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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젠 타로를 사용하기 전에...
먼저 이 글은 저만의 주장임을 밝힙니다
타로라는 도구 그 자체는 늘 자유로워야 옳습니다
다만 무의식은 우리 개인들의 의식을 부서뜨려서
의식이 주장할 수 없게 만드는 神과도 같아서,
자유 속에도 소통을 위해서는 틀이 필요합니다
뼈대와 같은 대조군(contrast)이 있으면 좋습니다
이 글들 속의 주장도 그런 참고에 불과할 뿐입니다
오쇼젠을 사용하는 것 그 자체로 앎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오쇼젠을 사용하고 깨어서 지켜보시길...
PS) 편의상 존댓말은 생략되어 있습니다
오쇼젠 타로는 사실상 해설이 필요하지 않다. 말하자면 이것은 오쇼가 그대에게 던진 질문이자 도발이기 때문에, 오쇼가 그대에게 무엇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대가 질문에 대답해야만 한다. 실제 리딩에서도 다르지 않다. 타로 리딩에서 대답을 해야만 하는 사람은 타로리더가 아니라, 오히려 리딩을 받으려는 그 사람이다. 그 질문에 리더가 대답해서도 안 될 뿐 아니라, 대답할 수도 없다. 오쇼젠은 단순히 점(占)을 즉, 상황과 이유, 길흉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인 것은 아니다. 물론 부수적으로 드러날 수는 있다. 오쇼젠은 그 상황에 대한 수용성과 의미, 그 이유를 도리어 되묻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대가 그것을 수용하지 못한 이유는 그대 속에 있다. 그 이유는 그대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 타로는 한 장의 카드에 불과하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만 한다. 그대가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타로가 한 장의 카드에 불과하다고 말하면, 자존심이 상하게 될 것이다. 그 순간에 처한 상황과 의미와 욕망은 다양하다. 그 많은 것들을 어떻게 하나의 카드나 몇 개의 카드 속의 이미지에 온전히 담을 수 있겠는가?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건들이 지금 드러났다고 주장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결코 그렇지 않다. 아직도 여전히 그대가 원하면 그 의지대로 무엇이든 간에 선택할 수 있다. 그대는 여전히 78 장(오쇼젠은 총 79 장이다)의 카드 중에서 어떤 경험도 선택할 수 있다. 지금 나온 카드가 마음에 들면 그것을 수용하고 그 경험과 자신을 동일시해서 스스로 돌아보는 것일 뿐이다. 여러 관점들 중에서 단순히 하나의 관점으로 그대를 살펴보는 것이다. 카드는 그대가 자신을 되돌아볼 잠깐의 기회를 준 것 뿐이다. 그냥 지켜보라. 그것이 전부이다. 거기에서 무엇을 얻거나 혹은 그렇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그러나 그것 역시 전적으로 그대에게 달린 문제일 뿐이다. 만약 그대의 그릇이 크고 충분하면 그 경험을 수용할 수 있겠지만, 그대의 그릇이 작다면 그것을 수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쇼젠 타로에서는 마이너 카드도, 메이저 카드도, 궁정 카드라는 구분도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스프레드도, 정방향도, 역방향도, 애초에 카드에 배정된 단어나 의미도 중요하지 않다. 단지 그것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그렇지 못한가에 달려 있다. 그대가 준비되어 있어야만 그 순간 주어진 배움의 기회를 통해서 성장할 수가 있다. 그렇다고 그 기회를 놓쳤다고 해도 문제는 없다. 비록 그로 인해서 어느 정도의 제약은 있겠지만 다시 기회는 있다. 아무리 그대가 원치 않더라도 배워야 할 것과 떠오르는 의문들은 저절로 때가 되면 주어진다. 서두를 필요조차 없다. 무지개 9 처럼 때가 충분히 무르익으면 떨어져서 분리되는 것이 이치요, 성숙이다. 그것이 결실의 기쁨일지 분리의 아픔이 될지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그대의 의식 상태이다. 만일 그대가 깨어 있다면, 기쁘고 슬프다는 그 의미가 퇴색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저 당연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을 던지는 것에 있다. 그것이 사슬(조건화)로부터 벗어나는 첫걸음이다.
오쇼젠을 사용하려면 되도록 클래식 타로에도 익숙한 것이 물론 좋다. 그렇지 못하면 오쇼젠 카드의 진정한 묘미를 맛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카발라와 점성학, 신화들이 클래식 타로의 바탕이다. 오쇼젠 타로 사용에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기법들을 살펴보면, 첫째로 카드 하단의 제목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카드 하단의 제목은 소위 화두(話頭)와 같다. 혹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로 깨달음에 이른 사람도 있다. 그것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아름다운 화두들도 수두룩하다. 그 질문을 자기 스스로에게 던져보라. 둘째로 클래식 타로들과 비교하라. 오쇼젠 카드에 해당하는 타로 카드들을 옆에 나란히 놓고 그 의미와 이미지를 비교하면, 상당히 재미있고 유머가 있으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것이 많다. 그 이미지를 한 번에 동시에 떠올릴 수 있도록 노력해보라. 셋째로 그 경험들을 그대가 수용했는지 살펴보라. 그리고 나서 정방향인지 역방향인지를 한 번 살펴보라. 보통 정방향은 힘겨운 경험임에도 수용했지만 역방향은 즐거운 경험도 누리지 못한다. 넷째로 그대가 그 카드 속의 인물이 되었다고 상상하며 그 카드 속으로, 그 경험 속으로 뛰어 들어가라. 그것을 ‘심상화’, ‘몽상’, ‘명상’, ‘적극적인 상상하기’라고 부르거나 ‘자각몽’이라고 불러도 된다. 그리고 나서 그것을 놓아 보내라.
이 테크닉을 위해서는 먼저 그 카드를 서두르지 않고 세밀하게 여러 번 살펴보아야 한다. 그저 지켜보는 것, 그것에 목적이 있다. 그대는 수많은 카드 중에서 어떤 카드를 통해서도 처한 상황의 답을 얻을 수 있다. 여러 수단 중의 그저 하나의 수단을 통해서 그것을 심상화하고 수용한 뒤에 놓아버리는 연습과 같다. 그러나 그대가 상상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허상인 것은 아니다. 그대는 이 과정을 통해서 눈앞에 일어난 사건이 실은 내가 만든 것임을 깨닫게 되면서 자기 삶의 통제력을 갖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끝없이 변하는 오르내림 속에서도 중심에 머무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될 것이다. 늘 그대가 움켜쥐고 싶은 것들은 달아나고 숨기고 싶은 것들은 더 드러나기 마련이다. 차라리 갈 것들은 가게 두고 드러내는 것이 낫다. 어차피 눈에 보이는 것들은 오래 가지 않는다. 그것들 중에서 변함없이 영구한 것들은 거의 없다. 그대 앞에 놓인 것이 진실로 덧없음을 인정할 때, 비로소 재미있는 한 판의 놀이를 즐길 수 있게 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그대도 안다. 그러나 그대의 눈과 마음은 어리석어서 항상 쉽게 속아 넘어간다.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는다. 결코 아니다. 그대는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는 대로 볼 뿐이다. 그러니 우선 그대의 믿음을 시험해보라.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꼼꼼히 살펴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대가 깨어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대가 잠들어 있는 한은, 그대는 양들과 타협한 사자이거나 운명이란 창살에 갇힌 새일 뿐이다.
메이저 카드는 의식의 상태를 묘사하는 반면에 마이너 카드들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일상을 묘사한다. 원래 Ace 카드들을 제외한 36 장의 숫자카드들에는 데칸(Decan)이라는 개념이 적용되어 있다. 일 년을 360 도로 가정하고 10 도씩 배정함으로써 일 년의 순환을 구분하는 점성학적 시간 개념이다. 그러나 카발라에서 Ace 카드는 근원이자 뿌리로서 잠재된 무엇이기 때문에 제외되어 있다. 그래서 숫자 카드들 각각에는 일 년의 특정 순간이 점성학과 날짜로써 배정되어 있다. 모든 것이 적절한 때가 있듯이, 마이너 카드들은 그러한 시기를 보여주는 것과 같다. 겨울에 꽃 피우기는 어렵지만 봄에는 한결 수월하다. 따라서 지금 순간의 의미와 적절히 보조를 맞추면 수월하다. 오쇼젠 타로는 통상적인 클래식 타로들의 의미와는 상반되거나 의문을 품게 만들어져있다. 종교적인 전통을 상징하는 신비 사제를, 시커먼 암흑이자 공(空)인 ‘무’(無)라고 이야기하면서 인격을 가진 신(神)이란 개념보다 차라리 카발라에서의 무한(無限)인 ‘아인 소프’와도 같다. 구름 3 카드처럼 고통이 서로 오가지 못하고 굳어 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말하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통상적인 의미에 대해서 그것이 정말로 그런지 반문하기도 한다. 물의 9 카드에서처럼 다른 사람들이 행운과 기쁨, 행복하다고 정의하는 상황을 두고 게으르다고 말한다. 카발라에서 ‘게으름’은 9 번 카드들에 상응하는 예소드의 악덕이다. 중세에는 사자를 때려잡는 불굴의 용기였던 8 번 힘 카드가 후대에 이르러서 종교적으로 여성의 미덕이 강조된 그림으로 왜곡되었지만, 오쇼는 진정한 용기는 그런 것이 아니라 안전한 외피를 벗어던지고 거칠고 힘겨운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리는 용기이자, 꽃을 피운 뒤에 죽음도 불사하는 것으로 꽃의 향기처럼 변형되면 실체조차 없다고 말한다. 심지어 마아트 여신이 등장하는 정의 카드에는, 심판자는 사라지고 도약하려는 어떤 여성을 발견하게 된다. 본능과 무의식을 상징하는 달 카드를 두고서 그것이 우리 전생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악마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서 조건화된 굴레에 불과한 무엇이라고 말한다. 물론 여황제나 운명의 수레바퀴, 별 카드처럼 기존 의미들을 따르는 카드도 있다.
오쇼는 선(禪)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이미 많은 깨달은 사람들이 왔다가 갔지만, 그들 중에서 물질 세상을 악하다고 규정한 사람은 없었다. 무엇인가 특별하고 대단한 것을 찾아서 떠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진리는 우리 가까이에 평범한 것들 속에 있기 때문이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 너무 어이없이 웃음을 터뜨린 이유도 동일하다. 닿지 못할 저 어딘가로 도달하려고 기울이던 그 노력이, 오히려 깨달음을 방해한 장애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대가 매일같이 반복하는 실수는 평범하지만 소중한 일상은 버려두고, 비범하게 느껴지지만 쓸모없는 것만 좇는 것이다. 지나간 과거는 화려하게 치장하면서 지금 현재는 누더기처럼 만든다. 가슴에는 판타지와 욕망의 투사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칼은 여전히 옆구리에 차고서 발톱을 숨긴 상태로 가면을 쓰고서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간다. 정작 해야 할 것은 계속 뒤로 미루기만 하고 물질만 가득 쌓아두고 인색하게 굴면서도 게으름만 부린다. 사실 생각보다 해야 할 것은 별로 없다. 정신없이 달려가고는 있지만 왜 달려가는 지도 모르고 온갖 스트레스를 떠안고 온갖 것들을 하기에 바쁘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열심히’ 혹은 ‘빨리’가 아니다. 일단 멈춘 뒤에 ‘방향’부터 먼저 살펴라. 수박 겉핥기로 아는 것은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다. 진리는 ‘깊이’ 속에 숨어있다. 불의 8 카드(여행)처럼 아직 가야할 여정이 여전히 한참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조급함을 잠시라도 내려놓고, 무지개 기사(거북)처럼 여유를 가지게 될 것이다.
오쇼젠과의 대조군 역할로는 하인들 타로가 좋은데, 그것은 팬타클 슈트 때문이다. 일반적인 다른 덱들은 컵스 슈트 즉, 성배의 전설을 중요하다고 여긴다. 대체로 컵스 10 카드가 가장 행복하다. 황금새벽회에서 컵스 10 카드에 ‘완벽한 성공의 주님’이라는 제목을 붙였던 반면에 팬타클 10 카드에는 ‘부(富)의 주님’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 비록 물질적으로 풍성하지만 그 물질적인 풍요가, 영혼을 가두거나 병들게 해서 불행을 초래하는 위험이 있다. 그래서 웨이트 덱에는 할아버지가 가족과 분리되어 있고, 크롤리 덱에도 검은 클리포트와 물질의 어두운 속성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서구 전통들 속에 내재된 영지주의 사상의 영향이다. 인간은 순수한 빛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빛(神)이 물질(육체) 속에 갇혀서 고통당하고 그 고통으로부터 빛을 해방시키는 것이, ‘구원’이고 ‘성배’(신성한 의무)라는 주장이다. 서구의 여러 영적인 전통들은 욕망을 버리고 성배를 찾아서 떠나는 일종의 모험을 부추긴다. 그것이 곧 바보 카드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인들 타로는 오히려 물질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물질을 통해서 영이 실현되고 빛나게 된다는 것은, 카발라의 가르침과 상통한다. 카발라의 신은 아직 드러나지 않는 케테르이고, 물질인 말쿠트는 온전히 드러난 케테르이다. 가장 하위에 있으면서 가장 물질적인 말쿠트가 신성한 그의 왕국인 동시에 그의 배우자이다. 말쿠트가 신성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나? 다이온 포춘도 모든 세피라가 신성하다고 주장했다. 선(禪)에서도 일상의 소중함을 가르친다. 선(禪)은 평범한 일상들 속에 진리가 들어있어서, 일상 속에서도 깨어있으라는 것이 주요한 가르침이다. 그래서 오쇼젠의 무지개 카드들은 대단히 긍정적이고 아름답게 묘사했지만, 흔히 아름답게 묘사되는 컵스 카드들에 대해서는 과연 그러한지 되묻는다.
오쇼젠 타로를 사용할 때 우선 바꿔야 할 인식은, ‘인과관계’이다. 뿌리와 열매라는 뜻에서, 모든 Ace 카드는 원인이고 10 번 카드는 결과인 것으로 간주되곤 한다. 그러나 사실은 모든 10 번 카드들은 Ace 카드들의 원인이면서 결실이자 목적이다. 둘은 서로가 서로에 대한 원인이 되고 동시에 결과이다. 그러므로 그 중에서 어느 것도 다른 것들보다 우선하거나 더 신성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사실 각각의 모든 카드들이 신성하다. 그중에서 어떤 것도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다만 Ace와 10 번 카드들은 다른 카드들에 비해서 완전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단순히 Ace 카드들은 시작에 해당하고 10 번 카드들은 마침에 해당하기 때문에 변형 중에 있어서 제대로 살필 수 없었던 다른 카드들에 비해서 그 둘은 그나마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과관계와 함께 선악에 대해서도 이제부터 다르게 보아야 한다. 불의 7 카드에서 풍선을 터뜨리는 원숭이가 악한 자인가? 혹은 나를 돕는 신인가? 독을 담은 성배를, 원숭이의 가면을 쓴 신을 우리는 무엇이라 불러야 하나? 그러나 더 본질적인 질문은, 만약 그 모든 것이 변화 중인 경험이라면, 우리에게 주어진 이 인과관계와 선악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모든 것들은 변형과 변화 속에 있다. 아무리 변형 중에 있다고 해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헤르메스주의는 말한다. 신(אל)이 스스로 바보의 황소(א)가 되고 정의의 소몰이막대(ל)가 되고 절제의 기둥인 천사(ס)가 되고 제 3의 눈 악마(ע)가 되고 상상력의 올무인 침묵(צ)이 된다. 선(禪)의 가르침 또한 동일하다. 구름 10 카드에서 낙타가 사자로 변형되었다가 아이가 된다고 보는가? 그렇지 않다. 본질은 그대로이고 낙타의 경험을 했었다가 사자의 경험을 했고, 이제는 아이의 경험을 하게 된 것에 불과하다. 그 경험들의 주체는 여전히 변함없이 그대로다. 그대는 항상 표면에 머무른다. 그래서 표면만 보고 판단한다. 원숭이의 가면을 쓰면 원숭이로 생각하고 승리하면 ‘승리한 자’라는 가면을 자신으로 생각한다. 언제나 전체는 보지 못하고 부분만을 보면서, 그것을 전부로 생각한다. 오쇼젠 타로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 마구 달려가기 급급한 그대의 움직임을 멈추게 도와줄 것이다. 부분적인 시각이 아니라 전체적인 시각으로, 가면 너머의 진면목을 볼 수 있게 새로운 눈을 줄 것이다. 카드의 번호와 그림과 말들에, 이미 오랫동안 조건화된 그대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 모든 것이 경험이나 가정 혹은 합의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의심을 갖게 될 것이다.
타로 카드는 분명히 한 장의 카드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의 힘이자, 변형과 의지로 바꾸는 것은 바로 그대이다. 때로 어떤 이들은 역방향의 연인, 물의 3 카드(고립), 구름 9 카드(비애) 같은 것이 나오면, 자신이 선택한 불행한 경험을 비난한다. 그대는 카드가 한 장의 카드에 불과한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아무리 어렵고 힘든 카드라고 해도 문제될 것이 무엇인가? 타로 카드가 한 장의 카드에 불과하다는 인식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 의미 없던 카드에 힘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대 자신임을 기억해야 한다. 언제든 그대는 그대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고 역방향의 카드를 뒤집는 것도 가능하다. 그대가 그것을 받아들이길 선택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그대가 더 성장하면 기쁘고 행복한 경험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불운한 경험을 두 팔 벌리고 맞이할 수 있다면 이제 그대는 그만큼 성숙해진 것이다. 오히려 행복이란 그대를 그 경험과 동일시하고 그 속에 머무르게 유혹하는 힘이 있다. 불행 앞의 그대는 그것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부정하면서 달아나기에 바쁘다. 아니다. 이제는 반대로 해보라. 행복이 오면 부정하고 오히려 불행 속에 머물러라.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 반대도 해야만 한다. 행복을 즐길 수 있어야 하고 불행도 기쁘게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부정하는 것과 즐기는 그 둘은, 결코 서로 반대가 아니다. 부정하고 달아나는 것과 즐기고 머무르는 것이 서로 반대 개념이란 정의도, 오랜 조건화의 결과이다. 그 둘은 서로 다르지 않다. 그러니 때로 느긋하게 지켜보고 때로 부정하며 가면을 벗겨보라. 그 긍정과 부정 모두 그 나름의 맛이 있다.
- 나는불꽃 沈載興 拜上-
첫댓글 오쇼가 타로와 점에 대해서 생전에 언급했던 적이 있습니다
"만약 그대가 점을 쳐서 그대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맞출 수 있거든
그것은 그대가 깨어있지 못해서 과거에 살아가던 패턴 그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니
그대가 지금 무감각하게 잠들어 있지 않고 깨어서 現存하며 느끼면서
매순간 自覺 속에 살고 있다면 절대 과거의 패턴대로 살아가지 않을 것이며
그런 사람의 미래를 어떻게 점칠 수 있겠는가?" 하고 되물었습니다
옳습니다. 삶은 당연히 자신이 뿌린대로 거두는 결실이며
그렇게 자신이 자초한 수많은 족쇄들에 채워진 상태로
여전히 습관과 욕망대로 혹은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고
그것이 무엇이든 선택은 남아있습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9.04.05 05: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