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6일 소셜미디어 '엑스'(X, 옛 트위트)를 통해 "해외에 동결된 약 3천억 달러(약 395조 원)의 러시아 자산은 우크라이나 지원에 사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생명에는 신경을 쓰지 않지만, 돈에는 큰 관심을 갖고 있는 테러국(러시아)의 집권층이 고통스럽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는 기회"라는 이유를 댔다. 이를 통해 "국제사회가 테러국에게 제대로 된 힘을 보여주고, 이 세계가 테러보다 강하다는 것을 느끼게 할 수 있다"고도 했다.
그의 이같은 주장은 시기적으로 그냥 나온 게 아닌 듯하다. 지난 연말 서방에서 제기된 러시아 자산의 압류및 활용 방안 검토라는 움직임과 연계된 것이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의 분위기로 볼 때, 자국에 대한 자금 지원 전망은 새해 들어서도 여전히 흐린 데 반해, 대규모 병력 동원 등 돈 쓸 곳은 많은 우크라이나측으로서는 마지막 희망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속내를 쉽게 풀면, '우리는 지금 돈이 필요한데, 니네 주머니에서 꺼내기 힘들면, 갖고 있는 러시아 돈이라도 달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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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렌스키 대통령/사진출처:엑스(옛 트위트) @ZelenskyyUa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이날 젤렌스키 대통령의 '엑스' 메시지를 소개하면서 "1,100억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는 미국과 EU의 대(對)우크라 금융 지원 논의가 중단된 것을 배경으로, 동결된 러시아 자산의 압류에 대한 서방의 논의가 심화됐다"며 "러시아 자산의 몰수는 서방의 대우크라 자금 지원 방안의 대안으로 간주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미국과 EU의 대우크라 추가 지원은 지난 연말 각기 다른 이유로 막혀 버린 상태다. 미국은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이 우크라이나 지원을 남부(멕시코) 국경지역의 불법 월경 방지 강화 방안과 연계시켜 바이든 행정부가 요청한 자금 지원안의 논의 자체를 원천 봉쇄했다. 또 EU는 다년간에 걸쳐 우크라이나에 500억 유로를 지원하기로 한 계획이 친러시아 성향의 헝가리가 반대함으로써 사실상 무산됐다.
러시아군의 역공으로 수세에 몰린 우크라이나를 마냥 두고 볼 수 없는 미국은 지난 연말 러시아 (중앙은행이 해외에 맡겨둔) 자산의 몰수를 대안으로 내놓은 것으로 외신들은 전했다.
스트라나.ua와 rbc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미 뉴욕 타임스(NYT)는 지난 12월 20일 "바이든 미 행정부는 G7(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 일본)과 함께 러시아 자산을 압류해 우크라이나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지 검토하기로 했다"며 "최근 몇 주 동안 미국에서는 관련 부처와 중앙은행(연방준비제도이사회, Fed), 고위 외교관, 변호사 간에 논의가 심도있게 이뤄졌다"고 전했다. 나아가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 2주년이 되는 2024년 2월 24일에 맞춰 이를 실행에 옮기기로 하고 다른 G7 회원국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은 의회의 적절한 조치 없이는 러시아의 자산 몰수가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표명한 바 있다고 NYT는 덧붙였다. 러시아 자산의 몰수가 자칫 다른 국가들이 자국 자산의 미국 예치를 거부하거나, 인출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다.
동결된 러시아 자산의 압류및 활용에 관한 FT(위)와 NYT 기사/웹페이지 캡처
NYT 보도는 곧바로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의 보다 진전된 기사로 이어졌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FT는 지난 12월 28일 "G7 재무장관 등이 최근 러시아 동결 자산을 압류하는 방안을 논의했다”며 “미국의 강력한 의지 표명에 서방의 러시아 자산 몰수 작업이 가속화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자리에서 미국은 자산 압류 작업과 관련한 실무그룹 3개를 구성하자고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 자산 몰수와 관련한 법적 문제와 △자산 압류후 리스크(위험)을 최소화하는 방안 △압류 자산의 우크라이나 지원 방식 등을 논의하는 실무자 그룹이다.
미국의 이같은 계획에 영국과 일본, 캐나다는 찬성했으나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 EU는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에 러시아 자산 몰수의 합법성을 신중하게 평가해야 한다”며 유보적인 입장을 나타냈다고 한다.
서로 다른 입장은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동결된 러시아 자산이 적은 영국과 일본, 캐다나는 러시아의 보복 조치에 대한 부담감이 별로 없는 반면, 나머지 국가들은 자산 몰수의 후폭풍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특히 새해 들어 G7 의장국을 맡은 이탈리아는 러시아에 진출한 자국 기업에 대한 러시아 측의 보복 가능성을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
해외 금융기관에 예치된 러시아 중앙은행의 동결자산 약 3,000억 달러 가운데 미국 금융기관에는 약 50억 달러가 들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도 유럽 국가들에 비해 부담이 덜한 편이다. 미국으로서는 러시아의 자산 몰수가 '내 손이 아니라 남의 손'에 피를 묻히게 하는 '신의 한수'라고 여길 수도 있다.
/사진출처:Делфи rus.delfi.lv
하지만 이를 잘 알고 있는 EU의 주축국인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은 부정적이다. 유럽 금융기관에 맡긴 러시아 자산(유로화 투자)을 몰수할 경우, 유로화에 대한 제 3세계의 신뢰는 무너지게 된다. 또 유럽 자산에 대한 러시아 측의 보복 몰수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서방 진영에서는 러시아 자산의 압류 외에도 △자산의 수익금을 우크라이나를 위해 사용하는 방안 △자산을 우크라이나의 자금 대출시, 담보로 활용하는 방안 등이 논의되고 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FT는 지난 12월 16일 EU 집행위원회가 러시아 자산을 압류하는 것보다 (국제증권예탁결제기관인) '유로클리어'에 예치된 러시아 자산 1,910억 유로의 수익금을 우크라이나 지원 자금으로 돌리는 방안을 제안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오는 2027년까지 러시아 자산에서 발생한 수익금 150억 유로(연간 30억)를 우크라이나로 이전한다는 것이다.
또 우크라이나 재건 기금을 세운 뒤, 세계은행의 보증 하에 러시아 동결 자산을 담보로 대출하거나, 직접 대출 자금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있다. 러시아가 이 방안에 협력을 거부할 경우, 러시아 동결 자산의 가치가 급격히 떨어질 때까지 계속 자금을 대출할 수도 있다고 한다.
물론, 서방의 이같은 조치는 '국제법 위반이자 절도'(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로 해석될 수도 있고, '세계 금융 질서의 판도를 바꾸는 조치'(필립 젤리코우 후버연구소 선임연구원)가 될 수도 있다. 전쟁이 경제전쟁, 특히 금융전쟁을 수반한다면, 동결 자산 이슈는 어떤 의미에서 서방진영이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주권 국가의 중앙은행이 예탁해 놓은 거액의 돈을 압류하는 것은, 전례가 없고 가치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 세계질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또 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러시아도 이미 기회가 있을 때마다 "러시아 자산이나 그 일부가 압수될 경우, 대칭적으로 행동할 것"이라며 맞대응을 예고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지난 12월 29일 브리핑에서 '러시아의 동결 자산이 몰수될 경우, 대응 차원에서 압류할 수 있는 서방 자산의 목록이 있느냐'는 질문에 "물론 있다"고 자신있게 답변했다. 앞서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러시아내 비우호국의 자산인 특별 투자 계좌(통칭 러시아어로 C, 혹은 S계좌)의 몰수 가능성을 경고했다. C계좌는 비우호국 투자자가 반드시 개설해야 하는 러시아내 계좌로, 지난해 4월 1일 기준으로 4,770억 루블(약 6조7,590억원) 규모로 추산된다.
러시아 외무부에서는 전쟁 상태에서나 가능한 '외교 단절'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위협했다.
세르게이 랴브코프 러시아 외무차관은 지난 12월 22일 "미국과의 외교 관계를 우리가 먼저 깨뜨리고 싶지 않지만, 동결된 러시아 자산 몰수와 군사적 행동의 확대는 양국간 외교 관계의 파단을 촉발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외교 관계 자체는 숭배해야 할 일종의 토템도 아니고 모두가 소중히 여길 것도 아니지만, 모스크바는 워싱턴과 함께 '국제 안보와 전략적 안정을 유지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러시아는 미국과의 관계 단절을 원하지 않는다"며 이같이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