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왜 무너졌는가?
필자 정병석은 광주일고, 서울상대 무역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주립대학원 경제학석사와 중앙대 경제학 박사 학위 소지자다. 1975년 제17회 행정고시를 수석으로 합격하고 30년간 노동부에서 근무하고 차관을 지낸 경력의 소유자다. 왜 어떤 나라는 가난하고 어떤 나라는 잘사는가? 무엇이 차이를 만드는가? 단일 민족으로 같은 문화와 언어를 가진 남한과 북한이 왜 경제력에서 엄청난 격차를 보이는가? 500년의 조선이 왜 망했을까? 질문을 던지면 대개 당파 싸움, 쇄국정책, 양반의 수탈 등의 답을 한다. 과연 그런 요인들이 조선을 말하게 했을까? 경제성장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제도이다. 제도는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제도와 저해하는 제도가 있다. 필자는 제도적 요인이 조선 경제 쇠퇴의 핵심 요인이라 결론 내린다.
1652년 ‘반계 유형원’은 전북 부안에서 임진 병자 양란으로 무너진 조선의 제도를 복원하고 나라의 재건 방안을 연구했다. 여러 학자와 관료들이 숙종 영조 등 임금에게 반계수록을 제출하며 출판하여 읽히게 해달라고 상소했으나, 조정은 건의 조차 수용하지 못했다. 100년이 지나고 목판으로 몇 부를 인쇄하여 정부 서고에 비치했을 뿐이다. 조선의 지배층 성리학자들은 농업을 본업으로 중시하고, 상공업은 천한 일이라 생각하며 억압했다. 조선은 신분제로 양천제를 채택하여 천민을 제외한 모든 계층을 양민으로 규정했다. 양인은 백성으로 권리와 의무를 동등하게 부담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반상제로 바뀌어 양반을 제외한 양인과 천민이 모두 상민으로 취급되어 법령이 아닌 관행으로 형성되었다. 조선의 역사 서적은 어디까지가 공인된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개별 연구자의 해석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조선의 제도는 아쉬운 부분이 더 많았다.
서양 무역상 독일의 ‘에른스트 오페르트’가 본 조선은 대륙에 면해 유리한 지리적 여건, 온화한 날씨, 비옥한 토지, 풍부한 광산자원 등 잘 살 수 있는 여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조선은 풀이 잘 자라는데도 염소가 귀했다. 양을 키우지 않아 모직물 생산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다. 또한 조선인은 창의성이나 기량이 부족하지 않으며 기술자가 되기 위해서는 약간의 교육과 격려만 있으면 된다고 보았다. 조선의 수공업은 조잡한 면 제품과 대마 제품인데 저급품이라 평가했다. 제지 기술은 발달해 조선산 종이가 중국이나 일본 것보다 질기고, 품질이 좋다고 평가했다. 그는 1851년 홍콩으로 와, 대상의 꿈을 키워 상하이를 거쳐 1858년 일본이 개항하자 일본을 방문한다. 당시 조선은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프랑스 함대 강화도 점령 사건을 비롯해, 천주교 박해 사건으로 대외 감정이 악화한 상태였다. 1868년 ‘남연군 묘 도굴 사건’은 ‘오페르트‘가 주모자다. 그는 당시 실권자 대원군을 만나 통상조약을 맺으려고 도굴을 계획한 것이다. 그는 조선과 통상을 하려던 서양 상인의 한 사람이다.
중국인의 눈으로 본 조선인은 가난하고 장래가 없는 나라였다. 조선은 활기도 없고 음식도 담백하다. 장비는 형편없으며 화약을 쓰는 장치도 매우 느리다. ’마건충‘은 프랑스를 유학한 청나라 관료로 조선은 땅이 기름지지만 물자가 부족해 유통되지 않으며 불균형이 심하고, 상업이 발달하지 않아 국민이 빈곤하다고 지적했다. 양반이나 백성도 나태해, 토지 개간에 관심이 없고, 백성은 도박을 좋아해서 길거리에서 장기를 즐기는 등, 무지몽매하고 게으르며 무능한 존재로 인식했다. 의식주는 중국에 비해 매우 낙후된 수준이고, 조선은 옛것에 얽매였기 때문에, 국가가 약해지고 재물이 부족하며, 상업의 침체는 조선 정부의 정치적 무능 때문이라 진단했다.
왜에서 돌아오지 않는 조선인들, 특히 도자기 장인이나 인쇄기술자들은 아예 귀국할 뜻이 없었다. 귀국하면 장인이라 천시되는데 일본은 대우받으며, 일할 기회를 얻고 생활도 안정적이었다. 몇 년 사이에 그들은 많은 재물을 모은 사람도 많았다. 1764년 통신사로 간 ’조엄‘은 동래부사와 경상감사를 역임해서 일본을 잘 알던 관리다. 그는 건축 기술이 “동쪽 집 창문을 떼다 서쪽 집에 사용해도 꼭 들어맞는다.”라며 감탄했다. 구황식물 고구마 종자를 구해 부산으로 보냈고, 재배법도 배웠다, 그는 통신사로서는 드물게 좋은 제도나 기술을 배우려는 자세를 보였다. 조선의 사신은 일본의 경제력에 위축되기는 했지만, 일본 유학자의 수준이 낮아 차츰 문화적 우월감을 느낀다. “일본은 과거 시험이 아닌 세습 제도로 관직을 이어받기 때문에, 무식하고 품위가 없는 무사들이 중용된다.” 지적했다. 어쩌면 경제적 격차와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해의식에서 조선의 학문과 문화가 일본보다 낫다는 데에서 위안을 찾고 백성을 배불리 먹이지 못하고 국가안보도 보장하지 못하면서 철학과 시문 실력만 뽐내는 것을 올바른 관료 자세로 볼 수는 없다.
제도가 만드는 경제성장의 차이는 제도는 게임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제도는 “인간이 만든 제약 조건”이라고 ’더글러스 노스‘는 정의한다. 비공식적인 제도의 대표적인 개념으로 문화가 있다. 조선에서는 비공식적인 제도의 역할이 다른 어느 나라 경제에서보다 더 두드러졌다. 조선의 제도는 권력 독점으로 훼손되었다. 관료 집단을 제외한 상공업자나 농민 등 이익집단 간 권력의 분산이나 견제, 균형은 이뤄지지 않았다. 인구 대다수인 농민 상인, 천민을 제외한 소수의 양반 관료 계급에만 권력을 줬을 뿐이다. 그들은 독점적 지배력을 행사하고 다른 계급과는 나누지 않았다. 여기서 창조적 파괴의 공포가 온다. 산업혁명 초기에 철도에 반대한 기득권은 이미 운하로 범선을 이용하던 사업자들로 기득권을 잃을 것에 대비해 격렬히 반대했다. 오스트리아의 집권층은 “우리는 대다수 대중이 잘살거나 독립적으로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어떻게 그들은 지배할 수 있겠는가?”라며 철도 건설을 반대했다.
스스로 묶은 발목으로 조선은 자원과 노동력 생산요소를 동원해 성장을 추구하지 못했다. 제도적 관점에서 보면 착취적이고 폐쇄적인 제도가 조선을 지배하면서 긍정적 요소를 압도해 조선을 쇠퇴하게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조선은 임금과 양반 중앙 관료와 군현 수령, 향족 사족이 함께 지배하던 체재라고 봐야 한다. 특권을 마련하기 위해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법적 근거도 없는 면세 혜택이나 병역의 면제, 신분상의 우의 등 특권을 확대해 신분제를 강화하면 제도를 추진한다.
중국, 조선, 일본의 성장 전략을 보자. 성리학의 원조 중국은 유학 통치 원리를 반영 유교 정치를 펼치지만, 경제는 반전했고 세계와 교역을 했다. 일본은 조선에서 유학을 받았지만, 부국강병을 지향하는 제도 개혁과 영주 간, 봉건을 토대로 농업과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경제를 성장시킨다. 유독 조선이 경제 체제에 약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권 안정 제일주의를 택했다. 고려 말에 전제 개혁과 신분제를 개혁해 노비를 축소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조선 왕조는 관료가 실제적 지배층이었다. 관료제로 중앙과 지방 정부를 통제했고, 신분제로 사회를 장악했다. 조선의 성리학을 숭상하는 관료들이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관료제를 구축했다. 조선의 건국은 무인 이성계와 성리학자 정도전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정도전이 이성계를 설득해 혁명을 일으키도록 촉구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조선 건국은 치밀하게 구상하고 준비한 혁명이었다.
초기 제도의 위기와 개혁의 실패는 임진왜란 전의 개혁론이 헛된 그릇된 이론이라고 ’율곡‘이 비판한다. 임금부터 현행 제도를 고수하는 보수적인 자세가 문제라는 지적이다. “큰 강령은 이루어졌지만, 절목은 갖추지 못했다”. 고 주장한다. 임란 전 명종 10년에 왜선 70척이 침입해 전라도 강진, 진도, 영암, 장흥, 해남 등 서남해안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약탈한 ’을묘왜변‘이 있었다. 전라 절도사와 장흥 부사가 전사하고 막대한 손해를 입은 사건이다. 곧 다가올 대재앙의 징후를 미리 보여준 것인데, 조선은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임란 후 조선의 사대부들은 제갈량의 출사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면서, 류성룡이 쓴 징비록은 읽지 않는다는 행태를 ’송복‘은 비판했다. 당시 사관도 징비록에 대한 평가는 인색했다. “류성룡은 국량이 협소하고 지론이 넓지 못해 붕당에 대한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한 나머지, 자기와 의견이 다르면 조정에 용납하지 않았고 임금이 득실을 거론하면 대항해서 바른대로 고하지 못해 대신 다운 풍절이 없었다. “사관들은 징비록이 자기만을 내세우고 남의 공은 덮어버렸다.”라고 비판했다고 기술했다.
대동법은 조선 최고의 제도 혁신 사례다. 1708년에 완료된 대동법은 백성이 부담하던 공물 납부 의무를 지역 특산물이 아닌 쌀로 납부하도록 변경한 제도이다. 개혁 성공 사례는 ’잠곡 김육‘이란 관료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전조는 백성이 토지를 기준으로 내는 세금이고, 공물은 지방관이 군주에게 내는 예물의 성격을 가진 세금과는 달리 책정되었다. 공물은 중앙 정부가 주와 현 단위까지만, 분정하고 지방관이 조달해 바치라는 취지였다. 관내 개별 민호에게 어떻게 분정할 것인가를 세부적으로 법에 규정하지 않았다. 대동법은 1608년 경기도, 1623년 강원도, 1651년 충청도, 1658년 전라도의 해읍, 1662년 전라도 산군, 1666년 함경도, 1678년 경상도, 1708년 황해도 순으로 다섯 명의 임금 광해, 인조, 효종, 현종, 숙종과 100년이란 기간에 걸쳐 확대 시행되었다.
2024.06.18.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
정병석 지음
시공사 간행
첫댓글 공부 잘 하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사암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