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19일 연중 제7주간 월요일 그 뒤 예수께서 집으로 들어가셨을 때에 제자들이
his disciples asked him in private, “This kind can onl y come out through prayer.”
말씀의 초대 시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이 있고,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악행이 있다. 남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시기심이 생기는 것이다. 자신의 본모습을 보지 못하기에 이기심을 가지는 것이다. 하늘의 지혜를 청해야 한다. 그래야 평화와 관대함을 지닐 수 있다(제1독서). 어떤 영이 아이를 괴롭혔다. 아이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영을 쫓아내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해결하지 못한다. 그만큼 강한 영이었다. 예수님의 능력만이 아이를 치유할 수 있었다. 제자들은 더욱 스승님을 믿고 따른다(복음). †♡†♡† 오늘의 묵상 ‘아이는 또다시 땅에 쓰러져 거품을 흘리며 뒹굽니다. 늘 보는 일이지만 앞이 막막합니다. 이젠 마지막이 되어야 할 터인데. 왠지 저분은 고쳐 주실 것만 같아.’ 그 순간 예수님께서 말씀을 건네십니다. “아이가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 아이 아버지는 애절한 마음으로 두 손을 모읍니다. “어릴 적부터입니다.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며 평생을 사셨던 할아버지께서 도시에 살고 있는 큰 아들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처음으로 방문하신 아버지를 위해 아들은 최선을 다해서 맞이했지요. 이제 밤이 되어 할아버지는 잠자리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납니다. 아주 기괴한 소리, 정말로 듣기 싫은 소리가 나서 할아버지는 그 소리를 찾아서 나섰지요. 그 소리의 진원지는 바로 손자의 바이올린 켜는 소리였습니다. 이제 막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기에 그 소리가 결코 아름답지 못했지요. 할아버지는 이렇게 형편없는 소리를 내는 악기를 연습하는 손자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 날, 할아버지께서는 둘째 아들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둘째 아들 역시 처음으로 방문하신 아버지를 위해 최선을 다해 맞이했지요. 그리고 밤이 되어 할아버지는 잠자리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큰 아들의 집에서 들었던 소리와는 달리 너무나도 아름답고 듣기 좋은 소리였습니다. 시골에서는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아름다운 소리였지요. 그 소리를 찾아 나선 할아버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소리의 진원지는 손녀의 바이올린 켜는 소리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똑같은 바이올린인데 이렇게 다른 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지요. 똑같은 바이올린입니다. 그러나 누가 연주를 하느냐에 따라서 소리가 달라지더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당연한 진리를 우리는 자주 잊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주님께 대한 우리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위의 진리를 잊어버리고 자주 주님을 원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들에게 많은 은총과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 은총과 사랑을 바라보려고 하기보다는 내게 아무런 것도 주시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에게만 사랑을 베푸신다는 말도 안 되는 불평과 불만을 주님께 던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은총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우리들 자체가 문제인 것이지, 결코 똑같은 은총과 사랑을 주시는 주님이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우리들이기에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쁜 영이 들어간 아이의 아버지처럼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라는 가정의 말을, 그리고 조건의 말만을 계속해서 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들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간직하기를 우리들에게 요구하십니다. 그래야 주님께서는 주시는 그 큰 은총과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의 믿음은 과연 어떠할까요? 나는 과연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충만히 받을 수 있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렇지 못한 우리들이기에 오늘도 우리는 주님께 기도합니다.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음악감상을 통해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보세요. †♡†♡†♡†♡†♡†♡†♡†♡†♡†♡†♡†♡†♡†♡†♡†♡†♡†♡†♡†♡† 내 손을 잡아주시는 주님 -강윤철 신부- 간질병을 앓는 아이의 부모가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왔으나 제자들을 먼저 †♡†♡†♡†♡†♡†♡†♡†♡†♡†♡†♡†♡†♡†♡†♡†♡†♡†♡†♡†♡† 기도의 능력 - 원순희 목사(여수 송여자 생명교회)- 기도하지 않으면 좀처럼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볼 수 없다. 구석구석 도사리고 있는 부정적인 요소를 찾아내기가 어렵다. 말만 하면 죄요, 생각만 하면 죄를 품고, 움직였다 하면 죄를 범하는 나 자신이 얼마나 악한지를 알지 못한다. 기도할 때 이런 죄인인 나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그 사랑에 감사하며 오늘도 새로운 삶을 다짐한다. †♡†♡†♡†♡†♡†♡†♡†♡†♡†♡†♡†♡†♡†♡†♡†♡†♡†♡†♡†♡†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양승국신부- <온 세상 곳곳을 다 다녀봤지만> 요즘 많은 분들이 ‘보이스 피싱’(voice phishing, 電話詐欺))이란 신종 사기 수법에 넘어가 곤혹을 치르기도 합니다. 참으로 ‘희한한’ 세상입니다. 전화 사기범들은 기상천외한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어린 자녀가 납치당한 것처럼 가장해서 돈을 송금하게 합니다. 갑자기 마음의 평정을 상실한 부모님들은 손쉽게 넘어갑니다. 멀쩡한 대낮에 눈 뻔히 뜨고 사기를 당하는 것입니다. 법원이나 금융기관, 경찰서 등 국가 공공기관 직원으로 사칭해 개인정보나 금융정보를 훔쳐가기도 합니다. 완벽하게 판을 짜놓고, 치밀하게 작전을 세워놓고 덤벼드니, 넘어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한번 속은 사람들, 그래서 꽤나 큰 충격을 입은 분들의 피해는 금전적 피해에 그치지 않습니다. 정신적, 심리적 피해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세상이 무섭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차게 됩니다. 이 세상과 사람들을 향한 마음의 문을 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어떤 일이든, 그 어떤 사람이든 일단 의심을 지니게 됩니다. 누군가 호의를 베풀면 ‘저 사람이 또 나에게 사기 치려고 다가오는 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향해 미소 지으면, ‘뭔가 분명히 흑심을 품고 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러다보니 대인관계가 상당히 위축되고, 관계맺음 방식이 왜곡됩니다.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어디 한군데 마음 둘 곳이 없습니다. 절친했던 친구로부터도 배신을 당합니다. 믿었던 상사로부터도 내침을 당합니다. 가족들도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사기범들은 기를 쓰고 덤벼듭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정이 훨씬 나은 편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다 걸어도 불안하지 않을 신의의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존재 전체를 다 바쳐도 괜찮은 분, 우리 모든 것을 다 맡겨도 안심되는 분, 신뢰의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존재 전체, 영혼과 삶 전체를 맡길 곳은 오직 주님 당신뿐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사람, 그래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오직 주님께만 신뢰를 둔 바로 그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영이 들린 아이를 말끔히 치유시켜주시면서 우리에게 진실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단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온전히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들, 조금의 의혹도 지니지 않고 하느님께 미래를 맡기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큰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깊은 내적 평화입니다. 충만한 행복입니다. 높이 올라가 계신 분들, 현재의 위치를 유지하느라,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사람들 견제하느라 잠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큰 부(富)를 소유한 사람들, 혹시나 누군가 빼앗아가지 않을까 지키느라 행복할 순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가운데 깊은 내적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충만한 행복을 맛보며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가난한 사람입니다. 소박한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입니다. 소외 받은 사람입니다. 낮은 곳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 어디 가도 믿을 사람 한명 없는 사람입니다. 온 세상 곳곳을 다 다녀봤지만 믿을 사람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그였기에, 오직 단 한분 하느님께만이 진실하다는 것을 알게 된 그였기에, 그래서 오직 주님께만 신뢰를 두는 그 사람, 그 사람은 행복합니다. †♡†♡†♡†♡†♡†♡†♡†♡†♡†♡†♡†♡†♡†♡†♡†♡†♡†♡†♡†♡† -김찬선신부-
오늘의 야고보서는 †♡†♡†♡†♡†♡†♡†♡†♡†♡†♡†♡†♡†♡†♡†♡†♡†♡†♡†♡†♡† <독서> : 하느님의 지혜를 구하는 신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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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에서-
나의 실수를 먼저 인정합시다.
- 이정호신부-
-이수철신부- 놀라움을 회복해야 합니다.
마음들은 날로 무디어지고 황량해지는 오늘의 현실입니다.
옛 믿음의 선배들은 이성적, 합리적 사고는 부족했을지 몰라도 하느님에 대한 감수성은, 놀라움의 감각은 단연 탁월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자연 사물에 대한 놀라움에서 하느님을 찾는 믿음의 여정이 시작되고, 시(詩)들도 저절로 흘러나옵니다. 감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이런 놀라움에서 저절로 샘솟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요, 더불어 무럭무럭 자라나는 믿음이요 지혜입니다.
맹목적 믿음이 아니라 지혜로운 믿음입니다.
지극히 경외해야 할 지혜로운 한 분이 계시니 당신의 옥좌에 앉으신 하느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지혜를 만드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 지혜를 선물로 주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운 지혜이며 이 지혜 있어 하느님을 알아봅니다.
하느님을 찾는 믿음과 사랑의 여정 중에 더불어 깊어지는 지혜요, 이 지혜는 바로 사랑이요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모두가 하느님께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믿음의 결정체인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탄식입니다.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믿음 부족한 우리 자신을 봅니다.
지혜와 믿음의 화신과도 같은 주님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쫓겨나는 더러운 영입니다.
믿음의 힘과 지혜의 빛이 사라지면 악의 세력과 무지의 어둠이라는 더러운 영이 우리의 내면을 차지합니다. 어리석음과 불신의 혼란이 우리를 덮쳐버립니다.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늘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하느님의 사랑과 믿음, 지혜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좋으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의 사랑과 지혜로 우리를 가득 채워 주십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아멘.
-양승국신부- <슬픈 광대처럼> 이런 말들을 자주 사용합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정말 마음에 새겨들을 일입니다. 병에 걸리면 컨디션 관리나 영양보충에 더욱 신경을 쓸 뿐만 아니라,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치료를 위해 병원엘 가야지요. 정확한 진단을 받고, 그에 따른 제대로 된 치료를 해야 합니다. 물론 기도는 당연히 해야지요. 안수도 받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안 그래도 몸 상태가 안 좋은 사람 끌고 이곳저곳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굿을 벌인다, 기(氣)치료를 한다, 심령치료를 한다며 여러 군데 다니다가 병세를 더욱 악화시킨 사람들을 봅니다. 성장기에 있는 아이가 반항기가 많고, 문제를 일으키고, 사고를 치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분명히 심리적, 정서적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치료적 접근이 필요하지요. 아이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보다 집중적인 사랑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이에게 영적인 문제가 있다고 며칠씩 감금시킵니다. 밥도 주지 않고 며칠이고 굶깁니다. 악령을 쫓아낸다며 구타를 서슴지 않습니다. 정말 위험한 모습들이지요. 병이나 크나큰 시련이나 감당하기 힘든 문제 앞에서 우리 인간 측의 과실이나 실수인지, 아니면 정말 악의 세력에 의한 것인지 잘 식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끔씩 우연의 일치로 선무당도, 돌팔이도, 용감 무식한 사람도 제대로 맞출 수가 있습니다. 한건 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럴 그런 사람들 더욱 무섭지요. 기고만장해집니다. 사기충천합니다. 메시아라도 된 듯합니다. 뭐든 다 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들이 그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셔서, 개인적 능력 발휘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겸손하게 사용하라고 주신 능력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도와주셔서 몇 번 치유의 능력을 발휘한 후 제자들은 잔뜩 겉멋이 들었습니다. 스승님께서 치유활동하시는 것을 어깨너머로 봐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잔뜩 목에 힘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 인간적인 마음으로 치유를 시도했습니다. 결과는 전혀 먹혀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어, 이상한데, 분명히 잘 됐는데, 이게 아닌데...’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둘러선 사람들이 의혹에 찬 시선으로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들 사이비 아냐?’하는 수군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마치 묘기부리다 떨어진 슬픈 광대들처럼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제자들이 갑자기 이토록 당혹한 현실 앞에 직면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제대로 지적하신 것처럼 제자들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결국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메시지 하나는 이것입니다. 기도가 배경이 되지 않는 사목이나 치유활동은 헛것입니다. 사이비 무당이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기도가 선행되지 않는 봉사나 사도직 활동은 자기과시일 뿐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당부하십니다. “항상 기도하십시오.”
-강영구신부-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사건에 이어 악령이 들려 말을 못하는 아이를 치유한 기적을 들려주는 대목으로서 공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다.(마태 17,14-21; 루가 9,37-43) 그러니까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서 시작한 베드로의 메시아고백부터 오늘 복음의 기적까지가 공관복음의 공통된 내용인 셈이다. 아울러 오늘 기적은 예수께서 갈릴래아 활동기(마태 4,12-18,35; 마르 1,12-9,50; 루가 4,14-9,50) 중에 행하신 마지막 기적이다. 보다시피 마르코복음은 갈릴래아 활동기의 마지막 기적을 대단히 상세하고 장황하게 서술하고 있는 반면 마태오와 루가는 분량을 대폭 줄였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는 것(9,2)은 주지의 사실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거룩하게 변한 영광스러운 모습을 따로 데리고 간 3명의 제자들에게만 보여 주시는 동안 다른 9명의 제자들은 군중과 함께 산 아래에 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3명의 제자들에게 목격한 것을 자신이 계실 때까지는 절대 함구해야 한다는 명을 내리고 산 아래로 내려와 다른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왔다. 마침 제자들이 군중에 둘러싸여 율법학자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14절)고 한다. 연유인즉 예수께서 따로 산에 계시는 동안 남은 제자들에게 한 아버지가 악령이 들려 말을 못하는 아이를 데려와 고쳐달라고 청하였던 모양인데 제자들의 능력이 그 요구에 미치지 못하였던 것이다. 사유를 알게 된 예수께서 제자들과 군중과 율법학자들 모두를 포함한 이 세대에 믿음이 없음을 통탄하셨다.(19절) 모두에게 믿음이 없음을 나무라신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께 아이를 데려오자 아이를 사로잡고 있던 악령이 먼저 예수를 알아본다. 예수께 대한 악령의 인식은 아이에게 심한 발작을 일으킨 것으로 나타난다.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께 ’하실 수 있다면’(22절) 하는 단서를 붙이고 치유를 청한다.
조건부 청원에 예수께서 믿음만 있다면 만사형통이라고 하신다. 여기서 믿음의 중요성을 재삼 깨달을 수 있다. 아이의 아버지가 큰 소리로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다면 도와주십시오"(24절)하고 청했다. 이에 예수께서 큰 호령과 함께 아이를 치유해 주셨다. 사람들이 다 떠나고 예수의 일행이 집에 들어갔을 때 제자들이 자기들에게 기적의 능력이 없는 이유를 물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셨다. 이 대목에서 마태오는 제자들의 ’약한 믿음’을 이유로 들면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다해도 그 믿음이 산을 옳길 수 있는 효과를 낸다고 하였다.(마태 17,20) 이 대목에서 마태오가 마르코와는 달리 ’기도’ 대신에 ’믿음’을 언급한 이유는 병든 아이의 아버지가 지닌 부족한 믿음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즉, 부족하나마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기적이 가능하다는 것을 마태오가 강조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마르코의 ’기도’에 머물러 보자. 여기서 ’기도’라는 요소가 언뜻 보기에 전체문맥에 잘 어울리지 않게 보인다. 왜 예수께서는 오늘 구마치유기적의 마지막에 가서 ’기도’를 언급했을까? 마르코에 의하면 예수께서 기도하지 않는 자는 기적을 행할 수도 바랄 수도 없다는 식의 의도를 가진 것이 분명하다.
마르코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도중에 기도하신 일은 두 번 인데, 빵을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것이다.(6,41; 8,6) 그 외에도 예수께서는 자주 한적한 외딴 곳이나 산에서 기도하셨고(1,35; 6,46), 잡히시던 날 밤에 게쎄마니 동산에서 친히 아버지께 기도하셨고, 제자들에게도 깨어 기도하도록 권유하셨다.(14,37-39) 이렇게 볼 때 기도는 예수님의 일상(日常)에 속하며, 모든 가르침과 행적 아래 기도의 힘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기도’없이 아무 것도 하시지 않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기도는 사실 어떤 ’힘’이라기보다는 어떤 ’조건’이나 ’상태’이다. 다시 말해서 기도는 무엇을 행할 수 있는 ’힘’이라기보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준비하는 ’조건’이며 ’상태’인 셈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곧 믿음이다.
-유 광수신부- 예수님께서, "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그 영은 예수님을 보자 곧바로 아이를 뒤흔들어 댔다. 아이는 당에 쓰러져 거품을 흘리며 뒹글었다. 예수님께서 그 아버지에게 "아이가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대답하였다. "어릴 적부터입니다. 저 영이 자주 아이를 죽이려고 불 속으로도, 물 속으로도 내던졌습니다.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 주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스승님, 벙어리 영이 들린 제 아이를 스승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어디에서건 그 영이 아이를 사로잡기만 하면 거꾸러뜨립니다. 그러면 아이는 거품을 흘리고 이를 갈며 몸이 뻣뻣해집니다."하고 청한다. 어쩌면 이런 아이를 가진 부모님들이 계실런 지도 모른다. 아이가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또 그런 아이를 보고도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울까?
예수님은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듯이 당신에게 와서 청하는 아버지부터 진찰을 하신다. 예수님은 제일먼저 아이가 자라온 주변 환경을 물으신다. "아이가 이렇게 된지 얼마나 되었느냐?" 아마도 예수님이 보셨을 때 그 아이의 증세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꽤나 오래된 것같이 보이셨나 보다. 예수님의 질문은 우리가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면 의사들한테 흔히 듣는 질문이다.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입니다."라고 한 것을 보면 꽤나 오래되었고 "저 영이 자주 아이를 죽이려고 불 속으로도, 물 속으로도 내던졌습니다."라고 아이의 상태를 말 한 것을 들어보면 꽤나 심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아이의 병은 아이에게서 생긴 것이 아니라 아버지한테서 생긴 것이라는 것을 알아채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이를 고치려면 무엇보다 아이를 병들게 한 아버지부터 고쳐야 한다는 것을 아셨다. 어쩌면 아이보다 아버지가 더 중병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병은 아버지 혼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까지 전염되었고 더 나아가 다른 가족 전체에게도 전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앓고 있는 병은 무슨 병인가? 아이가 이렇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아버지는 예수님께 "벙어리 영이 들린 제 아들"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이가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하고 물으시자 "어릴 적부터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니까 이아이는 어릴 적부터 믿음이 없는 부모 밑에서 자린 아이다. "아이"라는 말은 부모의 보호 밑에 자라는 나이다. 즉 자기가 무엇을 판단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 부모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나이이다. 이 아이는 "믿음이 없는"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다. 그러니까 하느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들은 것 없이 자란 아이다.
"벙어리 영이 들린 제 아들"이라는 말은 단순히 말을 하지 못하는 아들을 말하지 않는다. 이 아들은 말을 하고 있다. 말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말은 하나의 언어이다. 즉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다. 자기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자연히 그 사람은 자기가 갖고 있는 언어로 말을 할 수밖에 없다. 내가 한국 사람이면 한국어로 표현할 것이고 미국 사람이면 영어로 표현할 것이다. 그 언어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로부터 익혀온 언어이다. 부모가 한국 사람이면 한국어를 가르쳤을 것이고 미국 사람이면 영어를 가르쳤을 것이다. 여기서 가르친다는 것은 물론 의도적인 것도 있겠지만 어릴 적부터 함께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 것이다. 어릴 적부터 익혀온 언어를 모국어라고 하고 그 언어는 다른 모든 언어를 배울 때에 기초가 되고 모국어는 자연스럽게 언제 어디에서든 자기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커서 다른 외국어를 배우려면 아주 힘들다. 아무리 배워도 자연스럽지 않고 어색하다. 이미 모국어로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가 배운 언어는 무슨 언어일가? 아이는 믿음에 대해서 배우지를 못했다.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도 못했고 말한 적도 없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는 부모 밑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벙어리 영이 들렸다는 것은 단순히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해서 말을 할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아이는 분명히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 "거품을 흘리고 이를 갈며 몸이 뻣뻣해집니다. 땅에 쓰러져 거품을 흘리며 뒹굴고, 불 속으로도 물 속으로도 내던졌습니다."라는 것은 아이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이고 말이다. 절대로 이 아이는 벙어리가 아니다. 정상적인 말을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아이는 충분히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 다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요, 너무 격하고 이상한 언어를 사용할 뿐이다. 하느님을 모르면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모두 격하고 강하고 이상하다. 아무리 약한 소리라도 하느님을 찬미하는 소리,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소리는 아름답고 누구에게나 기쁨을 준다. 하지만 하느님에 관한 언어가 아닐 때 그 어떤 언어도 그 어떤 말도 이상한 소리요, 이상한 언어이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대는 예수님이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라고 한탄하실만큼 믿음이 없는 세대이다. 나라 전체가 로또 복권같은 허황된 꿈에 들 떠 있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거짓말, 남을 비방하는 말, 사람을 죽이는 말, 사기, 부정, 음란, 도박, 마약 등으로 병들어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과연 무슨 말을 배우겠는가?
부모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과연 하느님에 대해서 말을 할 수 있을까? 매일 보는 것이 서로 싸우고, 세상 이야기 뿐이고, 술, 도박, 이혼, 비정상적인 관계 등의 분위기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하느님에 대해서 말을 할 줄 알겠는가?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가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라는 예수님의 한탄은 2천 년 전의 한탄이 아닐 것이다. 우리 아이가 성당에 가지 않고 하느님을 믿지 않게 된 것은 아이의 탓이라고 보기보다는 어쩌면 부모의 탓이 아닐까? 어릴 적부터 보고 들은 것이 오늘의 아이로 성장시켜 온 것일 것이다. 오늘 우리의 자녀들이 잘못되었다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자라온 가정 환경, 부모의 영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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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사 원문보기 글쓴이: 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