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종로 거리를 누비며 한국 상인을 지키는 김두한의 모습. 1900년대 초반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이 영화의 배경이 된 무대는 전라남도 나주 영산포구 일대다. 비옥한 평야가 많아 일제의 수탈 현장이 되었던 호남권에는 여전히 60여 년 전의 흔적이 남아있다. 전라남도 나주도 그 중 한곳이다.
옛 영산포구는 홍어의 거리로...
비릿한 홍어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나주에서 영산강을 따라 도착한 옛 영산포구는 이제 ‘홍어의 거리’가 됐다. 흑산도에서 잡은 홍어가 이곳에 오면서 저절로 삭았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영산포는 내륙 깊숙이 자리한 포구다. 고려시대 수운의 발달로 형성된 영산포는 1897년 목포항 개항과 함께 전라남도의 경제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다. 1910년 일제는 배가 드나들 수 있도록 개폐식 목교를 설치하고 1930년대에는 아예 철근콘크리트 다리를 설치했다. 영산포역과 직선으로 연결된 다리는 나주평야의 쌀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탈해가는 수단이 됐다. 1970년대 영산강 하구언이 지어지고 배가 더 이상 드나들지 않게 되자 영산포는 포구로서의 역할을 잃었다.
그나마 옛 포구에 남아 있는 영산포등대가 화려했던 과거 모습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한다. 영산포등대는 1915년 일제가 영산강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설치한 시설이다. 이제 배가 드나들지 않아 수위를 측정할 필요는 없지만 내륙하천에 남아있는 유일한 등대로서 저녁이 되면 여전히 불을 밝힌다.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영산포등대 인근 영산동과 이창동에는 일본식 가옥이 고스란히 남았다. 일제가 만든 문서창고는 회사와 가정집으로 용도가 변하긴 했지만 붉은 벽돌건물 그대로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3년 전 이곳으로 이사 온 집주인은 “가끔 이렇게 근대문화유산을 본다며 사람들이 찾아와요. 오래된 집이지만 워낙 튼튼하게 지어서 생활하기에는 불편함이 없어요”라며 마음 좋게 집 구경을 시켜준다.
“여기도 일본집, 저기도 일본집”
“여기도 일본집, 저기도 일본집, 다 일본집이야~” 영산동 골목에 들어서자 주민 이환배(74) 할아버지가 마을을 설명해준다. “이 앞은 일본 카페였고, 저 옆은 담배가게였지. 어렸을 적에는 일본아이들과 골목을 뛰어다녔어”라며 당시를 회상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나주의 인구는 14만6000여 명. 그 중 일본인은 3400여 명에 달했다. 일본인은 영산포를 침략 교두보로 삼고 교육, 상업. 금융시설을 만들었다. 해방 후 일본인이 떠난 영산동과 이창동 일대에는 130여 채가 넘는 일본식 가옥이 그대로 남았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장군의 아들>, 1970년대 시골을 무대로 한 드라마 <죽도록 사랑해>가 이곳에서 촬영됐다.
주민의 안내를 받아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보자 예상보다 더 많은 일제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서정(西町·니시마찌), 본정(本町·혼마찌)이라 불리던 거리 명칭부터 가옥에 일장기 표시를 했던 흔적까지 1930년대에 타임머신을 타고 온 기분마저 들 정도다. 오래된 양철집 내부는 긴 복도에 다다미방과 옷장 등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정미소, 창고, 공장 등으로 쓰이던 건물은 일반 살림집으로 쓰이다가 현재는 빈집이 되어버린 곳이 많다.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온 윤상근(76)할아버지는 “그때만 해도 여기가 엄청 번화가였지. 뱃길이 끊기고 상권이 다 죽었어. 사실 60년도 더 된 집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게 신기하지 뭐”라고 말한다. 낮은 지대의 집은 1989년 큰 홍수로 물에 잠겨버리기까지 했다. 그래서 옛날 사진을 가지고 있는 주민을 찾기 힘들었다. 영산동 이성자 통장은 “마을에서 아이 울음소리를 들어본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어요. 집주인이 마을을 떠나거나 연로해서 세상을 떠나면 집은 그냥 비어버리죠.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곳이니까 잘 정비하면 더 좋을 텐데요”라고 말한다.
수탈의 현장이자 독립운동의 근거지
마을 안쪽까지 들어서자 어마어마한 규모의 저택이 나온다. 일제 강점기 나주에서 가장 많은 농토를 보유했던 일본인 대지주 구로즈미 이타로(黑住猪太郞)의 저택이다. 전국을 시찰하다가 나주평야를 보고 영산포에 정착해 1,100여 정보(町歩)의 농지를 소유한 대지주가 됐다. 지금 봐도 호화로운 저택은 1935년경 청기와를 비롯한 모든 자재를 일본에서 운송해 지은 것이다. 이렇게 수탈의 증거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나주지만 동시에 항일학생운동의 근원지가 된 곳이기도 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시작이 나주역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나주에서 출발한 호남선 열차에서 일본인 중학생이 한국여학생을 희롱한 것이 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과의 싸움으로 번졌고 이것이 불씨가 돼 호남지역에서는 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나주항일학생운동기념관에서는 당시 나주 모습은 물론 독립운동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나주에는 영산포등대 이외에도 옛 나주경찰서, 노안천주교회, 남평역사 등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문화재가 많다. 옛 동양척식회사 건물 등 나주 시내 몇몇 건물은 문화재 등록이 예고됐다. 물론 아직 정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지도를 꼼꼼히 살피면서 찾아야 하지만, 호남의 웅도로 찬란한 문화유산을 가진 나주를 둘러본다면 근대문화유산 기행은 꼭 풀어야 할 과제처럼 여행객을 따라다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