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 1:12, 시편 37:4, 역대하 19:9
예수님께 적응하면 따라오는 좋은 것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요한복음15장1~2절에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하나님은 그 포도나무를 기르시는 농부요 나는 그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 적응하면 하나님께서 언제나 열매 맺는 가지가 될 수 있도록 돌봐주시는 아버지라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께 적응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세상이 가만 나두지 않는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겠지만, “그래도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돌봐주시는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저는 올해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표어를 주셨을 때 이 축복의 은총이 주향기교회와 그 속에 속해있는 모든 이들에게 임하게 될 것을 확신하며 매우 기뻐했습니다. 또한 만군의 여호와가 함께하심으로 점점 강성해져가는 축복의 장이 될 것을 확신하기에 매우 행복했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붙어있어야 하는 포도나무가 되시고, 그 나무를 기르시고, 그 가지에 항상 열매가 있게 돌보시는 농부가 바로 하나님이시기에 “예수님께 적응하는 것이” 이 세상에게 가장 큰 성공을 거두는 길입니다. 우린 그 길 안에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도 항상 갈등하죠. 그 이유는 온전히 적응이 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자기 스스로가 온전히 적응시키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품고 싶은 열망이 남아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들은 예수님 안에서 항상 갈등하며 살아갑니다. 저는 오늘 우리모두가 이 갈등을 뿌리 뽑고 예수님 안에서 펼쳐지는 나의 농부이신 하나님을 만끽하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으면 다음으로 들어나야 하는 당연한 것이 나 자신을 예수님께 적응시켜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단계를 건너뛰고 봉사, 헌신, 주의 일을 앞장서 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예수님을 영접한 그 열정이 식어질 쯤 되면 우리 마음에 허무감이 찾아와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어 합니다. 아니 부정합니다. 그러다보면 예수님을 넘어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게 되죠. 왜냐하면 없는 것 같고, 믿으나, 안 믿으나 별로 달라 보이지 않게 보이거든요. 그렇게 되면 거의 예수님을 등지고 세상의 가장 가운데로 스스로 들어가게 되죠.
반대로 예수님께 적응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면 똑 같은 허무감이 찾아올 때, 예수님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그렇게 이끌어 가시거든요. 피곤하고, 지치고, 어렵고, 힘든 것은 같은데, 변한 것은 없는데, 여전히 예수님이 좋아서 예배 중심의 생활을 살고, 말씀이 좋고, 찬양에 귀 기울이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십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요? 예수님께 적응되었기 때문입니다. 전 그렇게 되요.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가 적응한 대로만 행동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적응이 무서운 것은 생각하지 않아도 그 길을 가고, 그 일을 행하고 있는 자신을 보기 때문이죠. 의식을 하든, 의식하지 않던 내가 어떤 것에 적응이 되었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행동으로, 열매로 들어나기에 무섭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은 자신이 믿으려고 하는 것만 보는 아주 무서운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예수님께 온전히 적응시켜놔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예수님의 멍에를 반듯이 메고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막8:38절에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부끄러워하리라” 하신 조건에 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 기뻐 맞아주시는 그런 우리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적응이 무서운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적응하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부끄러워하실 것이고, 예수님께 적응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기에 세상이 가만 두지 않을 것이기에 무섭죠.
이런 생활환경 가운데 살아가면서 여러분은 지금 어느 부분에 적응이 되어 살아가시고 계시나요? 지금 어느 부분에 적응시켜 생활하려고 애쓰시고 계십니까? 그 이유와 목적이 다를 수 있으나 사도 바울과 베드로의 권면과 같은 곳에 적응시키려 애쓰시길 바랍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을 예수님께 온전히 적응시켰습니다. 그래서 그가 어떤 일을 당하든 자신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어떤 일=예수님께 적응되어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겪었던 아픔들이죠! 매를 맞고, 돌팔매질을 당하고, 태형을 3번 당하고, 쫓겨나고, 궁핍함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벧전 4:16절에서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 시대는 기독교 박해가 극에 달했을 때입니다. 그 시대처럼 우리들도 점점 신앙을 지켜가기 매우 어려운 현실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정치, 사회, 교육을 넘어 세계 정서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무너뜨리기 위해 악을 쓰고, 달려들어 물어뜯으려는 현실에서 살아남는 것은 초대교회 시대만큼이나 어려워졌습니다. 베드로 시대에는 육체적 고통에 직면했다면, 지금의 시대는 그보다 위험한 정신의 시대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권면은 “부끄러워말고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로 만들어라” 이 말에 집중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발판을 삼아가는 지혜로운 성도님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만군의 여호와가 나와 함께 하여 주심으로 날마다 강성해져 갈 테니까요.
이런 생활을 해나가는 사람으로 적응하려면 이 세 가지를 내 마음과 육체가 온전히 적응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을 항상 기쁘시게 하는 일<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고, 그 안에 거하는 것>
성경에서 하나님은 언제 기뻐하셨을까? 하나님 만나기를 찾을 때, 위기에서 구해달라고 요청할 때, 구원하심의 감사해서 찬양과 영광을 돌릴 때, 성전을 준비할 때와 그 성전을 헌당할 때, 마음이 그 성전을 향해 있을 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 이름으로 믿어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생활을 살아갈 때,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을 살아갈 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구약성경에서 두 가지를 찾았는데요.
* 할 수 있는 형편 일 때 = 수넴 여인의 헌신 = 자신의 집에 엘리사가 지낼 수 있는 방을 준비해 놓았다.
* 절대 할 수 없는 형편일 때 = 사르밧 과부 헌신 = 엘리야 선지자의 말을 믿고 떡을 준비하여 대접했다.
이런 봉사와 헌신은 하나님 아버지가 좋을 때 가능하죠.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내 안에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좋아하고, 경외하며, 경배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억지로도 할 수 있기도 하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싶어 하시는 것은 마음에서 울어나서 스스로 하는 것을 받고 싶어 하십니다. 이 두 가지를 하나님께서 요구하실 때마다 충분히 올려드릴 수 있는 마음이 언제나 준비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여호와를 기뻐하는 일<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을 살아가면 자연스럽게 되는 마음이기에>
의인의 생활 가운데 가장 중요한 덕목이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가 무엇을 주시지 않아도, 무엇인가 잘 되지 않아도, 건강이 좋지 않아도, 항상 부정적인 처지에 놓여있어도, 계속해서 안 좋은 일이 벌어질 때도.... 여호와가 그냥 좋은 거예요. 그래서 여호와하면 내가 슬프고 외롭고 힘들어도 미소가 지어지고, 기쁨이 되는 거예요.
여호와를 기뻐하면 이런 행동을 취하게 됩니다.
욥이 재산, 자식을 잃었을 때 그의 태도
욥1: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모세 = 미리암의 모반 = 그의 태도.<모세가 구스(흑인)을 아내로 삼자 사람들 앞에서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했다. 그런데 그는 아무말 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미리암에게 진노하셨을 때 그를 위해 증보기도 하여 낳게 해주었다. 공격하지 않고 그를 감싸고 중보 기도해주는 그런 행동이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예는 여호와를 기뻐하지 않는 마음으로는 억지로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이 내 안에 온전한 주인이 되어 계실 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격이 내 안에서 완성되어 영원한 생명의 생수가 흘러나오는 것이기에 그렇게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여호와를 경외하라<이것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이기 때문>
혹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의 역할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그들이 순종하여 감당하였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역할은 둘째 치고 자신들의 믿음조차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역대하 19장을 보면 유다 여호사밧 왕이 2차 종교개혁을 단행하면서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가르칩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섬기고, 그의 뜻을 받드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말씀은 66권에서 세 번 나오는데요. 본문을 뺀 두 말씀은 이렇습니다.
[시34:9]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잠23:17]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이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일에 적응하고, 여호와를 기뻐하는 생활에 적응하면 자연스럽게 여호와를 경외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돌이키는 마음이 선행되어집니다.
세상에 적응하면 하나님과 모든 것이 멀어지겠죠. [빌2:12]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러므로 사도바울의 이 말씀처럼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나, 목사와 같이 있을 때나, 홀로 일터에 있을 때나, 어느 자리에 있을 때에든지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의 복종하고, 주의 말씀이 내안에 거하는 삶이되기 위해서, 예수님 안에 거하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말씀에 나를 적응 시켜가야 합니다.
주의 말씀에서 멀어지면 세상이 들어와 세상에 적응하게 되는 두려운 결과를 맞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신 여러 말씀 중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러면 항상 승리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사7:9절 하반 절.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통해 길과 진리요,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굳게 믿고, 굳게 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복 주시는 생활에 적응하려면 끊임없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 그 믿음의 생활에 적응시켜가는 것인데 그것의 시작이 바로 Tea time with jesus의 시간을 내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 생활의 패턴에 적응 되면 하나님이 이루시는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에서 날마다 거닐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 빛 간운데서 행하게 됨으로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아름다운 소산을 물댄 동산과 같이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향기교회 성도들은 예수님께 적응하여 여호와를 즐기는 그런 생활을 펼쳐나가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