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3일 (금요일, 맑고 한때 흐림)
·8시 00분 : 학생들, 시민들에게 청소 협조 호소
·10시 00분 : 시민 5만여명이 도청광장에서 집회
·10시 15분 : 학생수습위 자체 특공대 조직하여 총기 회수작업 시작
·11시 45분 : 도청과 광장주변에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 게시
·13시 00분 : 지원동 주남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 17명 사망
·15시 00분 :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계엄사의 '경고문'전단이 시내전역에 살포
·19시 40분 : 최초 석방자 33명 도청광장에 도착
이 버스를 검문했던 공수부대원이 교복을 입고 있던 한 여학생을 발견한다.
자신의 여동생을 떠올린 그는 그 여학생을 차에서 내리게 한다.
유일하게 살아남아 당시의 상황을 증언한 그 여학생이 아직도 살아있다.
당시 춘태여상 1학년이었던 생존자 홍금숙의 증언을 들어보라
『80년 5월23일 오후2시쯤 마을로부터 2㎞쯤 떨어진 광주~화순간 국도변에서 11공수여단 소속 군인들이 화순방향으로 달리던 17인승 미니버스에 무차별 총격을 가해 타고 있던11명 가운데 운전사 김윤수(당시 27세)씨등 8명이 즉사하고나를 포함해 3명이 부상한 채 이곳(부엉산 기슭)까지 끌려왔다』
피해자가 있고, 증인이 있고, 가해자가 있는 사실을 없다고 우겨대는 저의가 무엇인가?
주남마을 사건 (광주 - 화순간 도로 일원)
80년 5월 21일 오후 1시 30분 계엄군은 도청 앞 광장에 모인 20만 군중에게 집단 발포하여 시위를 진압하고자 하였으나 더욱더 시민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5월 21 일 5시경 도청에 주둔하고 있던 제7특전여단 35대대, 11특전여단 63, 62, 61대대는 차례로 도청을 빠져나가 조선대학교에 철수하여 광주공원에서 작전하고 있던 33 대대와 함께 조선대 뒷산, 학동, 지원동을 거쳐 5월 22일 06:00까지 주남마을 뒷산 에 집결하였다.
주남마을 뒷산에 집결한 부대는 대대별로 주둔비 사수방어에 용이한 주변의 주요 고지를 점령하여 지형적 잇점을 최대로 활용하면서 광주로부터 화순방향으로 나 가는 외곽도로를 차단하였다.
이상과 같이 제7특전여단 33대대, 35대대와 제 11특전여단 61대대, 62대대, 63대대 는 5. 22 - 5. 24 동안 주남마을에 주둔하여 외곽봉쇄 작전을 수행하였다.
특전부 대가 외곽봉쇄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5. 23 07:00경 광주에서 화순방향으로 향하던 미니버스 1대가 도로차단 및 매복지역인 녹동마을 입구에 이르자 도로변 야산과 화약고 건물에 매복해 있던 특전부대는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미니버스를 향해 사격을 가하는 과정에서 미니버스 탑승객 11명 전원이 학살되었 으며 인근지역인 월남동, 소태동, 지원동 주민 10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동일 13시경 동일지점을 통과하던 미니버스 1대에도 무차별 사격을 가해 미니버스 탑 승객 중 15명이 학살되었으며 홍금숙 등 3명과 인근지역 주민이 부상을 당하였다.
부상당한 채 특전부대에게 생포된 홍금숙과 교련복을 입은 학생 청년 3명의 탑승 객은 강제로 주남마을 뒷산 특전부대 주둔지로 끌려가 홍금숙만 헬기로 후송되고 2명의 남자부상자들은 특전부대소령의 지시에 의해 현장에서 즉결 사살되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증언에 의해서 입증된다.
당시 7공수 3대대 요원으로 있던 최영신 중사는 심한 부상을 당해 공수부대 주둔 지인 주남 계곡으로 끌려온 부상자 2명을 살려달라는 애원에도 불구하고 모소령 의 "없애버려"라는 지시에 의하여 3명의 공수부대 부대원이 이들을 대검과 총으 로 사살했다고 증언하였다.
주남마을 주민 전홍근, 이상기씨는 5월 23일 오후에 마을 입구 당산마을 앞에서 경운기에 실려 마을 뒤 계곡으로 부상자를 옮겨가던 상황을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그 날 오후 모 소령이 먹다 남은 술병을 들고 마을로 내려와 마을 주민과 술을 마시면서
"오늘 마음이 괴롭다. 2명의 부상자가 살아날 가망이 없어 사살했 다."
는 말을 했고 주민 3명이 모 소령의 이 말을 직접 들은 바 있다고 증언하였다.
위에서 밝힌 5. 23 오전 오후 2차례에 걸쳐 계엄군이 주남마을에서 양민을 학살한 예 외에도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사례는 허다하고 그 증거로서 다음과 같은 사실 을 들 수 있다.
1989년 1월 5일 주남마을 계곡에서 암매장된 시신 2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1989년 1월 15일 특전부대가 매복작전을 전개, 무차별 양민학살을 전개하였던 녹동마을 입구 도로변에 위치한 부엉산에서 머리 뒷부분이 손실된 시신 1구의 유 골이 발견되었다
첫댓글 <·8시 00분 : 학생들, 시민들에게 청소 협조 호소>는 거짓말입니다. 본래 광주사태에 전남대가 참여하지도 않았지만 5월 21일 무장폭도들이 전남도청을 점령한 부터는 사태 주도권이 폭동 지휘부에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학생들이 아니었어요. 학생들이 시위를 주동한 것은 광주사태 이전의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학생들"이란 명칭을 붙이려면 과격파를 말하는지 수습파를 말하는지 밝혀야 합니다. 과격파에 학생들이 있었다면 김종배 폭도를 따르던 조선대 학생들이었습니다. 그 외에는 과격파는 학생이 아닌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시민군 대장 박남선씨도 폭동 주동자 윤상원도 모두 학생이 아니었어요.
<지원동 주남마을 앞에서>라 하였는데, 거기 공수부대가 갈 이유가 있었다는 말인가요? 5월 22일부터 공수부대원들이 파견된 지역은 광주 외곽이었습니다. 광주를 시민군이 점령하고 있었기에 시민군이 서울로 진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광주 외곽을 봉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시민군은 1975년 월남 시민군이
중부에서 폭동을 일으켜 수도 사이곤으로 진격하여 월남 정부를 전복시키고 월남 전국을 공산화시켰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서울을 공격하러 하였습니다. 그러니. 나라를 지키려면 국군이 광주 외곽을 봉쇄하여야만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시민군은 광주 시민들을 강제 징집하여 군복을 입혀 광주
외곽 지역들을 공격하였습니다. 시민군 작전이 얼마나 치밀하였던지 어느새 전라도 여러 지역 경찰서들을 점령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것은 시민군도 군복을 입고 있었으므로 외관상으로는 국군과 구별하기 어려웠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군복을 입고 총을 난사하였어도 그들의 정체는
국군이 아니라, 폭도들이었어요. 그러니 폭도들의 소행을 국군에게 뒤집어 씌워서는 아니됩니다.
감사합니다...
<광주~화순간 국도변>이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는 단서가 됩니다. 폭도들이 5월 22일 광주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었던 8톤의 다이너마이트 폭파 장치를 전남도청에 설치하여 놓았습니다. 그 다이너마이트가 어디서 왔던가요? 바로 화순광업소에서 왔던 것입니다. 나주, 화순은 이미 폭도들의 점령 지역이었어요
따라서 <광주~화순간 국도변>이라면 광주 외곽 봉쇄 대상 지역에 당연히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17인승 미니버스>가 달렸다고 하는데, 통행 금지 지역에 버스가 달리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인가요? 당시 17인승 미니버스는 시민군이 시민군 병력을 수송하는데 사용되던 버스였습니다. 그리고 무장
참 새삼 대단하심을 느낌니다.. 논리가 정연하여 참으로 부럽습니다. 그런데 광주 일지에도 국군이 17명을 사살한 것으로 나와 있는것은 무슨 연유인지요??
시민군의 버스 외에는 버스 통행이 없었어요. <교련복을 입은 학생 청년 3명의 탑승객은>이라 하였는데, 그때 교련복이란게 있었나요? 아닙니다. 교련복이 아니라 군복이었어요. 학생이 주남마을에 갈 일도 없었고요. 더구나 시민군과 국군 사이에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었던 때 군복차림으로 다닐 이유가
무엇이었다는 말인가요? 폭도들이 군경을 잔인한 방법으로 죽여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던 때에 군복차림으로 나들이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는 말인가요? 그리고, <광주~화순간 국도변>은 폭도들이 나주경찰서 무기를 탈취하여 오던 도로였습니다. 이런 정황으로보아 무장 시민군 차림이었을 것입니다.
암매장에 대해서는 저는 시민군의 소행을 의심합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계엄군에게는 아직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었던 때입니다. 다만, 장교에게만 공포용 실탄이 10발씩 지급되었는데, 장교는 직업 군인이예요. 따라서, 장교들은 출세에 지장이 될만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검으로 밝혀진 과학적 증거를
보아도 당시 희생자 대부분이 시민군 총에 희생되었습니다.
개인적 의견으로 광주사태가 폭동이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점은 역사의 흐름, 특히 '좌익사'의 흐름입니다. 70년대는 좌익의 성장기, 80년대는 좌익의 이념정립기, 90년대이후는 좌익의 합법적투쟁기라고 요약할수 있겠습니다. 5.18은 바로 이념정립기 직전에 일어난 소요사태라고 보면 될겁니다.
현재 쌍방 모두가 인정하는 부분은 사망자숫자입니다. 150명, 30명정도로 5:1의 비율이라고 보면 될겁니다. 그러나 지금 국민들은 광주사태에서 시민사망자가 2000명이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5.18기념관에서 사망자의 사진에만 주력하고 주요 내용들은 숨겼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겁니다.
5.18기념관의 사진중 압사당한 사진이 있습니다. 모든 사진중 가장 참혹한 사진입니다. 그런데 이 압사당한 사람은 계엄군에 있었던 한 병장으로 알고 있습니다(이 카페 어딘가에 그 병장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을것입니다). 아마 더 조사해보면 기념관의 사진들중에 군인의 사진들도 많이 있을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교련복이 있지 않았나요???
더욱이 총상 흔적을 확인해보면 오히려 시민의 사망자보다 군인의 사망자가 더 많음을 알수 있습니다. 김영삼씨는 역사바로세우기라는 허황된 주장을 하면서 역사를 왜곡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80년대에 적은 책들을 조사해보면 대부분이 12.12를 그저 사태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한국학생운동사라는
플라스틱 피리님 감사합니다...
대략 82년에 저술된 책에서도 그렇죠. 5.18이 진짜 그들 말대로 학살이라면 학살의 주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를 따지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아닌 새로운 인물이 필요했으며, 광주사태이전에 중앙정보부장서리였던 전두환이 12.12쿠데타의 주역, 신군부의 괴수라는 픽션을 써낸 것입니다.
수선화님, 당시 시민군 중 청소년이 다수였습니다. 바로 윤상원이 평소 의식화 교육을 시켰던 들불야학 청소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윤상원이 시키는 대로 따라 했을 뿐이었지요. 그런데, 1980년에 설사 교련복이 있었다고 해도 들불야학에 교련복이 있었을 리 만무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군복은 교련복이
아니라, 군복류이었을 것입니다.
질문에 답하여 주셔서 매우 감사드립니다...
역사학도 니가 광주에 와서 보았는지 궁금하다. 며칠전에 유일한 생존자 홍금숙씨를 만나서 생생한 증언을 들었다. 똑똑히 기억해라. "기억하지 않은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것이라는 것을...
역사학도님의 글에 크리하여 답장을 달아 야지요.. 지금 처럼 답글을 딜면 원글을 쓴 사람에게 알림이 가요.. 무슨 말인지 이해 가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