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에 들어서면서 겐로쿠 시대가 끝나는 1709년부터 바쿠후가 멸망하는 1868년까지의 약 160년간 에도 바쿠후는 커다란 시련에 부딪히게 된다. 경제가 큰 혼란에 빠져 물가가 오르고 사람들의 생활이 어려워졌다. 특히 하급부시들은 영주로부터 받는 월급으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상인으로부터 돈을 빌리거나, 부시의 신분을 팔기도 했다. 농민 사이에도 빈부의 차가 커지고 농촌을 떠나 도시로 나가는 빈농들도 많아졌다. 또 냉해나 대기근이 발생하여 굶어 죽는 자도 많이 나와 농촌의 비참은 극에 달하였다.
8대 쇼군 요시무네(吉宗) 이후 바쿠후는 재정을 재건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했지만, 계속 실패했다. 게다가 바쿠후가 재정의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세금을 더 부과하자, 농민과 쵸닝의 저항으로 잇키가 잇따라 발생했다. 1837년 부시가 반란에 가담한 최초의 사건인 '오시오의 난'이 오사카에서 일어나며 바쿠후는 치명타를 입으며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게다가 서양 배들이 자주 나타나 교역을 요구하며 횡포를 부리는 등 인심이 흉흉해지면서 바쿠후는 난국을 해결할 능력을 상실해가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한들은 서서히 힘을 길러 가고 있었다. 특히 사쓰마(현 가고시마현)와 조슈(현 야마구찌현)의 개혁적인 하급부시 사이에서 손노조이(尊皇攘夷: 왕을 존중하고 외적을 척살하는 사상)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상공업의 발달을 바탕으로 새로운 질서를 원하던 이들은 무능한 바쿠후에 불만을 품고 대개혁을 꿈꾸고 있었다. 1853년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에도 어귀 우라가에 검은 배 네척이 나타난 것이다. 미국 동인도 함대 사령관 페리제독이 이끄는 검은색 군함, 즉 구로후네(黑船)의 출현이었다. 외국의 영향을 받지 않고 섬 안에서 권력의 변화를 반복해 오던 일본에 직접적인 외국의 영향이 미치는 첫 계기이자 일본역사에 대폭풍우를 예고하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은 개국을 주장하는 바쿠후와 손노조이를 외치는 사쓰마와 조슈 등 유항 세력으로 갈라져 정면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차에 1858년 바쿠후의 다이로(大老)인 이이 나오스케가 굴욕적인 미일수호통상 조약에 조인하고 쇼군의 후계를 독단적으로 결정하자, 손노조이파들은 노골적으로 바쿠후에 도전했다. 그러자, 이이 나오스케는 손노조이파에 대대적인 탄압(안세이 다잉고쿠 安政大獄)을 가하다가 1860년 에도성의 사쿠라다몽에서 유항출신 사무라이들의 칼에 무참하게 살해되며(櫻田門外의 변) 바쿠후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이제부터 일본역사의 중앙무대에 바쿠후에 도전장을 낸 사쓰마와 조슈가 주역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페리에 의한 강제 개국 이후 자체 개혁을 통하여 제도를 크게 고치고, 하급 부시의 출신 젊은 인재를 등용하여 막강한 상업자본의 바탕 위에 무기와 군사를 늘려나가 바쿠후도 함부로 손댈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때 조슈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손노조이파의 선두로, 향리인 하기(萩 현 야마구치현)에 쇼카 손쥬쿠(松下村塾)를 차리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수많은 개국 공신을 길러냈다. 그러나 똑같이 손노조이론을 주장하면서도 경쟁관계에 있었던 사쓰마와 조슈는 각각 1년 간격으로 사쓰에이 전쟁과 시모노세키 포격사건으로 외국군대의 힘을 깨닫고 조이에서 개국으로 180도 선회하며 도바쿠(討幕)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바쿠후는 조정과 협력하여 정치를 행한다는 공무합체(公武合體)를 고려했지만, 손노조이파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끝내 사쓰마는 영국 함대와 싸우고, 조슈는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의 4국 함대와 교전했다. 그러나 이 싸움을 통하여 외국의 힘을 실감한 사쓰마와 조슈는 조이(攘夷)의 불가능함을 깨닫고, 바쿠후를 타도하고 텐노(天皇) 중심의 새로운 정치를 실행해야 한다는 손노토바쿠(尊皇討幕)운동을 추진했다.
바쿠후의 조슈 정벌이 임박할 즈음, 도사(土佐 현 코오치현) 출신인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중재로 사쓰마의 사이고 타카모리(西鄕隆盛)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등은 조슈의 키도 타카요시 등과 1866년 역사적인 삿쵸 비밀동맹을 맺고 신정부 수립을 약속했다. 곧 영국에 접근해 서양식 군비를 정비한 조슈는 바쿠후에게 패배를 안겼다. 바쿠후는 일개 한(藩)에 지나지 않는 조슈에 패함으로써 급격히 패망의 길을 걸었고, 조슈는 후에 2차대전말까지 일본 군부를 장악한 군바츠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 무렵, 정치와 경제의 혼란으로 인해 에도와 오사카에서 대규모의 폭동이 일어나고, 농민봉기도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또, 사회의 불안으로 인해, 구원을 바라는 심리에서 이세신궁에 참배하는 것이 대유행하기도 했다. 바쿠후와 삿쵸가 서로 칼을 겨누던 1866년, 도쿠가와 요시노부(慶喜)가 새로운 쇼군(15대)으로, 메이지 텐노가 새 텐노로 즉위했다. 바쿠후와 삿쵸의 정면충돌이 임박하자, 도사에서 유럽 의회제도를 도입해 바쿠후의 독자적인 권력을 텐노에게 반납하고 바쿠후와 조정을 완전히 하나로 합병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이것이 다이세이호칸(大政泰還)이다.
요시노부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1867년 정권을 텐노에게 반납하고, 조정은 텐노정치가 부활했음을 정식 공포했다(王政復古). 그러나 영지를 모두 잃게 된 바쿠후의 부시들이 불만을 품고 쿄토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하고, 신정부군이 요시노부군을 토벌하기 위해 에도로 향했다. 그러자 바쿠후의 카쯔 카이슈(勝海舟)는 신정부군의 사이고 타카모리와 회담을 열어 도쿠가와 가문의 존속을 보장받고 에도성을 포기했다. 이로써 260년간 계속된 에도 바쿠후는 멸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