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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주간한국문학신문 주최
제8회 전국시낭송경연대회 지정시 원문(3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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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을에/ 정한모
2.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도종환
3. 개에게 인생을 이야기하다/ 정호승
4. 검정 고무신/ 한석산
5. 겨울의 춤/ 곽재구
6. 곡비(哭婢)/ 문정희
7. 그 강에 가고 싶다/ 김용택
8. 그 길은 아름답다/ 신경림
9. 그대에게/ 안도현
10. 꽃피는 시절/ 이성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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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을에 / 정한모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이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끓고
모아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오늘이
마침낸 전설 속에 묻혀버리는
해저 같은 그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에서
한없이 밑으로만 떨어져가던
그토록 아득하던 추락과
그 속력으로
몇 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공포의 기억이 진리라는
이 무서운 진리로부터
우리들의 이 소중한 꿈을
꼭 안아 지키게 해주십시오.
[출처] 평생 간직하고픈 시/ 윤동주 외/ 북 카라반/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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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 도종환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 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패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텅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출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랜덤하우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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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개에게 인생을 이야기하다 / 정호승
젊을 때는 산을 바라보고 나이가 들면 사막을 바라보라
더이상 슬픈 눈으로 과거를 바라보지 말고
과거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웃으면서 걸어가라
인생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오늘을 어머니를 땅에 묻은 날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첫아기에게 첫젖을 물린 날이라고 생각하라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분노하지 말고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침밥을 준비하라
어떤 이의 운명 앞에서는 신도 어안이 벙벙해질 때가 있다
내가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잔이 있으면 내가 마셔라
꽃의 향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듯
바람이 나와 함께 잠들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일에 감사하는 일일 뿐
내가 누구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내 손이 빈손이 되어야 한다
오늘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말고 무엇을 이루려고 뛰어가지 마라
아무도 미워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지 말고 가끔 저녁에 술이나 한잔해라
산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을 내려와야 하고
사막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깊은 우물이 되어야 한다
[출처] 수선화에게/ 정호승/ 창비/ 201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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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검정 고무신 / 한석산
눈 덮인 초가지붕 아랫목 화롯불이 피어나던
뭔가 아련하고 애잔한 느낌의 시절
인생의 길모퉁이서 만난 사람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
지쳐 버린 내 마음 아는 이 없어도
진한 그리움에 가슴 저린 보고픔이 이는데
이름만 불러도 눈물이 아리 아릿한
나의 인생에 함께 했던 수많은 얼굴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사는 게 힘들어 잊고 살았던
사랑했던 사람들의 발자취를 묻어둔
검정 고무신 시절 황소보다 못한 찬밥 덩어리 같은
살아온 지난날을 생각하니 사는 게 눈물입니다.
가고 싶은 그 시절 그리움 속 깊은 사랑
내 어린 날 어머니 아버지 지금 나를 보시면
얼마나 만지고 싶고 말하고 싶으실까
울고 싶은 가슴 짓누르는
아픔으로 그려지는 어머니 엄마 보고 싶어요.
지난 인생길에 함께 했던 잊혀진 얼굴이 보고 싶다.
[출처] 풍금/ 한석산/ 한국문학신문/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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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겨울의 춤 / 곽재구
첫눈이 오기 전에
추억의 창문을 손질해야겠다
지난 계절 쌓인 허무와 슬픔
먼지처럼 훌훌 털어내고
삐걱이는 창틀 가장자리에
기다림의 새 못을 쳐야겠다
무의미하게 드리워진 낡은 커튼을 걷어내고
영하의 칼바람에도 스러지지 않는
작은 호롱불 하나 밝혀두어야겠다
그리고 춤을 익혀야겠다
바람에 들판의 갈대들이 서걱이듯
새들의 목소리가 숲속에 흩날리듯
낙엽 아래 작은 시냇물이 노래하듯
차갑고도 빛나는 겨울의 춤을 익혀야겠다
바라보면 세상은 아름다운 곳
뜨거운 사랑과 노동과 혁명과 감동이
함께 어울려 새 세상의 진보를 꿈꾸는 곳
끌어안으면 겨울은 오히려 따뜻한 것
한 칸 구들의 온기와 희망으로
식구들의 긴 겨울잠을 덥힐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채찍처럼 달려드는
겨울의 추억은 소중한 것
쓰리고 아프고 멍들고 얼얼한
겨울의 기다림은 아름다운 것
첫눈이 내리기 전에
추억의 창문을 열어젖혀야겠다
죽은 새소리 뒹구는 들판에서
새봄을 기다리는
초록빛 춤을 추어야겠다.
[출처] 세노야/ 곽재구/ 문학과 지성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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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곡비哭婢 / 문정희
사시사철 엉겅퀴처럼 푸르죽죽하던 옥례 엄마는
곡(哭)을 팔고 다니던 곡비였다
이 세상 가장 슬픈 사람들의 울음
천지가 진동하게 대신 울어 주고
그네 울음에 꺼져 버린 땅 밑으로
떨어지는 무수한 별똥 주워 먹고 살았다
그네의 허기 위로 쏟아지는 별똥 주워 먹으며
까무러칠 듯 울어 대는 곡소리에
이승에는 눈 못 감고 떠도는 죽음 하나도 없었다
저승으로 갈 사람 편히 떠나고
남은 이들만 잠시 서성일 뿐이었다
가장 아프고 가장 요염하게 울음 우는
옥례 엄마 머리 위에
하늘은 구멍마다 별똥 매달아 놓았다
그네의 울음은 언제 그칠 것인가
엉겅퀴 같은 옥례야, 우리 시인의 딸아
너도 어서 전문적으로 우는 법 깨쳐야 하리
이 세상 사람들의 울음
까무러치게 대신 우는 법
알아야 하리
[출처] 지금 장미를 따라/문정희/ 민음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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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 강에 가고 싶다 / 김용택
그 강에 가고 싶다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저 홀로 흐르고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멀리 간다
인자는 나도
애가 타게 무엇을 기다리지 않을 때도 되었다
봄이 되어 꽃이 핀다고
금방 웃을 일도 아니고
가을이 되어 잎이 진다고
산에서 눈길을 쉬이 거둘 일도 아니다
강가에서 그저 물을 볼일이요
가만가만 다가가서 물 깊이 산을 볼 일이다
무엇이 바쁜가
이 만큼 살아서 마주할 산이 거기 늘 앉아 있고
이 만큼 걸어 항상 물이 거기 흐른다
인자는 강가에 가지 않아도
산은 내 머리맡에 와 앉아 쉬었다가 저 혼자 가고
강물도 저 혼자 돌아간다
그 강에 가고 싶다
물이 산을 두고 가지 않고
산 또한 물을 두고 가지 않는다
그 산에 그 강
그 강에 가고 싶다
[출처]제12회 소월시문학상수상작품집/ 김용택/ 문학사상/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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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그 길은 아름답다 / 신경림
산벚꽃이 하얀 길을 보며 내 꿈은 자랐다.
언젠가는 저 길을 걸어 넓은 세상으로 나가
많은 것을 얻고 많은 것을 가지리라.
착해서 못난 이웃들이 죽도록 미워서.
고샅의 두엄더미 냄새가 꿈에서도 싫어서.
그리고는 뉘우쳤다 바깥으로 나와서는.
갈대가 우거진 고갯길을 떠올리며 다짐했다.
이제 거꾸로 저 길로 해서 돌아가리라.
도시의 잡담에 눈을 감고서.
잘난 사람들의 고함소리에 귀를 막고서.
그러다가 내 눈에서 지워버리지만.
벚꽃이 하얀 길을, 갈대가 우거진 그 고갯길을.
내 손이 비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내 마음은 더 가난하다는 것을 비로소 알면서.
거리를 날아다니는 비닐봉지가 되어서
잊어버리지만. 이윽고 내 눈앞에 되살아나는
그 길은 아름답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 아니어서, 내 고장으로 가는 길이 아니어서
아름답다.
길 따라 가면 새도 꽃도 없는
황량한 땅에 이를 것만 같아서,
길 끝에서 험준한 벼랑이 날 기다릴 것만 같아서,
내 눈앞에 되살아나는 그 길은 아름답다.
[출처] 뿔/ 신경림/ 창비/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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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대에게 / 안도현
괴로움으로 하여
그대는 울지 말라
마음이 괴로운 사람은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니
아무도 곁에 없는 겨울
홀로 춥다고 떨지 말라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는 세상 속으로
언젠가 한 번은 가리라 했던
마침내 한 번은 가고야 말 길을
우리 같이 가자
모든 첫 만남은
설렘보다 두려움이 커서
그대의 귓불은 빨갛게 달아오르겠지만
떠난 다음에는
뒤를 돌아보지 말 일이다
걸어온 길보다
걸어갈 길이 더 많은 우리가
스스로 등불을 켜 들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있어
이 겨울 한 귀퉁이를
밝히려 하겠는가
가다 보면 어둠도 오고
그대와 나
그때 쓰러질 듯 피곤해지면
우리가
세상 속을 흩날리며
서로서로 어깨 끼고 내려오는
저 수많은 눈발 중의 하나인 것을
생각하자
부끄러운 것은 가려주고
더러운 것은 덮어주며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찬란한 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우리
가난하기 때문에
마음이 따뜻한 두 사람이 되자
괴로움으로 하여 울지 않는
사랑이 되자
[출처] 가슴으로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안도현의 시작법/
안도현/ 한겨레출판/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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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꽃 피는 시절 / 이성복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 난 몸뚱이 갈가리 찢어지고
나는 울고 싶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키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당신을 보내는 일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꿈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막만 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출처] 그 여름의 끝/ 이성복/ 문학과지성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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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전국시낭송경연대회 지정시(11번~20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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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나의 강산이여/ 심훈
12. 너를 만나고 싶다/ 김재진
13. 너를 사랑한다/ 강은교
14.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정진규
15. 대설주의보/ 최승호
16. 대숲 바람소리/ 송수권
17. 못 위의 잠/ 나희덕
18. 바람의 찻집에서/ 류시화
19. 백발의 그리움 하나/ 홍윤숙
20. 사랑의 빗물 환하여 나 괜찮습니다/ 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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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나의 강산이여 / 심훈
높은 곳에 올라 이 땅을 굽어보니
큰 봉우리와 작은 뫼뿌리의 어여쁨이여,
아지랑이 속으로 시선이 녹아드는 곳까지 오똑오똑 솟았다가는 굽이쳐 달리는 그 산 줄기
네 품에 안겨 딩굴고 싶도록 아름답구나.
소나무 감송감송 木覓(목멱)의 등어리는
젖 물고 어루만지던 어머니의 허리와 같고
삼각산은 적의 앞에 뽑아든 칼끝처럼 한 번만 찌르면 먹장구름 쏟아질 듯이
아직도 네 기상이 늠름하구나.
에워싼 것이 바다로되 물결이 성내지 않고
샘과 시내로 가늘게 수놓았건만 그 물이 맑고 그 바다 푸르러서,
한 모금 마시면 한 백년이나 수(壽)를 할 듯
퐁퐁퐁 솟아서는 넘쳐 넘쳐 흐르는구나.
할아버지 주무시는 저 산기슭에
할미꽃이 졸고 뻐꾹새는 울어예네
사랑하는 그대여, 당신도 돌아만 가면 저 언덕 위에 편안히 묻어 드리고
그 발치에 나도 누워 깊은 설움 잊으오리다.
바가지 쪽 걸머지고 집 떠난 형제,
거칠은 벌판에 강냉이 이삭을 줍는 자매여,
부디부디 백골이나마 이 흙 속에 돌아와 묻히소서
오오 바라다볼수록 아름다운 나의 강산이여!
[출처] 그날이 오면/ 심훈/ 시인생각/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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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너를 만나고 싶다 / 김재진
나를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사소한 습관이나 잦은 실수,
쉬 다치기 쉬운 내 자존심을 용납하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직설적으로 내뱉고선 이내 후회하는
내 급한 성격을 받아들이는
그런 사람과 만나고 싶다
스스로 그어 둔 금속에 고정된 채
시멘트처럼 굳었다가 대리석처럼 반들거리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사람들 헤치고
너를 만나고 싶다
입 꼬리 말려 올라가는 미소 하나로
모든 걸 녹여 버리는
그런 사람
가뭇한 기억 더듬어 너를 찾는다.
스치던 손가락의 감촉은 어디 갔나.
다친 시간을 어루만지는
밝고 따사롭던 그 햇살,
이제 너를 만나고 싶다
막무가내의 고집과 시퍼런 질투,
때로 타오르는 증오는 불길처럼 이글거리는
내 못된 인간을 용납하는 사람
덫에 치여 비틀거리거나
어린아이처럼 꺼이꺼이 울기도 하는
내 어리석음 그윽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내 살아가는 방식을 송두리째 이해하는
너를 만나고 싶다
[출처]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김재진/ 꿈꾸는서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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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너를 사랑한다 / 강은교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을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을 몰랐다
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출처] 막다른 골목을 사랑했네/ 강은교/ 시인생각/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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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 정진규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을 아시는가
이것은 나락도 거두어 갈무리하고
고추도 말려서 장에 내고
참깨도 털고 겨우 한가해지기 시작하던
늦가을 어느날 농사꾼 아우가 한 말이다
어디 버릴 것이 있겠는가
열매 살려내는 햇볕,
그걸 버린다는 말씀이 당키나 한가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은
끈임없이 무언갈 자꾸 살려내고 싶다는 말이다
모든 게 다 쓸모가 있다
버릴 것이 없다
아 그러나 나는 버린다는 말씀을
비워낸다는 말씀을
겁도 없이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욕심 버려야 보이지 않던 것
비로서 보인다고
안개 걷힌다고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아니다, 욕심도 쓸모가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마음으로 보면 쓸모가 있다
세상엔 지금 햇볕이 지천으로 놀고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뜻을 아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다
사람아 사람아 젖어있는 사람아
그대들을 햇볕에 내어 말려 쓰거라
끊임없이 살려내거라
놀고 있는 햇볕이 스스로 제가
아깝다 아깝다 한다
[출처]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정진규/ 문학세계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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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대설주의보 / 최승호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 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는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 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출처] 대설주의보/ 최승호/ 민음사/ 1983/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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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대숲 바람소리 / 송수권
대숲 바람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흐르는 게 아니라요
서느라운 모시옷 물맛 나는 한 사발의 냉수물에 어리는
우리들의 맑디맑은 사랑
봉당 밑에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고여 흐르는 게 아니라요
대패랭이 끝에 까부는 오백년 한숨, 삿갓머리에 후득이는
밤 쏘낙 빗물소리……
머리에 흰 수건 쓰고 죽창을 깎던, 간 큰 아이들,
황토현을 넘어 가던
징소리 꽹과리 소리들……
남도의 마을마다 질펀히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흰 연기 자욱한 모닥불 끄으름내, 몽당빗자루도 개터럭도
보리숭년도 땡볕도
얼개빗도 쇠그릇도 문둥이 장타령도
타는 내음……
아 창호지 문발 틈으로 스미는 남도의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눈 그쳐 뜨는 새벽별의 푸른 숨소리, 청청한 청청한
대닢파리의 맑은 숨소리
[출처] 우리나라의 숲과 새들/ 송수권/ 고요아침/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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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못 위의 잠 / 나희덕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 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 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 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 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 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출처]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나희덕 / 창비/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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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바람의 찻집에서 / 류시화
바람의 찻집에 앉아
세상을 바라보았지
긴 장대 끝에서 기도 깃발은 울고
구름이 우려낸 차 한 잔을 건네받으며
가장 먼 데서 날아온 새에게
집의 안부를 물었지
나 멀리 떠나와 길에서
절반의 생을 보내며
이미 떠나간 것들과 작별하는 법을 배웠지
가슴에 둥지를 틀었다 날아간 날개들에게서
손등에서 녹는 눈발들과
주머니에 넣고 오랫동안 만지작거린 불꽃의 씨앗들로
모든 것이 더 진실했던 그때
어린 뱀의 눈을 하고
해답을 구하기 위해 길 떠났으나
소금과 태양의 길 위에서 이내 질문들이 사라졌지
때로 주머니에서 꺼낸 돌들로 점을 치면서
해탈은 멀고 허무는 가까웠지만 후회는 없었지
탄생과 죽음의 소식을 들으며
어떤 계절의 중력도 거부하도록
다만 영혼을 가볍게 만들었지
찰나의 순간
별똥별의 빗금보다 밝게 빛나는 깨달음도 있었으나
빛과 환영의 오후를 지나
가끔은 황혼과 바람뿐인 찻집에서 차를 마시며
생의 지붕들을 내려다보고
고독할 때면 별의 문자를 배웠지
누가 어둔 곳에 저리도 많은 상처를 새겼을까
그것들은 폐허에 핀 꽃들이었지
그리고는 입으로 불어 별들을 끄고
잠이 들었지
봉인된 심장 속에 옛사랑을 가두고
외딴 행성 바람의 찻집에서......
[출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옐림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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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백발의 그리움 하나 / 홍윤숙
어디서 불어오던 바람 소리일까
한 시대 에둘러 돌아와 후득이던
고향의 예감 같던 바람 소리
한 시절 바람은 나의 내부에서 일어났다
아니 내 몸 전체가 온통 한 포대의 바람이었다
나는 날마다 들끓는 바람이 되어
세상의 끝을 헤매다녔고
돌아오는 길은 고향 뒷산 밤나무 숲의
밤꽃 향기에 목이 메었다
그 시절 바람은 열이면 열 눈먼 장님이어서
분수처럼 산화하고 자폭했다
어디를 가도 꿈꾸던 나라, 도시는 없었다
인생을 나눌 사람 하나 없이
쓸쓸히 눈감고 돌아서는 뒷모습
그 등에 붉은 저녁노을 실의의 그림자
길게 멀어져 가고
젊고 푸르던 바람은 그렇게 이별했다
그 바람 언제부턴가
살 속 뼛속으로 파고드는 하늬바람 되어
내 가슴 시리게 후비고
밤새 눈뜨고 먼 하늘 중천에 길도 없이 떠돌고
한 주름 빗방울로 운명해 갔다 남은 생애,
이제 바람 한 점 없는 아득한 변경
어디로 갈까 길을 물어도
대답 없는 내 안의 산골짝에서
가랑잎 한 장 부서지는 소리로
귀를 씻는다
섬으로 쌓인 세월의 부피 키를 넘어 숨이 차고
가야 할 길은 보이지 않아
가슴엔 길로 자란 백발의 그리움 하나
출구 없는 빈집 혼자 지킨다
[출처] 장식론/ 홍윤숙/ 시인생각/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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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사랑의 빗물 환하여 나 괜찮습니다 / 김선우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풀여치 있어 풀여치와 놀았습니다
분홍빛 몽돌 어여삐 몽돌과 놀았습니다
보랏빛 자디잔 꽃마리 어여뻐
사랑한다 말했습니다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흰 사슴 마시고 숨결 흘려놓은 샘물 마셨습니다
샘물 달고 달아 낮별 뜨며 놀았습니다
새 뿔 올린 사향노루 너무 예뻐서
슬퍼진 내가 비파를 탔습니다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잡아주고 싶은 새들의 가녀린 발목 종종거리며 뛰고
하늬바람 채집하는 나비 떼 외로워서
멍석을 펴고 함께 놀았습니다 껍질 벗는 자작나무
진물 환한 상처가 뜨거워서
가락을 함께 놀았습니다 회화나무 명자나무와 놀고
해당화 패랭이꽃 도라지 작약과 놀고
꽃아그배 아래 낮달과 놀았습니다
달과 꽃의 숨구멍에서 흘러나온 빛들 어여뻐
아주 잊듯 한참을 놀았습니다 그대 잃은 지 오래인
그대 만나러 가는 길
내가 만나 온 것들 모두 그대였습니다
내 고단함을 염려하는 그대 목소리 듣습니다
나. 괜찮습니다
그대여, 나 괜찮습니다
[출처]내 몸 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김선우/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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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전국시낭송경연대회 지정시(21번~30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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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세상에 어머니 같은 여자는 없다/ 한석산
22. 아버지의 등/ 이정하
23. 어머니라는 말/ 이대흠
24. 옮겨가는 초원/ 문태준
25. 중년에 아름다운 당신/ 이채
26. 직소포에 들다/ 천양희
27. 천년의 잠/ 오세영
28. 초록이 세상을 덮는다/ 김기택
29. 한강 아리랑/ 한석산
30. 황옥의 사랑가/ 정일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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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세상에 엄마 같은 여자는 없다 / 한석산
엄마 아이구 내 새끼 나 어떤 여자랑 살까
음 여자는 뭐니 뭐니 해도
음식 솜씨 좋은 여자가 으뜸이란다.
응 엄마 같은 여자! 아야, 징그럽다
곁에서 잠잠히 있던 아빠
야 이놈아 세상에 엄마 같은 여자는 없다.
청 보릿대 같던 시절 엄마와 할머니가 담근
김장김치 밑반찬 간장 된장 고추장
귀 떨어진 뚝배기 보글보글 된장찌개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이 눈물 나게 그립다.
어머니의 젖내 나는 그 품속이 그리워 운다.
투정 부리면 달래주고,
칭얼거리면 젖가슴을 내주시던
그리운 어머니 엄마가 보고 싶다.
오늘 저녁 밥상은 엄마 손맛 같은 여자
밥숟가락에 묵은지 쭉 찢어 얹어주는
아내가 차려주는
자글자글한 고등어구이 한 손
된장찌개 호박잎 상추쌈에 보리막장
열무김치 배추 겉절이 곁들인 보리 밥상이면 좋겠다.
[출처] 풍금/ 한석산/ 한국문학신문/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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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아버지의 등 / 이정하
-수없이 업힌 어머니의 등보다 더 기억나는 것은
단 한 번 업힌 아버지의 등이다
일곱 살 되던 해 겨울,
눈보라치는 들판을 건너가기 위해
아버지는 처음 내게 등을 내주셨다
심한 고열로 밤을 꼬박 새웠던 나는
아버지의 넓은 등판에 뺨을 댄 채 잠이 들었고
읍내 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내 병은 말끔히 나아 있었다
객지에 계신 아버지가 집에 오는 것은
일 년에 어쩌다 한두 번
그때마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동네 목욕탕에 가고 싶어 하셨고
나는 그때마다 부리나케 도망쳐
혼자 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곤 했다
막노동 탓에 표시나게 굽어 있는 등을
세월이 한참 흘러
아버지와 함께 간 동네 목욕탕
그때도 나는
늙고 말라빠진 아버지의 몸을 외면했다
야야, 쓸데없는 돈 말라꼬 써
등만 밀어주면 되는데
세신사에 이끌려가며 힘없이 남긴
아버지의 말씀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세월이 더 흐르고 흘러
아들과 함께 간 동네 목욕탕
자식새끼의 등을 때수건으로 벌겋게 밀며
나는 소리 없이 눈물 흘렸다
샤워기 세차게 틀어놓고 목 놓아 울었다
어릴 적 그 따스했던 아버지의 등
이제는 밀어드릴 수도 없는 아버지의
그 굽은 등이 간절히 생각나서....
[출처] 다시 사랑이 온다/ 이정하/ 문이당/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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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어머니라는 말 / 이대흠
어머니라는 말을 떠올려보면
입이 울리고 코가 울리고 머리가 울리고
이내 가슴속에서 낮은 종소리가 울려나온다
어머니라는 말을 가만히 떠올려보면
웅웅거리는 종소리 온몸을 물들이고
어와 머 사이 머와 니 사이
어머니의 굵은 주름살 같은 그 말의 사이에
따스함이라든가 한없음이라든가
이런 말들이 고랑고랑 이랑이랑
어머니라는 말을 나직이 발음해보면
입속에 잔잔한 물결이 일고
웅얼웅얼 생기는 파문을 따라
보고픔이나 그리움 같은 게 고요고요 번진다
어머니라는 말을 또 혀로 굴리다보면
물결소리 출렁출렁 너울거리고
맘속 깊은 바람에 파도가 인다
그렇게 출렁대는 파도소리 아래엔
멸치도 갈치도 무럭무럭 자라는 바다의 깊은 속내
어머니라는 말 어머니라는
그 바다 깊은 속에는
성난 마음 녹이는 물의 숨결 들어 있고
모난 마음 다듬어주는
매운 파도의 외침이 있다
[출처] 귀가 서럽다/ 창비시선311 / 이대흠/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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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옮겨가는 초원 / 문태준
그대와 나 사이 초원이나 하나 펼쳐놓았으면 한다
그대는 그대의 양떼를 치고, 나는 나의 야크를 치고 살았으면 한다
살아가는 것이 양떼와 야크를 치느라 옮겨다니는 허름한 천막임을 알겠으니
그대는 그대의 양떼를 위해 새로운 풀밭을 찾아 천막을 옮기고
나는 나의 야크를 위해 새로운 풀밭을 찾아 천막을 옮기자
오후 세시 지금 이곳을 지나가는 구름 그림자나 되어서
그대와 나도 구름 그림자 같은 천막이나 옮겨가며 살자
그대의 천막은 나의 천막으로부터 지평선 너머에 있고
나의 천막은 그대의 천막으로부터 지평선 너머에 두고 살자
서로가 초원 양편으로 멀찍멀찍이 물러나 외면할 듯이 살자
멀고 먼 그대의 천막에서 아스라이 저녁연기가 피어오르면
나도 그때는 그대의 저녁을 마주 대하고 나의 저녁밥을 지을 것이니
그립고 그리운 날에 내가 그대를 부르고 부르더라도
막막한 초원에 천둥이 구르고 굴러
내가 그대를 길게 호명하는 목소리를 그대는 듣지 못하여도 좋다
그대와 나 사이 옮겨가는 초원이나 하나 펼쳐놓았으면 한다
[출처] 먼 곳/ 문태준 / 창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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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중년에 아름다운 당신 / 이채
깊어서 고요한 것이 있다면
바다만이 아닐 것이며
넓어서 편안한 것이 있다면
하늘만이 아닐 것입니다
중년에 아름다운 당신의
눈빛이 그러하고 가슴이 그러하고
중년에 온화한 당신의
표정이 그러하고 생각이 그러합니다
세월의 오랜 정을 소중히 여기고
진실한 마음의 참됨을 알기에
문득 그리워지는 사람 하나
어둠 속 별이 되어 빛날 때
깊어도 때로는 외롭던가요
외롭다가 슬프기도 한 눈빛으로
흘러도 보이지 않는 가슴 속 눈물
중년에 아름다운 당신의 모습입니다
떠나간 이름 하나
긴 하루로 남았던 기억
어느 날 너와 나의 만남이
엷은 꽃잎으로 다시 피어날 때
넓어도 때로는 그립던가요
타다 남은 불씨에
실바람이 불어오면
달래고 재우는 버들잎 손길
중년에 아름다운 당신의 마음입니다
가고 오는 세월은 유수 같아라
부질없는 욕심을 버리고 나니
한줄기 노을빛이 더욱 아름다워
중년인 내 나이를 사랑하렵니다
[출처] 중년의 고백/ 이채/ 도서출판행복에너지/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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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직소포에 들다 / 천양희
폭포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
와!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
관음산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정상이란 생각이 든다
피안이 이렇게 가깝다
백색 정토(淨土)! 나는 늘 꿈꾸어왔다
무소유로 날아간 무소새들
직소포의 하얀 물방울들, 환한 수궁(水宮)을.
폭포소리가 계곡을 일으킨다. 천둥소리 같은 우레 같은
기립박수 소리 같은 - 바위들이 흔들 한다.
하늘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무한천공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 와서 보니
피안이 이렇게 좋다.
나는 다시 배운다.
절창(絶唱)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
[출처] 마음의 수수밭/ 천양희/ 창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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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천년의 잠 / 오세영
강변의 저 수 많은 돌들 중에서
당신이 집어 지금
손 안에 든 돌,
어떤 돌은
화암사(禾巖寺) 중창 미타전(彌陀殿)의 셋째 기둥 주춧돌로
놓이기를 바라고,
어떤 돌은
어느 시인의 서재 한 귀퉁이에 나붓이 앉아
시가 씌어지지 않는 밤, 그의 빈 원고지 칸을 지키기를 바라고
또 어떤 돌은
어느 순결한 죽음 앞에서 만대(萬代)의 의(義)를 그의 붉은
가슴에 새기기를 바라지만
아, 나는 다만 당신이
물수제비뜨듯 또다시 강가에 나를
팽개치지 않기만을......
아무도 깨워주지 않는 천년의 잠은
죽음보다 더 잔인할지니
흙 위에 엎드려 잠들기보다는
급류 속의 일개
징검다리가 되리라.
그러므로 님이여, 장난삼아 던질 양이면 차라리
거친 물살에 던지시라.
그리하여 먼 후일 당신이 다시 찾아오시는 날,
나는 즐겨 내 몸을 당신 앞에 바치리니
당신은 주저 말고 내 등을
밟고 건너시기를......
[출처] 천년의 잠/ 오세영/ 시인생각/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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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초록이 세상을 덮는다 / 김기택
잠깐 초록을 본 마음이 돌아가지 않는다
초록에 붙잡힌 마음이
초록에 붙어 바람에 세차게 흔들리는 마음이
종일 떨어지지 않는다
여리고 연하지만 불길처럼 이글이글 휘어지는 초록
땅에 박힌 심지에서 끝없이 솟구치는 초록
나무들이 온몸의 진액을 다 쏟아내는 초록
지금 저 초록 아래에서는
얼마나 많은 잔뿌리들이 발끝에 힘주고 있을까
초록은 수많은 수직선 사이에 있다
수직선들은 조금씩 지우며 번져가고 있다
직선과 사각에 밀려 꺼졌다가는 다시 살아나고 있다
흙이란 흙은 도로와 건물로 모조리 딱딱하게 덮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은 초록이 갑자기 일어날 줄은 몰랐다
아무렇게나 버려지고 잘리고 갇힌 것들이
자투리땅에서 이렇게 크게 세상을 덮을 줄은 몰랐다
콘크리트 갈라진 틈에서도 솟아나고 있는
저 저돌적인 고요
단단하고 건조한 것들에게 옮겨 붙고 있는
저 촉촉한 불길
[출처] 소/ 김기택/ 문학과지성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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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한강 아리랑 / 한석산
천년을 흘러도 한 빛깔, 물 파랑 쳐 오는
갈기 세운 물소리 조국의 아침을 깨운다.
한강 1300리 물길 하늘과 땅 이어주는
구름 머문 백두대간 두문동재 깊은 골
뜨거운 심장 울컥울컥 꺼내놓는 용틀임 춤사위
우리 겨레의 정신과 육신을 가누는
민족의 젖줄 한강 발원지 여기 검룡소.
큰 물줄기 맑고 밝게 뻗어 내리는
골지 천과 아우라지 조양 강 휘돌아 친 두물머리 이끈
한강 한복판에 떠 있는 선유도 갈대숲
물새 둥지 튼 그 속에서도 꽃 피웠네.
대한민국 서울 기적 이룬 한강
굴절된 역사의 아픈 눈물 삼키며 제 몸 뒤집는다.
이런 날에 우리 다 같이 부르는 가슴 벅찬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우리 가는 곳 어딘지 몰라도
가버린 것들은 허망하게 아름다운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청동기 문화를 세운, 오늘날 우리 민족의 선조
이 땅 순한 백성들이 원시생활 하던 시절부터
강에 안기던 사람 품을 내주던 강
세월이라는 깊은 강가에 서면
고요한 강물이 내 영혼을 끌고 가네.
먼 옛날 삼각산 소나무 아래 어매 아배 뼈를 묻고,
삽을 씻으며 민초의 한을 씻던 아리수
넓고 깊은 어머니 가슴 강물도 차운 날에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젖가슴 여미는 어머니 가슴 헤집는 젖둥이
온갖 풀꽃 향기에 젖은 물가에 앉아 있어도 목이 마르다.
[출처]한강아리랑/ 한석산/ 동학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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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황옥黃玉의 사랑가 / 정일근
운명의 맥을 짚어 누런 바다를 건너기로 했습니다.
바다 건너 동쪽나라에 하늘에서 알이 되어 내려왔다는
수로, 그대가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더 먼 나라 나사렛에서 태어난 야소라는 남자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태어나고 죽는 일이 하늘에 있고
죽어서 다시 사는 일이 하늘에 있다면
제가 그대에게로 가는 것도 하늘이 정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 사랑이 하늘의 신탁이라면
그대는 그 나라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겠지요.
어머니가 주신 붉은 속곳을 준비하며 저는 자꾸만 붉어집니다.
그래서 바다를 건너는 두려움은 잊기로 했습니다.
이만 오천 리 뱃길 내내 초야의 뜨거움을 꿈꿀 것입니다.
첫날밤 그대가 열여섯 내 나이를 묻는다면
붉은 저 속곳보다, 바다를 건너며 붉어진 내 몸보다
더 붉은 처녀의 피로 답할 것입니다.
내 배 안에서 하늘의 흰 피와 땅의 붉은 피가 섞여
새로운 나라 새로운 왕조의 피를 만들고
그 피 세세 년년 붉게 이어지길 바라겠습니다.
건강한 남자로 곧추서서 저를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지금 아유타국에서 허許씨 성을 가진 황옥이
물고기 두 마리 문양을 증표로 수로, 그대에게로 갑니다.
[출처] 사과야 미안하다/ 정일근/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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