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철학/미학
메를로퐁티의 지각 현상학과 상호 엮임
프로필
#메를로퐁티#현상학#하이데거 # 교감 이론 #환경 #키아즘
목차
1. 메를로퐁티의 지각 현상학
2. 메를로-퐁티의 객관주의 비판
3. 교감 이론으로서 메를로퐁티의‘상호 엮임’ - 권택영
4. 메를로-퐁티와 세잔
1. 메를로퐁티의 지각 현상학
지각현상학(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 1945.
현상학에서 의식의 지향성이란?
생각을 비우면 계속 다른 것들이 떠오른다. 의식은 그 자체로써 끝없이 외부의 대상을 향해서 떠오르게 한다.
의식의 지향성은 중세철학부터 있던 것으로 후설이 발전시켰다.
(주: Franz Bretano: 심적 현상의 특유성을 나타내는 지향적 내재라는 개념을 제시한 에드문트 후설의 스승)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의 의식은 외부를 향해서 지향한다. 의식 자체는 내용이 없다. 비어 있기에 선택의 자유가 있다.'라고 말한다.
메를로퐁티는 데카르트의 마음과 신체의 심신이원론. 이성 중심 사고의 가치를 부정하고
데카르트와는 다른 명제를 내 세웠다.
▪ 인간의 정신과 눈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를 체험적인 삶 속에서 지각하며 이런 삶은 사유 체제 또는 화가에 있어서 시선 속에 들어와 있는 세계이면서 몸의 지각과 융합된 세계이다
▪ 주체의 몸은 이미 세계 속에 존재하고 세계와 몸은 일체를 형성한다
▪ 예술가에 의해 캔버스에 그려진 세계는 이미지의 재현이 아니라 삶에 관한 창조의 현상 들이다
▪ 몸은 세계 속에 존재하고 세계는 몸의 원초적인 지각을 통해 자신을 드러나기 때문이다
▪ 몸은 지각 작용을 통해서 세계와 끊임없이 교섭하면서 세계로 향한다.
▪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은 지각 현상의 기원과 몸의 존재론적 근거를 사유해 간다는 의미 에서 곧 지각 또는 몸의 현상학으로 불려진다
원초적인 존재는 살의 떨림으로 존재한다. 예: 세잔의 그림.
내 몸은 모든 색깔에 진동한다. 음악을 들으면서 몸이 진동하게 된다.
의식이 판단하기 전에 음악에 감응하게 된다.
메를로퐁티는 "우리는 결코 무 속에 거주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충만 속에, 다시 말해서 존재 속에서 있는 것이다. "
메를로퐁티가 추구하는 새로운 회화의 정신은 이상적인 구도에 의존해서 대상 세계를 이미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언어일 수 있는 총체적인 지각의 인식과 논리에 의해 대상 세계를 새롭게 사유하는 것이다. 이런 세계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몸과 마음 그리고 자연이 유기적으로 일체를 형성하는 삶의 공간을 의미한다.
반 고흐의 촉각적인 붓 터치에서 보듯이 여러 감각기관들이 동시에 작용한다.
신체의 감각이 세상을 받아들여서 세상을 이해한다.
세잔의 예술론
▪ 색채의 미를 통해 체험적인 세계를 표현하고, 공간은 색채의 대비와 효과 등에 의해 그 깊이를 표현한다
▪ 색채란 크레파스와 같이 가지런히 ‘정의된’ 색채가 아니라, 마치 카멜레온이 자신의 피부 색을 변양시키듯이 같은 색채도 이웃한 다른 색체들과 대비되면서 무수히 변화한다
▪ 현실 공간에 대한 회화적인 평면의 이해는 무수한 색체들에 의해 회화적인 원근법을 재 해석한다
▪ 전통적인 구도를 뛰어넘고자 평면의 회화공간 속에서 색채의 채도와 변화를 통해 공간의 내면적인 깊이를 새롭게 재현
에스타크에서 바라본 마을은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이 색채를 통하여 원근감을 나타내려 했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가까운 것은 따뜻한 색, 이를테면 노랑과 주황 등으로, 먼 곳의 색은 파란색이나 보라색 등 차가운 색으로 그리는 등 차가운 색과 따뜻한 색의 조화가 놀랍다.
그는 주변적이고 부수적인 것은 깡그리 무시하고 지혜의 눈으로서 리얼리티의 심연에 뛰어들었다.
그의 작품은 미술이 선과 색채로 대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색채로 자연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임을 입증했다.
"온 우주는 색으로 되어 있다. 심지어 나 자신도 색으로 되어 있다", "마치 내가 끝없이 무한한 색채로 덮여 있는 것 같은 느낌이야. 바로 이 순간이네. 내가 그림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지개 색으로 빛나는 카오스 상태라고나 할까. 나는 내 그림의 배경 앞에 서서 몰아의 경지에 빠지고 마는 거야" - 세잔이 친구 조아생 가스케과 나눈 대화 中 -
이러한 세잔의 감각적인 색채의 표현에 감동하여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 1908~1961)는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다.
메를로 퐁티가 추구하는 새로운 회화의 정신은 이성적인 구도에 의존해서 대상세계를 이미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언어일 수 있는 총체적인 지각의 인식과 논리에 의해 대상세계를 새롭게 사유하는 것이다
이런 세계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몸과 마음 그리고 자연이 유기적인 일체를 형성하는 삶 의 공간을 의미한다
메를로 퐁티에 의하면 세잔이 어느 날 생 빅토와르 산의 풍경을 보고 있다가 빠져들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풍경이 내 속에서 자신을 생각한다.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
(Le paysage se pense en moi, et je suis sa conscience.)
주체와 대상이 전혀 구분이 안 되는 상태이다. 이 경지는 '나'라는 존재가 풍경의 색을 보는 것이 아니라 '풍경'이 나를 통해서 자기의 색을 보는 것이다.
생 빅토와르 산 풍경의 색이 여러 겹 붙어 있는 것이 보이는데 보다보면 자연스럽게 선의 구분이 보인다. 선을 일부러 그린 것이 아니라 배치하다보니까 선이 형성된 것처럼 보이게 그렸다. 마치 모자이크처럼 색깔들을 다 쪼갠다. 이것이 심해지면 피카소의 분석적 큐비즘(cubism)이 된다. 세잔은 세상에는 선이 없다고 했다. 입체물은 단면으로 보면 선이 분명 있다고 느껴지지만 몸을 틀어 보이면 시각적으로 선이라고 인지되던 것은 모두 면으로 흡수된다.
로브에서 본 생 빅토와르 산, 1904~1906 ⓒ폴 세잔(Paul Cézanne)
메를로 퐁티는 정신을 '체화된 의식(conscience incarnée)'이라고 했다. 몸을 현상학적으로 파악하면서 몸과 정신은 서로 얽혀있고 정신이라는 것은 몸의 일부가 된다. 또 메를로 퐁티가 맑스주의자라는 점에서도 그의 철학적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맑스는 "개인적 의식은 사회적 존재의 산물이다. 사회적 존재는 물질관계와 육체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맑스는 유물론적 관점으로 세계를 보았고 메를로 퐁티는 몸이라는 것은 통해 맑스적 유물론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폴 세잔의 그림은 감각적인 부분이 훨씬 강하다. 영어로 '에스테틱(aesthetic)'이라는 말이 있다. '미학'이라는 뜻을 가진 이 말은 독일어로 'Ästhetik'이고 이 말은 그리스어 'Aisthesis'에서 왔다. 'Aisthesis'은 '감각'이라는 뜻이다.
메를로-퐁티에 있어 대상들의 사물성은 주체와 내면적인 교섭 또는 지각작용을 통해 비로소 존재한다. 그가 표방하는 신체주의는 그런 교감을 가정하며 이에 따라 정의된 사물성은 주체와 대상들이 융합하는 관계들 속에 내재한다.
메를로-퐁티의 신체성을 뒷바침하는 가시적인 개념으로 살(chair,leib, flesh)이라는 현상학적 요 소를 소통적인 의미의 매개체로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후설은 chair에 해당하는 독일어 leib를 주재화시키 철학자이다. 그는 물리적, 생물학적 신체인 koerper와 고유한 신체 leib를 구분한다. Leib(chair)는 객관적인 신체가 아닌 주체의 신체를 말하며, 감각하고 행동하고 표현하는 신체, 인격적 주체로 회송되는 신체이다. 더 나아가 타자의 신체가 문제될 때 leib는 지각될 수 있는 신체, 감정이입(empathie)1이 일어나는 신체를 말한다. 메를로 퐁티는 후설이 말하는 동일한 살의 개념을 발전시키고, 더 나아가 그러한 살을 주체의 고유한 몸을 넘어서는 존재론적 영역에 까지 확장시킨다. 고유한 몸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주체성을 구성하는 반면, 살은 주체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편재성을 갖는다.
그에 따르면 살은 곧 세계를 구성하는 환원적인 성분이면서 존재의 원소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형태들과 마주치면서 원초적인 지각활동을 가져올 수 있는 신체적인 장치며 세잔에 있어 그런 원초적인 원소는 회화적인 채색을 통해 마치 카멜레온의 빛 깔과 같이 주변부의 색채들과 어울린다.
세잔은 "세상이 '색'으로 되어있다"고 했고 메를로 퐁티는 "세상은 '살'로 되어있다"고 했다. '색'을 느끼고 '살' 자체를 느끼는 것이 이 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이다.
대수욕도, 1900~1905 ⓒ폴 세잔(Paul Cézanne)
세잔이 말년에 그린 <수욕도> 시리즈들은 바로 인간세계와 원초적인 어울림과 자연과 의 조화, 일체를 표현하며 삶의 유토피아를 자연스럽게 그려내고 있다.
이 그림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우리가 보기에 맨 왼쪽에 있는 여자의 모습이다. 얼굴은 얼굴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뒤의 짙은 나무 그늘에 스며들어 있다.
그리고 벗은 몸은 전체적으로 갈색 빛이 흐르는 가운데 짙은 녹색이 칠해져 있다
세잔의 회화적 시선이 얼마나 깊은가를 알 수 있다.
이 녹색은 나무에서부터 주어진 색채이다. 그리고 갈색 빛은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황금 색 빛을 받고 있다.
황금색의 땅마저 나무들의 녹색을 받아 푸르게 빛나고 있다.
세잔의 그림은 구도는 정적으로 가지만 색의 리듬을 통해 동적인 내면을 표현하고 있다.
메를로-퐁티: “우리는 자연인(homme naturel)처럼 우리 자신 속에 그리고 사물 가운데, 또 우리 자신 속에 그리고 타인 속에 자리 잡을 것이다. 즉 일종의 교차에 의해 우리는 타자가 되고 또 한 우리는 세계가 되는 곳에 위치하게 될 것이다."
"철학은 자연인과 같이 자기로부터 세계로, 타자에게로 나아가는 곳에 의지한다.”
▪ 알베르 글레즈, <입체파 화가에 대하여> , 1912
▪ 조광제, <의식의 85가지 얼굴-후설 현상학의 주요 개념들>, 글항아리, 2008
▪ 윤대선,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적 신체주의와 세잔의 예술세계’ <미학> 제56집, 2008.012, 9-52쪽
2. 메를로-퐁티의 객관주의 비판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의 도입부에서 경험론(empiricism)과 지성론(intellectualism)을 주된 비판의 표적으로 삼고 있다. 그는 자신의 몸의 현상학을 본격적으로 펼치기에 앞서 이전까지 서구 사회에서 암묵적이면서도 거의 예외 없이 유일한 두 형태의 가능한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받아들여져 오던 경험론과 지성론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는 작업을 한다. 이 예비 작업은 메를로-퐁티의 입장에서 논리적으로 정당하게 요청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의 현상학이 드러내고자 하는 현상이 경험론을 통해서도, 지성론을 통해서도 환원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하기 때문이다. 지성론과 경험론은 모두 현상을 마치 대상(object)처럼 바라보는 객관주의(objectivism) 적 태도를 전제한다. 객관주의적 태도를 전제하는 사고방식 안에서 엄밀한 의미의 현상의 장(phenomenal field)은 들어설 틈이 없다. 객관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세계의 모든 부분은 대상으로 가득 차 있다. 설사 세계 안에 빈 공간이 상정된다고 할지라도 그 공간 역시 일종의 대상으로서만 파악된다. 객관주의적 입장에서 현상이란 대상들의 나타남의 총체로서, 그 자체도 일종의 대상으로 파악된다. 반면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은 현상을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현상 자체로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바로 그럴 때에만 드러나는 현상적 장의 고유한 면모를 포착하려 한다. 그런데 그러한 현상학적 작업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일상적인 자연적 태도는 객관주의적 태도와 아주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그 둘 사이를 뚫고 들어가 현상학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마치 양성자와 중성자를 분리시키는 것처럼 힘들기 때문이다. 메를로-퐁티가 경험론과 지성론을 비판하는 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은 바로 그 두 지론의 압도적인 지배력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독자를 이끌려는 처절한 노력이자 나름의 배려로 읽힐 수 있다.
먼저 경험론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도록 하자. 경험론은 말 그대로 인간과 세계를 학문적으로 설명하는 데 있어서 경험을 가장 원천적이고 일차적인 진리의 근거로 삼아야 한다는 지론이다. 메를로-퐁티의 경험론 비판의 첫 번째 주된 논점은, 이러한 경험론의 기본적인 기조로부터 반드시 따라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경험론 전통은 원자적 경험의 존재를 핵심 전제로 받아들여 왔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경험이 한꺼번에 주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 예를 들어 의자에 앉아서 교실 안을 바라보면 나의 시각적 범위 안에 수많은 감각 경험이 한꺼번에 들어온다. - 경험론에 따르면 경험은 원자적인 요소로 분석될 수 있으며, 그 원자적 요소들이 조합되어서 총 제적인 경험이 주어진다. 경험의 가장 기초적인 단계로 생각되는 감각을 예로 들어보면, 경험론은 빨간색, 파란색, 회색, 특정한 진동의 소리 등 나에게 주어지는 원자적이고 순수한 인상(impression)들이 감각을 통해 주어져 감각 경험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거나, 빨강, 파랑 등 성질(quality)이라고 불리는 대상의 속성이 감각을 통해 얻어지고 서로 결합하여 경험을 산출한다는 등의 설명을 내놓는다. 인상이든 성질이든, 경험론은 경험 요소들이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최소 단위의 인자로 분해될 수 있다고 상정하며, 최소 단위들의 결합으로 부분이 구성되고 부분의 결합을 통해 전체가 구성된다는 식의 그림을 그린다. 메를로-퐁티는 경험의 전체론적, 공시적, 구조적 특성에 주목하면서 그러한 경험론의 원자적 사고를 비판한다. “내가 보는 양탄자 위의 빨간색 부분은 오직 그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와의 관계 하에서만 빨갛다. 그것의 질은 빛의 역할과의 관계 안에서만 드러나며, 따라서 공간적 배치 안에서의 한 요소로서만 드러난다.” 메를로-퐁티가 보기에 원자적인 빨간색 인상이나 빨간색 성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빨간색에 대한 감각은 전체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주어진다. 전체적인 감각 경험에 이미 빨간색의 감각은 들어와 있다. 그러나 빨간색은 현재 주어지는 경험 전체와 경계가 흐릿하면서도 분명히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가지는 역설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최소단위의 부분으로 환원될 수 없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현재 주어진 전체적 경험 그대로 직시하면 원자적 인상이나 질은 경험론의 공상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메를로-퐁티의 경험론 비판의 두 번째 주된 논점은 경험론이 지각을 외부 자극에 상응하는 기계적·생리학적 반응의 조합으로서 설명한다는 것이다. 상응 가설(constancy hypothesis)이라고 불리는 이 지론은 원자적 경험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작용한다. 상응 가설에 따르면 인간의 감각기관은 최소 단위로서의 미세한 외부적 자극들을 개별적으로 수용하도록 구성되어 있으며, 그 미세한 개별 자극들에 각기 상응하는 미세한 개별 반응들이 존재한다. 그러한 반응들이 종합된 결과가 일련의 움직임, 행동, 행위이다. 메를로-퐁티가 상응 가설을 반박하는 하나의 길인 주의(attention)에 대한 묘사를 살펴보자. 상응 가설이 옳다면, 감각 경험의 모든 요소는 주의를 받기 이전에 이미 감각된 상태로 존재해야 한다. 주의는 무의식에 물러나 있거나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하던 감각 요소에 빛을 비추는 행위이다. 여기에서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다. 주의는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으나 관심받지 못하던 것에 새로이 가늠쇠를 맞출 뿐이다. 주의의 빛은 이미 주어진 감각 요소들 중 어디에든 비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이고 자유롭다. 메를로-퐁티는 상응 가설의 이러한 결론이 경험의 변화무쌍하고 창조적인 측면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주의는 이미 감각이 주어지고 난 다음에 사후적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이 아니라, 주어지는 감각 자체를 동시적으로 변형시키는 행위이다.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단지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것들을 더 명료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형상(figur)으로 취함으로써 그것들 안에서 새로운 표현을 실현시켜내는 것이다.” 주의를 통해 그전에는 불분명한 지평으로서 주어져 있던 것에 상대적으로 견고하고 분명한 범위를 설정하고 그것을 돌출되게 만듦으로써 우리의 감각기관이 수용하는 자극 자체가 새로이 설정되게 된다. 이러한 창조적이고 동시적인 형상 설정 행위가 있기 이전의 상태를 가정하고, 흰 백지처럼 자유로운 그 상태에 존재하는 감각 자극과 그것에 상응하는 반응을 상정하는 일은 실제로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와 과정을 자의적으로 상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경험론 반박의 두 주요 논제를 살펴보았지만, 메를로-퐁티는 경험론이 어떤 의미에서 반박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원자적 경험이 존재하지 않고 상응 가설에 들어맞는 개별 자극과 개별 반응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박해도, 경험론은 언제나 새로운 자극-반응 종합 모델을 제시하여 경험의 전체론적, 공시적 특성이 원자적 존재자들을 통해서 구현되는 과정을 새로이 설명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 그러한 시도는 어떠한 반박이 제기되더라도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이렇듯 어차피 경험론을 완전히 반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해 봤을 때, 경험론 반박의 보다 근본적인 층위를 이뤄야 하는 것은 경험론이 가진 객관주의적 사고방식 자체에 대한 비판이다. 경험론은 기본적으로 경험에 주어지는 대상들이 외재적이고 객관적인 대상으로서 존재한다고, 대상이 누구의 시선도 받지 않고 즉자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그러한 객관주의적 사고방식의 한계는 그러한 객관적 사물들의 운동과 결합을 아무리 정밀하게 추적해도 결코 주체의 경험 자체가 구성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경험론의 객관주의적 접근 방식을 통해 경험의 근사치에 해당하는 설명을 제시할 수는 있다. 그러나 현재적이고 총체적인 경험에서는 불분명한 배경과 또렷한 형상이 흐릿한 경계를 사이에 두고 공존하며 그것들이 매 순간 교차하고 서로 교체되며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구성요소들을 특정하여 제시할 수 없다. 따라서 명확하게 기술되고 한정되어 있는 객관적인 대상적 요소들로 경험 자체를 구성해 내려는 시도는 언제나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경험에 남겨놓을 수밖에 없다. 경험론은 “감각을 사물로서 소개하지만, 경험은 정확히 그곳에서 의미 있는 전체로서 이미 나타난다.” 경험론은 끊임없이 경험적 실재에 대한 근사적 설명을 제시하지만 결코 현상 자체에는 이르지 못한다.
다음으로 지성론에 대한 메를로-퐁티의 비판을 살펴볼 것인데, 경험론에 대한 비판을 이미 수행한 이상 지성론 비판은 더욱 쉽다. 메를로-퐁티가 보기에 지성론은 뒤집어진 경험론이기 때문이다. 지성론이란 자극에 의미를 부여하여 지성적인 정보로 바꾸어내고 그것들로부터 경험을 구성해 내는 선험적인 지성적 주체가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지성론에도 다양한 유형이 있지만, 유형에 상관없이 대체로 경험론의 객관주의적 전제를 그대로 공유한다. 외부적인 감각자극이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경험이 주체의 산물이라는 극단적 지성론이 있는데, 그 경우 객관적이고 즉자적인 존재자로 상정되었던 경험적 대상이 지성적 주체로 완전히 대체된다. 주체는 어떠한 시선도 받지 않은 채 깨끗한 공간 안에 자기 동일적으로, 자기 자신 자체로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러한 극단적 지성론은 과학적 영역에서 영향력이 크지는 않고, 조금 더 완화된 형태의 칸트 식의 초월적 지성론이 본격적인 영향력을 갖는다. 완화된 지성론에 따르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자극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러한 자극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맹목적이다. 주체는 맹목적인 자극에 의미를 부여하고, 나름의 범주 하에 그것을 조직화하여 의미를 가진 경험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우리는 이중의 객관주의적 사고를 목격한다. 먼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자극이 경험론에서와 마찬가지로 객관적인 대상으로 상정된다. 또한 지성적 주체 역시 외부 자극을 초월하는 존재, 객관적인 존재로서 세워진다. 사실 주체를 객관적이고 즉자적인 존재로 세워놓는다는 측면에서 보면 극단적 지성론이나 완화된 지성론이나 마찬가지이다. 주체 이외의 다른 존재를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완화된 지성론에서 역시 주체는 아무런 시선도 필요 없이 절대적으로 존립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따라서 지성론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반박 불가능할 것이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성론은 언제나 경험의 근사에 해당하는 설명을 제공할 뿐이지, 경험 자체를 드러내는 데에는 결코 다가가지 못할 것이라는 점도 예상할 수 있다.
메를로-퐁티가 지성론을 비판하는 한 사례인 판단에 관한 논의를 살펴보도록 하자. 지성론에서 판단은 “지각이 가능하기 위하여 감각이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모자와 옷으로 가려진 형체를 보고 그 속에 사람이 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 우리는 두 개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언제나 두 개의 이미지를 얻는 데도 불구하고 하나의 물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 감각을 넘어서는 판단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판단은 외부적 감각자극과 분리된 상태에서 순수 지성의 힘으로 수행되는 하나의 독립적인 논리적 수행 작용이 된다. 그런데 그럼으로써 역설적으로 감각자료는 오히려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객관적으로 주어진 자료에 대해 사후적으로 객관적인 판단을 가하는 것이 바로 올바른 지각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 지각을 살펴보면 감각과 판단은 경계가 흐릿한 채로 혼재되어 있어 둘을 명확히 구별할 수 없다. 착시효과는 감각에서 비롯하는가, 판단에서 비롯하는가? 종이 위에 그려진 정육면체는 서로 다른 두 부분이 번갈아가며 돌출되어 나타난다. 가만히 정육면체를 바라보고 있으면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두 관점 중 하나의 관점을 취하게 된다. 그러다 잠시 후에 전혀 다른 두 번째 관점이 퍼뜩 나타나기도 한다. 이제 나는 두 관점이 모두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나의 마음대로 관점을 바꿀 수는 없다. 여전히 나는 하나의 관점에서 정육면체를 바라본다. 그러다가 어느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관점이 번뜩하고 나타난다. 지성론은 변하지 않은 객관적인 감각자극에 대해 지성이 서로 다른 두 판단을 내린 것이라고 해석하겠지만, 실은 이미 감각 수준에서 무언가가 변화하고 있다. 변화하는 감각은 판단을 변화시키고, 변화하는 판단은 또다시 감각을 변화시킨다. 이 관계는 원초적이다. 실제로 지각을 그대로 들여다보면 감각과 판단은 상호 침투 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그 둘의 상호작용은 명확히 도식화하여 분석될 수 없다. 감각과 판단을 상호 독립적인 과정으로 구분하려는 지성론은 “지각된 대상의 존재와 공존의 방식을 보지 못하며, 시각적 장에 퍼뜩 떠오르고 비밀스럽게 그 부분들을 묶어내는 삶을 보지 못한다.” 그리하여 지성론은 세계를 설명하는 이론이 되려고 하나 어디까지나 실제의 삶과 동떨어져 있는 이론으로 남는다.
저자 : 이 충녕, 서울대학교 철학과
https://guthaben.tistory.com/4
3. 교감 이론으로서 메를로퐁티의‘상호 엮임’
권 택 영
교감 이론으로서 메를로퐁티의‘상호 엮임’
영어영문학』제57권 4호 (2011) 581-98
https://oak.go.kr/repository/journal/18628/NRF005_2011_v57n4_581.pdf
I. 서론
뇌 영상 기술이 발달하면서 최근의 뇌 과학자, 에델만(Gerald M. Edelman)
은 인간의 인지를“기억된 현재”(remembered present)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Edelman, Wider than the Sky (2004)
뇌의 수많은 뉴런 가운데는 우리의 경험을 저장하는 부분이 있는데 우리가 사물
을 인지할 때 의식은 이 저장소를 반드시 거친다. 아니 오히려 뉴런의 경험이
의식에 투사되는 것이 대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다. 그러므로 의식은 결코 새
로운 것을 순수하게 인지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뇌의 뉴런은 몸이요 물질인
데 이 부분이 인지에 개입된다는 것이다. 의식은 이미 몸이 경험한 것을 되새김
할 뿐, 매번 새롭게, 순수하게, 대상을 인지하지 못한다. 이런 발견은 첫째,의
식이 어딘가에 존재하여 순수하게 사유한다는 데카르트 이후 절대 코기토에 대
한 반론을 낳는다. 그리고 둘째, 몸의 경험에 의한 인지는 인간뿐 아니라 뇌를
가진 다른 동물에서도 나타난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은 동물과 마
찬가지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몸의 기관을 발달시켜왔다는 다윈의 진화론이
설득력을 얻는 것이다. 에델만은 이것을 뇌의 진화라는 의미에서“누럴 다우니
즘”(neural Darwinism)이라 부른다.1
1 에델만의 저서들 가운데“기억된 현재”는 Wider than the Sky (2004), p. 4, “뉴럴 다위니즘”(neural Darwinism)은 Bright Air, Briliant Fire (1992), p. 82 참조
인간의 인지가‘기억된 현재’라는 발견은 사실 전혀 새로운 가설이 아니다. 의식에 대한 과학적 접근은 이미 19세기 말, 미국 실용주의 철학의 시조로 불리는 제임스(William James)의 뇌 과학에 근거한 심리학이나,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아 뇌 과학자로 출발했던 프로이트의 기억의 방식, 그리고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의 상호 관련성에서 실험되고 입증되었다. 그렇다면 최근 인지 과학 혹은 뇌 과학은 과거의 것과 무엇이 다르고 왜 다시 부상하며 이런 논쟁과 현상 학은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특히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이 몸 담론으로서 부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사상을 압축한 용어인‘상호 엮임’(intertwining)이란 무슨 뜻인가.2
2 “상호 역임”은 그의 책, The visible and the Invisible의 제 4장, “The Intertwinging—The Chiasm”(pp.130-55) 참조. 양자물리학에서 주체와 대상이 분리 되지 못하듯이 인간과 사물이 서로 엮이는 것을 의미함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전통 형이상학을 전복하고 인간과 환경의 상호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가. 본 논문은 이런 관점에서 메를로퐁티의 몸 담론 이 사물과의 교감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 그의 대표적 저서, 『지각의 현상학』 (Phenomenology of Perception)과 후기 사상을 압축한『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 는 것』(The Visible and the Invisible)을 중심으로 살펴보려한다. 의식의 물질 성을 발견하고 의식은 끊임없이 흐른다고 보았던 제임스는 동생인 헨리 제임스 의 심리적 사실주의 뿐 아니라 모더니즘의 문학 기법인“의식의 흐름”에큰영 향을 주었다. 현재 논의되는 메를로퐁티의 심리학은 예술뿐 아니라 인간과 환경 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가?
II. 몸과 의식의 상호 관련성
우리는 흔히“물이 흐린데도 바닥이 보인다”라고 말한다. 또 기차를 타고 가 면서 창밖을 내다보면 경치가 뒤로 물러난다.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나 인데, 내가 움직이고 있는데, 밖의 경치가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같은 현상으로 배를 타고 가는 사람은 해안선이 물러나는 것을 보고 해안에 서있는 사람은 배가 멀어지는 것을 본다. 보는 자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자신은 움직 이지 않고 상대방이 움직인다고 믿는다. 이런 지각은 왜 일어날까. 지각은 객관 적인 진리에 의존하지 않고 주관적이다. 그것은 기차를 탄 나와 경치사이의 상 호관계 속에서 태어난다. 의미는 상황 속에서, 주체의 위치 속에서, 태어난다. 그렇다면“물이 흐린데도 바닥이 보인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 말은 “물이 맑아야만 보인다”는 명제를 진리로 가정하기 때문이다. 물이 맑을 때 매 끄럽고 아름답게 보이는 바닥도‘진짜’가 아니고 물이 흐릴 때 보이는 바닥도 실체는 아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둘 다 물에 의해 굴절된 바닥이다. 그렇다면 물이 마르고 드러나 보이는 바닥이 실체인가. 그것조차 실체라고 보기 어렵다. 우리의 시각을 담당한 홍채는 빛과 상호연관 속에서 특정 색깔만을 흡수하고 반 사하기 때문이다. 내가 바닥을 바라 볼 때 그 울퉁불퉁한 바닥도 나를 응시(gaze)한다. 지각은 이런 상호관계 속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물이 맑으 면 바닥이 보이고 흐리면 보이지 않는다고 단정 짓는다. 그렇다면 이런 단선적 인“의식”(consciousness)보다는 상대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몸, 즉“본다” (vision)는 감각이 더 정확한 게 아닐까. 메를로퐁티는 우리의 인식을 지배하고 있는 데카르트적 코기토를 반박하면서 이성의 투명성과 순수성에 반기를 들고 감각을 이성보다 우위에 놓는다. 데카르트 이후 계몽주의에 대한 회의론은 20세기 초에“현상학”이라는 범주 로 후설로부터 비롯되고 하이데거로 이어진다. 후설은 우리의 인식은 언제나 대 상을 향한 것이기에 지향성(intension)을 지닌다고 하여 추상적이고 보편적 이 성에 의심을 표시했다. “지향성”이란 인지가 순수하고 절대적이 아니라 대상과 의 상호 관련 속에서 태어나기에 이성은 대상(사물)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는 가 설이다. 이성의 지향성에서부터“사물그자체로 돌아가자”(Return to the things itself)는 구호가 태어난다. 하이데거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존재와 세 상으로 확장한다. 그리고 주체는 흙에서 태어나 세상(문명)에서 살다가 다시 흙 으로 돌아가는 유한한 존재자(Dasein)로서 무한한 존재(Being)의 일부이다. 그 러므로 존재는 잠깐 왔다가는 한정된 시간과 장소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고정 불변의 이성을 상황, 즉 시간과 장소 속에 놓아 잠정적이고 변화하는 과정 으로 본 것이다. 인간이 흙에서 태어나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만물 가운데 하나 라면 사물성과 뗄 수 없이 연결된다. 그리고 모든 인식이 대상을 향한다는 후설 의 사유는 하이데거에 와서‘세상속의 존재’(being-in-the world)라는 하나의 연결된 끈으로 표기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사물성(thingness)을 인정하면서도 인간과 사물을 구별하 였다. 그는“오직 인간만”이 다른 사물과 달리 문명의 세상을 창조하고 죽어서 야 흙으로 돌아간다고 말함으로서 열어놓았던 존재의 심연을 다시 인간중심적 시선으로 닫아버리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둘을 존재(Being)의 일부로 보았고 몸의 사물성을 인정함으로서 투명한 이성을 거부하였다. 이것이 그가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말하고 시 (poetry)로 본 이유다. 언어는 투명하지 못하다. 그 속에 공간, 즉 사물을 지니 고 있기에 대상을 객관적으로 지칭하지 못하고 해석의 여분을 남긴다. 흙으로 빚은 항아리는 예술의 기원을 잘 설명해준다. 항아리는 가운데가 텅 비었기에 존재의 집이요, 거처요, 시다. 그리고 예술이야말로 인간이 사물을 지니고 사물로 돌아간다는 것을 드러내기에 진리(truth)다. 이런 견해는 전통 형이상학을 거부한 점에서 아감벤(Giorgio Agamben)에 이르기까지 후세 비평가들에게 논 쟁의 화두를 남겼다. 현상학은 이처럼 존재론(ontology)과 맞물려있으면서 학자 에 따라 조금씩 방향이 다르다. 그렇다면 메를로퐁티의 경우는 이들과 어떻게 다른가.3
3 하이데거는 그의 글, “The Thing”179면에서 오직 인간만이 살아서는 세상만을 섬 기고 죽어서야 사물이 된다고”말했다. 아감벤은 The Open 에서 하이데거의 인간과 동 물의 이분법을 비판했다. 아감벤은 하이데거가 존재를 세상과 땅 사이에 위치시키고, 인 간과 문명은“드러냄”으로 동물과 사물은“감춤”으로 나누었는데 그런 이분법으로 어떻 게 서구 형이상학을 넘어선다는 것인가라고 반문한다(71-73).
주체를 독자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대상과의‘관계’속에서, 세상과의 상호관 련 속에서 사유한 점은 메를로퐁티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는 심리학자였 다. 그러기에 이전의 현상학자들 보다 마음(혹은 의식)이 연출하는 인지와 기 억, 그리고 유아기 심리에 의존했다. 인간의 삶에서 유아기는 사유이전, 언어이 전의 몸으로 존재하는 시기이다. 그는 인간의 심리에 총체적 패턴이 있다고 믿 은 게슈탈트 심리학을 비판하고 심리가 마음 어딘가에 숨어있어 그대로 드러나 는 실체가 아니라고 말한다. 메를로퐁티의 상대적, 상호 주관적 관점을 잘 이해 하기 위해, 그에게 영향을 끼친 베르그송의 기억에 관한 이론, 양자물리학의 패 러다임, 그리고 제임스 심리학을 잠깐 살펴보자. 제임스가『심리학의 원칙』 (The Principles of Psychology)에서 분석했듯이 의식은 숨어있는 실체가 아니 라 몸에 새겨진 앞선 경험에 의해 지배받는다. 의식은 뇌의 뉴런에 새겨진 경험 들의 영향을 받아 재구성되는 현재로서 시간의 흐름을 따른다. 그러므로 몸의 바탕 위에서 현재를 인식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마음먹기 달렸다든가. 의식적 배움이라고 믿는 많은 학습의 영역들이 사실은 반복되는 몸의 경험에 의해 새겨 진다는 것이다. 그의 글, 「습관」“( Habits”)은 외국어가 문법이나 구조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자주 그 언어를 현장에서 사용하는가라는 경험의 반복이라 는 것을 알려준다. 같은 맥락에서 중독증 역시 단순히 마음을 바꾸어 먹는 다고 치유되는 것이 아니다. 긴 시간 동안 몸에 새겨진 습관을 다른 습관으로 대치하 는 상당한 기간의 반복적 실천이 필요한 것이다.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도 마찬가지다. 여기에서 물질은 뇌의 기억과 경험을 간직한 뉴런이다. 인간의 기억은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행위에 의해 몸에 새겨진 근원적 기억이 있고 그보다 과거를 회상하는 회고적 기억이 있다. 습관적 기억 은 대부분의 동물들이 생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기본으로 먹이를 구한다든다 위 험을 피하는 데 필수적인 기억이다. 이것은 반복적으로 행해지면서 얻게 되는 지각이다. 이에 비해 회상적 기억은 진화된 동물인 인간만이 지닌 더 높은 의식 의 부분이다. 이 부분에 의해 인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의식하고 자의적인 인식에 의해 사회적 동물이 되어 언어와 문명을 창조한다. 이처럼 19세기 말부 터 20세기 초에 일어난 진화론과 초기 심리학은 최근에 와서 뇌 영상과학 (fMRI) 기술의 발달로 현대 인지 과학이나 기억에 관한 이론에서 재인식되고 있다.
제임스의 심리학과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 그리고 뇌 영상과학과 연결된 인지 과학 등, 최근 담론에서 경험주의가 부상하고 이들 이론이 문학작품의 이해와 창작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뇌영상과학 이전에 양자 물리학의 관점에서 관계론을 개발했다. 우리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관측할 수 없다. 양자물리학에서 양자는 빛을 비추면 질량이 줄어든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는 질량을 잴 수 없다. 질량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는다. 양자와 빛 사이에는 서로 바라보고 보이는 응시가 존재하기에 객관적 수치를 재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시각(몸)은 이미 양자라는 유동체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메를로 퐁티가 보는 사물의 진실이요 인지의 현상이다. 여기에서 하이데거보다 한층 더 관계성을 강조한 존재론적 심리학(ontological psychology)이 태어난다. 심리학에서 출발하기에 그는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을 몸과 인지의 문제로 바꾸어 생각한다. 그는“인지하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4
4 Merleau-Ponty는 Phenomenology of Perception, 22면에서 인지는 기억이라고 말 하고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Past is not imported into the present perception by a mechanism of association, but arrayed in present consciousness itself,”이로부터 이 책에서 인용은 괄호 속에 면수로 표기함.
메를로퐁티는 Phenomenology of Perception, 22면에서 인지는 기억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다.“과거는 연상의 구조에 의해 현재의 지각 속으로 고스란히 수입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재 의식 그 자체 속에 배치되어 있다." 과거의 경험은 어딘가에 깊숙이 묻혀 있다가 현재 시점으로 운반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재 의식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어떤 것에 대한 지각은 항상 어떤 다른 것에 대한 지각 속에 있고 이 지각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늘 변화한다. 빛과 양자의 질량이 서로 상호 관계에 있듯이, 주체는 사물을 대상화하여 생각할 수 없다. 메를로퐁티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물이 오히려 주체를
지배한다고 말한다. 사물은 기억에서 물질이요 뇌의 뉴런이라는 몸이다. 몸이 의식의 사유를 좌우한다는 예를 그는 회화예술에서 찾는다. 우리는 이차원의 평면 위에 그린 입방체 그림에서 3차원의 깊이를 본다. 평면에서 입체감을 느낀다. 원근법을 즐겨 사용한 르네상스시대 그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무가 늘 어선 가로수에서 우리는 깊이를 본다. 메를로퐁티는 그의 글, 「시각과 마음」 “( Eye and Mind”)에서 이런 깊이를 사유의 한가운데에 있는“신비한 수동성” (a mystery of passivity)이라고 말한다(175). 왜 2차원의 평면 위에 그려진 입방치에서, 가로수의 그림에서, 3차원의 깊이를 보는가. 시각은 이성적이 아니다."본다"라는 감각은 몸의 경험을 그대로 반영한다. 현실에서 우리는 입방체와 가로수를 볼 때마다 원근의 깊이를 경험하기 때문에 그림 속에서도 그 깊이를 본다. 그렇다면 시각이 대상을 조망한다고 믿었던 이분법적 근대 원근법은 몸이라는 감각에 의한 것으로 새롭게 해석된다. 몸이 이성의 사유를 지배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또 다른 예는 영화다. 영화는 스크린이라는 평면 속에서 실제 삶을 재현한 눈속임 수가 아니다. 가장 정확히 육화된 사유, 혹은 몸의 사유를 보여주=는 예다. 연속적인 사진들을 찍어 빨리 돌리면 눈은 사진들에서 움직임과 깊이
를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각은 의식과 몸(혹은 사물들)의 상호관계성 속에서 태어나고“지금”이라는 시간성과“여기”라는 장소의 지배를 받기에 끊김 없이 변한다.(161). 지각은 독자적인 의식의 사유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각은“지각에 관한 사유”이다(44).
존재는 사물도 아니고 이데아도 아니다. 아니 이 둘 다이다. 그러기에 메를로 퐁티는 존재를 무로 보았던 사르트르를 비판한다. 존재는 무(nothing)가 아니라 몸이다. 사물(things)이다. 개인은 몸에 새겨진 경험의 눈으로 사물을 본다. 그러기에 대상에 대한 감각은 주관적이고 상황의 지배를 받는다. 경험하기, 과정, 시간성은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을 규명하는 단어들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화가는 몸을 가지고 그림을 그린다고 말하고 몸을 가장 정확히 천착하려 한 화가로 세잔을 꼽는다. 세잔은 빛의 각도에 따라 매 순간 달라지는 경치를 그대로 화폭에 옮기려 했다. 그는 원근법 대신에 감각의 사물성을 최대로 재현하려 했고 눈에
비친 모든 사물 속에서 원통형을 보았다. 재현은 화가의 응시와 사물의 응시가 만나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하면 인지는 몸 때문에 넘치고 재현은 사물의 응시 때문에 넘친다. 물질과 의식의 상호관계성 속에서 의미가 탄생하기에 이성은 독자적으로 대상을 판단하지 못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늘 대상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가. 그 것은 우리가 몸을 주체로부터 분리하여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감각을 이성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기에 우리는 대상을 객관화하려 한다. 그림은 바로 이것을 짚어주고 우리에게 감각의 위력을 일깨워준다. 하이데거가 언어를 시로 보았듯이 메를로퐁티 역시 미학을 중시한다. 그는 현상학을 예술과 같은 차원에서 정의했다. 즉, 현상학적 세상은 이미 실존하는 존재의 명징한 표현이 아니고, 현상학은 이미 존재하는 실재의 사유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예술처럼”진실을 존재 속으로 부각시키는 행위에 관한 철학이다. 그가 예술과 철학적 사유를 같게 본 것은 하이데거와 다르지 않다. 메를로퐁티는 몸을 사물성으로 확장할 뿐 아니라, 의식의 기능을 몸의 경험으로 대체했다. 그렇다면 이성과 언어의 자리에 몸의 경험을 대체하고 어떻게 개인과 타인 사이에 사회적 교감이 가능할까.
III. 사회적 교감의 매개체로서 몸
의식의 순수성과 독자성을 거부하고 의식보다 몸의 경험을 중시하는 메를로 퐁티는 데카르트적 코기토를 반대하면서 타인과의 관계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한다. 인간이 타인과의 관계를 맺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몸을 통해서이다. 몸은 개인을 타인과 관계 맺게 하는 매개이다. 이런 예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악수”라는 행위이다. 악수는 언어보다 더 강력하다. 그 이유는 서로 상대방의 손을 잡는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악수를 할 때 우리는 내가 남의 손을 잡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나도 남에 의해 손이 잡힌다. 만지고 만져지는 몸의 접촉은 언어보다 더 정직하고 강하다. 인간이 가장 간절한 소망을 기도할 때 두 손을 합장한다. 이것 역시 한 손이 다른 나머지 손을 만지고 만져지는 상호 엮임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이렇듯 만지고 만져짐은 사회적 행위에 속한다. 서양인들은 만나는 반가움이나 헤어지는 아쉬움을 표현할 때 언어보다 서로 가볍게 상반신을 끌어안는 행위로 대신한다.
이런 몸짓은 언어보다 더 절실하게 마음을 전달한다. 언어 속에는 몸이 들어있다. 단어의 의미란 선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의미는 말과 동시에 태어난다. 우리는 타인을 만날 때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하겠다고 미리 생각한다. 그러나 만난 현장에서 의미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말은 타인과의 접촉 속에서, 문맥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주체를 지배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지향성이고 이런 욕망에 의해 의미는 오직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서로 바라보고 바라보 이는 상호 엮임 때문에 언어는 매번 의미가 새로워진다.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메를로퐁티에게도 언어는 이미 그 자체가 시요 예술이다. 바라보고 보이기에 언어는 의식에 속한 것이 아니라 사물에 속한다. 이런 맥락에서 메를로퐁티는“언어는 몸의 기억”이라고 말한다. 순수 코기토가 없듯이 순수 언어는 없다. 몸이 경험한 것은 언제나 의식에 이미 각인되어 기억하고 대상에 의해 보이기 때문에 상황을 떠난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인은 영어를 중국식으로 발음하고 일본인은 일본식으로 발음하고 인도인은 인도식으로 발음한다. 모국어가 먼저 몸에 새겨진 탓이다. 문화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문화는 자국의 문화 위에 덧칠해지기에 한국인은 한국식 민주주의를 낳는다. 이런 의미에서 메를로퐁티는 한나라의 언어를 타국어로 순수하게 그대로 번역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언어는 순수한 소통의 수단이 아니다. 타인과 소통을 가능해 하는 것은 몸이라는 친근한 경험들이고 이것이 주체와 세상을 연결한다. 언어는 더 이상 도구가 아니고 수단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세상이나 다른 인간들과 하나로 묶는 친근한 존재와 심리적 연결고리의 드러냄이고 증명이다.
Language is no longer an instrument, no longer a means; it is a manifestation,
a revelation of intimate being and of the psychic link which unites us
to the world and our fellow men. (228)
메를로퐁티의 경우, 언어와 이성은 실제 경험의 영역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사물과 세상과의 관련 속에 기억하고‘말하는 이성’다. 그러므로 몸은 공간과 뗄 수 없는 공간의 일부분이다. 그는“몸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가 본 거처럼 특정 세상과 연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원칙적으로 공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 속해있다"라고 말한다. 몸이 공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몸을 소유하고 있다. 몸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공간, 즉 환경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메를로퐁티에 오면“나는 몸으로
존재한다”(I am my body)로 바뀐다. 그렇다면 개인의 창조성은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 플라톤과 칸트는 예술 작품의 창조는 개인의 고유한 천재성에 의 해 이루어진다고 믿었다.5
5 플라톤은 시인 Ion을 통해 시의 형식보다 시인의 영감을 강조했고, 칸트는『판단력 비판』에서 시인의 천재성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시의 형식을 동시에 강조했다.
아도르노는 그의 글, 「문화산업: 군중기만으로서 계 몽」“( Culture Industry: Enlightenment as Mass Deception”)에서 예술작품을 후기 산업사회의 군중문화(mass culture) 속에서 이해했다. 후기 자본사회에서 작품은 더 이상 고유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군중의 상품으로 존재한다. 매스미 디어에 의해 자본의 시녀가 된 창작품은 공동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군 중의 환호 속에서 존재하기에 개인의 독창성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132-34). 아도르노의 후기 산업사회 문화논리 이전의 메를로퐁티는 예술작품을 몸, 혹은 사물성의 맥락에서 이해한다. 주체는 대상을 객관화할 수 없기에 재현은 불가능하다. 재현 속에는 이미 자신의 응시와 대상의 응시가 상호 엮여 있고, 이미 그려진 그림에도 화가의 응시와 보는 관객의 응시가 작동하기 때문 이다. 객관적 재현을 거부한 그는 당연히 사실주의를 거부한 인상파 화가 세잔 을 선호하였다.
세잔은 시간에 따라 빛의 양이 달라지고 그러기에 대상의 재현이 달라진다는 것을 화폭에 담으려 했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경치를 그렸다. 빛의 응시, 나무의 응시는 화가의 응시와 함께 시간마다 장소마다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을 포착하려 했다. 주체 속의 사물 성과 대상의 사물성이 만나는 지점을 포착하려 했던 세잔은 만물을 입방체로 보아 둥근 사과 속에서도 각진 외형을 보았다. 당대에 인정받지 못한 그의 그림이 후세에 인정받는 것에 대해 메를로 퐁티는 그의 글, 「세잔의 의심」(“Ce ´zanne’s Doubt”)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잔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자 기다려야 했던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를 승인해야만 했기 때문이다:“그것이 자신의 손끝에서 출현하는 그림들에 그가 의문을 던진 이유이고, 자신의 캔버스를 향해 던지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매달렸던 이유다. 그것이 그가 그림 그리기를 끝내지 않은 이유이다. 우리는 결코 우리들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의 사상이나 자유를 정면으로 마주 볼 수 없다”.
우리의 과거가 현재 속에 있듯이 우리의 현재는 미래 속에 있다. 메를로퐁티에게 주체와 세상은 끊임없이 흐르는 과정이다. 예술작품은 몸과 의식, 사물과 인간 사이의 상호 관련성에서 태어난다. 이런 맥락에서 몸의 응시는 사회적이다. 하이데거는 언어가 곧 시라고 말했지만 메를로퐁티는 몸이 곧 예술이라고 말한다(174). 시는 몸으로 존재한다. 칸트는『판단력 비판』에서 예술은‘무목적의 목적성’을 가지고 있기에 독자에게 가장 정확한 판단력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논리는 설득을 목적으로 하기에 주관적이다. 그러나 예술은 작품이라는 형식을 매개로 독자 스스로 경험에 의해 의미를 얻기에 목적성이 없다. 칸트는 예술이 감
각과 의식이 만나는 곳에서 이루어지기에 순수한 의식의 산물인 논리와 다르다고 믿었다. 그러나 메를로퐁티에 오면 논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논리 역시 몸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응시를 벗어난 순수 이성은 존재하기 않기에 논리 역시 넓은 범위의 예술 속에 포함된다. 메를로퐁티는 예술의 기능을 아리스토텔레스의 감정 정화나 칸트의 판단력 연습이 아니라 화가와 대상이 서로 만나 소통하는 장이라고 보았다. 응시는 시각 속에 존재하는 몸의 경험이고 이것이 사회적 교감의 기능을 한다. 악수와 포옹은 사회적 소통에서 몸이 말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말 또한 상황 속의 일부요 몸에 의해 매개되기에 끝없는 과정으로서
소통한다.
IV. 환경과 인간의 교감
전통적으로 듣는다는 것은 본다는 것보다 정확하지 않은 것처럼 인식되어왔다. 서구에는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라는 격언이 있고 동양에는“백 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百聞이 不如一見” ( )라는 속 담이 있다. “본다”는 것이 곧장“앎”이라는 지식과 연결된 것이다. 메를로퐁티에게 본다는 것과 듣는다는 것은 둘 다 감각의 영역이기에 다르지 않다. 시각 속의 몸인 응시가 작동하는 한 본다는 것은 언제나 대상의 응시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인식을 좌우하는 매개체가 된다. 그러므로“우리가 본 것을 정확히 아는 것만큼 더 어려운 일은 없다"라고 그는 말한다. 6
6 영어원문: “Nothing is more difficult than to know precisely what we see”Italics in original).
한 쪽 팔을 절단한 환자가 그쪽 팔이 가렵다고 느낀다면 어떻게 본다는 것이 진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몸에 없는 팔, 보이지 않는 팔을 가렵다고 느끼는 것은 팔이 있었던 과거의 경험이 심리에 영향을 주고 바로 이 경험이 믿음을 갖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팔의 기억이 몸에
새겨져서 현재에도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다는 것보다 과거의 경험과 그 기억이 더 앞지른다. 팔은 기억이고 몸의 의도성이다. 의도성은 이성이 아니라 욕망이다. 우리는 이성이 아니라 몸으로 생각한다. 사유의 자리에 ”바로 지금 여기“에서 무언가를 하려는 욕망(desire)이 들어선다. 메를로퐁티에게 이성은 의도성, 몸의 응시, 그리고 욕망이다(consciousness is not a matter of I think, but I can. 없는 팔이 가려운 것처럼 의식은 몸을 매개로 작용하고 심리는 물리적 현상을 앞지른다. 팔이 없는 데 있는 것처럼 느끼는 감각은 기억이요 의지요 믿음이 이성적 판단보다 우선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이처럼 대상을 인지하는데 몸이 이성 보다 앞지른다면 전통적 인지과학에 대한 수정이 불가피하게 된다.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을 인지 과학의 입장에서 논의 한 드레이퍼스(Hubert L. Dreyfus)는 그의 글, 「메를로퐁티와 최근 인지 과학」 “( Merleau-Ponty and Recent Cognitive Science”)에서 인지과학이란“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든지 간에 뇌와 마음을 연구하는 학문”(145)이라고 정의한다. 인지는 과거의 경험이 몸에 새겨지고 그것이 현재 상황에 최대로 대응하면서 이 루어진다. 다시 말하면 끊임없는 경험의 기억과 현재 상황의 접촉이 인지의 핵 심이다. 예를 들면 학습의 훈련은 행동들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를 중시한다(143). 학습은 재현이 아니라 상황에 감각적으로 대응하는 지속적 행위를 통 해 이루어진다(138). 그러기 위해서는 성공에 대한 보상의 기억, 실패의 쓰린 경 험들이 반복되어 몸에 새겨지도록 만든다(205). 경험을 축적한 감각은 사유하는 의식 이전으로 의식보다 앞지른다. 그러므로 경험하는 현장이 중요하고 시간과 공간이 중요하다. 몸은 외적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인식을 바꾸기 때문이다. 드레이퍼스에 따르면 새로운 인지과학은 세상과의 상호접촉 속에서 일어나는 몸의 경험과 과정을 중시한다. 이런 맥락에서 메를로퐁티는 철학자의 질문은 인지의 확실성이 아니고, 현미 경처럼 현상을 들여다보고 객관적 통찰로 의식을 깨우치는 방식도 아니라고 말 한다.7
7 Merleau-Ponty, The Visible and the Invisible, p. 101, 이로부터 이 책에서 인용 은 괄호 속에 1968: 면수로 표기함.
현상은 질문의 방식으로 의심의 가능성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현상 그대 로의 모습, 그것이 끊임없는 변화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에게 인간은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끊임없는 질문들 가운데 하나이다. 인간자체가 질문이라면 그가 창조하는 대상도 질문에 속한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그 자체로 예술의 완 성품인 자연에 몰두해야한다. 자연은 사물성과 육화된 의식의 신비한 만남이기 때문이다. 세잔이 일곱 개의 색깔들로 알려진 빛에서 열여덟 개의 색깔들을 보 았듯이 혼돈이라는 감각의 세계에 몸을 던지는 것이 예술가이다. 그는 자신이 소통한 자연을 독자와 나누어 맛본다. 그 나눔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독자의 특성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닌다. 예술은 개인의 독특한 사적인 세계를 공 적인 세상으로 확장하는 매개이다. 심리가 곧 몸이라면 심리학은 자연의 사물성 과 뗄 수 없이 연결되고 심리학은 자연과학의 영역과 겹쳐진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심리를“물질적이고 생물학적인 현상이다”라고 말한다. 심리 그자체가 몸이고 이미 세상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기에 환경을 떠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다. 인간과 환경은 몸이라는 하나의 에너지로 연결된다(1968: 143). 보는 것과 듣는 것의 차이가 없듯이 만지는 것 역시 감각의 영역으로 차이가 없다. 모든 감각은 환경과의 상호엮임 속에서만 존재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바 라보고 동시에 보인다. 만지고 동시에 만져진다. 숲에 가면 나만 나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무도 나를 바라본다. 눈이 보듯이 사물도 본다. 예를 들어 장님은 지팡이로 본다. 그의 지팡이는 몸의 연장이다. 사물인 지팡이는 그의 감각이 된다. 지팡이는 인간이 물질과 소통하는 가장 흔한 예이다.
The blind man's stick has ceased to be an object for him, and is no longer perceived for itself; its point has become an area of sensitivity, extending the scope and active radius of touch.. . In the exploration of things, the length of the stick does not enter expressly as a middle term.
물질성, 혹은 사물 성은 마음의 일부분이기에 그는 마음이 사회적일 뿐 아니라 생물학적이라고 믿 는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살(flesh)이라는 개념이다. 몸은 살이다. 인간과 동물 이 고통을 느끼듯이 살은 만물의 공통된 몸이다. 그리고 전도성(reversibility of flesh)을 지닌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 동시에 이루러지는 것처럼 만지는 행위 는 만져지는 것과 동시에 일어난다. 전자 없이 후자는 없다. 이 전도성이 키아 즘(Chiasm)이다. 그러므로 살은 우주를 구성한 4가지 요소이다. 물, 공기, 흙 그리고 불의 네 가지 요소들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끝없이 변하면서 만물을 구 성한다(1968: 139). 심리학에서 출발했기에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은 유아기 경험을 중시했다. 몸 의 체험인 이 시기 경험은 성인이 되어 타인과 소통하는 바탕이 된다. 몸의 경 험에 뿌리내린 자아이기에 인간은“자연적 자아”(natural self)이고“심리학은 자연과학”이다.8
8 Merleau-Ponty, The World of Perception, p. 10.
어린시절 몸의 경험은 성인이 되어 타인과 소통하는 근원이 되 기에“사유란 사유하는 자연”이다(414). 사유는 몸의 사유이다. 그렇다면 몸과 자연은 같지 않은가. 순수의식이 아닌 체화된 의식(embodied mind)이 사유한 다면 (순수)자의식 역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아와 세상을 변 증법적 관계로 본 헤겔식의 자의식(self-consciousness)은 다음과 같이 수정된 다.
세계에 대한 의식은 자의식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 그들[세계와 의식]은 철저히 동시적이다. 자신을 의식하기 때문에 나에게 세계가 있다. 그리고 세계를 갖는 한, 자신으로부터 나를 감출 수 없다. 의식이전에 세계를 소유하는 것은 사유이전 의 코기토로만 분석되도록 남아있다.
The consciousness of the world is not based on self-consciousness: they are strictly contemporary. There is a world for me because I am not unaware of myself; and I am not concealed from myself because I have a world. The pre-conscious possession of the world remains to be analysed in the pre-reflective cogito. (347)
헤겔은 자아와 세상을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 연결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자의식은 투명하다. 이와 달리, 메를로퐁티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아닌 키아 즘의 관계로서 인간과 환경의 동등한 공시성을 강조한다. 몸을 통해 서로 보고 보이는 관계, 만지고 만져지는 관계이기에 소통은 끊임없이 여분을 남긴다. 몸 은 몸을 통해서만 분석된다. 그러기에 오히려 주인은 의식이나 자의식이 아니라 사물성인 세상이다. 세상은 인간보다 먼저 있었고 인간이 죽은 후에도 지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주체는 세상의 일부요, 세상 밖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없다 (502). 하이데거가 세상과 존재를 끈으로 잇듯이 메를로퐁티 역시 세상과 주체 를 끈으로 연결한다. 그러나 그는 주체보다 세상이 더 우선된다는 것을 강조한 다. 우리는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몸에서 태어나 다시 몸으로 돌아가는 살 의 일부분이다. 몸은 피와 살로 이루어지고 이 살은 인간이 다른 만물과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다. 그러기에 살에 의해 주체와 세상은 상호 키아즘을 형성한다. 자연을 대표하는 색깔들 가운데 붉은 색의 꽃을 보면 우리는 에너지가 분출하 는 느낌을 받는다. 파란 하늘이나 바다를 보면 서늘하고 냉정한 느낌이 오고 푸 른 숲을 보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감각과 자연의 색깔은 이처럼 서로 교감한다. 물은 차고 불은 뜨겁다. 공기는 부드럽고 흙은 단단하다.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 들과 우리의 감각을 구성하는 요소는 이렇게 서로 교감한다. 우리는 자연 속으 로 던져진 존재이다. 자연은 우리 밖에 있지만 주체의 중심인 몸은 이를 알아챈 다. 몸은 자연이 서로 피를 나눈 형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기억이 현재의 눈으 로 과거를 읽듯이 인간은 자신의 유적지(유아기)를 되돌아본다. 그러므로 객관 적이고 절대적인 재현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출생을 경험하지 못하고, 자신의 죽음을 경험할 수 없으면서 어떻게 탄생 이전에도 있었고, 죽음 이후에도 지속 되는 세상을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 우리는 세상 위에서, 세상 밖에서, 세 상을 대상으로 볼 수 없다. 이미 세상의 부분으로 태어나고 세상으로 되돌아가 기 때문이다.
V. 결론—공헌과 한계
메를로퐁티의 통찰은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 특히 현대 지성사에서 『지각의 현상학』은 그의 위치를 확고히 다진 저서다. 그의 사상이 최근 다시 부 상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의 소통 뿐 아니라 인간과 환경의 교감, 인지과학, 그 리고 미학에 대한 새로운 정의 등, 최근의 관심사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 몸 담론을 선도하는 마크 존슨(Mark Johnson)은 그의 글, 「무엇이 몸을 만드는가」“( What Makes a Body?”)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몸을 문화적으로만 한정했다고 비판했다(166). 그리고 몸은 사유의 대상이 아니고 과학적인 관찰의 대상조차 아니라고 말한다. 1980년대 문화연구를 선도한 페미니즘, 푸코의 신역 사주의, 그리고 버틀러의 퀴어(Queer)이론에서 몸은 정치적 이념이 각인되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몸은 의식을 좌우하는 감각이고, 마음의 주인이고, 살과 피를 나눈 사물의 형제다. 몸은 의미와 사유의 탄생 뿐 아니라 외부와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통로이다(163). 그러나 미국 몸 담론은 윌리엄 제임스를 비롯하여 존 듀이, 피어스 등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의 전통에서 감각을 의식보 다 우위에 두었다.9
9 존슨은 몸을 살과 피의 생물학적 몸, 생태학적 몸, 경험하는 현상학적 몸, 사회적 몸 으로 구분했다. 그리고 조지 라코프(George Lakoff)와 함께 언어가 몸의 경험과 밀접하 다는 것을 주장한다. “감각기관의 경험 패턴들이 어떻게 우리들의 구체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들을 구성하는가.”예를 들어 몸의 동작과 위치에서 언어가 파생되는 예를 보자. “옳다”라는 단어는 오른 쪽을 가리키는 몸의 위치에서 나온다.
메를로퐁티는 감각을 이성보다 우위에 놓아 이성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를 전복했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정치적 차별을 수정하는데 공헌했다면 현 재 진행되는 그에 대한 해석, 그리고 재해석들은 사회적 교감,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과의 교감에 집중된다. 그는 심리학자로서 프로이트, 라캉과 차별을 견지하 면서 정신분석은 존재론이 되어야한다고 믿었다. 무의식은 어딘가에 고여 있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을 잇는 매개라는 것이다(183). 그러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으로 자신의 사상을 완성시키지 못했기에 방법론의 부재를 남긴다. 그리고 유아기 몸의 소통이 성인이 되어 대상과 교감하는 근원이 된다고 믿은 인성에 대한 순수한 믿음은 다른 심리학자들의 불만을 낳기도 했다.10
10 예를 들어 라캉은 누구보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애도했다. 그러면서도 추도사, “Merleau-Ponty: In Memoriam”에서 이런 아쉬움을 표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통찰한 현상학적 경험론은 최근의 인지과학이나 뇌 과학 등과 함 께 생태 패러다임을 이끄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주제어: 메를로퐁티, 현상학, 하이데거, 교감이론, 환경, 키아즘
인용 문헌
Agamben, Giorgio. The Open: Man and Animal. Trans. Kevin Attell. Stanford:
Stanford UP, 2002.
Adorno, Theodor. “The Culture Industry: Enlightenment as Mass Deception.”
Dialectic of Enlightenment. New York: Verso, 1979.
Bergson, Henri. Matter and Memory. Trans. Nancy Margaret Paul and W. Scott
Palmer. New York: Dover Pub. 1895, 1910.
Dreyfus, Hubert L. “Merleau-Ponty and Recent cognitive Science.” The Cambridge
Companion to Merleau-Ponty. Eds. Taylor, Carman and mark B. N. Hansen.
Cambridge: Cambridge UP, 2005. 129-50.
Edelman, Gerald. M. Bright Air, Brilliant Fire: On Matter of the Mind. New York:
Basic Books, 1992.
______. Wider than the Sky: the Phenomenal Gift of Consciousness. New Haven:
Yale UP, 2004.
Freud, Sigmund. “Project for a Scientific Psychology.” Standard Edition. Vol. 1.
281-397.
______. “Remembering, Repeating and Working-Through.” Standard Edition. Vol.
12, 145-56.
______. “A Note Upon the ‘Mystic Writing-Pad.” Standard Edition. Vol. 19. 227-
34.
Heidegger, Martin. “The Thing.” Poetry, Language, Thought. Trans. Albert
Hofstadter. New York: Perennial Classics, 2001. 163-80.
______. “The Origin of the Work of Art.” Poetry, Language, Thought. 17-76.
______. What is Called Thinking? Trans. Fred D. Wieck and J. Glenn Gray. New
York: Harper & Row, 1968.
Hoeller, Keith ed. Merleau-Ponty and Psychology. New Jersey. Humanities P,
1993.
James, William. “Habit.” Pragmatism: A Reader. Ed. Louis Menand, New York:
Vintage Books, 1997. 60-68.
______. The Principle of Psychology. Cambridge: Harvard UP, 1891.
Johnson, Mark. “What Makes a Body?” Journal of Speculative Philosophy.
Kearney, Richard and David Rasmussen, eds. Continental Aesthetics: Romanticism
to Postmodernism. New York: Blackwell, 2001.
Knapp, James A. and Jeffrey Pence. “Between Thing and Theory.” Poetics Today
24.4 (2003): 641-779.
Lacan, Jacques. “Merleau-Ponty: In Memoriam.” Merleau-Ponty and Psychology.
Ed. Keith Hoeller. New Jersey. Humanities P, 1993. 73-81.
Merleau-Ponty, Maurice. Phenomenology of Perception. New York: Routledge &
Kegan Paul, 1962.
______. “Eye and Mind.” The Primacy of Perception. Ed. James M. Edie. Trans.
Carleton Dallery. Evanston: Northwestern UP, 1964. 159-90.
______. “The Child’s Relations with Others.” The Primacy of Perception. Ed.
James M. Edie. Trans. William Cobb. Evanston: Northwestern UP, 1964. 96-
155.
______. “Cezanne’s Doubt.” Sense and Non-sense. Trans. Hurbert L. Dreyfus and
Patricia Allen Dreyfus. Evenston: Northwestern UP, 1964, 9-25.
______. The Visible and the Invisible. Ed. Claude Lefort. Trans. Alphonse Lingis.
Evanston: Northwestern UP, 1968.
______. The World of Perception. Trans. Oliver Davis. New York: Routledge,
2004.
권 택 영
교감 이론으로서 메를로퐁티의‘상호 엮임’
영어영문학』제57권 4호
(2011) 581-98
https://oak.go.kr/repository/journal/18628/NRF005_2011_v57n4_581.pdf
위 논문은 OAK 국가 리포지터리에 등재된 논문으로 오픈 액세스가 가능합니다. https://oak.go.kr/repository/journal/18628/NRF005_2011_v57n4_581.pdf
국립중앙도서관은 오픈액세스 기반의 학술정보 유통 체계를 알리고 국내 오픈액세스 학술정보의 접근과 이용을 촉진하기 위하여 OAK 국가리포지터리, 학술지저작권안내시스템(KJCI)을 운영하고 있다.
Open Access Korea는 세계적인 오픈액세스 운동을 지지하고 국내 지식정보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과 공유를 추구하는 지식협력체이다. 국가 및 공공기관, 도서관, 대학, 연구소, 학회 및 출판사 등 오픈액세스를 지지하는 누구나 OAK에 참여할 수 있다.
Open Access는 학술정보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과 이용이라는 개념으로 출판과 동시에 누구나 무료로 접근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경제적, 법률적, 기술적 장벽을 해소하는 학술커뮤니케이션의 유통 패러다임이다.
4. 메를로-퐁티와 세잔
메를로-퐁티의 지각 개념 (주+객 공존)
지각하는 주체와 지각된 세계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순환 체계다. 메를로-퐁티의 철학은 모든 원리에 앞서 내가 세계에서 경험하는 사실을 현상으로서 있는 그 대로 기술하려는 시도다. 이것이 바로 지각의 현상학의 의미다.
메를로-퐁티는 경험에서 순수 대상에 앞서 이미 지각하는 주체[주관]을 전제한다. 다만 지성주 의의 주체와 다른 점은 세계와 직접 접촉하는 자연적 주체이며, 신체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주 체, 즉 몸-주체다. 이때의 몸(le Corps)은 정신+신체, 즉 ‘육화된 의식’이다. 메를로-퐁티의 지각 개념이 애매한 이중성을 띠는 이유는 이처럼 지각의 주체를 주-객 요소 가 공존하는 몸으로 간주하는 데서 생긴다. 우리는 대상과 의식으로 분리되기 이전에 이미 원 초적, 야생적 세계를 만난다. 날씨가 어떤 가를 살피기 위해 바라보는 하늘이 아니라 별 생각 없이 넋 놓고 바라볼 때의 하늘은 이미 나의 몸에 들어와 있고 난 하늘에 들어가 있다. 따라 서 주체와 대상의 경계를 구별하기란 어렵다. 메를로-퐁티는 세계가 아직 객관적 세계가 아니 며, 주관은 아직 반성적 사유가 아닌 곳, 다만 세계와 주관이 서로의 속으로 흘러가는 원초적 현상적 장으로서 지각 영역을 탐구한다.
메를로-퐁티의 몸 철학
메를로-퐁티가 인간 존재를 몸이라 규정할 때, 인간의 몸은 세계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있어 서 가장 중심에 자리한다. 여기서 몸은 무엇보다 즉자적 대상이 아니라 자신에게 속한 나의 몸이다. 지각 단계에서 몸은 인식하는 몸이고 지각의 참된 주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환각지다. * 환각지; 팔 다리를 잃은 사람이 여전히 그것이 있는 것처럼 느끼고 행동하는 현상. 이는 사고를 당하기 이전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배운 ‘몸 도식’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 준다. 몸이 세계와 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일종의 주체임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한편 지각된 세계는 오직 주체에 대해서만, 주체와 관련해서만 존재한다. 세계는 나의 몸과 무관하게 즉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지금의 세계는 나의 몸에 한해서만 가능하다. 세계-에로-존재etre-au-monde는 세계에 속해 있지만, 세계에 매몰되지 않고, 세계를 전유하 고자 세계를 향해 다가가는, 인간의 실존적 운동을 가리킨다. 반면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 는 그러한 운동성이 결여되어 있다. 실제 지각 경험에서 감각적 성질들은 소리, 색, 감촉 등으로 따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공감 각적으로 병존하며 하나의 현상으로 통일된다. 시 지각은 우리에게 색, 빛, 형태 등만을 제공 하는 게 아니라 경도, 질감, 무게 등의 촉각적 정보도 함께 제공한다. 동일한 붉은 색을 보더 라도 대상의 질감에 따라서 그 붉은 색에 대한 나의 느낌은 현저히 달라진다. 따라서 붉은 색 일반은 실제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 관념이다. 지각은 전-반성적 활동이다. 게슈탈트 심리학에서 말하는 전경과 배경은 지각에서 총체적으로 한꺼번에 주어져야 하고, 그것들을 지각 대상에서 분리하는 것은 지성의 종합, 즉 반성에서만 가능하다. 지각에서 발견된 전경을 배경으로부터 분리해내 선명하게 주제화하는 것은 지각 이 후 반성의 소임이다. 이처럼 미완성이고 열려 있는 지각의 종합 터전 위에서 지성의 종합이 움튼다면, 내가 거기 있음(존재)이야 말로 사유의 근거다. 맑스의 영향 몸 철학에서 몸의 주체적 측면이 강하게 부각되었다면, 후기로 가서는 몸의 물질적 측면이 부 각된다. 이러한 이행이 일어나는 계기는 메를로-퐁티가 몸-철학에서 궁지를 깨달았기 때문이 다. 왜냐하면 몸-주체도 어쨌든 코기토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코기토와 다르기는 해도 몸 이 주체로서의 역할을 맡게 되면 불가피하게 지각함과 지각됨이라는 이분법이 슬며시 뒷문으 로 들어오게 된다. 메를로-퐁티는 주체-객체의 구분을 아예 없애기 위해 비인칭적 방식으로 존재를 파악하기 시작한다. 지각함과 지각됨 대신에 봄과 보임이 나오고, 봄은 나와 세계가 원초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나[몸]과 세계는 동일한 재질stuff로 이루 어져 있기 때문인데, 이를 메를로-퐁티는 살이라고 부른다. (세잔은 모든 것이 색으로 이루어 져 있다고 보았다. 세잔이 말하는 색과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살은 거의 같은 개념이다) 살 존재론은 「눈과 정신」(1961)과 유작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1964)에서 심도있게 다 루어진다. 메를로-퐁티는 이미 "지각의 현상학"에서 사물을 만지는 왼손을 오른손이 만질 때, 몸의 주- 객 이중성을 논하였다. (만짐의 만짐) 내 오른손이 사물들을 쓰다듬고 있는 내 왼손을 만질 때 성립되는 이 같은 만짐의 만짐을 통 해 만지는 주체가 만져지는 것들의 계열로 편입되어 사물들 속으로 내려간다. 그 결과 만짐은 마치 사물들 안에서 이루어지듯 세계 한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만짐의 만짐이 발생하는 현상학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이것이 가능한 존재론적 토대로까지 관심을 확장한다. 그런데 몸의 경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만짐과 만져짐의 교환만으로는 전 우주적 확장은 성립될 수 없다. 따라서 봄의 가역성[역할 바꿈]이 요구된다. 앞서 설명하였듯이 만짐과 봄은 하나로 통일되어 지각된다. 게다가 메를로-퐁티는 시선의 쓰 다듬음을 설명하면서 시각과 촉각의 밀접한 연관성을 제시한다. 그러니까 보는 자는 보이는 것들의 계열에 편입될 수 있다. 보다 완전한 가역성을 위해서는 이것으로 충분할 수 없고 보 이는 것이 보는 자의 위치에 들어와야 한다. "눈과 정신"에서 이러한 봄의 가역성에 대해 구 체적 논의를 펼친다. 쉽게 말해 나의 눈은 보면서 동시에 보인다. 이로부터 우리의 몸이 세계 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따라 나온다. 세계는 몸과 동일한 살로 구성되어 있다. 살로 된 존재자는 존재의 원형이며, 주-객을 담지하는 것인데, 우리의 몸이 감각하는 자이면 서 감각되는 자라는 이중성은 우리의 몸이 살로 된 존재자의 변양이기 때문이다. 살의 독특한 성격을 지칭하기 위해서 메를로-퐁티는 ‘원소’element를 사용한다. 개별자와 관 념 사이에 있는 존재. 그것은 주체와 대상에 형상을 부여하는 자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 능케 하며 그것들의 기반이다. 그러나 몸을 떠나서는 세계의 존재양식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살이 몸과 연관되어 나타나기에 구체적 시공간을 떠날 수 없다. 이는 하이데거의 존재 처럼 다른 존재자들과 무관한 초월적 성격이 아님을 의미한다. 나는 내가 본 푸름 속에서 그가 본 푸름을 알아챈다. 여기에는 타자의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보는 자는 나도 아니고, 그도 아니며 익명적 가시성이 우리 모두에게 거주하기 때문이다. 가시적인 것은 비가시적인 것을 함축하고 있다. 메를로-퐁티는 비가시적 관념은 가시적인 것 이 보여주기도 하고 감추기도 하는 내적 뼈대라고 말하면서 관념은 감각적인 것과 대립이 아 니고 그것의 안감/깊이라고 정의했다. 메를로-퐁티의 살 존재론은 존재가 자기 내부에 존재와 무, 능동과 수동 등 양가성을 품고 있 으면서 그것들을 단순한 종합이나 대립이 아닌 접합이자 분리의 애매한 상태로 간직한다. 6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존재의 구조=가시적인 것+비가시적인 것) 메를로-퐁티는 봄이라는 작용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종합으로 설명한다. 봄에는 언 제나 이미 주체의 봄을 넘어서 그 이상의 것을 함축한다. 따라서 내가 가시적 세계에서 보는 것은 그 이면에 세계와 내가 함께 의미를 이루고 있는 존재 전체가 함축되어 있다. 의미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의 모순이 아니다. 보이는 것 은 그 자신이 보이지 않는 것의 뼈대를 지닌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의 은밀한 보완적 상대방이어서 보이는 것의 내면에서만 나타난다. (...) 보이는 것의 잠재적 초점이며, 보이는 것 내면에 새겨져있다. 본다는 행위는 그 자체로 이미 본질에 접근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반성적 사유는 불필요하 다. 가시성이 가시적인 것과 봄이 포개질 때만 가능하다고 할 때 봄은 빈자리이자 부재이며 가시적인 것과의 비가시적 포개짐이다. 여기서 부재란 단순히 없음이 아니다. 오히려 부재 자 체가 하나의 기호일 수 있다. (the man I love, 침묵의 목소리) 메를로-퐁티는 가시적인 것의 본질은 엄격한 의미에서 비가시성의 안감을 가지는 것이며, 그 안감을 어떤 부재로서 현전하 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위에서 말했듯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을 모두 포괄하는 존재 는 항상 가시적인 것으로부터 드러난다. 메를로-퐁티는 공간이 갖는 깊이에 주목했다. 그런데 깊이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가시성을 떠받치는 잠재적 영역[존재]은 깊이, 살 혹은 비가시성 개념을 통해 제시된다. 세잔은 생성을 그린다. 결과로서의 산물이 아니고 그것이 가식계로 출현하는 과정을 보여준 다. 이 출현 과정을 알아볼 수 있어야 그의 작업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여기서 보이지 않 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잔여물과 같다. 그는 본다는 지각 행위가 결코 확실성을 가질 수 없다 는 결론을 내린다. 비가시적인 것은 단순히 가시적인 것의 반대가 아니다. 이는 가시적인 것을 가능케 하는 잠재 적 토대와 같다. 비가시적인 것은 감추어진 방식에도 불구하고 어느 지각에나 존재한다. 가시 적인 것을 지탱하는 내적 가능성. 가시적인 것은 심연에서 들어 올려진 화석이며, 비가시적인 것의 가능성과 잠재성으로부터 솟아나는 결정체이다.
세잔의 회화
세잔은 초상화 한 점을 그리기 위해 모델에게 150번의 포즈를 요구했다. 한 번의 붓 터치를 위해서도 몇 시간이나 고민했다. 왜 그랬을까? ‘자연에 의거하여’ 그림을 그리고자 했기 때문 이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기존의 지식, 선입견, 일상적 태도를 철저히 비워내야 했을 것이다. 자연에 의거한 작업은 인상주의와 세잔의 작업을 비교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인 상주의는 대상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을 포착해서 그 순간 대상이 지각에 드러나는 대로 그렸 다. 따라서 짧은 붓 터치와 보색에 의한 강조를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인상주의의 작업은 캔 버스 내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이는 오히려 대상이 갖는 실재성, 즉 중량감을 포기하는 것이 다. 세잔은 대상이 갖는 실재성을 포기하지 않고 훨씬 다양한 색채를 통해 대상이 가진 풍부 함을 그리려고 했다. 회화 표현의 의미는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다. 마티스는 자신이 매순간 무엇을 그릴지 결정하 는 것은 자신의 몸이고, 자신이 무엇을 그리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그림을 그리는 과정 속에 서 확인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표현 행위를 통해서만 우리는 존재의 숨겨진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런데 표현 행위를 통해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작업 이전에 화가는 대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가? 메를로-퐁티는 그저 막연한 흥분과 모호함에 휩싸여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작 품의 의미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애초에는 주체에게도 대상에게도 의미는 존 재하지 않았다. 다만 창조적 표현을 통해 새롭게 의미가 생성되는 것이다. 메를로-퐁티가 강조하는 애매함은 두 항의 종합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어느 곳에 도 속하지 않음을 유지해야 한다. 따라서 전통적 이분법을 무력화하면서도 동시에 모두를 포 괄해야 한다. (articulation처럼 이어주면서도 분리해야 하는 것) 이것을 회화에서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 회화에서 표현은 이미 가지고 있는 도구(선, 색)를 통해 수행할 수밖에 없 다. 그러니까 화가는 색과 선이라는 보이는 것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의미를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화가의 소임이다. 메를로-퐁티는 기존의 체계를 인정하면서 이 체계 안에서 새로운 의미로 나아갈 가능성을 모색하자고 제안한다. 화가의 봄은 대상과 완전한 합치를 이 룰 수 없고, 내가 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의미를 이미 가지고 있다. 따라서 간극을 인정하면 서 의미가 또 다른 의미를 낳을 수 있도록 열린 체계로 그려야 한다는 의미다. 그림은 단순히 대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며, 기존 언어로 완전히 그려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세잔은 이러 한 존재의 애매성을 그대로 두면서 새로운 의미가 생성될 수 있도록 그렸다. 그의 유화작품에 등장하는 대상들은 두꺼운 색[감각]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 또 대상의 윤곽 은 흐릿하지만 대상이 갖는 중량감이 존재하며, 다양한 시점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단일한 초월적 시점으로 모든 것을 포섭할 수 없는 구조다. 후기의 수채화도 다양한 색의 겹침으로 이 루어져 있고, 어떤 부분은 미완성의 상태로 많은 공백을 담고 있다. 이처럼 세잔이 선적 원근 법[단일 시점], 선명한 윤곽선 등을 거부한 것은 대상을 인위적으로 재구성하는 근대적 시각과 절연하기 때문이다. 근대 회화에서 데생을 중요시한 것은 형식과 체계에 대한 강조다. 이 경우 선이 1차적이고 색
은 2차 작업에 속한다. 그러나 윤곽선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관념에 불과하며 기하학에 속한다. 윤곽선도 알고 보면 보이지 않는 면의 일부다. 윤곽선은 대상이 이미 지성에 의해 객 관화 된 이후에 포착되는 것이다. 세잔은 색을 겹겹으로 덧칠함으로써 부정확한 경계선을 만 들어 형태가 잠정적으로 구성되도록 했다. 메를로-퐁티는 색을 선에 우선하는 것으로 보면서 세잔을 색채주의자로 해석한다. 화가가 깊이를 지닌 세계를 회복하려면 선과 형태가 색의 결 과로 주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색만이 가시적 세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색을 칠함에 따 라 그와 동시에 윤곽선이 주어진다. 이처럼 우리는 그림에서 명확한 경계선을 찾기 힘들기 때 문에 그림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대상이 드러나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는 세계와 의식이 끊임 없는 변증법을 통해 서로를 구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봄과 그림에 의한 보임이 계속 유 지될 때에만 어렴풋이 의미가 드러난다. 세잔은 친구와의 대화에서 색이 뇌와 우주가 만나는 장소라고 표현했다. 화가와 대상이 원초 적 차원에서 어떻게 만나는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색이다. 따라서 화가의 봄은 그때마다 색을 통해 표현되며 여러 색이 뒤섞인 그림은 일관성이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존재를 가장 잘 포 착한 그림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중적 시점의 원근법은 식탁 위에 놓인 정물들을 불안정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그런데 이는 우리들이 하나의 시점으로 대상들을 왜곡, 축소, 확장하여 그린 그림들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 이다. 세잔의 체험된 원근법에 의한 화면구성은 회화가 수학적 비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지각 경험에 의한 것임을 의미한다. 이처럼 그림의 깊이는 과학적 비례나 원근법에 의한 환영으로서가 아니라 사물의 만질 수 있 는 두께, 즉 사물의 근원인 색에 의해 만들어지는 가장 실존적 차원으로서의 원초적 깊이로 이해되어야 한다. 낯설게 그려지기를 원했던 것은 그가 보았던 대로의 사물들 자체였고, 세잔은 단지 그것들이 말하고자 원하는 것을 표현했을 따름이다. 이처럼 세잔은 그저 자연에 순응하는 것뿐이었다. 세잔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에포케를 통해, 원초적 경험으로 돌아가 우리에게 낯선 광 경을 제공한다. 그러나 사물 자체가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어쨌든 작가의 작업이다. 회화 는 실재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표현하는 문제다.
유충현
메를로-퐁티와 세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