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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욥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도 결코 하느님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마땅히 이유도 모르겠는 극심한 고통을 겪은 경험이 있는지요? 내가 잘못한게 무엇인지 아무리 따지고 따져봐도 모르겠는데, 난데없이 다가온 불행 앞에 망연자실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한없이 나약한 결핍투성이의 존재로서, 한계를 지니고 살아가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이 땅 위에 두발을 딛고 있는 이상, 욥처럼 극도로 비참한 상황 까지는 아니지만, 우리 모두 이 한 세상 살아가며 이런저런 다양한 고통과 시련에 노출됩니다.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고통이 아니라 욥처럼 뼛속 깊이 사무치는 고통일 경우, 우리는 하느님도 원망하고, 이웃도 원망하고, 나 자신도 원망하며 크게 울부짖습니다.
그런데 욥의 절규 같은 경우 우리와 살짝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극한의 고통 앞에 울부짖지만, 그 울부짖음이 결국 주님 안의 울부짖음이요, 주님께 대한 신뢰 안에서의 울부짖음입니다.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욥 19, 26-27)
보십시오. 참으로 놀랍습니다. 욥은 극심한 피부병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도 하느님을 저주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마지막 희망을 둡니다.
이런 욥이었기에 결국 하느님께서 그의 절규, 그의 몸부림, 그의 울부짖음을 귀여겨들으십니다. 그를 지옥같은 병고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새로운 피부, 새 인생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때로 삶이 너무나 고달프고 가혹한 나머지, 하느님을 원망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랑이며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 있냐며 따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희망까지 포기해서는 절대 안 되겠습니다. 그분께서 이 혹독한 고통 너머에서 주시려고 마련하신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한 희망까지 포기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2024년 나해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보여줄 수 있을까?>
복음: 루카 10,1-12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며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도 역시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이 말 안에는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곧 ‘심판’이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불가지론’을 말합니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증명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신을 찾는 행위는 의미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믿는 이들에게는 마치 아기가 태어났는데 부모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으니 부모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말과 같이 들립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이들 자체가 하느님이 계심을 증명한다고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가지론자들이 사용하는 예는 이러한 것들이 있습니다. 원래 영국 철학자 John Wisdom이 제시하고 나중에 Antony Flew가 대중화한 이 사고 실험에서는 두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정원사가 정원을 가꾸는지 아닌지를 토론합니다.
아름답고 잘 관리된 정원을 걷고 있는 두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은 정원사가 정원을 관리한다고 믿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론을 테스트하는 데 동의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정원사가 잘 관리된 정원 상태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두 번째 사람은 회의적이며 정원의 아름다움을 자연의 산물이라고 봅니다.
정원사가 존재하는지 테스트하기 위해 그들은 정원사의 존재를 감지하는 카메라, 센서, 심지어 경비견까지 다양한 도구를 설정합니다. 그러나 정원사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발자국도 남지 않고, 방해도 전혀 보이지 않으며, 정원은 눈에 띄는 어떠한 간섭도 없이 계속해서 번창하고 있습니다. 증거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정원사가 분명히 있다고 계속 주장하지만 이제는 정원사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고, 어떤 알려진 수단으로도 탐지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다음 회의론자는 “눈에 보이지 않고 감지할 수 없는 정원사가 있는 것과 정원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즉, 정원사의 존재를 어떤 관찰 가능한 방식으로도 확인할 수 없다면 어떻게 정원사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지구와 화성 사이 어딘가에서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찻주전자를 상상하는 유명한 비유를 제안했습니다. 이 찻주전자는 너무 작아서 어떤 망원경이나 과학 장비로도 감지할 수 없습니다. 그는 누구도 찻주전자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존재 입증의 책임은 그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믿지 않는 정당화를 하는 것이지,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만약 부모가 나의 부모임을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군가 부모를 보여주어야만 할까요? 또 누군가 DNA 검사를 해서 그 부모가 확실함을 입증한다면? 그런데 그 DNA 검사도 믿을 수 있는 것일까요? 중간에 속임수가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믿지 않으려고 한다면 어떤 증거를 대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입니까? 눈에 보인다고 믿어지는 게 아닙니다. 믿지 않으려면 태양 주위를 도는 주전자를 보더라도 홀로그램이라 주장할 것이고, 정원사를 보더라도 그 정도 실력으로 저 좋은 정원을 다 가꿨을 리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증거들은 이렇게 외적이고 외적인 것은 속임수가 가능하므로 믿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어떤 믿음도 줄 수 없습니다. 어떤 여인이 나에게 키스해 주었다면 그것을 사랑으로 확신할 수 있을까요? 그런 외적인 것은 속임수일 수도 있어서 쉽게 믿지 못합니다. 사랑은 그런 증거들이 쌓여 마음에서 일어나는 인간 이성으로 감당할 수 없는 무엇입니다.
믿음은 마음 차원의 문제인데 부모의 사랑이 그 사람 마음 안에 들어가 ‘평화’를 줄 때 생깁니다. 제가 어머니를 의심했을 때 어머니께서 저에게 해 주시는 사랑에 결국은 믿기로 결단을 내리게 된 것과 같습니다. 이 ‘평화’를 하느님 나라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라고 하였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 나의 창조자를 만났을 때 누구나 그 평화를 체험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 평화까지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 그 사람이 아이라면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하고 온전한 인간 사회에 적응할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이 평화를 주는 일을 하는 이들입니다. 그것을 거부할 때 더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음이 곧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르쇠르와 펠릭스 르쇠르의 이야기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저명한 프랑스 의사이자 지식인인 무신론자 펠릭스와 결혼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펠릭스는 무신론자였을 뿐만 아니라 아내의 신앙에 적극적으로 적대적이었고 종종 아내의 종교적 신념을 조롱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결혼 생활 내내 사랑과 인내, 충실함을 유지하면서 펠릭스의 개종을 위해 고통과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녀가 죽은 후, 펠릭스는 자신의 영혼을 위한 기도와 희생을 기록한 영적 일기를 발견했습니다. 그녀의 사랑과 헌신에 깊은 감동을 받은 펠릭스는 깊은 회개를 경험하고 도미니카회 가톨릭 신부가 되었습니다.
펠릭스는 후기 저작물과 공개 강연에서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삶에 미친 영향에 대해 자주 언급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하느님께로 인도한 것이 그녀의 사랑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의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결혼 생활 내내 보여준 사랑은 궁극적으로 그가 한때 거부했던 바로 그 믿음을 받아들이도록 이끌었습니다.
교회는 엘리자베스와 같습니다. 교회가 전하는 복음은 바로 엘리자베스가 쓴 영적 일기입니다. 이것마저 거부한다면 다른 증거는 펠릭스에게 믿음을 가져다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직 사랑으로 흘린 피만이 상대의 심장까지 흘러 믿음의 열매를 맺게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하도록 파견되었고 그래서 교회의 사랑과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0,1-12: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심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 외에 일흔두 제자를 둘씩 짝을 지어 당신이 가시려는 모든 곳으로 보내셨다. 그러시면서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3절) 하신다. 양들은 이리 떼의 먹이가 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총이 되도록 보내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어째서 양들과 같은 사도들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을까? 평화밖에 모르는 양들이 어떻게 잔인한 맹수를 이길 수 있겠는가? 그분은 복음을 전하는 모든 사람에게 목자가 되어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시며, 그들을 도와주시고 모든 악에서 구해주실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께만 의탁하면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돈주머니와 여행 보따리,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하신다. 그들은 바삐 다녀야 한다. 그들이 생필품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신발을 신었느냐 벗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살아가는 일을 모두 주님께 맡기기를 원하셨다.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시편 55,23)라고 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일꾼들에게 필요한 것을 넉넉히 채워 주시는 분이시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4절) 이는 길에서 누구와 이야기하느라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일이 늦어지지 않도록 복음선포의 직무를 서둘러 수행하라는 말씀이다. 인정에 끌린 행위가 거룩한 임무를 방해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또 수입을 바라고 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아무 음식이나 잘 먹고, 더 좋은 음식, 더 나은 숙소를 바라거나 찾아다녀서도 안 된다고 하신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5절) 우리는 방문을 하면서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한다. 좋은 습관이다. 우리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빌어주어야 한다. 우리가 빌어준 평화는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복음 전파에서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보다, 전하는 사람에게 더 유익하다. 평화가 전달되면 그 사람과 우리에게 다 유익한 일이다.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태 10,14)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응징하시겠다고 한다. 이 응징은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복음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의 길로 가고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12절) 라고 하신다. 나는 이제 어떠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전할 것인가? 깊이 묵상하면 좋겠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독일의 어느 공장에서 작업 효율을 높이려고 기술 고문을 초대했습니다. 이 기술 고문은 공장 전체를 돌아본 후에 한 가지 지시 사항을 내렸습니다.
“매일 공구를 정리 정돈하십시오.”
사람들은 모두 이 지시 사항에 불만이 커졌습니다. 기술 고문이라고 특별히 초청했는데, 뻔해 보이는 지시 사항을 내렸으니 말입니다. 더군다나 기술자들은 귀찮다고 짜증을 냅니다. 공구 정리 정돈으로 무슨 효율이 높아지겠냐며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일 효율이 20%나 상승했습니다. 일하다 공구를 찾는 데 걸리는 시간이 줄었기 때문입니다. 일상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짜증이 많은 사람, 우울과 불안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은 대체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신앙생활 역시 이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에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분이 많습니다. 신앙은 자기를 죄인으로만 만드는 것 같다며 짜증 나서 성당을 멀리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은 무엇일까요?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본인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방법이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매일 기도하며 주님과 가까운 사람은 신앙의 기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를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저것 챙겨줘도 잘될까 말까 한데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주시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이 전교 여행의 기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장 기본은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다.”라는 선포였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평화였고,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가장 기본을 열심히 선포하고 행동하는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고을이 있는 반면, 받아들이지 않는 고을도 있었습니다. 이 기본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라고 말하면서, 소돔보다 더 심한 벌을 받을 것을 말하라고 하십니다.
유다인들은 이교도들의 땅을 떠날 때 발에 묻은 먼지를 털고 자기네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바로 이교도들을 저주하는 표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을은 저주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잘 받아들이고 있나요? 신앙생활의 기본인 기도를 멀리하면서,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만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저주의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명언: 관계는 단지 마주쳐 나눈 이야기로 맺어지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물드는 과정이 필요하다(정영민).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루카10,6)
누군가를 위해 빌어주는
우리의 평화가
부디,
그들의 외면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오지 않기를.
우리를 위해 빌어 주는
누군가의 평화가
부디.
우리의 외면으로
그들에게
되돌아가지 않고
우리 위에
아주 오래 머물러 있기를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현장을 모르고 일을 하다 보면 자칫 관료화가되고
지나치게 원리원칙과 행정만 중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필드라고 하는 현장이 중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사람을 놓칩니다.
축구 할 때 공만 보다가 사람을 놓쳐
골을 먹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현장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기에 말씀으로만 머무르시지 않고,
현장인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방방곡곡 전하는데
여념이 없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협력자와 후계자로
제자들 역시 파견하십니다.
이처럼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것은
자기 자리에 앉아 가만히 머물면서 하는 게 아닙니다.
교회 울타리를 넘어
삶의 현장을 찾아가는 일에 관심을 갖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어야 합니다.
가끔은 사제의 삶이
이리 떼 한가운데서
살고 있는 삶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정신 차리고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 3)
갑자기
쌀쌀한 날씨가
되었습니다.
머무르지 않고
흐르며
걸리지 않고
지나가는
자연의
순리입니다.
안주하지 않고
떠나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가야할 길을
가는 사람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자아를
벗어나는
여정이
곧 하느님을
만나는
여정입니다.
떠나면서 알게되고
따르면서 보게되는
참된 평화입니다.
참된 평화는
물질을 수확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수확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하기에
그 어디에서도
배움이 있고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습니다.
수확할 양(量)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수확할 일꾼들의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너무 많은 것에
마음을 빼앗기며
사는 것을
경계해야합니다.
기도는 욕심을
줄이는 것이며
가까이 온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서
중심이 되기에
나의 뜻을 비우는
나라입니다.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리듯
수 많은
집착의 먼지를
털어 버립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십니다.
일꾼과 주인의
관계처럼
수확할 밭도
수확의 때도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우리를 수확할
밭으로 보내신
사랑안에는
기쁨도 실패도
좌절도 행복도
있었습니다.
그 모든 체험이
다 필요하기에
가까이 온
하느님의 나라는
먼지를 털고
다시 시작합니다.
홀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온
가장 좋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가장 좋은
하느님 나라의
오늘되십시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루카10,2ㄱ)
'복음화의 일꾼이 되자!'
오늘 복음(루카10,1-12)은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이미 열두 제자들을 파견하셨는데, 또 다시 일흔 두 명의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말씀처럼 수확할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할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10월은 '전교의 달'입니다. 교회는 1970년부터 10월을 전교의 달로 지내오고 있는데, 왜 10월을 전교의 달로 정해 놓았을까? 그 이유는 10월이 수확(결실)의 계절이고, 날씨로 볼 때도 전교하기 좋은 계절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복음 선포'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복음화의 사명'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절대사명'입니다.
하지만 요즘 우리는 세상 복음화가 점점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복음화의 일꾼들이 적은 탓도 있고, 세상 탓도 있지만. 보다 더 근본 원인은 내가 복음화되는 것이 힘들고, 내가 복음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화'는 단순하게 세례의 숫자를 늘리는 일이 아니고, '복음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화의 본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복음화 사명을 수행하려면, 내가 먼저 복음화가 되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내가 먼저 복음이 되고, 복음을 따라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복음화된 모습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날마다 내가 먼저 복음화되려고 애쓰는 그런 복음화의 일꾼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2열왕15,26)
복음
제1독서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 욥기의 말씀입니다.19,21-27
욥이 말하였다.
21 “여보게, 나의 벗들이여,
날 불쌍히 여기게나, 불쌍히 여기게나. 하느님의 손이 나를 치셨다네.
22 자네들은 어찌하여 하느님처럼 나를 몰아붙이는가?
내 살덩이만으로는 배가 부르지 않단 말인가?
23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25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6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7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속에서 내 간장이 녹아내리는구나.”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말씀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1-12
그때에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10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11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