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량수경(無量壽經)》이 설해진 인연
황념조 거사는 청량징관대사의 《화엄경소초》에서 10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화엄경》을 설명한 방식 즉, 《화엄경》현담의 방식에 의지해 《무량수경》을 설명했습니다.
첫 번째가 설해진 인연입니다.
부처님이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출현하셨고 또 무엇 때문에 우리들에게 49년 동안 법을 연설하셨는가, 그 동기와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답입니다.
그 원인이 매우 많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일대사인연’ 때문입니다. 총명한 사람은 이 세상이 고통스럽고 살아가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예외가 없고 좋아지게 할 방법도 없습니다.
가장 총명한 사람들이 문제점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그 해결방법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에서의 일(一)은 일심, 즉 한마음을 말합니다. 또 일심불란(一心不亂) 의 일(一)을 말합니다.
일체의 문제중 제일 큰 문제는 수시로 일어나는 생각입니다. 이 많은 망상을 어떻게 조복시킬 수 있을까요?
《금강경》에서 장로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고는 그 마음은 어디에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킬 수 있습니까? 라고 여쭈었습니다.
《금강경》에 대한 자세한 해설서가 있고 그 해설서를 지은 사람들이 몇 백 명이나 됩니다. 만약 그것들로도 해결방법을 찾을 수 없으면 《금강경》이 현재 중생의 근기에 맞지 않는 것이 됩니다.
우리 정토종의 방법을 쓴다면, ”어디에 머물러야 합니까?“ 하고 물을 때 아미타불 하고 대답하면 됩니다. 다시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킬 수 있습니까?“ 하고 물을 때도 아미타불 하고 대답하면 해결됩니다. 그리고 대사(大事)란 생사윤회의 대사니 일(一)보다 더욱 어렵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감수작용에는 괴로움 · 즐거움 · 근심 · 기쁨 · 담담함 등 5가지가 있습니다. 세간의 선정인 4선8정의 경지는 일심의 경지가 아닙니다.
단지 망념을 눌러놓아 작용 못하게 만든 것으로, 담담한 느낌에 속합니다. 진실한 선정을 얻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진실한 선정이 아닙니다. 그들이 얻은 선정은 시간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상비비상천의 수명은 8만 대겁이니 그 기한이 다 차면 그 천상의 선정력이 자연스럽게 소멸해 없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눌러 놓았던 망념이 다시 일어나게 되니 그들의 선정이 완성된 선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승경전에서 말하는 선정이라야 진실한 선정입니다.
《능엄경》에서 말하는 ‘자성의 성품과 상응하는 선정’이 능엄대정입니다. 이 선정은 번뇌에 물든 세상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번뇌에 물들어 있는 사람은 이 경계에 들어갈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부처님이 이 세상에 와서 우리들에게 염불법문을 연설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은 염불법문이 너무 쉽다고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현대사회의 사람은 속이는 말은 잘 믿어도 권유하는
말은 잘 믿지 않습니다.
진실로 말해주면 믿지 않다가도, 거짓을 말해주면 믿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습니다. 오늘날 바른 법을 믿는 사람이 너무도 적으니 실제로 비참한 상황입니다.
이 정토부 경전은 부처님이 49년 동안 중생을 교화한 법문의 중심입니다. 시방 어느 세계의 업장이 아무리 두터운 중생이라도 이 법문을 믿을 수 있고 실천할 수만 있으면, 진실한 끊어짐 없이 10번 이상 아미타불 명호를 염불함으로써 왕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경전의 가르침이 중생에게 가장 큰 이익과 은혜가 됩니다.
선도대사는 《관무량경사첩소》에서 ”부처님이 이 법문을 설해주실 때 주요대상이 범부였다. 범부를 전문적으로 제도하고 보살도 겸해서 제도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법문의 수행방법은 수준에 따른 차별이 없고 수행의 순서도 없습니다. 소승에는 4과와 4향의 차별이 있고 대승에는 51개의 단계적 수준에 따른 차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법문에는 단계적 수준에 따른 차별이 없습니다. 한 생의 공부로 서방에 왕생하고, 왕생하기만 하면 부처님의 경지를 반드시 성취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염불법문을 진실로 믿는다면 성공하기까지 성문 · 연각 · 보살의 단계를 거치지 않아도 됩니다.
삼승의 공부의 단계인데 그 모든 단계를 뛰어넘는다는 말입니다. 또 3대 아승지겁의 긴 시간이 걸리는 수행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진실하고 정성스럽게 공부해 힘을 얻기만 하면 7일 안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정토성현록》 중에서 송나라 때 영가법사는 단지 3일 동안 밤낮으로 쉼 없이 염불했을 뿐입니다. 진실로 왕생하기를 구하고 진실로 염불하며 오직 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찾았습니다. 3일이 지나자 마침내 아미타불이 찾아와서 그에게
”그대의 수명이 아직 10년이 더 남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영가법사가
”저의 업장이 너무 무거워 유혹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타락할까 두려우니 10년의 수명이 필요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좋다. 3일 후에 데리러 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이 소식을 사람들에게 알렸으나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으니 그가 파계한 비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기에 그의 말씨와 태도가 남을 속이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3일째 되던 날 아침 예불 중 경전독송 시간에, 그가 사람들에게 ” 오늘은 평소의 경전염송을 하지 말고 염불로 저를 배웅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염불을 시작하고 나서 향 하나가 다 타기도 전에, ”서방의 성인 3분께서 오셨습니다.“라고 말하고는 곧바로 왕생했습니다. 그는 인과응보를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파계비구였으니 만약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지 못하면 반드시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습니다.
황념조 거사가 옛날 대덕의 주장에 근거해 이 《무량수경》을 가지고 몇가지 중요한 점을 귀납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진여의 성품에 부합하는 최고의 말씀이며 여래의 올바른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량수경》의 뜻에 완전히 일치합니다.
《화엄경》과 《법화경》 둘 다 똑같이 일불승의 원만한 가르침이고 위대한 법문이라, 일체 경전 중 왕이라고 합니다.
중국의 불교종파는 이 두 경전을 똑같이 존중하고 근본경전으로 삼았으니, 그들의 태도가 그 두 경전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우익대사는 《아미타경요해》에서 “아미타경은 절대적이고 원융하며 불가사의하다. 화엄의 심오한 가르침 · 법화의 비밀스런 골수 · 일체 제불 마음의 요체 · 보살 만행의 나침반 등등, 이와
같은 내용이 모두 이 경전을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불법의 중심이 이 《무량수경》입니다.
《화엄경》이나 《법화경》도 이 경전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제불도 이 경전을 말미암아 성불한 것입니다.
당나라 때 일본의 대덕 도은법사는
“오탁악세에서 악업을 짓다가 그 악업에서 벗어나려면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오직이 염불법문만이 지극히 원만하고 빠르다. 또 간단하고 쉬우며 곧고 신속하게 가는 방법이니, 세간을 벗어나는 바른 말씀이 모두 이 경안에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계는 혼탁함과 악독함이 극점에 이르렀습니다.
마음의 오염 정도가 자연의 오염 정도 보다 더 심각하니 대단히 두려운 일입니다. 이 혼탁하고 악독한 세상에서 이 경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마치 가난한 사람이 귀한 보물을 얻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지금부터 오직 정토만을 닦고 아미타불 한 분만 공양하면, 이전에 모셨던 불보살님들이 혹 자기를 나무라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이런 생각은 불보살을 우리와 같은 범부로 여긴 것이고 불보살의 수준을 낮게 평가한 것이니 이 죄의 허물이 적지 않습니다.
▪︎》출처 : 무량수경 <도암스님 편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