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2월 시종원경을 지낼 때 을사조약을 체결한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등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1907년 1월 내대신(内大臣)을 지내면서 친일 보부상단체인 동아개진교육회의 회장에 선출되고 그해 11월 2일 박헌정과 이동선 등이 기호흥학회를 결성하여 사립 경성장훈학교(현 장훈고등학교)를 개교하자 교장을 지냈다.그해 3월 일본의 왜체가 대한제국의 한 해 예산과 맞먹는 거액 1,840만 원을 갚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거금 10만원을 기부했다.
1907년 7월 궁내부 특진관 겸 상방사 제조를 지내고 10월 대한제국을 시찰하러 온 일본 왕자 요시히토(大正 王 : 다이쇼 왕)를 환영하기 위해 조직한 신사회 (紳士會)에 발기인으로 참석하고 환영위원장을 맡아서 행사를 주관하였다.
1908년 5월 규장각 지후관을 지내고 11월 대한산림협회 명예회원이 되고 1909년 6월 연학단(硏學團) 단장을 지내고 7월 신궁봉경회(神宮奉敬會 : 일본 왕의 시조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왕의 위패를 봉안하는 신궁을 조선에 건립하는 친일 단체 모임)의 고문을 지냈다.
1909년 7월 일본은 왕자 요시히토가 조선을 방문했을 때 의전을 잘했다고 그공을 치하하고 요시히토 왕자로 부터 기념장을 받았다. (요시히토 일왕 1912년 ~ 1926년 재위)
1909년 12월 일진회(一進會 : 1904년 8월 일본의 명령으로 송병준이 주도해서 설립된 친일 단체)의 고문을 지내고 1910년 3월 국민협성회(國民協成會 : 한일병합을 추진하기 위해 결성된 친일단체)의 발기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강제병합에 앞장서고 그해 10월 조선의 국권피탈(國權被奪)에 앞장선 공으로 일본 정부로 부터 자작 작위를 받고 1911년 1월 일본으로 부터 은사공채 5만원을 받았다. 그해 4월 사단법인 조선귀족회 부회장에 선출되고 1912년 2월 한성은행 감사를 지내고 이어서 8월 한일은행 은행장에 선출되고 일본으로부터 조선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5년 5월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명예회원으로 위축되자 그 답례로 600원을 기부하고 8월 가정박람회 명예고문으로 위촉되었다. 그해 11월 일본 왕자 요시히토가 다이쇼가 왕으로 등극하자 즉위대례식에 참석했다. 1918년 6월 조선식산은행 설립위원으로 참여하고 8월 경성구제회에 1,000원을 기부했다.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의문으로 승하하자 어장주감 제조와 장례식 고문을 맡고 3월 애책문(哀冊文 : 왕이나 왕비를 애도하는 글)을 지어 올리고 6월 고종황제의 국장의궤 편찬고문을 지냈다. 그해 11월 전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寺內正義)가 죽자 그의 장례식에 조선대표 발기인으로 위축되었다. 1920년 3월 조선실업구락부 고문 12월 한일은행 고문 1921년 1월 내선융화를 목적으로 조직한 대정실업친목회(大正實業親睦會)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22년 12월 친일 유교단체인 대동사문회 (大東斯文會) 회장을 지내고 1923년 5월 조선교육회 부회장을 지내고 그해 8월 조만식, 오윤선, 김동원, 김보애 등이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조직하자 사무실로 사용하라고 서울에 집 한체를 기증하고 그해 11월 조선견직회사를 설립하였다.
1926년 4월 순종황제가 승하하자 종척집사(宗戚執事 : 국상을 주관하던 임시 관직)에 임명되고 애책문을 지어서 올렸다. 1926년 5월 유교단체인 모성공회(慕聖公會) 회장에 위촉되었다. 그해 12월 25일 미치노미야 히로히토가 일본 제124대 왕위에 등극하자 일본정부 는 기념품으로 금배(金杯 : 금 술잔)을 제작하고 관료들에게 금배와 대례기념장을 나누어 주었는데 조선 고위 관료중에도 일본 정부에 협조를 잘한 친일 관료를 선발하고 그들에게도 금배와 대례기념장을 나누어 주면서 민영휘도 금배와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9년 9월 경성협찬회에서 조선박람회를 개최하자 경성협찬회에 1,300원을 기부하고 1931년 11월 단군신전봉찬회의 고문을 맏고 1932년 6월 유림단체 대성원 고문을 지내고 1933년 동일은행(현 조흥은행)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35년 1월 조선나병예방협회(한샘병협회)에 1만원을 기부했고 그해 10월 조선총독부로부터 한일강제병합조약 25주년 기념은배와 표창장을 받았다. 1935년 12월 30일 83세로 만수를 누리고 죽었다.
일부 문헌에는 민영휘가 명성황후의 많은 재산을 관리 했었는데 1895년 8월 20일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왜인 자객들에게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민영휘는 명성황후의 모든 재산을 차지했다고 한다.
민영휘가 죽을 때 그의 재산은 거금 30만원 이상으로 그는 관직생활을 하면서 수탈한 부정축재를 잘 불려서 조선 최고 부자중에 한명이었다.참고로 그해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은 1억 300만원이었다. 민영휘가 죽자 일본정부는 정3위로 추서하고 훈장과 금배를 내렸다.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민영휘를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7호 : 한일합병의 공으로 왕위 또는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행위. 제18호 : 사법부내의 판사, 검사, 서기, 집달리 또는 형무관리로서 우리 민족의 탄압에 앞장선 행위 제19호 : 주임관 이상의 관리 또는 군경의 판임관 이상 관리나 고등계 형사 등으로서 우리 민족의 탄압에 앞장선 행위 등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규정하고 친일 인명사전에 올렸다.
민영휘의 자손들은 지금도 친일반민족의 재산으로 압수한 땅을 돌려달라고 국가를 상대로 재판을 하고있는 철면피적인 행동을 하고있다.
반민족행위자인 민영휘의 손자 민병도는 1965년 가평군의 남이섬을 매입하고 관광지로 개발하여 지금도 그의 자손들은 매년 수십억원의 막대한 돈을 챙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