 다산연보를 첨가해 <정다산전서>라는 책명으로 영인본을 냈고,
1970년에는 경인문화사가 <여유당전서보유> 5책을 추가해 영인본을 출간했다.
<[여유당집(與猶堂集)] 흠흠신서(欽欽新書)>
다산이 저술한 형법서(刑法書)로 30권 10책.
다산의 508권 저서 가운데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와 더불어
‘1표(表) 2서(書)’라 일컬어진다. 내용은 경사요의(經史要義) 3권, 비상전초(批詳雋抄) 5권,
의율차례(擬律差例) 4권, 상형추의(祥刑追議) 15권, 전발무사(剪跋蕪詞) 3권으로 구성된다.
다산은 살인사건의 조사·심리·처형 과정이 매우 형식적이고 무성의하게 진행되는 것은
사건을 다루는 관료사대부들이 율문(律文)에 밝지 못하고 사실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기술이
미약하기 때문이라 여겼다. 이에 따라 생명존중 사상이 무디어져가는 것을 개탄하였다.
이를 바로 잡고 계몽할 필요성을 느껴 책의 집필에 착수하였고, 1819년 완성 1822년 간행되었다.
<연강첩장 (烟江疊嶂)>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연강첩장 (烟江疊嶂)’이란 안개 낀 큰 강과 重疊한 산봉우리를 말한다.
중국 북송 때 왕진경이 그린 <연강첩장도烟江疊嶂圖들> 보고 이에 대해
소동파가 찬으로 쓴 시가 고문진보에 전한다.
열수선유시권(洌水船游詩卷)
유배지에서 돌아와 한강에서 친구들과 뱃놀이를 하며 느낀 회포를 20m의 두루마리에 적은 글
사언사구(四言四句) 시를 중심으로 48수에 이른다.
窈彼雲林 요피운림 조용한 저 운림은
靑窅深沈 청요심침 푸르고 깊숙하네.
於焉游息 어언유식 여기서 놀고 쉬며
聊樂我心 료락아심 나의 마음을 즐기노라.
<고종류수축(古鐘流水軸)>
정학연(丁學淵:1783~1859)외 다수
정조의 사위인 해거(海居) 홍현주(洪顯周:1793~1865)와 다산의 맏아들 유산(酉山)
정학연(丁學淵:1783~1859) · 둘째 아들 운포(耘逋) 정학유(丁學游:1786~1855)
그리고 동번(東樊) 이만용(李晩用:1792~1863) 등이 1831년(辛卯年)
10월 16일 열수(洌水: 지금의 한강)와 수종사(水鍾寺: 남양주시 운길산(雲吉山)에 있는 절)에서
뱃놀이도 하고 놀면서 지은 시를 모은 두루마리 작품이다.
위의 <열상시축>이 다산 등 19명의 참여자가 모두 각자의 필체를 구사하며
시를 지었다면 본 두루마리 작품은 놀이에 가담한 각자가 시를 읊고
한 사람이 받아 적었는데 두 작품은 좋은 대조를 이룬다.
운포는 <농가월령가>를 지은바 있다.
<열상주유기(冽上舟遊記)>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연강첩장(烟江疊嶂)>과 한 질의 작품으로 정학연(丁學淵), 권돈인(權敦仁), 김정희(金正喜)가
한강에서 배를 띄워 유람하며 지은 기문이다.
<시오경백선인소제학사(示五經百選印所諸學士)-정조대왕御筆>
정조(正祖: 1752~1800)
오경백선(五經百選)
정조가 규장각에 명을 내려 ‘주역’, ‘서경’, ‘시경’, ‘춘추’, ‘예기’에서 긴요한 내용 99편을 추리고
주희의 저술 2편을 더하여 엮은 책의 서문으로 정조의 친필글씨이다.
<채화정집(菜花亭集-매씨상서평(梅氏尙書平)>
정약용(丁若鏞)이 고문상서(古文尙書)라고 칭하는 <매씨상서(梅氏尙書)>의 진위를 고증해 밝힌
책마다 유배중이면 1810년(순조 10) 9권으로 저술하였으며, 1834년 10권으로 개정 · 증보하였다.
앞머리에 저술 동기 등을 밝히고, 상서 이분들의 내용을 치밀히 대조하여,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검토하면서 문제가 되는 부분이 위작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특히 위작이 아니라는 청(淸)나라 학자 모기령(毛奇齡)의 주장에 대해서 40조목을
할애하여 그것이 잘못임을 밝혔다.
<옥천증조고은명일서(玉川贈趙古隱明逸序)>
다산이 영조임금에게 올린 옥천(玉川) 조덕린(趙德린: 1658~1737)의 당쟁 비판
<을사소(乙巳疎)>를 읽고 적은 서문(序文)이다.
조옥천은 1725년(영조 1)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정4품 관직인 필선(弼善)으로
있으면서 당쟁의 폐해를 지적한 상소를 올린바 있다.
그런데 그 문장 속에 노론의 득세를 비난한 구절이 있어 당쟁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혐의를 받아 종성(鐘城)에 유배되었다.
옥천은 70세의 노구로 이인좌의 난(1728, 영조4) 때 활약하기도 하였다.
1736년(영조 12)에는 서원의 무분별한 건립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이미 1725년(영조 1)에 올린 상소와 연관되어 노론의 탄핵을 받고
제주로 유배 가던 중에 강진에서 별세하였다.
<열상산수도(冽上山水圖)>
輭槲肥梧葉始舒 연곡비오엽시서 연한 떡갈과 살찐 오동나무 잎이 막 펼쳤는데
一株枯木獨蕭疎 일주고목독소소 고목 한 그루만이 홀로 쓸쓸하네.
范寬筆意徐熙墨 범관필의서희묵 범관의 붓놀림과 서희의 먹으로
好向殘山賸水攄 호향잔산승수터 하찮은 산수 정치를 잘도 묘사하였네.
열초(洌樵)
<열상산수도(冽上山水圖)>
騷騷雲木擺孱顔 소소운목파잔안
사각사각 구름 낀 숲에 높은 산 열리니
疑有天風到此間 의유천풍도차간
아마도 바람이 불어 이곳으로 이르게 했겠지
草岸小亭誰作者 초안소정수작자
풀언덕 작은 정자 누가 지었나.
瀑泉聲出對頭山 폭천성출대두산
폭포샘 소리가 두산에서 들려오네.
열초(洌樵)
<사언고시(四言古詩)>
朝餐赬霞 夕吸墜露 朝餐赬霞 夕吸墜露
아침에 붉은 노을 먹고 저녁엔 떨어진 이슬 마시네
靑鶴翩翩 息我庭樹
푸른 학이 훨훨 날아 나의 정원 나무에 내려 앉네.
杜琴不理 風佩其淸 두금불리 풍패기청
거문고 타지 않아도 풍류는 더없이 맑다오.
靜觀調息 闃然無聲 정관조식 격연무성
조용히 바라보며 호흡을 고르니 고요하여 소리가 없네.
抱樸含眞 與道爲隣 포박함진 여도위린
소박하고 참됨을 안고 도와 이웃하리.
九轉之熟 萬歲長靑 구전지숙 만세장청
아홉 번 익힌 탄약 먹으며 만세토록 길이 청춘을 누리세.
茶山病客 다산병객
다산 병객
다산이 사언체(四言體) 고시(古詩)를 초서로 쓴 6곡 병풍이다. 종이에 비하여 작은 붓, 혹은 붓끝을 이용하여 활달하게 썼다. 여백 속에서 세세한 운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정관(靜觀) 두 글자를 파격으로 썼다.
진(晉)나라 도잠(陶潛)이 쓴 ‘정운(停雲)’과 ‘권농(勸農)‘에 나오는 ’翩翩飛鳥 息我庭柯‘ ‘傲然自足 抱朴含眞“이라는 구절을 따오기도 했다.
다산은 추사보다 24세 위이다. 그는 외국으로 사신을 가지 않았지만 강진에 유배되어 18년 동안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김정희가 다산에게 답한 사찰이 ‘완당전집’ 권4에 실려 있다
<오객기(五客記)>
출세할수록 겸손하고 검약해야 함을 다섯 가지 사례를 통해 비유함
오객기는 정조가 ‘[어고(御考)] 차상(次上·우수상)’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출세할수록 겸손과 검약해야 함을 다섯 가지 객을 들어 비유적으로 묘사하다.
<익찬공서치계첩(翊贊公序齒禊帖)>
<죽란산인산수도(竹欄散人山水圖)>
다산이 ‘竹欄詩社’를 주도할 때인 30대에 竹欄散人으로 자호하여 그린 산수도.
‘竹欄詩社’는 다산중심으로 만들어진 南人 제일 초급관리들의 사교모임이다. 다산은 出仕 초기,
즉 正祖의 총애를 받으며 관직에 나갈 때인 30대 초반에 채흥원 한치응 윤지눌 홍시제 유원명 등
친구 13인과 형님 약전과 모두 14인으로 죽란시사를 조직한바 있다.
다산은 자신의 집인 명례방에 모여 정원에 만발한 꽃을 감상하며 술과 詩畵로 우의를 다졌던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모임 시기가 더 詩的이라는 점이다. 다산이 적은 <죽란시사> 서문에 의하면
살구꽃 필때, 복숭아꽃 필 때, 국화 필 때, 늦여름 연꽃이 한참 필 때, 오이가 익을 무렵,
큰 눈이 내리면 한번, 歲暮에 盆梅가 필 때다.
<매조도(梅鳥圖)>
翩翩飛鳥 息我庭梅 편편비조 식아정매
훨훨 새 한 마리 날아와 우리 뜰 매화나무에서 쉬네.
有烈其芳 惠然其來 유열기방 혜연기래
진한 그 매화향기에 끌려 반갑게 찾아왔네.
爰止爰棲 樂爾家室 원지원서 락이가실
이곳에 머물고 둥지 틀어 네 집안을 즐겁게 해 주어라
華之旣榮 有賁其實 화지기영 유분기실
꽃은 이미 활짝 피였으니 토실한 열매가 맺겠네
嘉慶 十八年 癸酉 七月十四日 洌水翁書于茶山東菴
余謫居康津之越數年 洪夫人寄敞裙六幅 歲久
紅渝剪之爲四帖 以遺二子 用其餘 爲小障 以遺女兒
가경(嘉慶) 18년 계유년(1813) 7월 14일에 열수옹(洌水翁) 다산(茶山)이 동암(東菴)에서 섰다.
내가 강진(康津)에서 귀양살이 한지 여러 해가 지났을 때, 부인 홍씨(洪氏)가 헌 치마 여섯 목을
보내왔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붉은 빛이 바랬다. 잘라서 첩(帖) 네권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족자를 만들어 딸에게 남긴다.
<미법산수도(米法山水圖)>
九里松前一笠亭 구리송전일립정
구리 소나무 앞에 조그마한 정자 하나
濛濛煙水紹繞屛 몽몽연수소요병
자욱한 안개와 물이 구름 병풍 둘렀네
水南瞑色渾如海 수남명색혼여해
수남의 어두운 빛은 온통 바다 같으니
柔櫓伊鴉尙可聽 유노이아상가청
노 저으며 이아이아하는 소리 들을 만 하네
미법으로 그려진 산수도다.
미법산수도는 북송대의 문인 서화가였던 미불(米芾)과 그의 아들 미우인(米友仁)의
산수화 전통을 지칭한다. 또한 평원으로 전개되는 나지막한 토산을 배경으로
구름과 안개가 자욱이 끼어 있는 양자강 하류의 풍경, 즉 강남 산수화의 전형적인 화풍을 말한다
첫댓글 좋은 자료 잘 보았습니다. 전시회를 직접 보듯 상세한 설명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선생님~더위에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