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타지 않은 편지가
박지웅
산 자들이 쓰다 버린 문자는 무당이 주워 쓰거나 귀신이 드나드는 통로가 된다
숨결을 타지 않은 말의 육체가 사라지듯 지하에 묻힌 말도 불러낼 수 있다 그것을 아는 자는 글씨를 함부로 땅에 쓰지 않았다 망자로 이야기꽃 피운 자리는 불을 질러 귀문(鬼門)을 닫았다
불탄 자리를 뒤적이면
가끔 다 타지 않은 편지가 나왔다
아이들은 글씨를 주머니 깊이 넣어두었다가 먼저 잠든 사람의 머리맡에 몰래 뿌리곤 했다 미처 하지 못한 말 닿지 않은 글이 귓속으로 들어가면 꿈자리가 사나웠다 귀신과 공모한 아이들은 쾌활했으나 비극이란 애초에 모두 즐거움이었다
어떤 불행은 등잔불도 켜두지 않았으니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 까마귀처럼 웅크리고 꿈을 꾸었다 흰 나무의 미간에 푸득거리며 떨어지는 꿈, 저승은 봄이었다 귀신들이 꽃잎으로 나무의 말을 헤아리는 밤이었다
쓸쓸함을 열고 까악까악 우는 백목(白木)의 숲
그곳에는 꽃으로 가려놓은 함정이 있다
꿈에 덮인 꿈을 잘못 밟았다가 더 깊은 명부로 떨어지면 지층 사이에 버려진 집터가 나온다 다만 흐린 초성(初聲)으로 남은 길과 벽과 사방, 재가 된 방 안에 들어서면 시커멓게 바스러지는 발바닥
어떤 꿈은 몇 번이나 관(棺)을 지나서야
바깥으로 나올 수 있다
그는 누구도 입에 담지 않았던 방언을 중얼거린다 무명(無名)에 입술을 댔다가 지하의 글자들이 입속으로 흘러들었기 때문이다 목젖으로 올라오는 누군가의 혀들, 귀문에서 되살아나 흩어지는 홀씨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