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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1. 묵상글 ( 연중 제6주일. - 세 번째 주인공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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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1. 연중 제6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세 번째 주인공들
오늘 복음은 나병 환자가 주님께 와서 치유를 청해 치유 받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오늘 얘기의 주인공은 나병 환자와 주님 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나병 환자를 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 환자는 대단한 사람이고,
오늘 얘기의 주인공이 되기에 충분한 사람입니다.
우선 그의 신앙 고백이 우리의 모범입니다.
그는 주님 능력에 대한 믿음이 확고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주님 능력에 대한 믿음만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주님께서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일 뿐 아니라
하시고자 하는 의향도 있으신 분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런 선의가 없으신 분, 사랑이 없으신 분이라고 믿었다면
주님께 나왔겠습니까? 애초에 주님께 나아오지 않았겠지요.
오늘 독서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나병 환자가 사람들 가운데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병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다. 그리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친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
이렇게 격리된 삶을 살아야 하고 그것을 어기고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면
사람들은 돌을 던져 죽일 수도 있었던 그런 사회 상황에서
그는 마치 겁이 없는 사람인 양 주님 앞에 나아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 나아온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나아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직진한 겁니다.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걸을 때 주님만 보고 걸었을 때는
두려움이 없었고, 물에 빠지지도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사실 오늘 나병 환자에게는 병의 치유보다
두려움의 치유가 더 중요하고 값진 것이었을 겁니다.
육신의 치유보다 마음과 정신의 치유가 더 값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도 제가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여러분은 육신의 병, 마음의 병, 정신병, 영혼의 병 곧 마귀 병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또는 선택의 순서를 정하라면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순서로 선택하시겠습니까?
육신의 병을 선택할 것이고,
그다음이 마음의 병이요, 정신병과 마귀 병이 그다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가 이렇게 겁이 없이 나아올 수 있게 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 대한 그의 믿음이지만 그의 믿음은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말에 믿음직한 사람이니 믿음이 가는 사람이니 믿음을 주는 사람이니 하는
말이 있는데 주님이야말로 믿음을 주는 분이십니다.
병자에 대한 구약의 그 차별과 격리와 단절의 법과 관습을 타파하시는
구별과 차별이 없는 주님의 사랑 곧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비와 빛을
주신다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주님의 파격적 가르침과 실천이 믿음을 주신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세 번째 주인공이 있습니다.
그들은 숨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님과 같이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나병 환자가 주님께 나아올 때 막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병 환자를 피하거나 불평하지 않았고 아마 환대했을 겁니다.
오늘 병자의 날인데 우리도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라면
병자들이 주님께 나아오는 것을 막지 않을 뿐 아니라
복음에서 많이 볼 수 있듯 병자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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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1. 연중 제6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주님의 자비로운 마음과 깨끗함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만나 치유의 기적이 일어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에 따르면 나병은 전염되는 부정이며,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치유 되어 정화 예식을 거치기까지는 공동체와의 상종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나병은 하느님께서 죄인들을 내리치시는 최고의 재앙이라고 여겨져졌습니다. 원칙적으로 보아 나병은 죄의 표시였습니다. 주님의 자비와 나병환자의 간절함의 동시적인 만남은 죄의 해방과 치유의 은총을 낳게 합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습니다. 새가 알에서 깨어날 때 새끼가 안에서 껍질을 쪼아대는 것을 啐(줄)이라고 하고, 어미새가 바깥에서 쪼는 것을 탁(啄)이라고 합니다. 줄과 탁이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새끼는 안에서 죽어버리기에 줄과 탁의 동시적인 행위로 인해 껍질이 깨지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합니다. 주님의 은총과 자비와 깨끗해지고자 하는 나병환자의 간절한 바람도 이 줄탁동시와 같습니다. 치유의 기적과 깨끗해짐을 위해 자신의 노력만을 믿어서도 않되고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만 전적으로 의지해서도 않될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과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육체적으로 나병에 걸린 것보다 더 큰 것은 정신적 나병이었습니다. 치유받고자 하는 희망과 아무런 노력 없이 자신이 나병에 걸린 것에 대해 죄의식에 빠져 부모나 조상을 원망하며 고통과 비관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큰 나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2독서에서 사도바오로도 정신적 나병을 지닐 수도 있었습니다. 팔삭둥이었던 그는 놀림도 받고 자랄 수도 있었을 것이고 더군다나 유대교에서 개종했기에 변절자라는 수모를 받았을 것이고 교회를 박해했기에 더욱 그럴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진퇴양난의 정신적 나병의 상황을 하느님의 영광으로 돌립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환란과 시련을 극복하자고 하는 강한 바람과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로 인해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하느님께 영광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걸림돌이 될 수 있었던 정신적 나병의 상황을 디딤돌로 만들어 하느님의 영광으로 돌리며 그 영광속에 감추어진 하느님 사랑을 드러냅니다.
다음과 같은 초대교부의 숨은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수공예품을 팔기 위해 도시로 나온 아가톤 교부는 돌보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불쌍한 병자를 만나게 됩니다. 교부는 방을 하나 구하여 함께 지내면서 간호해 줍니다. 수중에 돈이 없었던 그는 자신이 만든 수공예품으로 방세를 대신 지불하였으며 병구완에 필요한 물건도 구입합니다. 그는 병자가 회복될 때까지 4개월 그곳에서 지내다 조용히 자기 거처로 돌아갑니다.
자신에게 정신적 나병의 상황이 닥쳐올 때 사도바오로가 어떻게 했는지를 상기하여 위기를 기회로, 걸림돌을 디딤돌로, 비관을 낙관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삼도록 합시다.
누군가가 정신적 나병이 걸려 힘들어 할 때 앞서 소개한 초대교부가 지녔던 사람의 마음으로 다가가 정성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함께 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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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성체성사를 위해 죽은 개종한 프로테스탄트
이탈리아-19세기
독일의 어느 한 부유한 농장주의 아들인 아르투르(Arthur S.) 남작은 그 나라와 국민들을 알기 위하서 19세기에 이탈리아를 여행하였다. 성체성혈 대축일에 그는 리보르노(Livorno)에 도착하였고, 성체성사가 장엄하게 거행되는 데에 놀랐다.
전도시가 깃발과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기쁨의 종소리는 빛나는 태양 속으로 환호하듯 울려퍼졌다. 모든 집 창문에서는 꽃과 타오르는 촛불이 인사를 하였다.
리보르노의 대주교는 화려한 천개(天蓋) 아래서 황금으로된 성광을 들고 행렬 한가운데에서 걸어갔다. 수천의 관중들은 성스러운 성체에 경배하였다. 그러나 젊은 아르투르(Arthur S.) 남작만은 거만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고 성체의 형태 안에 계시는 구세주 하느님께서 가톨릭 신자들 옆을 지나가셨을 때 무릎을 꿇은 가톨릭 신자들을 조롱하면서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 거만하던 자의 얼굴 표정이 바뀌었다. 그의 조소하던 얼굴이 깊은 감명을 받은 얼굴로 변했고, 얼굴 위에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얼어난 것인가? 왜 갑자기 아르투르 남작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을까 ?
그는 놀라고 있는 친구에게 자신의 경이스러운 체험을 몸소 이야기했다.
“내가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로 성체를 바라보는 동안, 나는 갑자기 성광 안에서 이루말할 수 없이 온화하면서도 나무라시는 듯한 슬픈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시는 구세주 하느님을 보았다. 그 순간 나는 내 마음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체 안에 실제로 계시다는 것을 완전히 확신하고서 나는 무릎을 꿇고 그분께 경배를 드렸어!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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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1. 연중 제6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
오늘은 연중 6 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에 대한 구약의 율법의 규정을 알려줍니다(레위 13,1-2,44-46). 그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야 했으며, 공공장소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타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는 접촉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누군가가 접근해 오면 “나는 부정한 사람이요”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해야 한다고 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교회에 방해를 놓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1코린 10,31-32)라고 권고합니다.
<복음>에서는 <제1독서>의 ‘구약의 율법’과 ‘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보여줍니다.
‘구약의 율법’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규정을 제시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께 와서 치유 받습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피해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오히려 감싸주시고 치료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처럼, ‘복음’은 규정이 아니라, 사랑과 호의를 제시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이는 그가 예수님의 권능, 곧 치유의 능력을 믿는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동시에 그 능력의 행사가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달려있음을 말해줍니다. 곧 오로지 예수님의 처분에 온전히 의탁하고 예수님의 뜻에 순명하겠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에서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신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이는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당신도 원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자신의 뜻을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는 온전한 의탁과 신뢰를 말해줍니다. 바로 이처럼, 나병환자도 예수님께 그렇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한다면’ 하면서,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바람에 의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는가요? 자신의 바람을 하느님을 통해 얻어내고자 하는가요, 아니면 하느님의 바람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지요?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만지셨습니다. 율법에 의하면(레위 13,45-46), 나병환자를 만지거나 접촉하면 부정을 타게 되는데도,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구원의 힘을 드러내며, 그분의 신체적 접촉은 우정과 사랑을 드러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부정을 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병환자가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것은 불결함에 닿아도 불결해지지 않는 오직 ‘거룩하신 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불꽃 속에서도 떨기나무를 태우지 않으시고(탈출 3,2), 인성을 취하셔도 죄에 물들지 않으시고, 아기를 낳으면서도 동정성을 잃지 않게 하시 듯, 불결한 이를 만져도 불결해지지 않고 오히려 불결한 이를 깨끗하게 하시는 ‘거룩하신 분’이신 당신의 신성을 드러냅니다. 곧 당신이 거룩하신 분, 구원자이심을 드러냅니다.
그 거룩하신 분, 구원자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합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
하오니, 주님,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소서.
제가 하고자 한 바가 아니라 당신이 하고자 한 바를 이루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을 제게서 이루소서.
당신이 원하니까 저도 원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주님!
당신께서 하시고자 한 바를 하소서.
당신께서 바라시는 것을 저도 바라게 하소서.
당신이 하시고자 한 바를 저도 하게 하소서.
주님, 저를 만지소서.
저의 바람과 하는 일을 깨끗하게 하소서. 새롭게 하소서.
저를 새롭게 하시고 당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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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1. 연중 제6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길 희망하며 병자의 날을 맞이하여 갖가지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이들에게 치유의 손길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질병으로 다가온 고통을 이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님께 믿음을 고백해도 아픔은 지속하기 때문에 진정 그분이 함께하시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믿는 이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합니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으니, 고통을 거두어 주시고 당신이 몸소 함께하고 계심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 고통이 계속된다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시고 오히려 그 아픔을 통해 당신의 수난 고통을 체험하는 시간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믿음은 시련을 이겨내는 힘이라는 깨우침을 주소서.
유다인들에게 나병은 하늘에서 내린 형벌로 저주받은 모습이요(레위13,34) 죽음으로 향하는 상태(욥기18,13)였습니다. 환자 자신의 죄나 부모의 죄로 말미암은 벌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병자나 장애인은 그 자체로 죄인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육체적으로 괴로움을 겪고, 종교적으로도 죄인으로 괴로움을 겪어야 했으며 사회적으로도 소외되었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공공장소나 사람들의 모임에 나타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었으며 `혹시라도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신이 ‘불결한 사람’ 이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하였습니다(레위13,45-46). 법은 접근을 막을 뿐 나병을 치유하기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시며 고쳐주십니다. 나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 환자에게 치유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적 고통, 종교적 단죄, 사회적 소외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예수님은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육체와 영혼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1,40). 하며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더는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상의 것이라도 할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사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항복의 자세입니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렸으니,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그저 저는 당신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저는 더는 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애원하는 자세요,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은 저의 주인이고 저를 고쳐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고 저의 희망이십니다.’하는 순종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나병환자가 무릎을 꿇은 것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간절함에 예수님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기 때문에 더욱 다가와야 하고 또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과 자비로 감싸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은 분리하고 소외시키지만, 주님의 품은 차별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품에 지체함 없이 안길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애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자세는 우리가 주님께 나올 때 취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되려면 먼저 무릎을 꿇는 자세부터 배워야 합니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님은 무릎 꿇지 못하는 원인을 다섯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자신이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지금 자신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4). 교만함 때문이다. 교만한 자세란 목덜미가 뻣뻣한 자세이다. 몸이 굳어 있는 사람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다. 5).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기쁨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릎을 꿇으면 비로소 사랑받는 나 자신을 보게 되고, 사랑해야 할 이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행동하게 됩니다. 오늘이 그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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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1. 연중 제6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금부터 4년 전입니다. 2020년 2월입니다. 대한민국에 코로나 환자가 급격하게 늘었습니다. 그동안 방역당국에서 철저하게 관리를 해서 대한민국은 코로나 청정지역이었습니다. 원인은 방역당국이 정한 안전수칙을 어기고 집회를 가졌던 모 종교집단에 있었습니다. 코로나에 감염된 신도들이 가족들과 친구들을 만나면서 코로나가 전국적으로 번져나갔습니다. 방역당국은 원인을 찾았고, 종교집단도 모이지 않으면서 코로나는 진정세로 돌아섰습니다. 가톨릭을 비롯한 다른 종교는 정부의 방역대책에 적극 협조하였습니다. 박해시대에도 계속되었던 미사가 중단되었습니다. 거리두기와 마스크 쓰기에 적극 동참하였고, 대한민국은 3T(Trace, Test, Treatment), 추적, 검사, 치료라는 방법으로 코로나 확산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해 3월 27일 사순 제4주일 금요일 저녁, 교황님은 코로나19 대유행의 시기에 특별 기도를 주례했습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홀로,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께 자신을 의탁하도록 인류를 초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교황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구원자이신 주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낼 수 없도록, 우리가 치유되고 그분의 품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두려워 떨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대한민국의 소방대원과 간호사, 의사들은 모두 한 마음이 되어서 코로나 환자들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전국의 소방대원들은 코로나 환자가 급증하였던 대구로 내려가서 환자들을 이송하였습니다. 소방대원들의 차량이 대구로 향하는 모습에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자발적으로 환자들을 돕기 위해서 대구로 향했던 간호사들의 충혈 된 눈, 지친 얼굴, 바닥에 앉아 빵을 먹는 모습은 감동이었습니다. 코로나 방역의 최전선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던 의사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다 본인도 코로나에 감염되어 쓰러지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의 코로나는 이렇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아픈 사람과 함께 하려고 했던 분들의 땀과 눈물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중국과 베트남에서 돌아온 교민들이 있었습니다. 용인과 아산의 주민들은 ‘우리는 교민들을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멀리 타국에서 온 교민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쉼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저는 뉴욕에 있었습니다. 의료 선진국이라는 뉴욕도 코로나의 확산을 막지 못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안타깝게도 사망하였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장례를 치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제게 안부 전화를 할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코로나의 터널을 지나왔지만 생각해보면 우리의 나약함을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부정한 사람은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3,000년 전인 구약의 시대에 감염병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없었을 것입니다. 방역의 차원에서 격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병에 걸린 사람이 곁에 있으면 같이 병에 걸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죄인과 함께 있으면 죄에 물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월감’입니다. 우월감이 개인과 집단에서 발생하면 ‘따돌림’으로 드러납니다. 사회와 국가적인 차원에서 발생하면 ‘민족차별’로 드러납니다. 노예제도, 식민지 건설, 유태인에 대한 차별이 있었습니다. 두려움은 낯선 이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우월감은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부정한 사람을 두려워해서 멀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부정한 사람을 따뜻하게 맞이해서 사랑으로 돌보라고 하십니다. 부정한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부정한 사람도 치유될 수 있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함께 지낼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픈 사람을 위해서 왔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움 때문에 선행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우월감으로 약하고, 병든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제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나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오늘은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우리들 또한 따뜻한 마음으로 주변에 아픈 이들과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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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1. 연중 제6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먹음직한 바나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를 집어서 껍질을 까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껍질은 멀쩡한데 속은 시커먼 멍이 들어있지 않겠습니까!
‘사람 같다. 겉은 멀쩡한데 속은 여기저기 멍든 사람’ ‘꼭 나 같기도 하고 세상에 살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모든 사람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그런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상황은 조금 더 심합니다. 겉도 멀쩡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그는 조용히 회당에 들어왔고, 조용히 구석에 앉았습니다. 사람들이 알아보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거적을 쓰고 고개를 내리고는 구석에서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스승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 순간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러고는 사람들 앞에 나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벌레 보듯 보고 있고, 어떤 사람은 살 썩는 냄새에 코를 막으며 돌아섰을 것입니다.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걸고 그렇게 엎드려 있습니다.
결과는 우리가 아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나았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걸었기에 모든 것을 돌려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은 것은 나병뿐만이 아닙니다. 인간으로서의 자존심, 마음의 상처, 슬픔, 외로움 등의 수많은 어둠에서 빠져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제에게 가서 보이라고 하십니다. 인간으로 사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공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저는 그 바나나를 저도 모르게 입으로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맛있었습니다. 달콤하기도 하고 오히려 더 부드럽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어쩌면 하느님도 이러하시지 않을까? 합니다. 시커멓게 멍들고 슬픔과 아픔 중에 있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하느님께 매달리는 사람의 영혼이 얼마나 향기로운지, 달콤한지 하느님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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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A Juice
일명 ‘까쥬스’입니다.
예전에는 저 스스로 식사를 챙겼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일이 너무 많아 사제관에서 저를 도와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출근하시는 아침이면 늘 ‘까쥬스’를 만들어 주십니다.
‘까쥬스’는 이렇게 만듭니다.
C 캐롯(당근)
C 캐비지(양배추)
A 애플(사과)
그래서 ‘까주스’입니다.
‘까쥬스’한잔해 보세요.
모든 분의 아침이
건강하고 든든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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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1. 연중 제6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1989년 조지아 대학교의 에이브러햄 테서가 이끄는 사회심리학 연구팀은 11세에서 14세 청소년이 있는 가족들에게 텔레비전 채널 선택이나 숙제하는 시간 등과 관련된 모든 의견대립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조사 결과, 부모와 의견대립이 많은 청소년이 더 행복하고, 사회적으로 잘 적응하며, 학교생활을 더 잘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부모가 자녀와의 의견대립에 대해 열린 관점으로 대화를 풀어갈 때 가능했습니다.
종종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며 어떤 간섭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부모는 아이가 사춘기를 심하게 겪는다면서 전혀 대화하지 않고 그냥 기도만 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친한 친구와 의견 차이로 인해서 심하게 싸웠고 역시 기도만 하면서 이 친구와 예전 관계로 다시 돌아가길 바란다고 하십니다. 과연 기적처럼 그런 일이 생길까요?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열린 관점입니다.
미국의 어느 소도시에 있는 은행에 강도가 들어왔습니다. 권총을 든 강도는 창구 여직원에게 총을 겨누며, “천만 원 내놔!”라고 고함을 지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은 천만 원을 내주거나, 아니면 몰래 비상벨을 눌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직원은 강도를 바라보며, “천만 원은 왜요?”라고 이야기를 건넨 것입니다. 그 말에서 강도는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강도는 총을 내려놓고 지금 자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이야기했고, 직원은 은행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었다고 합니다.
“천만 원 내놔!”라는 말에서 대화의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까?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말이지만, 이 말에서도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강도하고도 이렇게 대화가 되는데, 왜 다른 사람과 대화가 되지 않겠습니까? 사람과의 대화가 가능해야 주님과도 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병은 무서운 병으로, 공동체는 나병에 걸린 사람을 멀리하고 부정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공동체에서 벗어나 혼자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 곁에 갈 수 없기에 치료받을 수 있는 길도 없습니다. 이렇다고 해서 주님께서 이 나병 환자를 내쳤을까요? 아닙니다. 당신께 다가오는 사람을 절대 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가온 사람의 자세가 중요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행동하고 말했습니다.
바로 무릎을 꿇는 겸손한 자세만이 주님과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그를 낫게 하셔서 다시 공동체 안에서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혹시 이런 겸손한 모습보다는 맡긴 것을 찾는 사람처럼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라며 주님께 명령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를 내려놓는 겸손, 그래야 주님과도 또 사람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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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른 방식으로 얻은 교훈이 있을 뿐(트롸일라 타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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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1. 연중 제6주일. 키엣 대주교님.
고통받는 영혼
그 옛날 나병은 불치의 병이자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형벌과도 질병이었기에 그들은 죽음보다 못한 삶을 연명하는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 금단의 지역을 넘어서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물리적 한계뿐아니라 세상의 편견과 차별을 넘어서셨습니다. 누구도 넘지않은 세상의 벽을 뛰어넘으신 예수님께서 그를 어루만져주시자 그는 신체적 고통뿐아니라 영혼까지도 치유됨을 느꼈습니다. 다시 평범하고 자유로운 몸이 된 그는 이제 다른 사람과 다름없는 아주 평범한 보통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주신 가장 큰 은총은 치유와 더불어 수년간 그의 영혼을 지배했던 열등감으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열등감이 있습니다. 내면의 상처와 슬픔은 그 누구도 공감해 줄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혼자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나환자가 예수님께 달려가 청한 것을 보십시오. 여러분도 주님께 의지하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의 영혼을 짓누르고 있는 열등감을 없애주실 것입니다. 마음을 갉아 먹는 쌓이고 쌓인 상처를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나 또한 누군가를 여러 이유로 소외시키는 한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어주십시오. 그들이 깊은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의지가 되어주십시오.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 주고 그들의 명예와 인격을 존중해주십시오. 그들도 나와 다름없는 그저 나약하고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들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다가감으로써 그들이 다시 사회에 화합할수 있도록 도움을 주십시오
주님, 열등감에 사로잡힌 저희를 구원하여주소서. 그리고 이웃의 아픔을 돌아볼 수 있는 밝은 마음과 사랑을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웃고 있지만 영혼은 상처받고 울고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들의 눈과 마음을 들여다보고 따뜻한 마음을 나누어보십시오.
2. 친구로부터 차별이나 배척을 당해보았습니까?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이를 통해 무엇을 얻었습니까?
3.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아보았습니까? 나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멀리하지 말고 찾아가 손을 내밀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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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1. 연중 제6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치유의 구원
-갈망과 찾음, 만남과 치유, 선포와 영광-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
오늘은 연중 제6주일이자 제32차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2년부터 해마다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이 발현 첫날을 ‘세계 병자의 날’로 지내도록 하였습니다. 교황님은 시의적절하게도 2월에는 ‘생의 말기에 있는 병자들과 그 가족들이 의료적 측면에서도 인간적 측면에서도 언제나 필요한 보살핌과 동반을 받도록 기도하자“고 기도지향을 알렸습니다.
교황님의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창세2,18참조)란 말씀을 중심으로 한 이번 담화내용도 참 자상하고 우리를 각성케 합니다. 시대의 현자(賢者)요 예언자(豫言者)인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담화문 후반부를 길다 싶지만 그대로 인용합니다.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대부분 알게 모르게 죄인이자 병자인 우리에게 교황님의 지혜로운 말씀은 잔잔한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일시적이든 만성적이든 질병을 앓고 있는 분들에게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친밀감과 온유함에 대한 여러분의 갈망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이를 숨기지 말고, 여러분이 다른 이들의 짐이 된다는 생각도 전혀 하지 마십시오. 병자들의 상태는 우리 모두에게, 정신없이 바쁜 삶의 속도에서 한걸음 물러나 자기자신을 재발견하라고 촉구합니다.
급변하는 이 시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특히 예수님의 연민 가득한 눈길을 닮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고통받고 외로운 이들, 소외되고 버림받았을 이들을 돌봅시다.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기도 안에서, 특히 성찬례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고독과 고립의 상처를 치유합시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개인주의, 무관심, 버리는 문화에 맞서 싸우고 온유와 연민의 문화를 증진하는데에 힘을 모으게 되는 것입니다.
병든 이들, 취약한 이들, 가난한 이들은 교회의 중심에 있습니다. 우리의 인간적 관심과 사목적 염려의 중심에도 그들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절대로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병자의 치유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전구해 주시고, 우리가 친밀감과 형제애의 장인이 되게 도와 주시도록 성모님께 우리 자신을 맡겨 드립시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4년 1월10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겸손하게도 가장 끝자리에 작은 글씨로 “프란치스코”라 씁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연민과 형제애가 교황님을 통해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추호도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할 것도, 당황하거나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아주 현실적이 되어 우리의 병고로 인해 불편한 상황을 모두 배움의 계기로 삼아 하루하루 날마다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것입니다.
“밑바닥에서부터 배워야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오늘 다산의 말씀도, “천명(天命)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고, 예(禮)를 알지 못하면 바르게 설 수 없고, 말(言)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는 오늘 공자의 말씀도 우리에게는 참 좋은 격려가 됩니다. 천명과 예를 알기위해 성경과 전례로 돌아가고, 사람을 알기 위해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니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보다 더 좋은 평생 배움의 공부시간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우리 모두의 가능성이자 우리의 현실적 모습을 상징합니다. 나병의 고립단절된 절망의 처지가 구약의 제1독서에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병고보다 더 아프고 더 치명적인 것이 아마도 관계 단절로 인한 마음의 상처와 아픔 그리고 혼자라는 고독과 외로움일 것입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병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다. 그리도 콧 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요.”, “부정한 사람이요.” 하고 외친다. 병이 남아 있는 한 그는 부정하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
바로 이런 고립단절의 혼자라는 절망적 상황이 지옥입니다. 나병이 상징하는바, 오늘날 이런저런 사연으로 고립단절된 처지에 있는 모든 이들입니다. 나병환자도 엄연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버림받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든 이들도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엄한 품위의 사람입니다. 병자든 노인이든 다 존중받고 사랑받고 배려받고 싶은 마음은 본능이며 마음 깊이에서는 치유의 갈망이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나병환자가 그 모범입니다. 나병에 좌절한 것이 아니라 나병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갈망의 사람, 나병환자는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았고 만나 치유를 받습니다. 나병환자의 간청의 기도에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시니 그대로 구원의 삼박자 원리-“연민의 마음, 따뜻한 스킨쉽, 권능의 말씀”-가 계시됩니다.
도대체 우리 예수님이 아니곤 그 누구가 이 치유의 구원의 중심 역할을 할 수 있을런지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똑같은 주님께서 시공을 초월하여 이 거룩한 미사성찬전례중 영적 나병환자인 우리에게 치유의 구원을 선사하십니다. 오늘 이 거룩한 미사중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나병환자의 믿음에 주님은 말씀으로 응답하시자 나병은 가시고 깨끗하게 치유되니 말그대로 치유의 구원입니다. 인기의 중심에 서기를 원치 않으시는 겸손한 주님은 치유받은 나병환자에게 함구할 것을 명하시고,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 노자의 말씀대로 공을 이루면 집착하여 머물지 않고 홀연히 떠나 외딴곳의 아버지 품에 안깁니다.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고 새삼 온인류, 온세상의 중심이신 치유의 구원자, 생명과 빛의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치유의 구원을 받으니 나병환자의 운명은 완전히 바뀝니다. 예전의 고립단절의 지옥같은 상황에서의 혼자가 아닙니다. 세상의 구원자 예수님을 만나 치유 구원 받고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니’ 이제부터 복음 선포자가 되어 지상에서 천국의 삶을 살게 된 치유받은 나병환자같습니다.
지상에서 천국의 삶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수도원 정문 입구의 거대한 바위판에 새겨진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성규57,9)이란 성규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치유받은 나병환자에 남은 삶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요, 복음 선포도 그 일환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에게 치유의 구원을 베풀주시고, 바오로 사도를 통해 당신 속내를 밝히십니다. 우리 모두에 대한 주님의 소원이 다음 말씀에 담겨있습니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하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1코린10,31-11,1참조)”.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은 단 하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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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1. 연중 제6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면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
뭇사람들은
깨끗하지 못한 이를
멀리서 바라보지만
우리 님께서는
깨끗하지 못한 이를
가까이에서 돌보신다네
우리 님 닮은 우리는
우리 님 닮아야할 우리는
뭇사람들은
깨끗하지 못한 이에게
손가락질하지만
우리 님께서는
깨끗하지 못한 이에게
손을 내밀어 대신다네
우리 님 닮은 우리는
우리 님 닮아야할 우리는
뭇사람들은
깨끗하지 못한 이와
다름을 즐기지만
우리 님께서는
깨끗하지 못한 이가
당신을 닮게 하신다네
우리 님 닮은 우리는
우리 님 닮아야할 우리는
뭇사람들 앞에서
깨끗하지 못한 이는
깨끗하지 못한 채 있지만
우리 님 앞에서
깨끗하지 못한 이는
깨끗하게 된다네
우리 님 닮은 우리는
우리 님 닮아야할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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