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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의 사격명령은 정당했다. 2006/07/30 14:11 | 추천 0 스크랩 0 |
노근리의 사격명령은 정당했다.
노근리의 문제를 또 꺼내 반미 분위기를 만들어 가려는 순간,제가 아래 글을 곧바로 인타넷에 올렸읍니다. 빨/갱/이들이 제 글에 대해 트집을 잡으려고 인터넷에 확산시켰지만 결국 조용해졌읍니다. 저들의 논리가 미약하여 반미분위기를 뛰우려다 실패한 것입니다.
AP통신이 폭로한 내용의 요지
AP통신이 2006,5.29일 공개한 존 무초 당시 주한미대사의 미국무부앞 서한을 공개했고,한국의 뉴스매체들은 이를 "마치 미국이 몹쓸 큰 일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보도하고 있다. 눈치를 보면서! 모두가 눈치를 살피는 세상, 몇 사람이라도 확실한 말을 해야 할 것이다.
"만약 피난민들이 미군 방어선의 북쪽에서 출현할 경우 경고사격을 받게 될 것이고, 이를 무시하고 계속 접근할 경우엔 총격을 받게 될 것이다."
"ifrefugees do appear north df US lines they will receive warning shots,amd if rhey then persist in advancing they will be shot"
이러한 방침이 제 7기병연대가 노근리에서 학살을 벌이기 하루 전인 1950년 7월 25일 미 8군 고위 참모와 무초 대사를 대리했던 해롤드 노믈 1등서기관,한국관리 등이 참석한 회의에서 결정됐다. 회의는 임시수도 내무장관실에서 열렸다. 미 8군 사령부 주최 대책회의에서는 한국 정부의 내무,보사부 고위 관계자들과 경찰국장도 참석했다. 당시 내무장관은 조병옥, 사회부장관은 이윤영 씨였다.
당시 피난민들에 대한 미군의 공포
일본 " 日本陸戰史硏究普及會"가 발행한 [한국전쟁]은 전집 10권으로 구성돼 있다. 그 중의 일부를 발췌한다.
"당시 많은 피난민이 영동으로 몰려들었다가 다시 황간-대구로 남하하고 있었는데,북괴군과 게릴라들이 그 속에 기어서 사단陣內로 들어왔다. 한 임산부 모양이 수상하여 조사해보니,소형 무전기를 숨기고 있었다.그녀는 미군 포병 위치와 북괴군의 射彈을 조종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고 자백했다.짐 속에는 경화기가 숨겨져 있었고,쌀을 운반하는 바구니 속에는 박격포 탄약이 들어 있었다. 또한 미군 보초가 갑자기 피난민으로부터 사격을 받기도 했고, 지뢰탐지기에 의해 총기를 발각당한 무리들로부터 습격을 받는 등 그야말로 마음을 놓을 겨를이 없었다.보급차량도 종종 습격을 당했고,도로에는 지뢰가 매설돼 있었으며,불시에 미군 포병이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p,252)
"영동의 7.26일 날이 밝아올 무렵,먼저 수백 명에 달하는 피난민이 횡대로 늘어서서 전진해왔다. 그 후방에는 전차 4대와 약간의 보병이 뒤따르고 있었다.피난민들이 진지로 접근해 왔을때,지뢰가 폭발하자 주위 사람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차와 보병이 용서 없이 피난민을 사살했다. 피난민들은 어쩔 수 없이 대오를 정리하고 전진을 계속했는데 지뢰는 또다시 폭발했다. 실은 북괴군이 지뢰를 제거하기 위해 피난민들을 앞세워 희생시키는 만행을 자행했던 것이다.여기서 기병사단은 피난민을 사격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뢰지대를 통과시킬 수도 없는 그야말로 난처한 입장이었다."( pp.254~255)
1970년대에 한국군은 월남에서 어떻게 했나?
한국군은 지금 이라크,티모르 등에 가서 그 주민들과 잘 어울리는 친화력을 보여 세계 언론들의 칭찬을 받고 있다. 베트남 전에서도 그랬다. 그 친화력을 약점으로 베트남 어린 여자 아이들이 바나나 등을 들고 찾아와 놀아달라고 했다. 안아주고 놀아주었는데 갑자기 도망을 갔다. 도망하자마자 병사의 주머니에서는 수류탄이 터졌다.
시장에서 수박을 사먹고 죽은 병사도 있다.수박에 독약을 주사한 것이다. 베트콩 부대가 기지를습격했다.넓은 들판에서 한 것이 아니라 부대정문으로 연결된 도로를 따라 공격해왔다. 좁은 도로를 통해 겹겹이 몰려오니 병사들이 아무리 많다해도 이에 대항할 병사들의 수는 불과 10여명에 불과하다. 총을 쏘려 하는 데 앞에는 아이들과 부녀자들이 살려달라며 아우성을 쳤다. 차마쏘지 못하고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고 방송을 해도 자꾸만 다가왔다 공포를 쏘아도 다가왔다. 그 뒤에는 총을 가진 배트콩들이 사격자세를 해가지고 따르고 있다.
이 보고를 받은 대대장이 멀리 떨어져 있는 채명신 사령관에게 디급한 전화를했다. 제주도 4.3 사건,여수-순천 반란사건,적진에 들어가 게릴라전을 수행했던 비정규전의 대가,채명신 사령관은 부하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즉시 사격하라고 명했다. 희미한 불빛만이 어둠을 밝히는 밤에 사격은 무차별로 가해졌다,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은 대민 작전을 매우 잘 햇다.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자라나기를 바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며 독설을 퍼부었던 런던타임즈는 이런 한국군에 데해 "미국이 월남전을 한국군에 아예 맡겼거나 한국군으로부터 배워서 작전을 했더라면 미국은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극찬 했다.
그런 한국군은 어떻게 작전을 했는가? 한국군의 작전은 주로 마을 작전이었다. 중대단위 기지를 공격하기 위해 어느 마을에 수 많은 베트콩이 잠입했다.이런 정보는 한국군이 심어놓은 월남인 첩자들이나 마을 유지들로부터 접수된다.
이런 정보가 들어오면 한국군은 쏜살같이 마을을 포위하고 월남성장(도지사,통상중령)에게 마을 초토화에 대한 허락을 받았다. 성장들은 첩보를 확인한 후 마을에 대고 방송을 했다."모든 주민들은 손을 들고 밖으로 나와 한국군의 보호를 받기 바란다."
그러나 빨/갱/이 베트콩들은 마을 주민들의 이탈을 허용하지 않았다.부녀자들, 노인들에게 차마 사격을 하겠느냐는 생각 때문이다.약자들을 방패로 삼는 것이다.또한 양민을 학살시킴으로써 '한국군이 양민을 학살했다'는 선전 자료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한국군과 월남군은 이를 알지만 선택을 해야했다. 이런 마을 마다 융단폭격을 가했다. 모든 집이 불타고,가축들의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여러 차레 이런 무자비한 폭격을 가했더니 그 다음부터는 그들도 마을로 들어오지 않았다.
필자가 [나의 산책세계]에 쓴 "어느 소대장의 최후"의; 일부를 소개한다
"어느 한 소대장의 최후"에서
움직이지 않아도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6월 오후 ,갑자기 헬기들이 줄을 지어 날아오더니 내가 속한 중대를 낯선 마을로 데려갔다.김제 평야같이 광활하게 펼쳐진 논에는 짙푸르게 자란 벼가 정강이 높이까지 자라있었고,논물도 풍부하게 채워져 있었다.넓은 평야에 뛰엄뛰엄 마을이 보였다. 숲 속에 묻혀 있는 마을들이 송곳같은 기운을 뿜어내는 것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 곧 이어 건너 편 마을을 사정 없이 폭격하는 전투기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네 대의 미군전투기가 마치 독수리처럼 수직선으로 내려 꽃혔다. 야자수 높이에서 다시 날아오르면서 사정없이 폭격을 가하고 있었다.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나무 조각이 야자수 숲 위로 날아오르고,연기가 온 마을을 자욱하게 덮었다.
"따다다다닥...쾅..."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이런 것을 보고 전쟁을 예술이라고 표현하는구나 싶었다. 전투기 공격이 끝나자 포병사격이 뒤를 이었다.전투기가 뿜어내는 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둔탁하지만,야포 포탄이 작렬할 때 내는 소리가 날카롭게 째졌다. 검은옷을 입은 사람들이 날아다니듯 마을과 마을 사이를 쏜살같이 뛰어 다녔다. 4개 소대가 마을을 하나씩 배정받았다. 소위 전략촌 마을들이었다. 억센 가시나무들이 빽빽하게 마을을 둘러 쌌고 , 그 가시나무 울타리에는 동그란 총구멍들이 촘촘히 뚫려 있었다. 베트콩들이 마을에 서 밖을 향해 총을 쏘기 위한 것이었다. 중대본부 역시 제 4소대와 함께 장갑차를 타고 마을로 들어갔다.앞으로 전진하라면서도 온 신경은 뒷마을로 곤두 서 있었다.
장갑차가 논물을 가르면서 마을로 향해 달리는 동안 차 위에 설치된 기관총이 뒷마을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불을 뿜어 댔다. 사수가 공포감을 느낄수록 그만큼 내뿜는 기관총 소리도 요란했다. 이에 질세라 뒷마을에서도 우리를 향해 엄청난 사격을 가해왔다. 바싹 마른 나뭇가지를 꺽을 때 내는 "딱" 소리만 내고 여운을 내지 않는 총알들이었다. 이런 소리는 총알이 나를 향해 날아올 때 내는 소리다. "따쿵~"하고 여운을 남기는 총알은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는 총알이다.
M-16 소총의 초속은 마하 2.8이다 소리보다 2.8배 빠르다.바늘에 실 따라 가듯, 총알이 먼저 나가면 그 뒤를 이어 총소리가 따라 가는 것이다. 총알을 맞은 사람은 총소리를 미처 듣지 못한 채 의식을 잃게 된다. 내가 속해 있던 중대본부와 4 소대는 아무런 피해없이 마을에 도착했다. 장갑차에서 막 내라려는 순간이었다.제2소대 무전병의 울먹이는 소리가 수화기에 울려퍼볐다. 소대장이 전사했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들어간 마을과 불과 10M 떨어진 이웃 마을에 도착하여 잡갑차에서 막 내리려는 순간 뒷 마을에서 무차별적으로 쏟아 붓는 베트콩의 총알에 머리를 맞은 것이다.소대장의 전사 소식에 모두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기지로 돌아와 첫 밤을맞았다. 있어야 할 소대장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그제서야 소대장의 죽음이 실감됐다. 그는 몇 달 전에 많은 전과를올려 고국으로 포상휴가를 다녀왔다. 그 때부터 많은 여학생들과 알게되어 펜팔을 맺고 있었다. 월남의 여름해는 정말로 길었다. 저녁식사를 끝내도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식당에서 오자마자 그는 편지부터 읽기 시작했다. 편지 읽는 소리가 간간이 새어 나왔다. 여고생들이 월남의 영웅,미남의 소위를 흠모하는 내용들이었다.
그의 침대 머리맡에는 언제나 꽃봉투가 한 뼘씩 쌓여 있었다.읽을 때는 누워서 뒹굴었다.기분이 졿으면 문주란의 "돌지 않는 풍차"를 불렀다. 약간 음치이긴 해도 특유의 가락과 감정이 있었다.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힌 채 눈을지그시 감고 마치 예배를 끝마무리하는 목사님처럼 팔을 하늘로 치켜 올리고 목을 우좌로 저어가면서 소리를 뽑아내곤 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텅 빈 침대 위에는 임자 잃은 꽃봉투만 쌓여갔다.
그는 침대 밑에 귀가 쫑긋하게 올라간 귀엽고 통통한 강아지를 길렀다. 주인을 잃은 첫날부터 그 강아지는 식음을 전폐했다.병사들이 안아주고 밥을 떠 넣어 줘도 먹지 않았다. 매일 밤 내는 애절한 울음 소리가 병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어느 날 그 강아지는 천막이 보이는 뜨겁게 달아오는 모래 언덕 위에 잠들어 있었다. 그 강아지의 죽음과 함께 소대장에 대한 추억도 소멸돼 갔다.
노근리 피난민에 대한 사격명령은 정당했다.
1950년 7월 마지막 주는 낙동강 방어전을 위해 융단폭격까지 서슴치 않았던 다급한 시기였다.전쟁이란 갖가지 공포증이 유발하는 증후군이다. 지금 또 다시 전쟁을 한다해도 노근리 사건은 얼마든지 재발 할 수 있다.
솔직히 필자가 노근리에 았었다 해도 "피난민들이 방어선 앞으로 진격해오면 경고사격을 하라,이를 무시하고 남하를강행할 경우에는 총격을 가하라." 이렇게 명령할 것이다. 이에 대해 다른 명령을 내릴 사람이 있으면 나와서 토론하기 바란다.
당연한 군지휘관들의 결심을 가지고 무엇이 잘 못됐다는 것인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더구나 사격 전날 한국정부도 피난민 대책회의에서 미국요인들과 함께 '정책'을 결정한 일이 아닌가!
현재의 우리 형법 제 21조에서는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빙위하기 위한 행위는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에는 벌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군사법령인 군인복무규율(1970.4.29 대통령령 제 4923호)과 위수령1970.4.20 대통령령 4949호)에서는 군인에 대한 '자위권"을 규정하고 있다. 군인복무규율 제123조에서는[신체,생명,또는 재산을 보호함에 있어서 상황이 급박하여 부기를 사용하지 아니하면 보호할 방법이 없을 때,야간에 3회이상 수하를 하여도 이에 불응하여 대답이 없거나 도주하거나 보초에 접근할 때 또는 대답이 없을 때,폭행을 받거나 또는 받을 우려가 있어서 그 상황이 급박하여 자위상 부득이 할 때] 군인은 휴대하고 있는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미군의 노근리 발포명령은 군사작전 차원에서 아무런 하자가 없으며,정당한 것이며,비난의 대상이 될 수도 없는 성격의 것이다.
피해자들의 슬픔은 정서 차원의 문제로 군사지휘권에 대한 잘잘못을 따지는 문제에 개입될 수없다. 노근리를 바라보기 전에 우리는 아래 사실을 알아야 한다.
1950.6.30부터 1953.7.27까지,미군 36,940명이 목숨을 잃었고,8176명이 유해조차 찾지못한 채 실종됐으며,92,134명이 부상을 당했다. 총 1,789,000명의 미군이 한국전에 와서 싸웠다. 60만명이라는 대군이 항시 전쟁을 치르면서 한국과 한국인을 지켜 준 것이다,.
미합중국은 한국전에서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귀중한 목숨을 바친 전사자들에게 이런 비문을 바쳤다.
"미 합중국은 조국의 부름을 받고 ,생면부지의 나라,일면식도 없는 낯선 사람들을, 침략으로부터 보호하는데 기꺼이 나선 아들과 딸들에게 삼가 경의를 표합니다."
출전:시국진단 7월호 글쓴이:지만원박사 펴낸 곳:국민의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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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살인범이나 정신이상자가 아니고서야 멀쩡한 사람들을 살해 했겠는가? 정당한 이유에 의해 그렇게 했으리라고 봅니다.
근데~?...왜 이렇게 오랜세월의 사건들이 지금 올라오나요~?....유도하는 것 같네요...또 다시 그 사건을 조명하고자...우리의 목표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도록 유도하는 이런 글....주시해봐야 되겠습니다.
전쟁에서 만일 이런 경우라면 자신이 죽겠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사격은 당연합니다. 베트남전에서 처럼 노약자를 공격용 보호막으로 이용한다면 그런 희생은 피치못하게 치러야 할 희생입니다. 위와 같은 경우에 지휘관이 사격을 명령하지 않는다면 그 자는 빵갱이에 불과합니다.
전생을 모르는 젊음 세대는 이해못합니다.전쟁은 내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읍니다.전생터에서 인권찾고 ,피난민인지.물어보거 싸웁니까.피난민으로 위장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 그때을 모르셔서 그럽니다.때런 지리산서는 어린아이까지 사살한 괴로들입니다.전쟁터엔 아무것도 믿지못합니다.믿을건 나 자신입니다.
le라는자야... 이정권에서 과거사 진상규명ㄴ이라는 쓸데 없는 작업이 나오고 그 결과에 대한 비판글이다. 뭐가 오래전인데 조사를해봐?? 조사를분명히하고 조치결과를 말헤봐야 한다. 뭐 찔리는 것 있나?? 노무현이 빨치산ㅇ을 포상한게 옳다는말같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