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은총의수로꾸리아
 
 
 
카페 게시글
오늘의말씀 ♣ 복음묵상 스크랩 2008년 5월 19일 연중 제7주간 월요일
이대건안드레아 추천 0 조회 3 08.05.20 08:4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008년 5월 19일 연중 제7주간 월요일

 

그 뒤 예수께서 집으로 들어가셨을 때에 제자들이
“왜 저희는 악령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
하고 넌지시 물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런 것을 쫓아낼 수 없다.”
(마르9,14-29)


When he entered the house,

his disciples asked him in private,
“Why could we not drive the spirit out?”
He said to them,

“This kind can onl    y come out through prayer.”

 

 

 

말씀의 초대

시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이 있고,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악행이 있다. 남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시기심이 생기는 것이다. 자신의 본모습을 보지 못하기에 이기심을 가지는 것이다. 하늘의 지혜를 청해야 한다. 그래야 평화와 관대함을 지닐 수 있다(제1독서). 어떤 영이 아이를 괴롭혔다. 아이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영을 쫓아내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해결하지 못한다. 그만큼 강한 영이었다. 예수님의 능력만이 아이를 치유할 수 있었다. 제자들은 더욱 스승님을 믿고 따른다(복음).

 

†♡†♡†

 

오늘의 묵상

‘아이는 또다시 땅에 쓰러져 거품을 흘리며 뒹굽니다. 늘 보는 일이지만 앞이 막막합니다. 이젠 마지막이 되어야 할 터인데. 왠지 저분은 고쳐 주실 것만 같아.’ 그 순간 예수님께서 말씀을 건네십니다. “아이가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 아이 아버지는 애절한 마음으로 두 손을 모읍니다. “어릴 적부터입니다.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러자 아이 아버지는 황급히 외칩니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아이 아버지의 순수한 다급함이 눈에 선합니다. 어쩔 줄 모르는 그의 모습이 안쓰러워지는 대목입니다.
오늘 복음이 가르치는 대로, 기적은 믿음의 결과입니다. 믿는 이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기적을 동반하는 믿음에는 이렇듯 애틋함이 있습니다. 자신을 희생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병든 아이를 보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저 아이를 고칠 수 있다면 무엇이든 못하랴.’ 하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강한 믿음도 사랑이 없으면 힘을 쓰지 못합니다. 사랑과 함께하는 믿음이라야 기적을 모셔 옵니다. 아이 아버지의 애정이 기적의 출발점이었습니다

 

†♡†♡†♡†♡†♡†♡†♡†♡†♡†♡†♡†♡†♡†♡†♡†♡†♡†♡†♡†♡†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며 평생을 사셨던 할아버지께서 도시에 살고 있는 큰 아들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처음으로 방문하신 아버지를 위해 아들은 최선을 다해서 맞이했지요. 이제 밤이 되어 할아버지는 잠자리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납니다. 아주 기괴한 소리, 정말로 듣기 싫은 소리가 나서 할아버지는 그 소리를 찾아서 나섰지요. 그 소리의 진원지는 바로 손자의 바이올린 켜는 소리였습니다. 이제 막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기에 그 소리가 결코 아름답지 못했지요. 할아버지는 이렇게 형편없는 소리를 내는 악기를 연습하는 손자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 날, 할아버지께서는 둘째 아들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둘째 아들 역시 처음으로 방문하신 아버지를 위해 최선을 다해 맞이했지요. 그리고 밤이 되어 할아버지는 잠자리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큰 아들의 집에서 들었던 소리와는 달리 너무나도 아름답고 듣기 좋은 소리였습니다. 시골에서는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아름다운 소리였지요. 그 소리를 찾아 나선 할아버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소리의 진원지는 손녀의 바이올린 켜는 소리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똑같은 바이올린인데 이렇게 다른 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지요.

똑같은 바이올린입니다. 그러나 누가 연주를 하느냐에 따라서 소리가 달라지더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당연한 진리를 우리는 자주 잊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주님께 대한 우리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위의 진리를 잊어버리고 자주 주님을 원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들에게 많은 은총과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 은총과 사랑을 바라보려고 하기보다는 내게 아무런 것도 주시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에게만 사랑을 베푸신다는 말도 안 되는 불평과 불만을 주님께 던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은총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우리들 자체가 문제인 것이지, 결코 똑같은 은총과 사랑을 주시는 주님이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우리들이기에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쁜 영이 들어간 아이의 아버지처럼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라는 가정의 말을, 그리고 조건의 말만을 계속해서 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들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간직하기를 우리들에게 요구하십니다. 그래야 주님께서는 주시는 그 큰 은총과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의 믿음은 과연 어떠할까요? 나는 과연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충만히 받을 수 있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렇지 못한 우리들이기에 오늘도 우리는 주님께 기도합니다.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음악감상을 통해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보세요.

†♡†♡†♡†♡†♡†♡†♡†♡†♡†♡†♡†♡†♡†♡†♡†♡†♡†♡†♡†♡†

 

내 손을 잡아주시는 주님      

-강윤철 신부-

 

간질병을 앓는 아이의 부모가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왔으나 제자들을 먼저
만나게 됩니다. 성경 기록자가 밝힌 대로 제자들은 무능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 청합니다. 매번 그러셨듯이 예수님은 기적 전에 믿음을 확인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기적을 부르고 불가능을 가능케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기대도 간청도 없을 것이며 그런 자에게는 어떤 은혜도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은혜를 받아들이는 바탕입니다. 비가 쏟아지듯이 은혜가
베풀어져도 믿음이 없으면 흘러가버리는 물과 같습니다. 그릇이 준비 안 된
것입니다. 확고한 믿음이 내게 있는가? 밑져야 본전이라는 식은 아닌가?
차라리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고백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스스로는 이룰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인정하고 두 손 들고 항복하며 주님의 자비와 능력을 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엾이 여기시어 필요한 은총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죽은 것처럼 된 아이에게 그러셨듯이 내 손을 잡아 일으켜 건강한 영과 육으로 당신 앞에 서게 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기적의 힘은 기도가 있어야 낼 수 있다 하십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이요 대화이며 일치를 이루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믿음은 하느님께 나를 내맡기는 것이며, 그분의 전능에 참여하게 합니다.
믿음과 기도로 ‘악의 세력’과의 투쟁에서 이기고 싶습니다.

 

†♡†♡†♡†♡†♡†♡†♡†♡†♡†♡†♡†♡†♡†♡†♡†♡†♡†♡†♡†♡†

 

기도의 능력

- 원순희 목사(여수 송여자 생명교회)- 

 

기도하지 않으면 좀처럼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볼 수 없다. 구석구석 도사리고 있는 부정적인 요소를 찾아내기가 어렵다. 말만 하면 죄요, 생각만 하면 죄를 품고, 움직였다 하면 죄를 범하는 나 자신이 얼마나 악한지를 알지 못한다. 기도할 때 이런 죄인인 나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그 사랑에 감사하며 오늘도 새로운 삶을 다짐한다.
기도하지 않으면 어느 길이 참된 길인지 몰라 방황하게 되지만 기도하면 주님께서 당신이 곧 길이라고 가르쳐 주신다.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의 좋은 것,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어느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할지 헤매게 되지만, 기도하면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주님이 보인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린다.
기도하면 나를 유혹하여 자신의 종으로 삼으려 했던 악한 영이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고 멀리 떠난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쳐 준다.

†♡†♡†♡†♡†♡†♡†♡†♡†♡†♡†♡†♡†♡†♡†♡†♡†♡†♡†♡†♡†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양승국신부-


<온 세상 곳곳을 다 다녀봤지만>


요즘 많은 분들이 ‘보이스 피싱’(voice phishing, 電話詐欺))이란 신종 사기 수법에 넘어가 곤혹을 치르기도 합니다. 참으로 ‘희한한’ 세상입니다.


전화 사기범들은 기상천외한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어린 자녀가 납치당한 것처럼 가장해서 돈을 송금하게 합니다. 갑자기 마음의 평정을 상실한 부모님들은 손쉽게 넘어갑니다. 멀쩡한 대낮에 눈 뻔히 뜨고 사기를 당하는 것입니다.


법원이나 금융기관, 경찰서 등 국가 공공기관 직원으로 사칭해 개인정보나 금융정보를 훔쳐가기도 합니다. 완벽하게 판을 짜놓고, 치밀하게 작전을 세워놓고 덤벼드니, 넘어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한번 속은 사람들, 그래서 꽤나 큰 충격을 입은 분들의 피해는 금전적 피해에 그치지 않습니다. 정신적, 심리적 피해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세상이 무섭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차게 됩니다. 이 세상과 사람들을 향한 마음의 문을 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어떤 일이든, 그 어떤 사람이든 일단 의심을 지니게 됩니다.


누군가 호의를 베풀면 ‘저 사람이 또 나에게 사기 치려고 다가오는 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향해 미소 지으면, ‘뭔가 분명히 흑심을 품고 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러다보니 대인관계가 상당히 위축되고, 관계맺음 방식이 왜곡됩니다.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어디 한군데 마음 둘 곳이 없습니다. 절친했던 친구로부터도 배신을 당합니다. 믿었던 상사로부터도 내침을 당합니다. 가족들도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사기범들은 기를 쓰고 덤벼듭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정이 훨씬 나은 편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다 걸어도 불안하지 않을 신의의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존재 전체를 다 바쳐도 괜찮은 분, 우리 모든 것을 다 맡겨도 안심되는 분, 신뢰의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존재 전체, 영혼과 삶 전체를 맡길 곳은 오직 주님 당신뿐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사람, 그래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오직 주님께만 신뢰를 둔 바로 그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영이 들린 아이를 말끔히 치유시켜주시면서 우리에게 진실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단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온전히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들, 조금의 의혹도 지니지 않고 하느님께 미래를 맡기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큰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깊은 내적 평화입니다. 충만한 행복입니다.


높이 올라가 계신 분들, 현재의 위치를 유지하느라,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사람들 견제하느라 잠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큰 부(富)를 소유한 사람들, 혹시나 누군가 빼앗아가지 않을까 지키느라 행복할 순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가운데 깊은 내적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충만한 행복을 맛보며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가난한 사람입니다. 소박한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입니다. 소외 받은 사람입니다. 낮은 곳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 어디 가도 믿을 사람 한명 없는 사람입니다.


온 세상 곳곳을 다 다녀봤지만 믿을 사람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그였기에, 오직 단 한분 하느님께만이 진실하다는 것을 알게 된 그였기에, 그래서 오직 주님께만 신뢰를 두는 그 사람, 그 사람은 행복합니다.

 

 

†♡†♡†♡†♡†♡†♡†♡†♡†♡†♡†♡†♡†♡†♡†♡†♡†♡†♡†♡†♡†

 

지혜로운 사람은

-김찬선신부-

 

오늘의 야고보서는
누가 지혜로운 사람인지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나름대로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묵상해보았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모르는 것을 아는데
어리석은 사람은 아는 것을 자랑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필요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많은 지식 때문에 그 지식에 체이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는데 지식을 활용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그저 지식을 쫓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이 더 가치 있는지를 알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여러 가치가 엉켜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꼭 필요한 일만 하며
일의 선후에 따라 가지런히 일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많은 일을 하며
마음이 바빠 일이 뒤죽박죽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가장 값진 것을 위해 다른 것은 포기하는데
어리석은 사람은 모두 욕심내고 특히 小貪大失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德으로 재능을 십분 활용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才勝德하여 재능 때문에 인생을 망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강함과 장점을 의식하지 않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강함과 장점을 드러내다 망신당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을 모으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재물을 모으며
지혜로운 사람은 반대자도 소중히 여기어 옆에 두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지지자만 가까이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을 보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보고
지혜로운 사람은 선을 공유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경쟁을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善을 많이 보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惡 을 많이 보고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善을 즐기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最善을 탐하다 次善마저 놓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성공을 두려워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성실을 위해 무엇을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성공을 위해 무엇을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열심히 하지만 욕심을 부리지 않고
어리석은 사람은 욕심만 부리고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을 소중히 하여 더불어 일을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일에 치중하다 사람을 잃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중요하고 필요한 말만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합니다.

끝으로
어리석은 사람은 出世를 꿈꾸고
지혜로운 사람은 出家를 꿈꾸지만
영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出家在俗합니다.
그리하여
어리석은 사람은 그저 세상사만 바라보고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사 가운데서 사람을 바라보지만
영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하늘에서 세상과 사람을 바라봅니다.

 

†♡†♡†♡†♡†♡†♡†♡†♡†♡†♡†♡†♡†♡†♡†♡†♡†♡†♡†♡†♡†

 

 

<독서> : 하느님의 지혜를 구하는 신앙인
- 경규봉 신부-


야고보 사도는 지혜로운 사람에 대하여 말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온유한 마음과 착한 행동을 한다. 그는 평화를 위하여 일함으로써 교회를 분열시키지 않고, 교회 내에 평화를 가져온다.

참된 지혜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이다. 참된 지혜를 가진 사람은 이기적 야심을 갖거나 잘난 체하지 않는다. 참된 지혜는 외관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거나 편파적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는다. 참된 지혜는 진실하고 순결하며 위선이 없다. 교회 안에서 선생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이처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갖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사람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피조물이다. 사람의 자리는 분명 피조물의 자리다. 다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셔서 사람을 만물의 으뜸이 되게 하셨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협력하며, 세상을 다스리고 관리하도록 하셨을 따름이다.

그런데 사람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점 때문에 자신의 자리를 잊어버리고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다. 때로는 자신이 하느님인 것처럼 생각하고, 모든 것의 주인인양 행동하며,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처럼 착각을 한다.

이처럼 자신을 하느님의 자리에 올려놓으려 하고 자신을 하느님처럼 드러내고 높이려 하는 데에서 죄가 시작된다. 더욱이 사람은 피조물로서 마땅히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기보다 자신의 힘만으로 하느님처럼 되고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를 통하여 이를 여실히 볼 수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하느님처럼 되고자 했다. 그들은 나름대로 만물의 으뜸이며 최고의 지성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다. 하느님을 제외하고도 하느님처럼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지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하느님처럼 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한 결과 그들이 얻은 것은 지극히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벌거숭이란 사실을 알았을 뿐이었다. 벌거숭이, 인간이 얼마나 하잘것없는 존재인가를 깨달은 것이었다. 인간의 지성, 지혜, 능력, 판단 그 모든 것이 벌거숭이와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

그래서 시편의 저자는 “사람들은 숨결에 지나지 않고 높다는 것도 실은 거짓말, 모두 합쳐 저울에 올려놓아야 역시 숨결보다도 가볍다.”(시편 62,9)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는 것, 한평생이래야 지나가는 그림자입니다.”(144,4) “숨 한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고 그 때에는 모든 계획 사라진 다.”(146,4)라고 노래했다.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추켜세우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는 별다른 능력이 없어도, 그다지 총명하지 못해도, 가진 것이 없어도 자신이 많이 가진 능력자인 것처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신의 판단과 생각이 옳지 않더라도 자신을 굽히지 않고 고집하곤 한다. 그러한 이들로 인하여 공동체에 분열이 생기고, 평화가 깨진다.

사도 야고보는 사람의 지혜가 제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아니라면 그것은 세속적이며 동물적이며 악마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지혜로 인하여 분란과 더러운 행실이 생기게 마련이라고 가르친다. 인간 자체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 역시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이기적이며, 속되고, 분열을 가져올 따름이다.

그래서 신앙인은 겸손되이 하느님 앞에 서서 자신이 흙이요 먼지이며, 한낱 숨결일 따름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미약함을 알고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고자 자신을 비우는 사람이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접고 하느님의 지혜를 구하는 사람이다.

우리 모두 하느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며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하루를 살자.....................◆

 

†♡†♡†♡†♡†♡†♡†♡†♡†♡†♡†♡†♡†♡†♡†♡†♡†♡†♡†♡†♡†

 

기적은 굳건한 믿음과 기적의 열매
- 이장환 신부-


여러분 반갑습니다.
우선 오늘 복음의 내용을 한번 간추려봅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가셨고 그래서 제자들만 남겨진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높은 산에서 세 제자들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체험하는 동안 남아있던 제자들은 율법학자들과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악령이 들려 말을 못하는 아들을 예수님께 보이려 데리고 왔던 한 아버지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자 제자들에게 악령을 쫓아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악령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율법학자들이 무능한 제자들을 세차게 몰아세웠던가 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그 아버지는 예수님께 제자들이 고칠 능력이 없었음을 호소하고 이에 예수님은 믿음이 없음에 대해 한탄하십니다. 아이 아버지는 불신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믿음이 없는 자기를 도와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쫓아내시고 그 아이를 살려내십니다. 집으로 돌아와 제자들이 자기들은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는지를 물었을 때 예수님은 굳건한 믿음을 강조하시고 이런 기적은 기도로써만 가능하다고 덧붙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치유의 능력을 갖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묘사하는 아들의 병 증세를 보면 간질병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간질병과 같은 아주 고약한 병이 악령에 의해서 발병된다고 여겼던 당대 사람들의 생각이 반영되어 예수님의 치유이야기가 구마이야기의 성격을 띠게 됩니다. 사실 사도행전의 여러 곳에서 예수의 이름과 기도로써 병을 치유하거나 악령을 쫓아내는 것이 초대 교회의 중요한 활동 중의 하나였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을 갖고 기도할 때 하느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여기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믿음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되는가? 기도만 하면 다 이루어지는가라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병으로 죽어간 모든 사람들은 믿음이 없거나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얼마 전 선종하신 교황 요한바오로2세도 우리의 기도가 부족해서인가? 그것이 무엇이든지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믿음이 없고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물론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치유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하다고 하신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적과 기도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함께 묵상해 봅시다.

먼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기적의 의미를 깨달아야합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신 것은 예수님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임을 믿게 하려는 데 기적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치유이야기는 우리에게 마술과 같은 신기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는 표징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 없이,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했던 제자들이 그 병자를 치유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집니다.

다음으로 기도를 내가 원하는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기도란 내가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 기도문을 외우고 성체 앞에 조용히 머물 때도 기도하는 것이지만 하느님의 뜻이 나의 행동을 통해 드러나게 활동할 때 그것 역시 훌륭한 기도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내 마음이 하느님의 뜻을 묻고 하느님 뜻 안에서 살아가려 노력할 때 이 역시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내 삶이 기도입니다. 하느님 안에 머물고 있는 것이니까요.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 기도이지 내 뜻을 구하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은 기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세상 만물이 하느님을 드러내고 있고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삶을 증거하고 있다면 기적으로 가득 찬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기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즉 하느님 안에,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부족한 제 믿음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처럼 우리 자신의 부족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면서 내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기를 간구함으로써 기적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만들어 나가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

 

 

-오늘의 묵상에서-
어느 달동네에 한 어린아이가 큰 병으로 앓아누웠는데 너무 가난한 나머지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죽을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부모는 자식의 머리만 쓰다듬어 줄 뿐 달리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의 형인 다섯 살 난 꼬마가 엄마의 간절한 기도를 듣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기적을 주시옵소서! 제발 기적을 주시옵소서! 기적을…….” 이 애절한 엄마의 기도를 들은 형은 자기의 저금통을 깨어 7천6백 원을 가지고 약국으로 달려가 말했습니다.
“기적을 주세요!” 약사는 황당한 표정으로 “기적이라니?” 하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꼬마는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내 동생이 많이 아파요. 그런데 기적이 있어야 낫는데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한 신사가 물었습니다. “얘야, 네 동생한테 어떤 기적이 필요하지?” “나도 몰라요. 엄마가 늘 기적을 달라고 기도하고 계셔요.” 신사는 꼬마를 앞세워 그의 집으로 가서 동생을 진찰하고 바로 병원으로 옮겨 큰 수술까지 해 주었습니다.
그 신사는 의사였던 것입니다. 수술 뒤 아이의 엄마가 걱정스럽게 수술비를 물어보자 그 의사는 대답했습니다. “7천6백 원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새벽을 열며


지금 제 방은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 있습니다. 글쎄 제가 보유하고 있는 컴퓨터 3대가 완전히 분해되어 있거든요. 왜 그러냐고요? 사실 새해를 맞이해서 제가 많이 이용하는 컴퓨터를 뜯어서 청소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컴퓨터 안을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엄청난 먼지가 그 안을 채우고 있답니다. 따라서 저는 하나씩 부품을 떼어내어서 먼지를 모두 제거할 생각을 한 것이지요.

과감하게 연결된 선을 제거하고 부품을 떼어내어서 하나씩 청소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조립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분명히 다 조립했는데 하나의 컴퓨터가 켜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컴퓨터가 켜지지 않으면 방송을 할 수도 없습니다.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제가 직접 조립한 컴퓨터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더군다나 저의 컴퓨터를 조립 경험이 몇 년인데요. 하지만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뜯어서 꼼꼼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역시 잘못된 부분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확신했습니다. “컴퓨터가 고장 났구나. 그 동안 너무나 혹사를 시켜서 컴퓨터가 드디어 맛이 갔나보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포기하려는 순간, 무엇인가가 보였습니다. 선을 하나 잘못 연결한 것입니다.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 연결해야 하는데, 전혀 엉뚱한 곳에 연결해 놓았던 것이지요. 컴퓨터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저의 부주의로 인해 생긴 결과였던 것입니다.

솔직히 좀 부끄럽더군요. 스스로 잘 안다면서 저의 실수는 인정하지 않고 컴퓨터의 고장이라고 쉽게 단정했던 저의 모습을 말입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이런 모습을 보일 때가 너무나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저의 실수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고 남의 실수를 보고서는 ‘어쩌면 그럴 수가 있어.’라고 말하면서 인정하지 않는 저의 모습을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율법학자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악령 들린 아이를 쫓아내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아마 율법학자들은 ‘지금이 기회다’라는 식으로 공격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고칠 수 있다고 하면서도 전혀 고치지 못한다고 말이지요. 바로 예수님께서는 이 모습을 보시고 안타까움에 말씀하십니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지요. 바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악령을 쫓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기도의 중요성을 다시금 말씀하십니다. 제자나 율법학자나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주장했을 뿐,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 믿음이 없고 또 기도가 부족했음을 인정하지는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혹시 지금 내 모습도 이렇지 않을까요? 내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관대해지려고 했던 저의 모습을 보면서, 저 역시 너무나도 믿음이 없고 기도가 부족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나의 실수를 먼저 인정합시다.


빠다킹신부

 


사랑하는 마음    

- 이정호신부-

수도원에서도 싸움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식사 중에 한 수사님이 깍두기 두 개를 집어먹습니다.
그러자 앞에 앉은 다른 수사님이 왜 절제하지 못하고 깍두기를
두 개씩이나 먹었느냐고 그 수사님에게 면박을 줍니다. 물론 이런 이유를
내세우며 싸우는 일은 없겠지만 근본적인 마음가짐은 깍두기 한 개 때문에
싸우는 것과 별반 다름이 없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서로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데 따르는 상처를 받기 싫어서
고통을 받기 싫어서 서로를 외면하고 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립니다. 어둡고
침침한 분노와 원망 속에 나를 가둡니다. 사랑하지 않는 데서 죄가 시작됩니다.
죄는 나를 망가뜨리고 메말라가게 합니다. 죄는 스스로를 죽게 하고 이웃한
이들에게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합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단지 죄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마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기도로 하느님을 모시고 사랑으로 그분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기 위해서라도 악의 잡초가 내 마음의 화단을 덮치지 않도록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기도와 성사로 가꾸어가야겠습니다.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
김홍일 신부(성공회 · 나눔의 집 협의회)-

한때 기도를 나의 계획과 관심과 욕구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하느님을 움직이는 주술처럼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 “‘하실 수 있으면’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하신 성경 말씀은 기도에 대한 나의 그같은 믿음과 신념을 보증해 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음 다른 한구석에는 좌절된 기도의 경험들에 대한 설명할 수 없는 의심과 반문이 늘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후에야 기도란 나의 계획과 관심과 욕구의 충족을 위하여 하느님을 움직이고 조정하는 주술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고 복종하기 위하여 자신을 비우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비운 그 공간에서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을 위하여 무엇이든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기도의 응답이 내가 바라는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뜻을 깨닫고, 그 뜻에 내가 순종함으로써 이루지는 것임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문제는 늘 믿음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신다는 믿음, 하느님께서는 우리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더 잘 알고 계시다는 믿음, 하느님께서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깊고 크게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에 대한 믿음. 기도를 통하여 내 마음 안에 그같은 믿음이 자라나고, 그같은 믿음의 기초 위에서 드려지는 기도 속에서 하느님께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생각하면 수많은 기도 제목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가운데서도 내 안에 깊이 잠재되어 내 마음과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더러운 영과의 싸움은 죽는 날까지 안고 가야 하는 기도 제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는 그 무엇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결코 포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믿음과 지혜, 그리고 기도

-이수철신부-

하느님께 대한 감수성을,

놀라움을 회복해야 합니다.


머리들은 닳고 닳아 빛나지만

마음들은 날로 무디어지고

황량해지는 오늘의 현실입니다.

 

옛 믿음의 선배들은 이성적,

합리적 사고는 부족했을지 몰라도

하느님에 대한 감수성은,

놀라움의 감각은 단연 탁월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자연 사물에 대한 놀라움에서

하느님을 찾는 믿음의 여정이 시작되고,

시(詩)들도 저절로 흘러나옵니다.

“주, 저희의 하느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존엄하십니까?
  하늘 위에 당신 엄위를 세우셨습니다.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이런 하느님께 대한 놀라움이나 

감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이런 놀라움에서 저절로 샘솟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요,

더불어 무럭무럭 자라나는 믿음이요 지혜입니다.

 

맹목적 믿음이 아니라 지혜로운 믿음입니다.
하느님은 지혜 자체이시자 믿음 자체이십니다.

 

지극히 경외해야 할 지혜로운 한 분이 계시니

당신의 옥좌에 앉으신 하느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지혜를 만드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 지혜를 선물로 주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운 지혜이며

이 지혜 있어 하느님을 알아봅니다.

 

하느님을 찾는 믿음과 사랑의 여정 중에

더불어 깊어지는 지혜요,

이 지혜는 바로 사랑이요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모두가 하느님께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지혜,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믿음의 결정체인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로다!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오늘 날 세대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탄식입니다.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위의 더러운 영이 들린 아이의 아버지와 주님과의 대화에서

믿음 부족한 우리 자신을 봅니다.

 

지혜와 믿음의 화신과도 같은 주님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쫓겨나는 더러운 영입니다.

 

믿음의 힘과 지혜의 빛이 사라지면

악의 세력과 무지의 어둠이라는 더러운 영이

우리의 내면을 차지합니다.

어리석음과 불신의 혼란이 우리를 덮쳐버립니다.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새삼 끊임없이 드리는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늘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하느님의 사랑과 믿음,

지혜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좋으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의 사랑과 지혜로 우리를 가득 채워 주십니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아멘.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양승국신부-


<슬픈 광대처럼>


이런 말들을 자주 사용합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정말 마음에 새겨들을 일입니다. 병에 걸리면 컨디션 관리나 영양보충에 더욱 신경을 쓸 뿐만 아니라,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치료를 위해 병원엘 가야지요. 정확한 진단을 받고, 그에 따른 제대로 된 치료를 해야 합니다. 물론 기도는 당연히 해야지요. 안수도 받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안 그래도 몸 상태가 안 좋은 사람 끌고 이곳저곳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굿을 벌인다, 기(氣)치료를 한다, 심령치료를 한다며 여러 군데 다니다가 병세를 더욱 악화시킨 사람들을 봅니다.


성장기에 있는 아이가 반항기가 많고, 문제를 일으키고, 사고를 치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분명히 심리적, 정서적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치료적 접근이 필요하지요. 아이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보다 집중적인 사랑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이에게 영적인 문제가 있다고 며칠씩 감금시킵니다. 밥도 주지 않고 며칠이고 굶깁니다. 악령을 쫓아낸다며 구타를 서슴지 않습니다.


정말 위험한 모습들이지요. 병이나 크나큰 시련이나 감당하기 힘든 문제 앞에서 우리 인간 측의 과실이나 실수인지, 아니면 정말 악의 세력에 의한 것인지 잘 식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끔씩 우연의 일치로 선무당도, 돌팔이도, 용감 무식한 사람도 제대로 맞출 수가 있습니다. 한건 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럴  그런 사람들 더욱 무섭지요. 기고만장해집니다. 사기충천합니다. 메시아라도 된 듯합니다. 뭐든 다 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들이 그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셔서, 개인적 능력 발휘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겸손하게 사용하라고 주신 능력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도와주셔서 몇 번 치유의 능력을 발휘한 후 제자들은 잔뜩 겉멋이 들었습니다. 스승님께서 치유활동하시는 것을 어깨너머로 봐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잔뜩 목에 힘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 인간적인 마음으로 치유를 시도했습니다.


결과는 전혀 먹혀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어, 이상한데, 분명히 잘 됐는데, 이게 아닌데...’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둘러선 사람들이 의혹에 찬 시선으로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들 사이비 아냐?’하는 수군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마치 묘기부리다 떨어진 슬픈 광대들처럼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제자들이 갑자기 이토록 당혹한 현실 앞에 직면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제대로 지적하신 것처럼 제자들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결국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메시지 하나는 이것입니다. 기도가 배경이 되지 않는 사목이나 치유활동은 헛것입니다. 사이비 무당이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기도가 선행되지 않는 봉사나 사도직 활동은 자기과시일 뿐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당부하십니다.


“항상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는 예수

 -강영구신부-

스승 예수님, 당신은 기도의 사람입니다. 저희가 당신을 스승이요 주님이라 고백하는 것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기도하지 않는 분이었더라면 저희는 당신을 스승으로 받들지도 않았을 것이고 주님이라 고백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의 예수다움은 기도 할 때에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자주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 밤 새워 기도하셨습니다.(루가6,12) 기도를 통해서 당신은 언제나 하느님과 소통하는 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 통로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권능에 참여할 수 있는 길입니다.
당신이 악령 들린 아이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기도의 힘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힘으로 악령을 쫓아내신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당신은 하느님의 권능으로 악령을 쫓아내셨습니다. 기도로 하느님의 권능에 참여하고 있는 당신 주위에 악령이 머물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기도의 사람인 당신은 십자가에 매달려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기도하셨습니다.(루가23,46) 기도하는 당신이야 말로 하느님의 아들이며 저희들의 스승이요 구세주이십니다.

오늘 이 시대는 기도를 잃어버렸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이 시대는 하늘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하늘의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늘을 외면하고 사는 이 시대는 땅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합니다. 욕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돈과 권력으로, 과학기술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자만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이 시대는 악령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 저희로 하여금 기도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이 시대로부터 악령을 몰아낼 수 있도록 당신의 권능에 참여하게 하소서.(一明)

 

 


기도는 하느님의 일을 만드는 조건이며 상태이다.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사건에 이어 악령이 들려 말을 못하는 아이를 치유한 기적을 들려주는 대목으로서 공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다.(마태 17,14-21; 루가 9,37-43) 그러니까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서 시작한 베드로의 메시아고백부터 오늘 복음의 기적까지가 공관복음의 공통된 내용인 셈이다. 아울러 오늘 기적은 예수께서 갈릴래아 활동기(마태 4,12-18,35; 마르 1,12-9,50; 루가 4,14-9,50) 중에 행하신 마지막 기적이다. 보다시피 마르코복음은 갈릴래아 활동기의 마지막 기적을 대단히 상세하고 장황하게 서술하고 있는 반면 마태오와 루가는 분량을 대폭 줄였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는 것(9,2)은 주지의 사실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거룩하게 변한 영광스러운 모습을 따로 데리고 간 3명의 제자들에게만 보여 주시는 동안 다른 9명의 제자들은 군중과 함께 산 아래에 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3명의 제자들에게 목격한 것을 자신이 계실 때까지는 절대 함구해야 한다는 명을 내리고 산 아래로 내려와 다른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왔다. 마침 제자들이 군중에 둘러싸여 율법학자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14절)고 한다. 연유인즉 예수께서 따로 산에 계시는 동안 남은 제자들에게 한 아버지가 악령이 들려 말을 못하는 아이를 데려와 고쳐달라고 청하였던 모양인데 제자들의 능력이 그 요구에 미치지 못하였던 것이다. 사유를 알게 된 예수께서 제자들과 군중과 율법학자들 모두를 포함한 이 세대에 믿음이 없음을 통탄하셨다.(19절) 모두에게 믿음이 없음을 나무라신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께 아이를 데려오자 아이를 사로잡고 있던 악령이 먼저 예수를 알아본다. 예수께 대한 악령의 인식은 아이에게 심한 발작을 일으킨 것으로 나타난다.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께 ’하실 수 있다면’(22절) 하는 단서를 붙이고 치유를 청한다.

 

  조건부 청원에 예수께서 믿음만 있다면 만사형통이라고 하신다. 여기서 믿음의 중요성을 재삼 깨달을 수 있다. 아이의 아버지가 큰 소리로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다면 도와주십시오"(24절)하고 청했다. 이에 예수께서 큰 호령과 함께 아이를 치유해 주셨다. 사람들이 다 떠나고 예수의 일행이 집에 들어갔을 때 제자들이 자기들에게 기적의 능력이 없는 이유를 물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셨다. 이 대목에서 마태오는 제자들의 ’약한 믿음’을 이유로 들면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다해도 그 믿음이 산을 옳길 수 있는 효과를 낸다고 하였다.(마태 17,20) 이 대목에서 마태오가 마르코와는 달리 ’기도’ 대신에 ’믿음’을 언급한 이유는 병든 아이의 아버지가 지닌 부족한 믿음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즉, 부족하나마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기적이 가능하다는 것을 마태오가 강조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마르코의 ’기도’에 머물러 보자. 여기서 ’기도’라는 요소가 언뜻 보기에 전체문맥에 잘 어울리지 않게 보인다. 왜 예수께서는 오늘 구마치유기적의 마지막에 가서 ’기도’를 언급했을까? 마르코에 의하면 예수께서 기도하지 않는 자는 기적을 행할 수도 바랄 수도 없다는 식의 의도를 가진 것이 분명하다.

 

  마르코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도중에 기도하신 일은 두 번 인데, 빵을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것이다.(6,41; 8,6) 그 외에도 예수께서는 자주 한적한 외딴 곳이나 산에서 기도하셨고(1,35; 6,46), 잡히시던 날 밤에 게쎄마니 동산에서 친히 아버지께 기도하셨고, 제자들에게도 깨어 기도하도록 권유하셨다.(14,37-39) 이렇게 볼 때 기도는 예수님의 일상(日常)에 속하며, 모든 가르침과 행적 아래 기도의 힘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기도’없이 아무 것도 하시지 않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기도는 사실 어떤 ’힘’이라기보다는 어떤 ’조건’이나 ’상태’이다. 다시 말해서 기도는 무엇을 행할 수 있는 ’힘’이라기보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준비하는 ’조건’이며 ’상태’인 셈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곧 믿음이다.

 

 


 
아이가 이렇게 된지 얼마나 되었느냐? (9,14-20)

 -유 광수신부-


예수님께서, "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그 영은 예수님을 보자 곧바로 아이를 뒤흔들어 댔다. 아이는 당에 쓰러져 거품을 흘리며 뒹글었다. 예수님께서 그 아버지에게 "아이가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대답하였다. "어릴 적부터입니다. 저 영이 자주 아이를 죽이려고 불 속으로도, 물 속으로도 내던졌습니다.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 주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스승님, 벙어리 영이 들린 제 아이를 스승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어디에서건 그 영이 아이를 사로잡기만 하면 거꾸러뜨립니다. 그러면 아이는 거품을 흘리고 이를 갈며 몸이 뻣뻣해집니다."하고 청한다. 어쩌면 이런 아이를 가진 부모님들이 계실런 지도 모른다. 아이가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또 그런 아이를

보고도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울까?

 

예수님은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듯이 당신에게 와서 청하는 아버지부터 진찰을 하신다. 예수님은 제일먼저 아이가 자라온 주변 환경을 물으신다. "아이가 이렇게 된지 얼마나 되었느냐?" 아마도 예수님이 보셨을 때 그 아이의 증세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꽤나 오래된 것같이 보이셨나 보다. 예수님의 질문은 우리가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면 의사들한테 흔히 듣는 질문이다.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입니다."라고 한 것을 보면 꽤나 오래되었고 "저 영이 자주 아이를 죽이려고 불 속으로도, 물 속으로도 내던졌습니다."라고 아이의 상태를 말 한 것을 들어보면 꽤나 심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아이의 병은 아이에게서 생긴 것이 아니라 아버지한테서 생긴 것이라는 것을 알아채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이를 고치려면 무엇보다 아이를 병들게 한 아버지부터 고쳐야 한다는 것을 아셨다. 어쩌면 아이보다 아버지가 더 중병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병은 아버지 혼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까지 전염되었고 더 나아가 다른 가족 전체에게도 전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앓고 있는 병은 무슨 병인가? 아이가 이렇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아버지의 병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아버지의 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그 병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을 집어서 아버지에게 말씀하신다. "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하고 이르시자, 아이 아버지가 곧바로,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 주십시오."하고 외쳤다. 즉 아이의 아버지의 병은 아버지가 "믿음이 없는 저를"이라고 고백하였듯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이 병이었다. 즉 아버지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아이를 더러운 영이 들게 만든 것이었다.

 

아버지는 예수님께 "벙어리 영이 들린 제 아들"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이가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하고 물으시자 "어릴 적부터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니까 이아이는 어릴 적부터 믿음이 없는 부모 밑에서 자린 아이다. "아이"라는 말은 부모의 보호 밑에 자라는 나이다. 즉 자기가 무엇을 판단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 부모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나이이다. 이 아이는 "믿음이 없는"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다. 그러니까 하느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들은 것 없이 자란 아이다.

 

"벙어리 영이 들린 제 아들"이라는 말은 단순히 말을 하지 못하는 아들을 말하지 않는다. 이 아들은 말을 하고 있다. 말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말은 하나의 언어이다. 즉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다. 자기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자연히 그 사람은 자기가 갖고 있는 언어로 말을 할 수밖에 없다. 내가 한국 사람이면 한국어로 표현할 것이고 미국 사람이면 영어로 표현할 것이다. 그 언어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로부터 익혀온 언어이다. 부모가 한국 사람이면 한국어를 가르쳤을 것이고 미국 사람이면 영어를 가르쳤을 것이다. 여기서 가르친다는 것은 물론 의도적인 것도 있겠지만 어릴 적부터 함께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 것이다. 어릴 적부터 익혀온 언어를 모국어라고 하고 그 언어는 다른 모든 언어를 배울 때에 기초가 되고 모국어는 자연스럽게 언제 어디에서든 자기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커서 다른 외국어를 배우려면 아주 힘들다. 아무리 배워도 자연스럽지 않고 어색하다. 이미 모국어로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가 배운 언어는 무슨 언어일가? 아이는 믿음에 대해서 배우지를 못했다.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도 못했고 말한 적도 없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는 부모 밑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벙어리 영이 들렸다는 것은 단순히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해서 말을 할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아이는 분명히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 "거품을 흘리고 이를 갈며 몸이 뻣뻣해집니다. 땅에 쓰러져 거품을 흘리며 뒹굴고, 불 속으로도 물 속으로도 내던졌습니다."라는 것은 아이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이고 말이다. 절대로 이 아이는 벙어리가 아니다. 정상적인 말을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아이는 충분히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 다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요, 너무 격하고 이상한 언어를 사용할 뿐이다.

하느님을 모르면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모두 격하고 강하고 이상하다. 아무리 약한 소리라도 하느님을 찬미하는 소리,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소리는 아름답고 누구에게나 기쁨을 준다. 하지만 하느님에 관한 언어가 아닐 때 그 어떤 언어도 그 어떤 말도 이상한 소리요, 이상한 언어이다.
 
많은 신자들이 하느님에 대해서 벙어리이다. 다른 말은 정신없이 떠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물 속에도 들어가고 불 속에도 들어가면서까지 신나게 말을 하면서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 하라면 모두가 벙어리이다. 평소에 그렇게 말 잘하던 사람도 기도하라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하느님을 전하라면 모두가 입을 다문다. 춤을 추라고 하고 노래를 부르라고 하면 신나서 구들장이 내려 앉을 것처럼 방방 뛰고 몸을 뒤흔들고 꼬리를 치면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건만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라면 또 신자들의 기도를 하라고 하면 언제 내가 말을 했던가할 정도로 모두가 벙어리이다. 왜 그럴까? 어리적부터 아니면 신앙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하느님에 대해서 말을 하는 언어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인 복음을 읽지도 않고 복음에 대해서 들은 것도 없고 그저 왔다 갔다만 하는 신앙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하느님의 언어로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신앙인은 모든 사건 속에서 하느님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은 나의 구체적인 생활 속에 활동하시는 분이시다. 나와 멀리 계신 하느님이 아니시다. 우리가 하느님의 언어로 말을 하고 아이들을 하느님의 언어로 말을 할 수 있게 교육을 시키려면 부모가 먼저 하느님의 언어로 말을 하고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복음을 알 때만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복음은 오늘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언어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생활 속에서 복음을 토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복음을 올바로 알아야 하고 복음적으로 생활해야 한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대는 예수님이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라고 한탄하실만큼 믿음이 없는 세대이다. 나라 전체가 로또 복권같은 허황된 꿈에 들 떠 있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거짓말, 남을 비방하는 말, 사람을 죽이는 말, 사기, 부정, 음란, 도박, 마약 등으로 병들어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과연 무슨 말을 배우겠는가?

 

부모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과연 하느님에 대해서 말을 할 수 있을까? 매일 보는 것이 서로 싸우고, 세상 이야기 뿐이고, 술, 도박, 이혼, 비정상적인 관계 등의 분위기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하느님에 대해서 말을 할 줄 알겠는가?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가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라는 예수님의 한탄은 2천 년 전의 한탄이 아닐 것이다.

우리 아이가 성당에 가지 않고 하느님을 믿지 않게 된 것은 아이의 탓이라고 보기보다는 어쩌면 부모의 탓이 아닐까? 어릴 적부터 보고 들은 것이 오늘의 아이로 성장시켜 온 것일 것이다. 오늘 우리의 자녀들이 잘못되었다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자라온 가정 환경, 부모의 영향일 것이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