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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조사여행지 왕청에서 천교령으로, 천교령에서 다시 버스로 1시간 남짓을 가면 태양촌이 있다. |
ⓒ 이경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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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사람 만났다고 반가워 반가워 하는 왕청의 권옥선 할머니를 두고 태양촌 가는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버스는 조그마했다. 의자마다 사람들이 꽉꽉 찼다. 천교령까지 섰다 갔다를 반복하여 1시에 출발한 차는 2시가 넘어서 천교령에 도착했다. 버스가 선 곳은 터미널이라기보다는 시끌벅적한 시장통이었다. 시장은 설대목이었다. 온갖 과자와 생선과 고기와 채소가 넘친다. 사람들도 넘친다.
버스가 출발하기 전 천교령 장에서 올라탄 사람들로 버스 안은 왁자지껄했다. 마침 태양촌을 간다는 한 할머니를 만났다. 조선말이 참 따뜻하다. "어딜 가느냐, 태양촌에 왜 가느냐"라고 묻더니 할머니는 "내가 몸이 안 아프면 우리 집에 가서 밥 해줄 건데, 내가 몸이 아파서…"라고 말씀하신다. 할머니의 말은 변명같지 않았다. 정말 몸이 안 아프면 우리 손을 잡고 집으로 끌고가기라도 갈 태세였다. 중국산 도라지도 맛있고, 고사리도 맛있다던 할머니 말은 중국산이라면 일단 얕잡아보는 한국인들의 행세에 가하는 일침이었으리라.
천교령에서 태양촌까지는 비포장길. 버스는 덜컹덜컹, 조선말과 한인말도 버스의 흔들림에 따라 마구 섞인다. 그렇게 산골짜기를 따라 한 시간 넘어 갔다. 태양촌에 내린다던 할머니를 따라 서둘러 짐을 들고 내렸다. 설맞이 장을 갔다오는 이, 설맞이로 고향을 찾아오는 가족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버스 앞에 여럿이다. 누구는 등을 토닥이며 들어오는 식구를 반기고, 누구는 리어커를 끌고 나와 보따리를 싣는다. 정겨움이 도로가에 번지는 듯 싶더니, 그들은 각자 집으로 들어가고, 우리들에게는 한 할머니를 소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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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촌 입구 산으로 둘러싸인 태양촌, 설맞이로 사람들이 붐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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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보조. 아마 독립을 도와준다는 의미이리라. 중국이 건국하면서 마을마다 세운 조직이다. 지금의 노인회관쯤으로 보면 된다. 우리들은 독보조로 안내받았다. 그 날은 마을에서 나무하는 날이었다고 한다.
건물 문을 열고 들어가면 신발을 벗고 바로 올라앉을 수 있는 공간이다. 이 곳도 실내 입구에 바로 솥단지가 걸려 있고, 그 곳이 곧 마루(거실)이다. 우리가 들어갔을 때는 밥내음이 솔솔 풍기고 있었다. 방에는 할머니들 여러분이 둘레둘레 모여 앉아 있었고, 한 귀퉁이에 한 할아버지가 섞이지 않고 있다. 우리들 얘기를 하자, 곧 독보조 회장님이 오신다고 한다.
참, 기억이 총총한 분들이 많다. 연세가 여든이 가까워도 사진으로 찍은 듯이 육 칠십년 전의 전을 기억하시고 그림을 펼쳐보이듯 얘기할 때, 경탄을 자아낸다. 굳이 기억이 생생한 분만이 아니라 연세드신 분들이 역사이고, 역사의 증인이시다. 독보조 회장 김무호 할아버지도 곧 오셨다. 아홉 분 노인들은 저마다 기억을 쏟아냈다.
그러니까 1936년 2월에 문경, 상주, 안동 세 곳에서 218호가 태양촌으로 이주해오셨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한 가족만, 어떤 이들은 친지들 여러 가족들이 함께 왔다. 와서 논농사를 짓기까지의 고생은 권옥선 할머니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움집을 짓고 농사 시작한 일이며, 좁쌀 배급받은 일이며, 단오날 공산주의자들의 친일파 처단 투쟁까지도.
단오날 투쟁이 몇 년도쯤 일인지 여쭈었다. 그러니 툭 치고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얼른 잊혀지지 않는 말이 있었다.
"저 건너, OO 아버지, 그 날 안 죽었나. 거 물어보면 아는데. 저 아부지 제삿날이니까."
"그래, 친일분자라고 해서 죽었지."
"친일분자가 아니고, 일본말 했다고 친일분자인지 알았지. 그 날 거 아부지가 망보는 날이었는데, 누가 총을 쏘면서 쳐들어오니까 일본말로 뭐라고 했지. 그래서 죽은 거지. 친일분자는 아니지."
한 마을, 200여호가 사는 마을에 일본인들에게 잘 보이면서 조선인들을 괴롭힌 이들도 꽤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없는 조선인들은 일본놈들한테 공출낼라네, 같은 조선인들에게 잘 보일라네 더 고생이었다고 한다. 단오날의 투쟁은 우리 민족의 상흔 같았다. 마을이 세워진 곳에는 권력이 있고, 권력 아래 고통받는 이들도 있고, 의외의 피해를 당하는 이들도 있고. 그러나 돌아가신 그 분이 진짜 친일분자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60여호 남은 지금의 마을은 함께 덮고 사는 법을 익힌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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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촌 독보조 독보조(노인회관)에는 9명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앉아계셨다. 가마솥이 앞에 걸려있고, 이 곳이 곧바로 마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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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이야기를 하니, 여기서도 해방 직후에 친일분자들은 "투쟁 당했다"고 한다. 만주의 친일분자들은 즉결재판으로, 인민재판으로 쫒겨나거나 죽었다. 이번 여행 동안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가 "해방나자 친일파들은 중국에 남지도 못하고, 북으로도 못 가고, 다 남으로 갔다"는 말이었다.
실제로도 만주국 정부에서 조금이라도 높은 직책을 지녔던 사람들은 모조리 남한으로 돌아왔고, 그들은 남한에 와서도 높은 지위와 부와 명예를 누렸다. 남한이 친일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까닭은 이런 역사적 이유 때문이다. 모종 부어 놓은 듯 친일분자들이 소복이 모여 정권을 잡았으니, 그들이 어찌 친일청산을 시도하겠는가.
해방나고 친일분자, 지식인들부터 귀국했고, 그 중 선생들도 대부분 귀국했다. 태양촌에 있던 "국민학교" 선생들도 그랬다. 태양촌에 학교는 이주오고 "인차 지었다". "인차"라는 말이 정확히 언제쯤이냐고 물으니 이듬해는 아니고, 아마 1938년도 즈음이라고 한다. 학교는 누가 주도해서 지었냐는 물음에, 일본인들이 지었다고 한다.
인근 마을에 가장 중심이 되는 중심학교, 태양국민우급학교. 만주국 시절이니 각종 황민화 의식과 철저한 일본말 교육 등 황민화 교육은 조선이나 만주나 똑같이 실시되었다. 학교설립은 일본인이 했다고 하는데, 마을 사람들에게는 학교 지붕을 책임지도록 시켰다고 한다. 껍질이 하얀 나무, 껍질을 벗겨 커다란 돌로 눌러놓으면 반듯해지는데 그렇게 말려서 지붕으로 썼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학교지붕을 그렇게 공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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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지붕을 했다던 나무 일본은 각 집에 학교지붕을 할당했다. 겉은 하얗고 안은 노란 이 나무를 돌 밑에 눌려놓아서 말린 다음 지붕으로 썼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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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분의 노인들 중 한 분은 "우리는 너무 가난해서" 학교를 못 다녔다고 하고, 한둘 말씀을 하지 않는 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대여섯 이들은 모두 학교에 대한 기억을 쏟아낸다.
"시험치고, 성적을 교실 정면에 딱 걸어놨지. 그때가 그러니까 1학년때이지."
시험을 치고, 성적을 중시했다고 한다. 그리고 김무호 할아버지는 세 번이나 유급을 당했다고 한다. 그렇게 공부가 하기 싫었다고. 공부가 하기 싫어 화장실에 가서 숨어 있고 그랬다고. 사람들에 따라 기억이 다르기는 하지만, 김무호 할아버지는 초등학교 때 교복이 있었다고, 그 때 교복을 공짜로 주는 뽑기를 했는데, 자기는 안 뽑혀서 교복을 얻어 입을 수 없었다고 또렷이 기억한다고 말씀하신다. 내 생각에는 패망 직전 일본은 학교 학생들에게 여자아이는 몸빼, 남자아이는 황색군복 비슷한 옷을 착용하게 했던 일을 두고 말씀하시는 듯하다.
교사들은 한 동네에 같이 사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교장은 일본인들이 있는 곳에 있었고. 교사들은 일본말 사용을 철저히 감시했다. 사실 이 부분이 내게 숙제이다. 조선은 물론이고, 숫자로 봤을 때 일본교장이나 교사들이 더욱 적었던 만주에서까지 어떻게 그리 철저한 황민화교육이 실시될 수 있었는지. 조선인들끼리라면 서로 눈 감아줄 수 있지 않았을까.
조선인 교장과 교사들은 일본인들도 없는 곳에서까지 왜 그리 열심히 일본에 충성했을까. 황민화가 내재화되어서. 정말 일본말을 해야 아이들이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조선인 사범교육에 그 답이 있지는 않을까 싶다. 조선에서도 경성사범, 대구사범, 평양사범에서 철저한 황민화교육이 있었고, 중국에서도 일본인들은 조선인 교사양성에 관심을 두어 간도사도학교와 다른 사도학교에 조선인반을 설치하였다.
한참을 얘기하고 났더니, 배가 고프다. 할머니들도 밥 먹을려고 해놓고 여태까지 얘기하느라 못 먹었다며 까만 가마솥을 연다. 가마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한꺼번에 여럿 노인분들이 달라들어 밥상을 차린다. 상이 그득하다. 땅에 묻어둔 김치며, 도라지며 반찬들과 시레기국이 밥상에 올랐다. 겨울날이면 처마 밑에 주렁주렁 열린 시골의 시레기는 중국의 "작은 안동"이라는 태양촌에도 있었다. 말씨도 영락없는 경상도 우리네 말투이고, 음식도 그렇고, 문화도 그렇다. 밥을 뚝딱 비우고, 어느 새 깜깜해진 태양촌을 나섰다.
태양촌에는 아직도 한인들이 한 집도 없다고 한다. 대부분 조선족 부락에는 한국으로 떠난 집들에 농사를 지으러 들어온 한인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어떤 곳은 한인들이 더 많이 들어와 있어, 이제 조선족향이라는 이름이 어색할 지경이다. 하지만 태양촌은 경상도 사람들끼리 있다. 한인이 들어왔다가도 나가고, 더 이상 한인들을 받으려 하지도 않는다. 200여호의 집에서 지금 남아 있는 집은 60호가 채 안 된다고 한다.
중국내 경상도 마을. 이런 생각을 해본다. 경상도 사람들의 보수성 때문일까. 남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경상도 문화를 지켜주니 고마워할 일인지, 아님 경상도 사람들의 보수성을 중국에서도 확인하는 건 아닌지. 조선족 마을을 지키는 게 좋은지 아닌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더 넓은 중국땅으로 퍼져드는 이들도, 자신들끼리 모여사는 이들도 다 자기의 원대로 하면 될 일이다. 인간 삶에 영원은 없으니까. 모여 살며 자신만의 문화를 지키는 일도 소중하고, 섞여들어 새로움을 창조하는 일도 소중하다.
간도의 역사는 제국 일본에게서 지배당한 식민지 조선의 역사요, 배고픔의 역사이다. 또한 개척단이라는 이름처럼, 만주에 논농사를 이식한 역사요, 아무것도 없던 허허벌판의 땅에서 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서로간에 마음을 나누었던 생명창조의 역사이다. 그 역사를 만주로 이주간 조선인들이 세웠다. 태양촌을 돌아나오는 마음에 간도의 역사가, 조선의 역사가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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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촌에서의 저녁 식사 된장으로 끓인 시래기 국에 도라지 나물, 김장김치로 배불리 밥을 얻어먹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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