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요안나 프란치스까 드 샹탈 수도자
상류 계급 출신의 여인으로서 부인이나 혹은 과부로 혹은 수녀로 각기 그 신분에 적합한 덕을 닦고 중인이 모범으로서 성녀가 된 예는 극히 드물지만, 요안나 프란치스카는 그런 드문 분 중의 한 분이다. 요안나는 세례명이고, 프란치스카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사모하며 따르기 위한 그녀의 견진 본명이다.
그녀는 프랑스의 부르고뉴 주 디종 시의 귀족 프레미오가의 출신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한때 주(州)의회 의장을 겸한 근면(勤勉)한 인사였으며, 생후 얼마 안되어 어머니를 여읜 요안나를 측은히 여겨 특별히 관심을 갖고 그녀의 양육에 힘을 기울였다.
요안나는 아직 나이 20세 미만이었을 때에, 어떤 부유한 귀족인 청년에게 구혼을 받았으나 그가 이단을 따르는 자란 것을 알자 즉시 거절해 버렸다. 이것만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독실한 신앙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그녀는 국왕의 충신이며 신앙심이 깊은 신자인 바롱크리스토퍼 드 샹탈 남작의 구혼을 받고 이것이 주님의 뜻인 줄 알고 승낙을 해 연분을 맺게 되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는 이 새 가정에는 봄 날씨와 같은 온화함이 깃들었고 즐거움뿐이었다.
남편인 샹탈이 혼인 전에는 가사보다도 국사(國事)에 치중하여 분망했던 관계로, 집안에는 약간의 부채가 있었으나 그것도 주부인 요안나의 알뜰한 살림에 의해 얼마 후에는 깨끗이 청산을 했다. 그로부터 9년간 그들에게는 여섯 명의 자녀가 태어났으며
그 자녀들의 교육도 알뜰히 시켰다.
그러나 세상이란 것은 믿지 못할 일이어서 보름달같이 원만하던 그녀의 가정에도 우수가 깃들게 되었다.
하루는 친구와 더불어 사냥을 간 남편이 친구의 오발로 인해 불의의 큰 부상을 입고 신음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의 따뜻한 간호도 보람없이 며칠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평소에 정이 두터웠던 부부였던 만큼 프란치스카의 비통한 모습을 보는 사람은 저마다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람도 만나기 싫어 방안에 들어앉아 있던가, 혹은 산속에 가서 외로이 죽은 남편을 생각하며 하루종일 울기만 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이런 비통한 마음이 사라지고 동시에 하느님의 빛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눈물을 씻고 머리를 들어 앞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여생을 독신으로 살며 그리운 그분의 유물인 아이들을 잘 길러내서 초토에 파묻힌 남편의 영전에 보답할 것을 굳게 결심했다.
상(喪)을 벗은 요안나는 유산을 자녀들에게 분배하기 위해 그들을 데리고 마테본에 사는 시어머니 댁에 갔다.
시어머니는 본래 무뚝뚝한 성격에다가 그녀가 신임하는 여종까지 요안나를 눈에 티처럼 여겨 그 시어머니에게 여러 가지 나쁜 말을 했으므로 자연히 그녀의 입장은 곤란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안나는 사랑하는 아들들을 위해 모든 것을 잘 참고 시어머니나 그 여종이나 또는 그 여종의 아이들에게까지 한결같이 친절로써 대해주었다. 그러는 동안 요안나는 33세가 되었다.
그 해 그녀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디종에 있는 친정에 갔었는데, 때마침 유명한 프란치스코 드 살이 그곳에 와서 설교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성당에 가서 그의 설교를 들은 그녀는 이 분이야말로 자신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곧 그의 지도를 청했다. 이때부터 요안나는 성인의 지도를 받으며 성덕에 나아가게 된 것이다.
그녀는 프란치스코에게 육신의 고행보다도 영신적 극기에 대해서 지도를 받았고, 숨은 선덕의 아름다움을 배웠다.
그녀는 실수로 인해 자기 남편을 죽인 사람을 물론 미워하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나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 사람을 만나서, 지금까지 맺혀있었던 모든 원한을 깨끗이 씻어버리는 뜻으로 그 사람의 딸의 세례 대모가 되어 주었다. 자녀들이 이제는 다 컸으므로 그녀는 어머니로서의 일도 적어졌다.
그래서 요안나는 소녀시절에 품었던 수도 생활에 대한 동경을 다시금 갖게 되었다.
그녀는 지도 신부인 성 프란치스코에게 그뜻을 밝혔다. 그녀는 가르멜회 입회를 원했지만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은 전부터 있던 수녀원에는 들어갈 수 없는 과부들을 위한 새 수도원을 세우려고 했던 참이므로 그 계획은 즉시 실현되어 요안나는 그 계획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것이 곧 ’방문회’의 시초이다.
수녀가 되려면 물론 사랑하는 자녀와 정든 아버지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이 정이 많았던 요안나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것이었다.
더구나 그들이 한결같이 수도원 입회를 반대했으므로 그녀의 고민은 더욱 커질 따름이었다.
그러나 수도자가 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줄 안 요안나의 신념은 동요됨이 없이 결국 사랑하는 자녀와 아버지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수도 서원을 발했다.
그 외에 하느님과 개인적으로 선한 것이라 인정되는 것은 꼭 실행한다는 서원도 발했다.
그녀는 새로운 수도회의 총장으로서 그 자매들에게 될 수 있는 데까지 어머니다운 태도로써 대하고자 노력했다.
그리하여 기회 있는대로 건축한 분원(分院)의 수는 그녀의 임종 직전만 해도 무려 75개소에 달했다.
그동안 그녀의 성덕을 시기해 고의로 그녀의 사업을 방해하는 이도 있었다.
또 유게노 전투에서 큰아들을 잃었고, 딸과도 사별하게 된 일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의 하나 하나가 다 그녀에게는 비애의 날카로운 칼이 되었다.
그 중에도 가장 비통한 일은 그녀의 영적 아버지인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의 서거였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 더욱 분발해 많은 자매들을 이끌고 덕행의 길로 매진하는 한편 수도회의 발전을 도모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본부의 소재지인 아네시이에 무서운 페스트가 만연하자 사보아의 공작 부처는 요안나의 신변을 염려해 안전 지대로 피신할 것을 권유했으나, 그녀는 자매들을 남겨두고 떠날 수가 없다고 하며 도리어 시내에 나가 환자들을 돌봐 주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녀를 위안의 천사라고까지 부르게 되었다.
1641년, 요안나는 파리에 있는 수녀원을 방문하고 아네시이로 돌아오는 도중 폐렴에 걸려 위독하게 되어 물렝에서 12월 13일에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성 프란치스코 드 살 곁에 묻혔다.
그녀는 클레멘스 14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