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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2. 묵상글 ( 연중 제6주간 월요일. - 은총의 완성.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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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2. 연중 제6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은총의 완성
“여러분 가운데에 누구든지 지혜가 모자라면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게 베푸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야고보서는 지혜가 모자라면 청하라고,
그러면 하느님께서 너그럽게 베푸실 거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모자라고 청할 것이 지혜뿐이고,
하느님께서 주실 것이 지혜뿐이겠습니까?
우리는 모자라는 것투성이고,
그러니 우리는 청할 것을 특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 좋은 거라면 뭐든 청해도 되고 하느님께서는 너그럽게 주십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하느님께서 너그럽게 주신다고 하는데
이 말을 바꿔 이해하면 하느님은 은총의 하느님이라는 말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청하고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신다고
그 은총이 다 우리에게 진정한 은총이 되는 것인지,
그 은총이 진정한 은총이 되게 하려면 다시 말해서
은총을 완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것이 오늘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은총의 완성은 실천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이 우리에게 진정한 은총이 되게 하려면
주신 은총을 가지고 실천해야 한다는 말이고 이것이 야고보서가
줄곧 주장하는 바이며 우리 가톨릭이 개신교와 달리 얘기하는 바입니다.
개신교가 비판하듯 우리의 실천과 공로가 있어야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실천과 공로가 은총의 조건은 아닙니다.
우리의 실천은 주신 은총에 대한 합당한 노력입니다.
밥을 주십사 청하면 하느님은 밥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밥을 먹고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빈둥 놀면
그 밥은 우리의 힘이 되지 않고 살만 찌개하고 비만만 되게 할 뿐이지요.
밥이 우리의 힘이 되게 하려면 힘들어도 힘을 써야 합니다.
여러 차례 말씀드렸듯이 힘들다는 말은 힘이 들어온다는 말인데,
밥이 힘이 되어 들어오게 하려면 힘들어도 힘을 쓸 때 들어오는 것입니다.
오늘 야고보는 인내 또는 인내력이 어떻게 생기는지 얘기하는데
그 골자는 시련 없이 인내는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말이기도 한데 너무도 당연한 말입니다.
인내라는 것이 본래 싫어하는 것, 고통, 시련을 견뎌내는 것이지,
좋아하는 것, 즐거움, 순탄함은 견디지 않고 그저 즐기고 누리는 법이지요.
요즘 인내하는 힘들이 갈수록 떨어집니다.
역경에 조금만 처해도 쉽게 Burn out이 됩니다.
Burn out을 우리말로 무기력증이라고 번역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풀어서 얘기하면 스트레스가 지속되면 어느 순간,
심리적 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되고 육체적으로도 무기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렸을 때부터 역경을 적당히 견디는 힘을 길렀어야 하는데
자식을 너무 사랑하여 그 나이에 맞는 역경을 겪지 않아도 되게
부모가 과보호했고 역경을 피해 가게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역경을 견디고 이겨내는 힘이 세다고 하지요.
맞는 말이지만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아, 아니, ‘과잉 사랑’을 받아
힘든 것은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않고 컸다면 그 사랑의 결과는
완성이 아니라 실패이고 밥을 먹고 힘든 일을 하지 않아 비만이 되듯
사랑도 비만이 될 것입니다.
사랑이든 은총이든 많이 받았으면 많이 실천해야
사랑 비만 은총 비만이 되지 않고 완성될 것입니다.
내일부터 17일 토요일까지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돌아와서 기쁘게 다시 만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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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2.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마르 8,11)
오늘 <복음>은 ‘4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에 이어, 예수님께 대한 바리사이들의 시험을 전해줍니다.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마르 8,11)
그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마치 모세 때에 광야에서 내린 ‘만나’(탈출 16장)나, 여호수아의 간구로 해와 달이 멈춰졌던 일(여호 1,12-14)과 같은 하늘에서 오는 초자연적인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너뜨리기 위해서 시험합니다. 마치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에게 빵이 되라 해보시오.”(마태 4,3)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메시아인지를 스스로 증명해 보이라는 지극히 도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심문하듯이 예수님을 다그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이에 대해서, <마태오복음>의 병행구절에서는 그들이 표징을 요구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혀줍니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징은 분별하지 못한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6,3-4)
그렇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시대의 표징을 드러내셨지만, 특히 바로 앞 장면에서는 ‘4천명을 먹이신 기적이야기’를 통해서도 드러내셨지만, 그들이 표징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이기 때문임을 말해줍니다. 어쩌면, 도처에서 드러내시는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보면서도, 여전히 무시하고 거부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바로 그럴 것입니다. 과학자 아인쉬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한 부류는 세상에는 기적이 없다는 사람들이요, 또 한 부류는 세상의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믿고 받아들이는 이의 눈에는 모두 것이 기적이요 신비인 것입니다. 본 훼퍼가 갈파한 대로,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성사입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그 무엇도 이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혹 우리가 그 사랑을 피해가고 거부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 8,12)
주님!
당신의 진실은 오늘도 저의 믿음을 다그칩니다.
불신으로 왜곡된 저희 마음을 밝혀주소서.
가리고 눈 감은 마음을 뜨게 하소서.
도처에 드러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도처에 흐르는 당신의 사랑을 피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보면서도 무시하고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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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2. 연중 제6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어라
미국에서 교포 사목을 할 때입니다. 성당 앞뜰에 성모님 상을 모시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 마음을 안 어떤 분이 “한국 어느 성당에 모셔진 성모님은 성모상에 머리를 갖다 대면 꼭 안수하는 모습인데 기적도 많이 일어난답니다. 그 성모님 상을 모신 곳이 어딘지 알아보고 그런 성모님을 모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쁜 성모님을 모시면 더 많은 관심을 지니게 되고 은총도 그만큼 더 크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일반 판매용 성모상도 눈을 쌍꺼풀 해야 좋아한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사람들은 신비한 현상에 민감합니다. 어디에 어떤 기적이 있다고 하면 그곳에 쫓아가고 그 혜택을 입고자 애를 씁니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 신비한 현상이나 기적을 통하여 드러내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더 많은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현실입니다.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고 주어진 은총의 열매에 매달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찾기보다 자신이 하느님이 되기를 소망하는 착각에 빠집니다.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베풀어 주셨음에도(마르8,1-10). 종교 지도자들의 불신은 계속되고 결국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집과 몰이해 속에 믿음이 없는 완고한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자기들의 욕구에 맞는 것만을 요구하고 이미 보여준 표징을 올바르게 보려 하지 않고 또다시 표징만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내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도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보여주기 위해서 오신 쇼맨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보여주기 위한 기적,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진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기적을 많이 보고 체험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기적의 삶을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기적이 믿음을 가져오기보다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어떤 성모님 상을 모시든 그 앞에서 성모님과 일치한 마음으로, 그분의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면 기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풀고,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며 소외된 사람들의 상황을 바꾸어 주시고 영원한 삶을 살게 해 주어도 그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살아있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기적을 베풀어 준 것은 그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적 사건 안에 담긴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현상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 삶의 자리에서 기적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하늘의 기적이 아무리 많이 일어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무엇을 보여 달라고 조르지 말고 우리가 머무는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14,12). 주님, 표징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눈과 깨닫는 마음을 주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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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2.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영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A smooth sea never made a skilled mariner.’ 잔잔한 바다에서는 좋은 뱃사공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비슷한 말로 ‘고진감래(苦盡甘來)’가 있습니다. 고생 끝에 즐거움이 온다는 뜻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우리도 비슷하게 ‘인내는 쓰지만 결과는 달다.’고 말하곤 합니다. 성서는 고생 끝에 즐거움을 맞이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시작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정든 고향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갖은 고생을 하였지만 늦은 나이에 귀한 아들을 얻었습니다. 모세는 80이 넘은 나이에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 바다를 건넜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이스라엘 백성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재물, 가족, 건강까지 잃었습니다. 욥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했다면, 하느님께서 나쁜 것을 주실지라도 감사드립니다.” 아브라함, 모세, 욥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이 시련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참된 행복을 선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우리의 신앙에는 두 개의 축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성탄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부활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축하하면서 시메온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마리아는 시메온 예언자의 말을 가슴에 깊이 담았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십자가와 죽음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 죽음이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240년이 된 한국교회도 의로움 때문에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100년 넘게 박해를 받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하였습니다. 그 박해와 시련을 견디어 냈기에 우리는 103위 성인을 공경할 수 있고, 124위의 복자를 모실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표징은 무엇일까요?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표징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혈연입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학연입니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재물과 권력입니다. 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그들이 원하는 표징을 보여줄 수 없었습니다. 나자렛에서 자란 예수님은 그들이 바라는 표징을 보여줄 수 없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과 함께 하시던 예수님은 그들이 바라는 권력과 재물을 보여 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려는 표징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오신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려는 표징은 원수까지도 받아들이는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려는 표징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려는 표징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와 신앙인들이 보여 주려는 표징은 무엇일까요? 화려한 건물과, 체계적인 조직, 법과 교리를 통해 드러나는 권위는 예수님께서 바라시던 표징은 아닙니다. 우리는 ‘겸손, 용서, 희생, 사랑’의 표징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한 표징이 우리를 하느님의 나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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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2. 연중 제6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바리사이들이 주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하늘에서 오는 표징 말입니다. 그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표징 중에 가장 완벽한 표징이 바로 그들 눈앞에 있는 주님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실 그들은 주님께서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가시관 쓰신 주님께 그들은 ‘자신을 구해보아라.’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표징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바리사이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 역시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님께 모여들 때는 제자들 역시 주님을 스승님이라 부르며 그분을 따랐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제자라는 타이틀이 그들에게는 삶의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탄탄대로를 걷고 높은 지위에 오르시리라 믿었던 주님께서 고난의 길에 들어서게 된 순간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 버립니다. 그들은 주님을 하늘의 표징으로 정확히 보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은 벌하시지 않으십니다. 버리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부활의 기쁨을 전하고 제자들에게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그리고 그때 제자들은 가장 완벽한 하늘의 가장 완벽한 표징인 주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앞에 표징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계십니다. 이분이 가장 완벽한 표징입니다. 이분보다 더 하늘나라를, 하느님 아버지를 드러낼 수 있는 분은 없습니다.
가장 완벽하고 가장 흠 없는 분이 우리 앞에 계십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가장 완벽한 표징께서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 늘 헌신하십니다.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오늘도 주님과 함께 하늘나라를 향하여 걷는 우리들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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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키의 결말
제 동기 신부님들 사이에서 저의 별명은
‘요리 공주 민키’입니다.
제가 조리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동기 모임을 하는 중에 한 동기 신부님이 말했습니다.
너 밍키의 결말을 알아?
‘요술 공주 밍키’가 어떻게 끝나는지 관심도 없었던 저는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되는데? 별나라로 돌아가나?
그 친구는 말했습니다.
아니! 교통사고로 하늘나라 가~
앗! 이런! 요술 공주가 교통사고라니…. 동심을 파괴하는 결말이었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동심 파괴의 결말이 없기를 바랍니다. 적어도 아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은 말입니다.
‘요리 공주 민키’가 응원합니다. 모든 아이들의 동심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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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2.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313년 로마 제국이 종교 자유를 허락하면서 상황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성직자들에게 병역 면제, 세금 면제 등을 베풀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의 재산은 엄청나게 증가했습니다. 특히 종말을 걱정한 부자들은 유산 대부분을 교회에 기부했고, 가난한 사람도 죽을 때 구원을 위해 교회에 전 재산을 기부한다는 유언을 남기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의 재산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이를 통해 교회의 발전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심각한 세속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또 발 빠른 사람은 자기 자녀를 성직자로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성직매매를 통해서입니다. 당시의 교회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헌금을 받아 부자가 된 주교들은 가마를 타고 화려한 옷을 입으며 호화스럽고 성대한 잔치를 벌인다. 그들이 벌인 잔치는 로마 제국 황제의 잔치들보다 더 성대했다.”
종교 자유는 분명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종교는 부패했고, 하느님의 뜻과 정반대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길은 편하고 쉬운 세속화에서 찾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런 세속화 안에서 하느님의 자리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사랑의 하느님은 그런 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과 논쟁하면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 놀라운 기적을 보고서 믿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일은 믿음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세상의 기준을 통해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기적들은 절대로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신 것, 빵의 기적 등을 어떻게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자기들 앞에서 직접 표징을 행하라고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태도이며 꼬투리를 잡으려는 시도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세상의 눈으로는 알아볼 수 없습니다. 과거 종교의 자유로 세속화가 이루어지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더 멀어졌던 것처럼, 세상의 눈으로만 바라보는 불신의 마음이 하느님과 절대로 함께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면서 말하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믿음은 세상 것에 기준을 내세울 때 절대로 생기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느님께 기준을 맞출 때 비로소 믿음이 생기고 계속된 하느님의 놀라운 표징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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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사람들은 평생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죽을 때까지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세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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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2.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닮의 여정
-무지에 대한 답은 예수님뿐이다-
“행복하여라, 지혜로운 이들!”
지혜로운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예수님뿐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없애는 말씀의 빛, 하느님이 지혜인 예수님입니다. 부단히 자기를 넘어 예수님을 닮아가는 자아초월의 여정, 예닮의 여정을 통해 참으로 참으로 존엄한 품위의 사람, 지혜로운 사람, 자유로운 사람, 행복한 사람, 부요한 사람, 아름다운 사람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믿는 이들의 삶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진정한 부자는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필요한 것이 가장 적은 사람입니다. 예수님만으로 행복한 사람이 진정 부자입니다. 아주 오래전 써놓고 따뜻한 위로를 받았던 시가 생각납니다. 이 시로 한달간은 행복했습니다. 24년전 짧은 자작시인데 방금 생각이 났습니다.
“민들레꽃
외롭지 않다
아무리
작고 낮아도
샛노란 마음
활짝 열어
온통
하늘을 담고 있다”-2000.4.20.
아마도 형제들 다 엠마오 산보 다 떠나고 수도원 집을 지키던 부활절 다음날 썼던 시일 것입니다. 하늘을 담아, 하늘을 닮아 행복한 부자처럼 보이는 작고 낮게 위치한 땅에 바짝 붙어있는 하늘을 가득 담고 있는 샛노란 민들레꽃이었습니다. 교회학자 성인 축일에는 이들의 지혜를 기립니다. 학식은 물론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께 뿌리내린 지혜로운 사람이, 진리의 연인이 진짜 교회학자들입니다. 교회학자 축일시 독서는 늘 고무적입니다.
“나는 지혜를 욕심을 채우려고 배우지 않았다. 이제 그것을 아낌없이 남에게 주겠다. 지혜는 모든 사람에게 한량없는 보물이며 지혜를 얻은 사람들은 지혜의 가르침을 받은 덕택으로 천거를 받아 하느님의 벗이 된다.”(지혜7,13-14)
하닮의 여정, 예닮의 여정중 주님과 깊어가는 우정과 더불어 주님의 벗이,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요즘 들어 자주 생각하는 사부 성 베네딕도의 말씀입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성규4,47)
이와 더불어 내 삶의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일년사계로 압축할 때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겠는가 점검하는 것입니다.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하면 아마도 해지는 죽음의 시간을 오후 6시로 할 때 오후 4:30분, 일년사계로 압축하면 초겨울쯤 되지 않겠나 수차례 인용하여 나눴던 예화입니다. 이런 수행이 참으로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삶의 환상이나 거품, 교만이나 집착이 말끔히 걷힌 본질적 깊이의 투명한 삶을 살게 합니다. 인생휴가 얼마 안남았는데 새삼 무슨 휴가인가 하는 생각에 이미 휴가를 접은지 수십년이 지난 수도생활입니다. 얼마전 써놓은 “인생휴가”라는 시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휴가나온/인생인데
남은 휴가/얼마/안남았는데
지상에서의 삶자체가/날마다/휴가인데
죽으면 영원한 휴가인데
새삼 웬 휴가?
날마다/휴가처럼 사네”-2023.8.9.
어제 읽은 성염(요한 보스코) 교수 부인의 글이 생각나 인용합니다.
-‘요즘 보스코가 마루에 피어난 꽃들을 부쩍 오랫동안 들여다본다. 꽃을 좋아했어도 좀 낯선 버릇이라 “무슨 일이죠?” 물으니, “남은 날이 적어지니까 풀꽃 하나도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지 몰라. 보고 볼수록 신비롭기만 하거든.” 이 대답, 열심히 눈에 담아 놓았다, “이 세상 소풍이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씀드릴 준비중인가 보다.’-
우리 옛 선비들도 참 지혜로운 성인급의 학자들이 참 많았습니다. 오늘 다산 정약용 요한의 글도 마음에 와닿습니다. “읽기 버거운 책이 누구에게나 한 권쯤 있다. 독서는 그와 마주하는 경험이라야 한다.” 제게는 평생 독서의 대상인 성경이 이에 속합니다. “위로는 성현(聖賢)을 뒤따라가 짝할 수 있고, 아래로는 백성(百姓)을 깊이 깨우칠 수 있으니, 독서야 말로 우리 인간이 해야 할 본분이다.” 다산의 <여유당 전서>에 나오는 글입니다. 무지에 대한 해결책으로 평생독서와 평생공부를 참 많이 강조한 다산입니다.
참으로 인간의 고질적 마음의 병이 무지입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나를 모르는 무지의 병에는, 죄에는, 악에는 답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지혜의 주님과 무지의 바리사이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눈이 있어도 무지에 눈멀어 방금 4천명을 먹이신 주님의 기적의 하늘 표징을 목격하고도, 예수님 당신 자체가 하늘의 표징임을 모르고 시험하려 유혹하는 바리사이들에게 깊이 탄식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 자체가 빛나는 하늘의 표징이요 눈만 열리면 오늘 지금 여기서도 무수히 발견되는 하늘의 표징들인데 새삼 무슨 표징이 필요하겠는지요! 이들 무지한 이들을 버려두신 채 지체없이, 단호히 당신 삶의 여정에 오르는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빛납니다. 오늘 제1독서 야고보서에서 예닮의 여정에 충실했던 야고보 사도의 지혜가 보석처럼 빛을 발합니다. 시련과 관련된 인내와 지혜와 믿음에 대한 가르침이 빈부(貧富)에 대한 가르침이 마음 깊이 각인됩니다.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래서 한결같은 정주의 믿음, 정주의 인내를 통한 존엄한 인간 품위의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지혜가 모자라면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대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이런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은 어떠한 길을 걷든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
갈림없는 마음으로, 한결같은 믿음으로 한결같이 항구히 청할 때 선사되는 지혜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예닮의 여정도 실현됩니다. 빈부에 초연함도 탁월한 지혜입니다.
“비천한 형제는 고귀해졌음을, 부자는 비천해졌음을 자랑하십시오. 부자는 풀꽃처럼 스러질 것입니다. 해가 떠서 뜨겁게 내리쬐면, 풀은 마르고 꽃은 져서 그 아름다운 모습이 없어져 버리니 바로 부자가 자기 일에 골몰하다가 그렇게 될 것입니다.”
많이 지녀서 부자가 아니라 필요한 것이 적을수록 부자입니다. 무욕의 지혜입니다. 최소한도의 의식주에 주님만으로 행복하고 부유한 자가 빈부를 초월한, 무지의 탐욕에서 해방된 참 부자요 복자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예닮의 여정에 항구할 때 주님을 닮아 참으로 아름답고 지혜롭고 자유롭고 행복한 존엄한 인간 품위의 삶의 실현이겠습니다. 제 좋아하는 예닮기도 한 대목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생명, 저의 사랑,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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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2.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과 땅 사이에서>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마르 8,11)
하늘
내린
땅
고이
보듬어
땅
올린
하늘
고이
모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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