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아들네 첫 이사 가는 날.
생후 15개월짜리가 어미와 떨어져서 할머니와 자는 체 하다가 불안했는지 자정 넘어 서럽게 울었다.
낮에 그렇게 할아버지와 잘 놀던 것이... 나는 여행 떠날 준비로 내 방에서 일찍 잠 자러 들어갔다가 자지러지는 어린 것의 울음에 깊이 잠 들지 못했다. 아침 6시 일어났다. 나한테는 오밤중 한밤중인데도 일찍 일어났다.
양재역 2번 출구에 나오니 아침 여덟 시도 채 안 되었다. 아무도 없다. 춥기도 하고. 도로 전철역 구내로 들어갔다.
관광버스는 아침 08:45에 출발하여 천년고도(千年古都) 경주 여행은 시작되었다.
서울에서는 히끗거리며 날리던 눈발이었던데 고속도로 주변은 완전히 백설이 분분한 첫눈, 설경이 펼쳐졌다.
간밤에 눈이 많이 내렸다는 증거다. 차장 너머로 다가섰다가 뒤로 물러나는 고속도로 주변의 산 속 소나무들은 하얗게 눈을 뒤짚어 쓰고 있었다. 마치 겨울나라로 여행 떠나는 기분이었다.
아쉽게도 나는 잠을 설친 탓으로 눈을 감은 채 그대로 잠이 들었다.
옥천 금강휴게소에 10:35 도착. 휴게소에서 잠깐 쉬고는 다시 차는 거침없이 아랫녘으로 달렸다. 12:30 경주 톨게이트를 빠져 나왔다.
경주시 원화로(인왕동)에 위치한 경주사찰음식 전문점 '향적원 첨성대집'에서 음식을 들었다.
몸집이 넉넉한 여스님이 사찰음식의 이모저모를 자세히도 설명해 주셨다. 마늘, 파, 부추 등 오신채가 안 들어간 음식이기에 매실장아찌, 더덕 장아찌 등이 나오고, 두부와 누룽개를 삶아낸 물에 치자나무(열매)로 노랗게 물들인 누른밥도 먹었다. 구수하고 맛이 텁텁한 막걸리를 살짝 곁들였다.
여스님이 뽕잎, 산초잎, 곰취잎, 당귀잎 등으로 담은 장아치를 설명했다. 산야초, 약초에 관심이 있는 나였기에 티를 냈다. '선들임'이라는 나물요리 대부분의 식재료는 서해안 내 텃밭에 있는 것들이기에 살짝 여쭤보았다. 엄나무, 오가피, 명이(산마늘), 더덕, 미나리, 취나물, 두릅, 곰취, 뽕, 쭝나무(참가죽) 등등.
향적원에서 선물용으로 선식 군것질과 건나물도 팔고 있었다.
당귀가 어떤 꽃색갈로 피느냐고 여쭈었더니 흰색이란다. 흰빛은 왜당귀(일본당귀)이고, 우리 당귀는 참당귀(붉은 빛깔)이라는 것으로 아는 나로서는 고개가 갸우뚱.
경주 첨성대, 석빙고 지역은 멀리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계림 교동 최씨네 고택도 멀리 바라보았다.
경주 13대 부잣집인 최씨네는 다음에 방문해야 할 듯.
차는 토함산을 기어 올랐다.
구불탕거리며 뱀 몸뚱이(蛇形)처럼 아슬아슬하게 올라갔다. 토함산(745.1m) 정상 부위에 거의 다달아서야 차는 가뿐 숨을 멈췄다.
석굴암.
국보 제24호 석굴암은 유리벽에 갇혀 있다. 1914~15 년. 일제가 보수하면서 기단을 빼냈고, 해방 이후인1962~63년에도 재보수했는데 두 번이나 날림이었다고 여러 차례 들은 바 있었다. 석굴암 주변 빈 터에 좌대가 많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여 축축한 이끼와 먼지에 쌓여 있었다. 자연스럽게 훼손되고 있었다. 왜 이런 석물들이 방치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석굴암 모든 구성물이 국보이지 본존불 하나만이 국보는 아니다.
나한상, 보살상 등 39체의 불상이 조각된 조각품의 실제 원형은 어땠을까 궁금하다. 일제에 해체되기 이전의 실상, 해방 후 재차 해체되기 전의 원모습은 어떠 했을까?
석굴암 하면 본존불이 먼저 떠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석굴암 본존불도 가슴 답답해 하실까? 유리벽 속에 갇혀 지내니... 어쩌면 대기오염 등 미욱한 인간들이 저지르는 실수인데도 고요하게 결부좌한 모습, 가늘게 뜬 눈, 온화하고 인자한 웃음은 여전히 띄우고 있었다. 붉은 색으로 살짝 입술을 칠한 흔적도 보이고...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하니 국가의 경사다. 석굴암은 또다시 지금 재보수하고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물이라도 제대로 복원 간수했으면 싶다.
첨성대는 국보 제31호.
1963년 경의 사진을 보면 첨성대은 학생들 이십여 명이 한꺼번에 올라가서 대롱대로 매달리거나 탑 위에 걸터 않았다.
수십 년이 경과된 지금의 첨성대는 개보수한 흔적이 너무 여실했다. 어떤 돌맹이는 새로 교체한 것들이 제법 많았다. 지금은 올라가거나 출입을 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통제한 상태다.
그 작고 적은 첨성대는 별을 관측했던 장소라기보다는 제사를 지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별을 관측한다는 의미로 첨성대라고 이름을 붙였을 게다. 나로서는 천제를 지냈던 것으로 추즉하고 싶었다.
하여튼 문화재관리가 참으로 부실하다는 비난을 면하지 못할 것 같다.
동부 사적지대도 보았다.
황남동에는 고분 수십 기가 완전한 형태로 몰려있다는 듯이 스쳐가는 차창 너머로 바라다보였다.
대능원.
흙을 엄청하게 쌓아서 만든 봉분이라는 뜻일까?
1천 년에서 2천 년 전인 과거 시대에 순전히 인력으로만 흙을 퍼 담고 부어서 만든 커다란 무덤이다. 상상도 못할 만큼 강제부역을 했을 게다. 권력 있는 왕권이나 경성 토호족장들은 인근의 백성들을 숱하게 동원 부역시켜서 이 거대란 봉분을 조성했을 게다. 당시 경주에는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 살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월성(반월성) 지역을 조금만 걸었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재방문해야만 지역특색을 관찰할 수 있겠다.
불국사.
1962년 중학교 때 처음 보았던 불국사(사적지 제502호).
그 이후 성인이 되어서 건성으로 두어 번 보았던 불국사.
이번에 다시 와 본 불국사.
매번 방문할 때마다 외각은 변질되고 훼손된 흔적이 엿보였다.
수 많은 관공객때문일까?
밀려드는 관광객을 수용하기 위하여 도로시설을 확충하고, 화장실, 매표소 등등의 부수적인 관리시설물로 인하여 인근 수목지가 크게 훼손되었다. 도로변의 나무도 인간이 내뿜은 대기오염에 힘 든 것 같기도 했다.
입장료를 받는 관광수입이 목적일까?
아쉽다. 일제시대 보수할 때도 문제가 많았고, 해방 이후에도 보수가 진행될 때마다 자꾸만 변질되고 축소되는 꼬라지인 듯 싶었다. 국보 제21호인 석가탑은 1966년 도굴범에 의해서 해체 훼손되고...
삼층탑(석가탑) 해체 중이었다. 외각은 철제빔으로 완전히 덮혀져 있었다. 비 한 방울, 바람 한 점도 통할 수 없도록 밀폐된 공간에서 작업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더 진행된다면 불국사는 사진으로 남거나 새로 모조품을 전시할 수밖에 없을 게다.지금껏 불국사를 다녀 간 사람은 몇 억 명도 더 될 듯 싶다.
석공예품이 참으로 많이도 망가졌다는 느낌이었다.
불국사 출입구 매표소의 늙은 영감들.
65세 미만의 성인들은 입장료를 내야 할 게다. 통제의 의미로써.
하지만 우리 일행은 고령자들이다. 얼굴에 주름살이 지글지글하고 허리가 굽고 걸음걸이도 초로의 특유한 자세가 나온다. 멀리서 보아도 중늙은이라는 것이 뻔한데도 불국사 매표소의 영감들은 일일히 주민등록증을 조사해서 관람객 숫자를 통제하고 있었다. 그게 다 돈이니까. 한사람도 헛되이 통과시키면 안 된다는 야박한 수입에만 급급한 행태다.
야박스럽게 여겨지는 불국사 매표소 노인직원(직원으로 보기에도 좀 그렇다)들은 업무에 충실하다기보다는 돈 독에 올랐나? 하는 미운 생각조차도 들었다.
불국사 성인 4,000원. 학생 3,000원, 초등학생 2,000원 등이다.
돈 벌이가 이 보다 더 쉬운 게 있다더냐?
문화재란 어쩌면 국가가 무료로 개방해야 할 게다. 그런데도 경주지역의 문화재 관리당국은 매표 수입에 더 열중인 듯 싶었다.
어쩐지 경주지역 늙은것들이 지악스럽게 인원 체크하며, 주민등록증 까라고 눈알 부아리는 이유을 알겠다.
위 인상이 나쁜 탓으로 경주 문화재 관리가 어쩌면 허술하다는 첫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일제시대에는 왜인들이 국보급 보물을 강탈했고, 해방 이후에는 문화재 보수에 대한 관심부족과 발굴기술 부족으로 부실했고, 도벌꾼이 문화재를 해체하는 인상이다. 경주 지역 사람들의 행태가 다 이 지경인가 하는 의구심조차도 들었다.
신라 3국통일이 어떤 측면에서 성공했는지 그 어두운 이면(異面)을 다시 엿보는 것같아서 뒷맛이 씁쓸했다.
안압지 야경.
안압지에서 발굴된 많은 유물들이 큰 기와 건축물 내부에 전시되고 있었다. 이따금 모조품도 보이고... 때로는 치밀한 공예품, 때로는 투박한 수작업 예술품도 보였다. 안압지 안을 긁어내어 발굴하면서 원래의 모습을 해치고 인위적인 재축조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11월 하순 끝이라 어둠은 쉽게 찾아 왔다. 일찍 관광을 끝내고서는 민물탕집으로 들어갔다.
민물고기를 끊인 얼큰한 탕. 나는 뜨거운 탕을 식탁 위에 놓고는 손을 뻗어 화장지를 집는다는 풍신이 그릇을 잘못 건드려서 상 아래로 떨어뜨렸다. 양말 위에. 뜨거웠다. 양말을 벋었다. 다행히 화상은 입지 않았어도 벗은 양말과 바지가랭이에서 탕국물이 배었다. 연방 물수건과 화장지로 닦아냈는데도 비린내는 가시지 않았다. 그래도 맛있게 저녁밥을 먹었다.
저녁밥을 먹은 뒤 풀시즌유스호텔에 입실헸다.
나는 교사출신인 이정석과 배정현과 함께 셋이서 한 방으로 입실했다. 이들은 바깥에 나가더니만 소주 세 병과 오징어포, 건빵류를 사 가지고 되돌아 왔다. 김성복, 김낙중과 다섯이서 밤 늦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술을 전혀 못하니 건빵류 안주를 축냇다.
이정석 동문은 텃밭 150평을 짓는데 다양한 채소와 산야초를 지내한단다. 특이 여주와 돼지감자를 지어서 이들을 건조기에 말려서 뻥틔기하면 좋은 간식거리가 된다고 말했다. 그는 호박도 말려서 뻥튀기를 한다고 한다. 또 흰색 돼지감자와 자색돼지감자를 재배하는데 이들도 뻥튀김 간식거리를 만든단다.
나도 내년에 시골에서 텃밭농사를 다시 시작하거든 뻥튀기를 시도해 봐야겠다. 좋은 배움이다.
배정현 동문은 530여 평의 넓은 밭에 콩(서리태?)를 재배하는데 금년 날씨가 안 좋아서 콩바슴을 아직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콩바슴은 콩대가 마르면 하기 때문에 당분가 늦게 털어도 될 터.
논산 출신인 김낙중 동문은 정계에 관해서 많은 정보를 가졌다.
어쩌면 정계 야사 비슷한 이야기를 무척이나 많이 들려 줄 것 같다. 밤이 짧아서 아쉽게도 다음에 들어야겠다.
이정석 동문은 1970년부터 교사를 시작하여 42년 쯤 했고, 배정현 동문은 공직생활 하다가 교편을 32년간 쯤 잡은 모양이다. 두 사람 모두 일찍 교직자로 출발하여 좋은 선생님으로 존경받았을 것 같다.
곤하게 자는데 새벽 6시 45분 쯤 핸드폰 메세시가 떴다.
아침 8시에 식사한다는 전기우 동문의 멧세지. 대장님은 잠도 안 자냐? 나는 늦잠꾸러기라도 별 수 없이 일곱 시에 일어나서 샤워를 겯들여서 세수했다.
여행 2일째가 시작되었다.
아침에는 경주박물관에 들렀다.
참으로 많은 유물들이 몇 동(棟)의 대형 건물에 분산되어 전시되고 있었다. 왕이 썼을 왕관과 혁띠(요대)에는 참으로 많은 금붙이 조각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실제로 쓴 것과 제례 등 의식할 때 구별해서 썼던 것 같다. 전시품으로 진열될 것들이 진품인지 모조품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많은 금 장식품들이 천 몇 백 년 세월을 넘은 지금도 찬란하게 비추고 있었다.
많은 석조각품.
거친 빗돌에 새겨진 한문 글짜는 오랜 세월을 풍우를 견디지 못했는지 마모가 무척이나 심했다. 글자 판독이 거의 불가능한 것도 수두룩.
토기들. 깨어진 것들, 녹이 슬어서 모양과 형태만 남은 철제 용기들...
문화재 관리부재의 측면도 다소 있었지만 석조각 공예품은 그 재질 자체가 문제였다.
모래알이 뭉쳐진 아주 나쁜 사석(沙石화강암)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나쁜 모랫돌로 조각하고, 심지어는 글짜를 새겨넣는지 모르겠다.
내 고향 (충남 보령)은 전국 최고의 결이 곱고 단단한 오석(烏石)이 나온다. 오석공예품은 참으로 단단하고 오랜 세월을 가는데 비하여 경주지방의 빗돌과 석조각품은 참으로 조악스럽기까지 했다. 서울지역의 석조각품과 유사했기에 경주지역 석공예품은 마모현상이 심각하다고 보았다.
야외공터 정자 안에는 에밀레종이 전시되어 있었다.
에밀레종은 하도 많이 오랫동안 타종한 탓이로 종 하단에 금이 가서 이제는 타종하지 않는다고 했다. 야외에 전시된 종이 진품인지 모조품인지는 모르겠다.
에밀레 타종 소리가 두둥 하게 귀를 울렸다. 영혼을 때리는 듯한 장중한 소리가 멀리 천년신라의 혼을 두둘기는 것 같았다.
나는 사실 말이지 에밀레종에 얽힌 야사(夜史)를 좋아하지 않는다. 종을 주조할 때 어린 아이를 쇠물 속에 던져서 죽였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곧 종소리 속에서 묻어난다는 야사였다. 그게 꾸며낸 이야기인지 실화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잔인한 살인행위라는 인식이 내게 깊게 심어졌다.
배정현 동문은 교사출신답게 그게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지 실제로는 아니라고 내게 말했다.
나는 에밀레종의 예술가치는 국보이겠지만 그 종과 관련한 살인행위는 결코 미화될 수 없는 야만종교라고 보았다.
박물관 야외 공터에는 다보탑과 석가탑 모조품이 실물 크기로 전시되어 있다.
제3박물관을 바삐 돌아보는데 핸드폰에서 호출. 나 혼자 박물관에서 정신없이 구경하고 있었으니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될 동문이 나를 눈빠지기게 기다릴 터.
'미안해유' 하면서 나도 가쁜 숨을 급하게 내뿜었다.
천마총 내부 안으로 들어갔다.
해방 후 7개월 간의 발굴. 내부시골과 석장품 유물이 참으로 많이 나왔단다. 말의 안장 아래에는 사람의 발을 가리는 도구는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천인데 여기에 천마(天馬)의 그림이 있어서 천마도라고 한단다. 구름 모형의 그림이 있어서 하늘 천(天)을 붙였단다.
이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모른단다. 제17대 내물왕, 제18대 눌지왕, 19대 실성왕 가운데 한 분으로 추정한단다. 추정하는 이유는 다른 무덤에서는 순장 된 사체가 발굴되었는데도 천마총에서는 순장품이 없었단다. 순장제도를 금지한 내물왕로 추측한다는 해설사에 말에 다소 이해가 되었다.
천마총 바로 옆에는 무덤 두 기가 쌍봉을 이루고 있었다. 황남대총으로 부르는데 부부 묘를 각각 썼던 것으로 추정한단다.
천마총 무덤의 주인공이 누군인지를 모른다?
어찌보면 웃기는 현상이다.
신라가 그 당시 그 거대한 봉분을 조성하면서도 빗돌이나 상석 등 제물을 전혀 설치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후대에 들어와서 봉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외장부속품을 훼손하거나 도굴한 것은 아닐까?
신라는 제56대 경순왕 서기 935년에 망했다. 고려조, 이조시대에는 경주 신라 고분에 대하여 왕족의 후손들은 어떤 제사라든지 의식(儀式)은 유지했을까?
무덤의 주인이 누군지를 모른다고? 신라 망한지 1,000년이 흐르면서 석장석이 숱하게 많을 것 같은데도 어찌 남아 있지 않을 것일까?
경주 박물관에서는 많은 석기 장식물이 있을 게다.
그 거친 빗돌, 자연석을 갈은 뒤에 한문자로 새긴 석공예품이 참으로 많을 게다. 그런데 어째서 그 큰 봉분에는 이런 장식물이 없는 것일까? 신라를 멸앙시킨 고려조, 고려조를 멸망시킨 이씨왕조에서는 이들 신라조의 흔적을 어느 정도껏 훼손멸실했다는 것일까?
언제 한번 신락 고미술 문화재에 대해서 더 공부해야겠다.
왜 의문투성일까?
2일째 마지막 여행코스.
양동마을 주차장에서 관광버스는 멈췄다.
양동마을은 경주손씨, 여강이씨 두 대성 가문이 주류가 되고, 기타 소성받이 성씨 등 150여 채가 어울려서 500년 간이나 누대로 살아 왔단다.
양반, 일반 상민, 마름, 머슴, 노비 들이 한데 어울려 살았던 골((마을형태)는 정보화마을로 지정되고 민속체험마을로 지정된 만큼 마을 곳곳이 잘 정비되고 치중되었다.
1984년 양동마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고,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1984년에 중요민속지역으로 지정되었다면 옛날 고택, 민가 가옥 등의 형태가 고스란힌 완벽하게 계승된 것일까?
아쉽게도 나는 몇 개의 고택에서 나무기둥의 흔적을 살폈다. 몇백 년 전의 기둥과 몇 십 년 전의 기둥의 색갈, 나무 곁의 트기 등은 시차가 있을 터. 풍우에 곰삵고, 무게에 눌린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터. 몇몇 건물은 고색이 완연히 남아 있지만 대부분의 건물구조의 천장 부위의 목재 섯가래 등은 유규한 역사의 때가 안 묻었다. 개보수를 자주 했다는 뜻이다.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게 어떤 것일까?
어쩌면 국제사회에서 국가위상이 높아짐에 따른 영향력에 기인한 측면도 배려된다고 본다
극히 짧은 시간의 일견으로 어설프게 겉모양을 평가하는 것이 무척이나 외람스럽지만 나로서는 고개를 약간 흔들고 싶었다.
언제 기회가 되면 정밀 관찰해야겠다.
돈으로 개조한 문화유산이 아니기를 빈다.
양동마을 매표소를 지난 시각은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간대.
매표소를 조금 지난 곳에 음식점이 있었으나 예약이 안 된 상태라서 점심을 먹을 수가 없었다. 벗어놓은 손님들의 운동화만 잔뜩 보았다. 그만큼 관광지라는 뜻도 되겠다.
더 위 길로 접어드니 간단힌 초가지붕인 민가가 눈에 띄었다.
본래의 농가라기보다는 몇 십 년에 개증축한 인상이 너무 뚜렸했다. 허름한 초가 안채와 사랑채가 한 울타리 안에 있었다.
여든 살 쯤의 허리굽은 할머니 두 분이 한 평도 안 될 것 같은 비좁은 부엌에서 부추전을 연방 부치며, 나이 든 할이버지가 힘겹게 막걸리 투가리와 질그릇 술잔을 날랐다. 안 마당 간이식탁에 부추밀가루전을 젓가락으로 찟어서 안주하며 틉틉한 막걸리로 목마름을 달랬다.
뿌이연한 칼국수.
말이 칼국수이지 맛은 참으로 밍밍했다. 그래도 어디랴? 이 시간대에...17명이 허기를 급히 가셨다.
양동마을에는 제법 많은 기와집(검정)과 짚으로 지붕을 이은 초가가 있지만 대부분은 빈 집이란다. 칼국수를 내왔던 민가의 할아버지도 시내로 왔다갔다 하면서 영업만 한단다. 점심 때 간이음식을 팔려고 낮에만 머무는 집이란다.
마을안내 지도를 보니까 관가정(寬稼亭)이란 이름이 떴다.
안내 표지석에는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본다'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관가정 건물은 마을의 윗 자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기와담장 아래로 다가서면 마을 하촌이 내려다보였다. 솓을대문이 있는 집 마당에서 마을을 내려다 보였다. 관가정이란 뜻은 어쩌면 양반대가이며 부잣집을 상징하는 용어로 보였다.
관가정이라는 호를 쓴 분이 생각난다.
경주 최씨의 청이라는 분이 있다. 고려조 분이다.
최치원의 후손 여러 파 가운데 가족 번족한 파가 관가정공 청파가 있다.
라말 최치원 11세손인 고려조의 관가정이란 호는 어쩌면 부를 상징하는 것일까?
경주 첨성대가 바로 옆인 교동 최씨 고택.
교동 최씨는 경주최씨 시조인 최치원(신라 헌강왕 때의 6두품)의 후손이다. 어떤 파인지는 모르겠다. 경주 최부잣집으로 알려진 교동 최씨 고택은 만석지기로 13대를 일컫는 최부자를 말한다. 인근 백리(40km)에는 굶주린 사람이 없도록 곡간(쌀 창고)을 열어서 많은 사람을 구제하기를 13대나 이어졌다. 13대 마지막 당주와 최준 일족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은 기억한다. 대구 청구대학을 짓다가 붕괴사고로... 지금은 영남대학으로 넘어 간 유래를 짐작할 것 같다.
식사 전 나는 바삐
남쯕에 있는 심사정(心思亭)에도 들렀다. 빗장 질러서 닫힌 대문 틈새로 울안만 조금 들여다 보았다. 강학당(講學堂) 무척이나 작고 협소하다. 뒷편 대나무숲들이 음산해 보였다. 비탈진 산자락을 깎아서 세운 학당이 궁색해 보였다.
향단도 외모만 고개를 쳐들어 올려다보았다.
양동마을 음식집 손바닥만한 마당 가생이에서 사철채송화 몇 뿌리를 캐서 신문지에 쌌다.
영감한테 몇 포기 캐 가겠다고 허락을 받았다. 몇 뿌리를 캤다. 예전에 여러 차례 사다가 심었고, 얻어다가 심었는데도 관리부실로 죽였던 채송화다. 초겨울이 곧 되는데도 채송화 몇 송이가 꽃을 피웠다.
양동마을 구경을 끝낸 뒤 되돌아나올 때 두 어 평의 수조에서 특이한 식물을 발견했다.
손가락 굵기의 긴 줄기 곁에 난 풀이 특이했다. 곁가지에 실뿌리가 있는 것을 잘랐다. 6cm 줄기 하나를 신문지에 쌓았다.
'물아카시아'라고 정희태 동문이 이름을 말했다.
나로서는 처음보는 수생식물이지만 이름만은 들은 기억이 났다.
나중에 확인하니 정희태 동문은 그게 물아카시아라고 재확인했다. 그의 카페에서 언제 본 듯한 풀이름.
젓가락 굵기의 아주 짧은 길이로 잘라서 서울 가지고 왔는데 이게 새 뿌리가 나서 살 수 있는지 모르겠다. 꺾꽃이로 자라 증식되면 경주 수학여행의 기억이 더 오래 남겠다.
하여튼 나는 양동마을에서 본 몇몇 잡초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음을 실토한다. 내가 어느새 도회지 사람으로 환원되는 것일까?
우리 일행은 점식 식사 뒤 양동마을을 우측을 조금 둘러 보았다.
흙과 돌멩이를 짓이겨서 쌓아올린 토담이다. 그 위에 막기와장으로 덮은 형태.
빈 집. 많은 기와집과 사랑채, 나무광, 본채 안채 등이 비었다. 자물쇠로 굳게 잠그고, 댓문 빗장을 질렀다.
양동마을이 몇 백 년 되었다는 증거는 곳곳에 있는 은행나무와 향나무의 연륜에서 관찰되었다. 고목, 고사목이 되기 직전의 늙고 병 든 나무가 겨우 생명을 부지하고 있었다.
관가정은 보물 제442호. 중종 때 손중돈(1463~1529년) 청백리의 옛집이란다.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했다. 집터 면적 넓이는 별로였으나 들판을 내려보는 어덕배기 마을형태였다.
양동마을의 지형은 여성 질의 형태를 지녔다고 보았다.
동측, 서측 북측은 산이 제법 높고 가파른 협소한 반면에 남측은 넓은 들판이 별쳐졌다.
인체의 부끄러운 곳을 떠올리면 마을의 지형이 눈에 들어올 게다.
신라 천년의 서울 서라벌.
나는 신라인의 혼이 무엇일까를 문득문득 생각했다.
나는 1962~63년이던가? 중학교 시절에 경주로 수확여행 왔다.
처음으로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 안압지 포석정 에밀레종 등등을 보았다.
그 당시의 느낌과 50여 년이 세월이 흐른 지금의 느낌은 아직도 엇비슷했다.
신라 불교의 섬세함, 왕관의 금붙이 장식품 등으로는 신란인의 생활상이 섬세하고 정교하다는 것을 느꼈다.
거칠고 격한 사내의 그것이 아닌 섬세한 여성 특유의 기질을 엿보았다는 뜻이다.
천년서울인 서라벌.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년(인종 23년) , 중국측의 고서에 의한 신라의 역사가 과연 올바르며 정확할까 하는 의문은 늘 남아 있었다.
어제 본 옛 서라벌 시가지의 모습을 사진으로 재현한 그림판을 보았다.
각지게 동서남북으로 잘 구획된 도시형태에 기와집들이 즐비했다.
내 눈에는?
서기 2000~1200 년 전의 시대상황을 상상해 보자. 그 당시에는 무엇으로 불 때서 밥 해 먹고, 방을 덮혔을까?
산에서 긁어오는 나무 장작과 들판에서 나오는 지푸라기 수준... 그것 때면 그 많은 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데...
그 당시 수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면 그 많은 오줌 똥 등은 어떻게 처리했을까? 기껏해야 똥통을 지게로 져서 날라 버려야 할 터인데도 그 많은 양을, 언제, 어떻게, 얼마나 멀리 퍼날을 것인데... 하는 의문투성이를 간과한 도시모형도였다.
그 당시의 건축술과 건축자재(목재, 석재)가 그렇게 풍부했을까?
어쩌면 경주인들은 모두 왕족이며 양반만 살았을까?
아니다. 그들은 철저한 계급사회, 엄청나게 많은 백성과 노비가 존재했을 게다. 그럼 이런 백성과 노비계급이 과연 지금 옛 경주지도 모형의 기와집에서 경도(서라벌)에서 살았을까?
내가 보기에는 웃기는 과장과 허위였다.
우리나라 지도를 보면 경주지역은 한반도 남녁 끝에 자리잡았다.
고대국가, 삼국시대를 거쳐서 서기 660 백제를 멸하고, 서기 668년 고구려를 멸하고 서기 671년에 당나라 군대를 평양 바깥으로 축출해서 통일신라의 기틀을 맞았던 신라. 참으로 아쉬운 삼국통일이었다. 만주벌판을 다 잃어버렸다. 고구려 땅 1/2도 채 차지하지 못한 반쪽짜리 통일이었다. 나는 이런 이유로 신라의 삼국통일의 의미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견해를 지닌다.
한반도의 지형으로 보면 신라는 남단의 끝에 있는 협소한 지역이다.
서기 935년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조는 이북 개성에 왕궁을 세웠다. 개성에서 보변 경주는 남쪽 끝 변방지역이므로 자연스럽게 잊혀졌을 게다. 1392년 고려조는 군사구테타로 멸망되고, 이씨조선 왕궁은 개성에서 남하하여 한양으로 천도했다. 경주는 고려조와 조선조에서 보면 극히 변방에 속한 지역이다.
신라의 문화의 특징은 무엇일까?
문화의 특징이 있었기에 신라가 망한 뒤로로 천 몇 백년 후인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나는 섬세함으로 보았다.
섬세함은 남성문화가 아닌 여성문화다. 진취적인 것이 아니라 안으로 움추러들고, 현 상태에만 고착유지하려는 측면이 강조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신분관계도 이런 문화에 점착되어서 현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왕족, 양반 등의 강자와 백성, 노비 등 약자의 신분관계가 천 년을 넘어 지금도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지금은 부의 측면이겠지만..
어제, 세계문화유산지(2010년 12월 지정)라는 양동마을을 보면서 마음은 착잡했다.
양반과 백성 노비의 관계가 몇백 년 지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양동마을의 지형은 삼면이 협소한 야트막한 야산으로 둘러쌓여 있고 한 면은 강(안락천)과 들판으로 툭 터져 있었다. 즉 비 바람을 가려주는 풍수지리 형상으로 여성의 질을 연상하게 하였다. 변화가 정말로 더디었다는 것이 오히려 장점이 된 마을이었다.
문화관광이 아닌 잡목과 잡초 이야기도 조금은 글 써야겠다.
손바닥만한 텃밭 가생이 도로변에서 엉컹퀴보다는 더 큰 방가지똥을 보았다. 강경숙씨가 내게 물었으나 나는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시골 고향을 떠난지 만 2년이 거의 다 되어가다 보니 풀 이름들이 곧바로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참이나 고심한 뒤에 생각났다. 방가지똥. 어린 잎은 나물로 먹지만 그다지 실용성 있는 풀은 아니다.
나는 또 하나의 풀을 뜯고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 시골 텃밭에 천지인 광대나물이...
식물 이름은 매일 보지 않으면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일까?
어머니의 노환으로 지난해 내가 병원으로 전전긍긍했고, 올 이른 봄이 채 오기 직전에 어머니를 먼 곳으로 여행보냈다. 우환으로 식물에 관해서는 전혀 생각할 틈이 없었던 이유로 그 흔해빠진 잡초 이름도 생각이 안 났다.
나중에서야 강경숙 동문한테 풀 이름을 알려주었으나 그게 쉽게 귀에 들어올리는 없을 터. 도회지 사람이기에...
정정숙 여자 동문은 문학계에 등단했다며 차 안에서 자작 수필을 낭독했다.
2015년 발간한 수필춘추에 수필 2편을 게시했는데 그 중 한 편이다. 충남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하는 글. 1965~67년 남녀공학의 그리움이 잔잔하게 펼쳤다. 동문은 마지막 귀절을 울먹이는 소리로 끝을 냈다.
그랬지. 벌써 50년 세월 저너머의 공간에는 까까머리 남학생과 단발머리 여학생이 있었는데...
지금은 머리카락이 히끗히끗 회색으로 변색한 중늙은들으로 변신했으니까. 잠깐이라도 앳된 고교시절로 돌아갈 수 있음에 고마워 했다. 중견수필지인 수필춘추의 등단수필작가가 되었음을 함께 축하하며, 더 많이 정진해서 그의 이름으로 된 수필집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나는 문학지를 빌려서 달리는 관광버스 안에서 그의 또다른 수필을 읽었다.
여성 특유의 성세한 감정이 묻어나는 글이며, 빼어난 글솜씨이다. 일취월장하기를 기대해도 될 것 같다.
이번 여행 동문 중에는 또 수필등단 작가가 있었다.
'제 이름은 김명자에서 김명원으로 3년 전에 바꿨어요.'라면서 자기소개를 하던 김명원 동문이다.
음악인으로써 두각을 나타내는 명원 씨의 등단수필 내용이 무엇인지를 모르겠다. 나중에 등단 수필집을 얻어서 읽어봐야겠다. 글 솜씨는 화합을 이루는 음악소리처럼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작풍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경주 수학에 참가한 동문들의 재주를 일일히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모두는 숨은 인재들이다.
문화관광의 끝.
귀로에 오르는 강경숙 동문의 손에는 양동마을 민간 음식집 화단에서 잘라 온 사철채송화 줄기. 손가락 길이의 살찐 채송화 줄기가 손에 들려져 있었다. 흙이 있는 화분에 심고는 물을 이따금 주면 다육식물인 사철채송화는 새 뿌리를 내고는 꽃을 피울 게다. 말 그대로 채송화가 아니던가?
날렵한 몸매. 예전 무용교사였던 가락이 남았는지 살짝 빙그르 도는 자태가 무척이나 부드럽다. 자꾸만 무릎 등 연골이 둔해지고 아파 오는 세월에 와 있는 우리한테는 강경숙 동문의 사교댄스 중급의 실력을 은근히 기대해도 될 것 같다. 그런 그녀의 손에 살포시 쥔 사철채송화도 싱싱하게 새 뿌리를 돋아서 그의 마음속에 잔잔한 꽃을 피웠으면 싶다.
몇 해 전의 일이다.
서울 중구 남한 한옥마을이던가. 그곳에서도 강경숙 동문은 돌단풍 뿌리 한 포기를 조심스럽게 캐서 손수건에 감싸는 모습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여성 특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화초를 사랑하는 마음이기에 모든 것을 밝게 긍정적으로 대하여 지인들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심성을 엿볼 수 있다.
남들이 하찮게 보는 풀 한 포기, 나뭇잎새 하나로도의 그의 인품과 성품을 나타내고 있었다.
산수유.
천마총으로 걸어가는 좁은 도로변에는 붉은 열매, 새끼손톱 크기의 열매가 꽃처럼 매달려 익고 있었다. 저거 무슨 열매여? 물었는데도 나는 잠시 멍했다. 산수유라고 동문이 말했다. 내 시골 텃밭에서 몇 그루 있다. 몇 해 전 장에서 사다가 심어놓은 것. 왜 이름이 생각이 안 날까? 나는 어느새 도회지 사람으로 환원되는 것일까?
양동마을 가로수의 하나인 산수유.
풀섶에 떨어진 붉은 열매를 쪼그리고 앉아서 몇 알 줍고는 그것을 나한테 나눠주었던 강경숙 동문.
조금은 뜹고 쌉싸한 맛이 아는 산수유을 입안에 넣고는 이빨로 잘근잘근 씹어서 목질의 씨앗을 툭 내뱉고는 맛이 새콤한 과피를 먹었다. 몇 알의 산수유로도 그녀의 마음을 오래 또 기억할 게다.
서울에서 남녁 끝트머리에 있는 경주까지 오가면서 1박2일로 문화관광하는 것이란 속된 말로 웃긴다.
장시간 차량이동 시간만 엄청나게 많았으되, 관광시간은 극히 짧았다는 것을 시인한다.
참으로 많은 시간과 사전교육 없는 상태에서 뛰어다니면서 일견하는 꼬라지의 수학여행이었다.
진짜 여행이란 아무런 계획도 없이 길바닥에 철부덕 주저 앉아서 오래 지켜보며 관찰하는 것이다.
어쩌면 지나가는 관광객들의 표정과 그네들이 떠드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도 싶다.
유명하다는 것보다는 주변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는 혜안으로, 겸비한 여행이 진짜일 게다.
이번 여행은 나한테는 또 하나의 숙제를 남겼다.
경주에 대한 추억과 기억이 각인되어서 많은 공부를 더 해야한다는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2.
고교 졸업생 17명.
당초 21명으로 예상되었지만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 17명이라도 어디냐? 금요일이잖은가?
남학생 : 김낙중, 김성복, 배정현, 송영무, 이정석, 임재근, 전기우, 정희태, 최윤환.
여학생 : 강경숙, 김명원, 이춘희, 정정숙, 정진숙, 최순현, 황몽희, 허명희.
참가자들이 있기에 모임은 늘 유지되며, 특별한 이벤트는 늘 현재진행형이 된다.
동참하지는 못했어도 마음안부 전해 준 김만중, 박호건, 장두섭, 정상기, 윤종웅 등도 감사.
전기우 회장님께 감사.
행사 준비와 진행에 많은 애를 써 주었기에, 이 점 오랫동안 기억하겠소.
이 여행 뒷이야기는 우리들끼리만 기억해야 할 내용이기에 글 전개상 두서없이 간략하게만 썼다.
타인한테 보여주기 위한 내용이 아니고, 1965~67년 고교생이었던 우리들, 서울 동문의 또다른 수학여행 뒷이야기이다.
전기우 회장의 전갈이 생각이 난다.
최순현씨도 언급했던 사안.
12월 7일(월) 오후 7시
강남역 1번 출구, 분당선 강남역 4번 출구를 빠져나오면 스칼라티움(구 목화예식장)이 있단다.
재경 충남고 총동창회가 있다면서, 그립고 반가운 얼굴을 만나서, 보자고 말했다.
나.
그때쯤이면 시골에 내려 가 있을까?
나, 어쩌면 좋지? 어떻게 해야 돼?
양동마을 민가.
점심을 칼국수로 먹었던 집의 늙은 할아버지한테 양해를 얻어서 캐 온 사철해송화를 화분 흙에 조금 묻었다.
또 양동마을 문화관 바깥에 있는 수조에서 뜯어온 물아카시아. 반 뼘 살짝 넘는 줄기도 흙속에 묻었다. 물보다는 흙이 나을 것 같기도 싶고...
영상 5도 이하에서는 얼어죽는단다.
추워지는 겨울철인데 이들이 새뿌리를 내리고는 살까? 또 기대해 본다.
이거 얼려 죽이는 거 아녀?
국보 제20호 불국사 다보탑
국보 제21호 불국사 삼층석탑
국보 제22호 불국사 연화교, 칠보교
국보 제23호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
국보 제24호 토함산 석굴암 석불
국보 제25호 경주 태종 무열왕릉비
국보 제26호 불국사 금동비로사나불
국보 제27호 불국사 금도 아미타여래입상
국보 제28호 백률사 금동 약사여래입상 경주박물관
국보 제29호 성덕대왕 신종 경주박물관
국보 제37호 경주 구황리 3층 석탑
국보 제38호 고선사지 3층 석탑
이하 생략. 경주박물관에는 많은 국보와 보물이 있다.
2015. 11.29. 일요일.
하나만을 집중으로 써야 하는데도 아무 거나 다 조금씩 썼소이다.
내 기억을 위해서...
같이 여행했기에 여기에도 올렸소.
첫댓글 즐거운여행하셨군요.
그러데똘똘이 (전명숙)
은안가라봅니다.
같은옥천에 실던친구인데~~~
아... 키 큰 여자 친구도 옥천출신이다.
그 분도 아셔유? 옥천에는 고교 동문들이 제법 많은데...
요즘 노마님 티를 내는지 얼굴을 잘 안 보여주어서 조금은 아쉬운 분인데...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11.29 19:50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11.29 22:38
똘똘이는 어려서부터 불러오던
이름이니까요,
똘똘이는 알겠고, 그럼 정 카페지기는 뭐라고 불렀시유? 어렷을 적, 머스매적 부르는 별명이 있을 법한디...
그냥 이름부르고 우리끼리는
선비라 칭했습니다,
ㅋㅋㅋ. 잘도 지었던 것 같소.
선비라... 지지배들한테 인기는 많았겠소. 지금도 인기이지요.
자세히 기행문을 쓰셨구려 ~~
경주일원이 국립공원인데 나는 작년에도 경주에 갔었지만,이제는 별 감동을 느끼지 못하오
너무 뻔해서 그런지...그보다는 우리 고미술이나 문화 역사에 대해 무관심해서 일 듯 싶네
사실 관심많은 이들에게는 옛 기와 한 점.불두 하나, 비석하나에도 많은 의미가 있을 테지요
사진을 많이 찍긴 했는데 그다지 좋은 사진도 없고 그렇구먼..ㅎ
그래도 동행한 추억의 수학여행 즐거웠네
사실은 나는 신라문화 별로. 꼭 속좁은 마님문화인 것 같아서. 쪼그리고 앉아서 금 은 세공하는 작업이라니... 거대한 역사가 아니고...고작 옷감, 돌멩이를 다듬어서 거기에 절하고... 어쩌고 하는 문화는 싫어하기에...
정형이야 사진 제대로 찍었겠소? 늙어빠진 영감 할망구 단체사진이나... 그런 것은 예술적 가치는 전혀 없을 테고...
나는 풀 하나, 나무 한 그루가 훨씬 더 정감이 가오. 배울 점이 있기에.
신라... 옛 궁터가 지금껏 남았다는 뜻으? 어쩌면 강자에게 굽신거리면 그게 가능하겠지요. 이게 신라문화의 핵심인 듯 싶소. 내 개인생각에는... 저 남녁 끝 변방에서는...
댓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