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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유자적 등산여행클럽 원문보기 글쓴이: 무념무상
여수 안도 상산 둘레길
기러기 안(雁)과 편안할 안(安) 안도, 안섬
'안섬'하면 잘 모르지만 '안도'하면 누구나 잘 안다.
2009년 숙원이었던 안도대교가 금오도와 안도를 연결하면서 안도는 많은 변화가 시작되었다.
당장에 금오도 비렁길이 전국적으로 뜨면서 덩달아 안도까지 들썩이고 있어서 반갑다.
금오도 한 섬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남해안의 제주도'로써 공통 가치를 키울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이다.
금오도 비렁길에서 가푼 숨을 안도 상산 둘레길에서 한숨을 돌리는 여유를 느낄 수 있다.
안도 사람들은 보이지 않게 금오도에 대해서 경계를 하고 있다.
안도대교가 완공되면서 그나마 남아있는 학교와 기관이 통폐합이 되지 않을까 우려를 하고 있다.
금오도는 조선시대 조정이 관리하던 봉산으로 최근에서야 사람이 들어가서 살았던 것에 비해
안도는 신석기 시대때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크게 내세우고 있다.
'안도'라고 부르는 까닭은 크게 3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섬의 형태가 기러기가 날아가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기러기 안(雁)’ 자를 써 안도(雁島)라는 것과
1910년 편안할 '안(安)'자를 써서 안도(安島)로 바뀌어진 것,
안에 들어있다고 해서 안섬이다.
먼저 안도가 편안한 섬이 된 것도 3가지 의미가 있다.
선박이 안전하게 피항할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안도라는 것이다.
지형적으로 섬 가운데 자연 호수가 만들어져 근처의 배가 태풍을 피해 들어올 수 있게 되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입구는 좁고 들어갈수록 넓어져 S자형으로 되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은 두멍안이라고 부른다.
또, 임진왜란 때 피난왔던 사람들과
일본인이 살다가 돌아가서 편안했다고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금오도와 연도 사이에 들어있다고 해서 우리 말로 '안섬'이라고 부른다.
조개무지 위에 세워진 마을
처음에는 안도는 동도와 서도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오랜 세월 이야포 아래가 사주,
모래톱으로 연결되면서 한 섬이 되었다.
행정적으로는 안도와 서고지로 나눌 수 있는데, 모두 자연마을 7개로 이루어졌다.
안도 본동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터 95%가 원래는 매립지이다.
수천년의 세월 속에 바다에서 생산되는 굴, 홍합, 조개, 전복, 소라 등의 껍질을 버려서
매립이 된 곳이다.
어떻게 보면 안도는 조개무지 위에 마을이 있는 폭으로 안도 마을 자체가 선사시대 유물이다.
마을을 철거하고, 파보면 많은 유물들이 깊은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기껏 두 차례 발굴했어도 대단한 유물들이 발견되어 역사학자들이 안도를 주목하고 있다.
하늘에서 안도마을을 살펴보면 꼭 한반도 모양으로 생겼다.
처음에 일부러 그렇게 금을 그어놓고 집을 지은 것은 아닌데 그렇게 되어서
언론에서 널리 소개된 적이 있다.
조개무지 위에 세워진 선사시대 마을 안도는 예사스러운 섬이 아니다는 것이
발굴된 유물이 말해주고 있다.
선사시대부터 국제 교류
1992년, 1993년 지표 조사에서 선사시대 유적으로 안도에서 3개의 조개무지가 확인되었다.
유물로는 질그릇 편들과 돌도끼, 대패날, 숫돌, 돌톱 등이다.
2007년 안도대교 공사를 하면서 조가비 팔찌를 찬 인골 2기가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더욱 가치가 높은 것은 그 당시 일본 규슈 지역과 교류가 있었다는 흔적을 발견하였다.
융기대문토기와 융기선문토기, 이형패제품, 석시, 결상이식, 조가비 팔찌 등으로
토기는 일본 죠몬토기와 비슷하고,
함께 발견된 흑요석은 우리나라에서는 나오지 않고 일본 규슈지역에서 많이 나오는 암석이다.
이와 같은 유물의 발견은 선사시대에 안도가 일본과 문화적 상관성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통일신라 때 일본 승려 엔닌이 중국 당나라 불교를 배우기 위해 떠났다가
845년 귀국하여 9년 이상 여행을 하고 '입당구법순례행기'를 썼다.
그 책에 안도가 등장하고 서남쪽으로 제주도가 보인다고 한 것으로 보아
엔닌이 안도에 기착을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어촌체험마을 전시관
1860년 경신년 대화재가 발생하여 300 여 호 중 한 집만 놔두고 모두 불이 타서
금오도와 연도 등으로 주민 이주를 하였다.
그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8년에 안도에 경찰 주재소와 어업조합,
그 이듬해 안도심상소학교를 설립할 정도로 번창하였다.
수산업이 잘 되어 색시가 있는 술집도 있었고, 개가 돈을 물고 다녔다고 한다.
2007년 해양수산부에서 어촌체험 마을로 선정되면서
선착장 창고를 헐고 그 자리에 '어촌체험마을관리소'를 세웠다.
1층에는 관리소, 대합실, 창고, 판매소를, 2층에는 섬 유물 전시관을 두었다.
전시관에는 선사시대 유물과 주민들이 사용하였던 민속품이 전시되어 있다.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70회까지 졸업한 여안초등학교 졸업생 단체 사진 진열이다.
지금은 여안초등학교가 학생수 9명에 지나지 않는 본교이지만
지역주민들의 학교를 살리려는 정성이 높다.
안도 어촌체험마을은 개매기체험과 갯가 고둥 줍기, 상산 둘레길 걷기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안도에는 30평 규모의 찜질방이 2007년에 들어섰다.
안도 주민들은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다.
외부인들에게 안도에 대한 유래와 민속을 하나라도 더 열심히 가르쳐 주려는
어촌체험마을 김평식 사무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러한 열정이 전국에서 드문 마을 전시관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상산 둘레길
안도는 마을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상산(207m)과 서쪽에는 앞산 구실잣밤나무숲이 있다.
상산을 한 바뀌 도는 둘레길은 넓어서 사람이 걸어 다니기에 좋다.
상산 둘레길은 2006년 안도와 금오도 심장리를 잇는 안도대교가 착공되면서
상산봉수대를 복원하고, 상산 등산로를 개설하였다.
백금포 해수욕장을 가기 전 오지암에서 상산동 가는 길을 개설하면서 시작되었다.
2008년 다시 상산동에서 이야포 도로를 확장하면서 완공되었다.
상산 둘레길이 된 해안 일주도로는 국립공원 지역이어서 개발이 어려워
주민들의 힘으로 만들었다.
상산동에서 이야포까지는 1979년 새마을 운동으로 주민들이 직접 나서서
경운기가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오지암에서 상산동까지는 2005년 마을 주민들이 부지를 내놓고,
마을 자체 자금으로 폭 4m의 도로를 만들었다.
2008년 상산동에서 이야포까지도 폭 4m의 도로로 확장하면서 상산 둘레길이 완성되었다.
백금포 해수욕장과 동고지
안도해수욕장은 길이가 300m에 폭이 약 20m 정도로 이루어진 해수욕장이며,
하얀 모래가 매우 좋아서 백금포해수욕장이라 불리기도 한다.
화장실과 샤워장 1동과 야영장 등의 편의 시설이 있다.
해수욕장 옆 동고지 마을은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고지가 되었다.
동고지는 갈치잡이와 문어잡이가 성행하여 한 때 50-60호 정도 살았으나
지금은 10호 정도 살고 있다.
옛날부터 왜구들이 해산물을 채취하는 것을 방해하여
방답진 군대가 출동하여 물리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일출이 아름다워 2006년부터 청년회에서 일출제를 하고 있다.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은 새마을 사업으로 겨우 경운기 한 대가 다닐 정도였으나
2005년 차도로 확장 포장되었다.
길 옆 가로수에는 나무를 기증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여안초등학교 몇회 출신임을 강조하는 글이 눈에 띄인다.
시멘트로 포장되어서 차가 다니기에는 좋지만 걷기에는 짜증이 난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무척 힘들게 땀을 흘리면서 걸어야 한다.
이제 사라진 마을 상산동
소나무 사이로 백금포해수욕장의 햇빛에 반사되는 금모래, 은모래의 반짝거림을 보면서
널따란 길을 걷는다.
처음 만나는 마을이 바로 오지암이다.
오지암은 오지바구로 불렀던 곳으로
상산 산비탈을 일구어 사는 농가가 5호 정도 있다고 하지만
그보다 더 적을 것 같이 적막하기만 하다.
이채롭게 돌담을 거의 집 둘레로 지붕 가까이까지 쌓았다.
바다에서 툭 터진 곳이어서 바람이 얼마나 심했으면 집들이 모두 꼭꼭 숨어있었다.
할머니 한 분이 힘없이 도로에 앉아계시면서 고라니를 잡아달라고 하신다.
밭작물이 살아남지 않아서 걱정이 태산이다.
상산 뒤쪽은 해식애가 발달하여 바닷가가 모두 가파른 절벽,
비렁이어서 바닷가로 내려갈 수가 없다.
멀리 남태평양에서 밀려오는 쿠릴해류가 부딪히면서 만들어내는
자연 예술품이 멋지게 만들어졌다.
수십년이 넘은 키 큰 소나무가 보이고,
길 아래는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아서 울창한 숲이 만들어졌다.
상산동은 이미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가 되었고,
간간이 집터에는 대나무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집이 없는 것 같지만 찬찬히 보면 슬레이트 지붕이 보이지만
어떻게 그곳까지 내려갔는지 길이 완전히 묵혀버렸다.
최근까지 한 집이 살았으나 1980년 본동으로 이주를 하였다고 한다.
섬마다 이렇게 사라지는 마을이 하나 둘씩 늘어나고 있다.
안도에도 11개의 마을이 사라지고 이름만 남았다.
상산둘레길에서는 탁 트인 바다를 볼 수 있어서 상쾌하다.
산비탈을 깎아서 만든 길이어서 숲이 그대로 살아있다.
상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입구에 약수터가 있어서 가던 길을 멈추게 한다.
긴 대나무를 골짜기로 연결하여 물이 한 두 방울씩 "톡톡" 떨어지는 것을
받아먹는 재미도 싫지가 않다.
조금 여유를 갖고 기다리는 것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지 아닐까 생각해본다.
망망대해와 연도
하얀 파도가 포말같이 부서지는 바닷가 절벽을 보면서 별의별 상상을 한다.
수천년의 세월 동안 친구가 되어버린 바위와 파도,
품고서 휘돌아가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바다를 마음껏 휘젓고 다니면서 두 줄로 가르고 지나가는 조그만 배가
고요함을 달래줄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바다만 쳐다보면서 심심해진 눈을 달래줄 섬이 나타났다.
바로 연도이다.
섬 한 가운데 높게 솟은 필봉과 안도 가까이에 닿아있는 역포마을이 보인다.
1995년 7월 23일 여름 남해안 바다에 깊게 상처낸 씨프린스호가 좌초되었던 곳이다.
그 때의 피해가 지금도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아픈 상처를 안고 있는 이야포
맨흙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길을 지금껏 걸었다면 이제부터 시멘트 포장길을 걸어야 한다.
자갈로 이뤄진 이야포와 양식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고개마루에 도착했다.
발 아래 이야포에는 때마침 회사 직원들이 해안가 정화 사업으로 밀려오는 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파도에 떠밀려서 이야포 바닷가에는 몇겹으로 몽돌 산이 이뤄져 있었다.
이곳에는 1926년 경 소나무를 심어서 해안 방풍림이 만들어졌으나
1959년 여수를 강타한 사라호 태풍 때 많이 유실되었다.
1969년 미국 밀가루 원조로 석축 방조제를 쌓아서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구름다리'라고 부른다.
1980년대까지는 이야포 앞바다에서 들망 멸치어장이 형성되어
이야포 바닷가에서 멸치를 건조하였다.
등천에 막을 치고 밤으로 멸치잡이를 하면서 부르던 노래 "이야도"가 '이야포'로 바뀐 것이다.
들망이란 고정닻을 놓고 불배가 멸치를 유인하여 그물 안으로 모이면
양쪽 배가 그물을 끌어올려서 멸치를 잡는 방법이다.
그물을 끌어올릴 때 "어-스야" 노동요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 하다.
호황일 때는 5척의 배로 된 9 선단이 있었다고 한다.
불배가 이야포만을 불야성을 이뤘을 때 야경 모습은
앞으로 재현해볼 수 있는 어촌 관광 상품이 될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멸치를 삶고 자갈밭에 건조하는 모습이 장관이었지만
멸치 어장이 1970년대부터 조금씩 쇠퇴하여 흉물이 된 창고와 가옥을 철거하고
2007년 음수대와 벤치, 파고라, 정자 등을 설치하고 조경을 하여 휴식처로 만들었다.
지금은 몽돌 해수욕장과 휴식처가 되었지만 현대사의 아픈 사연을 안고 있는 곳이다.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 때 그 유명한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이 대위였을 때
이야포로 상륙하여 좌익을 색출한다는 이름으로 무고한 주민을 총살하였다.
일본인에게 물려받은 정치망 어장을 마을에 빼앗기게 된 이웃 섬의 모씨가
여수에 진주한 진압군에게 무고를 한 결과이다.
이 때 제대로 좌익은 발견하지 못하고,
안도의 젊고 유능한 엘리트만 12명이 무고하게 희생을 당하였다.
억울한 희생은 6.25 때도 이어져 350명의 피난민이 이야포 포구에 정박하여
주민들의 친절한 대접을 받았었다.
8월 3일 제트기 4대가 피난선에 기총사격을 하여 많은 희생을 가져왔고,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와서 기름을 부어 불을 질러 피난선을 침몰시켰다.
이 때 100-150명 가량이 아무 이유 없이 목숨을 잃은 억울한 일이 생겼던 곳이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안도는 6.25 때 영암 경찰대와 인민군 사이에서
또 다른 희생을 치르는 일까지 있었다.
남북 분단으로 인한 현대사의 갈등이 이렇게 안도를 심각한 고통에 빠뜨려
지금도 이념적 피해를 느끼고 있다.
안도만의 독특한 식당
과거 어업 전진기지가 있었다는 것은 근처에 고기가 잘 잡힌다는 것이다.
그 때 못지않게 서고지 가두리 양식장에는 볼락과 돔, 우럭을 양식하고 있다.
양식 역시 적조 현상 등으로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그러나, 두멍안 포구에 즐비한 어선과 낚시질 하러온 낚싯꾼들을 보면
싱싱한 고기와 해산물이 절로 생각나게 한다.
1999년 기준으로 등록된 어선이 86척이나 된다.
안도는 멸치잡이로 유명하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옛날에는 무동력선 시절 돌을 던져서 전갱이, 고등어, 숭어를 잡았고,
문어단지를 놓아서 문어를 잡고, 갈치와 조기는 300m 줄에 낚시를 매단 방법 주낙으로 잡았다.
밤에도 방파제에서 많은 낚싯군들이 손맛을 즐기고 있을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히는 곳이다.
해산물이 풍부한 안도에는 맛있는 식당과 민박집이 많다.
모둠 회 정식을 시켜도 되지만 백반만 시켜도 맛깔스런 반찬이 많이 나온다.
반찬은 직접 재배한 방풍나물 같은 특산품도 있지만,
바다에서 직접 채취한 군부와 군서, 가사리, 젓갈 등 해산물이 많이 나와 바닷가의 맛을 돋운다.
하나씩 골라서 따로 즐기면서 맛을 보는 것도 안도에서 재미이다.
포구를 따라서 식당이 줄줄이 있어서 어느 집을 들어갈 것인가를 걱정해야 한다.
이곳에서 1박을 하면서 골고루 끼니마다 다른 식당을 선택해서
식당마다의 독특한 맛을 즐겨보았다.
앞으로 안도에 많은 손님들이 들이닥칠 것을 생각하면 당장에 찾아온 손님만 생각하지 말고,
식당마다 차별화된 맛을 지닌 음식을 계발해서
서로 경쟁을 하지 않고서도 많은 손님을 맞이할 궁리를 해야 할 것 같다.
더 이상 선택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손님의 입맛을 따라가지 못했고,
섬에서의 진한 감동을 주지 못해 관광 활성화를 시키지 못하는 경우를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손님이 많다고 해서 소홀히 하면 굳이 이곳까지 와서 식사를 하지 않는다.
시내와 다를 바 없거나 뒤떨어지면 발길을 돌린다는 것과 입소문이 무섭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민박을 할 수 있는 펜션과 모텔, 깨끗한 민박집이 많다.
또, 경로당이나 찜질방에서도 하룻밤을 의미있게 보낼 수 있다.
안도의 보물인 당산공원
안도 상산 둘레길의 끝은 선착장 앞 당산공원이 된다.
비록 공원을 만들 때 체육기구를 놓는다고 하면서
당집을 허물어 버렸다는 것이 무척 안타까운 일이지만
동백나무와 후박나무, 팽나무 등 당산나무와 같은 고목이 삥 둘러서 있는
천 여 평의 당산 숲은 그 자체 만으로도 오래 보존되어야 한다.
해양도시 여수는 해안가와 섬에는 반드시 용왕과 같은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당집이 있다.
특히 섬 지역은 '할아버지당'과 '할머니당'으로 나뉘어 있는 곳이 많다.
안도의 제당도 2개로 '상당'과 '하당'이 있었다.
'상당'은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둥근 원형 담으로 둘러쌓여 있다.
제당이 벽돌 양철 건물로 물뚜멍과 함께 있고, 중앙에 불을 피울 수 있게 되어 있다.
철거해버린 '하당'은 방과 부엌으로 된 두 칸 벽돌집이었다.
1300년 경 처음으로 이곳에 정착한 정씨 내외를 모신 사당이라고 한다.
매년 정월 보름이면 마을 무사 안녕과 해난 사고가 없기를 바라는 당제를 지낸다.
원당주 부부가 제물을 준비하고, '하당'에서 제사에 쓰일 술을 빚는다.
오후 5시 '상당'으로 올라가 산신과 1,300년 경 처음 안도에 들어온 정씨 내외에게 제사를 드리고,
밖에서는 산신과 지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칠성제를 드린다.
당산에서 제사가 끝나면 매구를 앞세우고 마을로 내려와 4개 목에 상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낸다.
이어서 16일 오전 5시에 '하당'으로 올라가 지신에게 제사를 드린다.
다음은 도선장으로 내려와서 4해 용왕과 중앙 용왕에게 드리는 제사를 지낸다.
이 때 바다에서 죽은 사람이 있는 가정에서는 따로 상을 차려놓고 주부가 술잔을 올린다.
마을 사람들도 각자 소원을 빌면서 매구를 치고 한판 걸게 놀면서 지낸 다음
바다에 제사상의 음식을 던지면 당제는 끝이 난다.
어떻게 해서든지 당집을 복원하고, 당제를 지내서 이 민중 제례 문화를 살려야 한다.
이와 같은 민속 문화가 선사시대 섬 안도를 더욱 빛낼 수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기 위해서 안도를 더 많이 찾을 것이다.
당산을 한 바퀴 돌면 사방으로 안도와 금오도, 돌산도를 볼 수 있어 전망대로서 손색이 없다.
여름철이면 이곳에 올라 벤치에 앉아 쉬고 있으면 무엇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편안해진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승선
안도에서 손님을 내려주고
다시 연도까지 떠나는 도선을 기다리면서 근처를 살펴보면 볼 것이 많다.
선착장 바로 옆에는 '어촌체험마을 전시관'이 있지만
바다에는 국립수산과학원에서 운영하는 '바다목장'이 있다.
1897년 돌산군수인 조동훈이 안도를 순찰한 기념으로 세워진 해상순찰기념비문을 비롯하여
해마다 홍수가 나면 나무로 만든 다리가 떠내려가서
상산에서 평석을 옮겨와 돌다리를 놓은 김순점이라는 부인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한반도를 품은 호수마을'이라는 마을 유래비와
1918년 안도어업협동조합을 세운 이후 안개 낄 때 종을 쳐서 뱃길을 안내한 종대가 있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피곤한 몸을 편히 쉴 수 있는 오래된 노거수가
그늘을 드리우는 '안호정'이라는 정자에 몸을 의지해도 된다.
단지 아쉬운 것으로는 당산공원에서 안도대교가 시작되는 신추까지 잇는
인도교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굳이 인도교를 안만들어도 되고, 얼마나 앞으로 사람들이 이 다리를 건너다닐 것이며
이야포를 지나 호수 같은 두멍안을 걷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지기 때문이다.
섬은 그대로 놔두어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데도 억지로 인공 시설물을 만들어놓겠다고 한다.
혹시 염불보다 잿밥 때문에 자꾸 큰 공사를 벌인다는 의혹의 눈초리가 맞아떨어져서
그런 것이 아닌지 되묻고 싶다.
매표소장 정재곤 전 이장은 매표소에서 배가 들어오는데도
안도의 유래에 대해서 열심히 소개하는 열정이 존경스럽다.
정재곤님은 안도의 과거와 현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마을 역사지인 '안섬지'를 펴낸 분이다.
배삯이 여천에서 타는 것보다 비싸지만 차분히 안도를 둘러볼 수 있어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