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의 심술 1
몇년 전 폭설이 또 왔는데도 내가 미쳐 먹잇감을 챙기지를 못하니
토끼는 대변으로 사슴은 소변으로 밤에 집앞에 와서
자기들이 다녀갔다는 흔적을 남기고 나를 원망한듯한 데모를 한 흔적을 남겼다.
새로 산 현관 문은 수십개의 프리슴이 들어 있어서 동향집이니
아침이 되면 여러개의 무지게가 대리석 현관바닥에서
윗쪽으로 반사가 되어서 리빙룸 천정에 뜬다.
대리석은 중국 원난성의 대리시[大理市]에서 많이 나기때문에
나온 이름이며 영어로는 그리스어 차용어로 빛나는 돌[marble]이라고 부른다.
몇년전 어느 겨울은 눈이 많은 계절이었다.
눈이 천사의 춤이듯이 사뿐히 내려앉아 삼라만상을 현란한
백의로 갈아입히게 되고 그들의 품안에 포근히 안길 때면
사람들로 하여금 동심으로 돌아가게 한다.
순백 앞에서 사람들은 눈이 아름답다, 정겹다 등 사람이 만든
수식어가 있긴한데 어딘가는 어색하고 인색한것 같다.
눈보다 더 흰색은 없다는데 그들의 위대한 예술작품 앞에서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눈이 하얗게 덮인 산하를 바라보노라면 우리들의 마음도
표백동화 되어 정갈한 마음이 되고 설경의 도도한 운치를
음미하노라면 비록 문외한일지라도 한 구절의 시상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바람을 동반한 ‘폭(暴)’자가 붙게 되면 횡포(橫暴, 글자는 같아도
발음은 다름)로 변하여 땅위에서 먹을거리를 공급받는 동물들에게는
귀찮은 존재가 되며 활동을 불편하게 만들고 생명을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더군다나 동물들에게는 전혀 아름답지도 않은 것이고
운치라는 표현은 인간들의 감상적인 느낌일 뿐 그들에게는
자연이부리는 심술 그 이상의 것도 이하의 것도 아니다.
적설이 서서히 녹으면서 땅속에 수분을 공급하는 원천이야
되겠지만 동물들에게 주어지는 고통을 어루만져줄 방도는
아무데도 없는데 폭우후의 개울은 흙탕물이지만 폭설후의
개울물은 눈이 서서히 녹기 때문에 맑은데 폭설이 있음으로서
수원지의 수량을 높여 생태계를 유지하는 하나의 방법 인지도 모른다.
눈 속에 갇혀진 동물들을 조물주께서는 그대로
굶어 죽도록 방치하지는 않은 것 같다.
옛말에 짐승들은 역경에 대처, 먹이를 구하여 생명을 이어
나가는 지혜를 터득하게 되는 것은 무능하고 게으른
사람의 지혜와 비교 되니 이를 빗대어 흉 볼 때 ‘짐승이
두 앞발을 들고 다닌 다’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짐승들도 폭설 같은 역경에 부딪치면 본능적인 기능이
나타나 앞발이 변하여 손이 되고 뒷발도 능히 팔의 역할을
해서 능동적으로 먹이를 구한다는 이야기다.
동물의 원시적 기능에 비긴다면 인간의 두뇌 발달은
손재주를 낳고 그것은 기계를 만들어 폭설을 쉽게 제거하고
미리 예고까지 해주어 이정도의 피해는 인간의 생업을
불편하게는 할지언정 위협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폭설로 어려움이 닥치게 되니 동물들은 그들이 경계하는
인간들의 주거 공간 주위까지 찾아들게 되는데 그들의
굶주림은 나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으며 나의 마음속
고통의 일부 일수도 있다.
배고픔의 고통을 직접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 그 서러움의
진의(眞意)나 진가(眞價)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 이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한자 이상의 폭설이 내리자
백미터 뒷마당 건너로 토끼, 다람쥐, 산새들, 노루까지
원시림으로부터 나와서 집 주위를 서성거린다.
나는 닭 모이를 하려고 했던 30평 창고 속에 보관 중이던
조, 밀, 수수, 해바라기씨 등이 섞인 혼합 알곡 약 100파운드를
집수리 하려고 마련해 두었던 베니어합판 두 장을 눈위에
깔아서 멀리서도 보이게 하여 쏟아 놓았는데 익일 날
장화를 신고 그곳에 가보니 베니야판 주위에는 잡다한
동물들의 발자국에 어지러이 다져져 있었는데 그들이
모여들어 배를 채웠으며 목마른 것은 눈으로 해결을 했으리라.
저들은 먹이를 주는 내가 누구인지 알려고 하지도 않으며,
또한 내 마음도 헤아리지 않을 것이며 더욱이 베푸는 나의
뜻을 모를 것이다. 나 역시도 나를 알아 달라고 이러는 것은
더더욱 아니며 다만 배고픔에 대한 연민이요 그들에게
동정하고싶은 마음에서이다.
옛말에 자기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과 자기 논에 물
들어가는 것[我田引水]을 보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보기
좋은 모 양이라고 외할머님께서 말씀 하셨는데 내가 지금 그런 기분이다.
옛날 속담에 과부의 마음은 그 과부친구가 알고 배고픈 사람의
심정은 배를 골아본 사람이어야 그 고통을 알 수 있는 것은 다 같은 이치일 것이다.
겨울이면 산새들을 도우려고 비타민이 첨가된 혼합곡을 사다가
팔각정 복판의 비가 맞지 않는 원탁 위 그릇에 담아놓고 그들이
언제든지 와서 먹게 했는데 그들이 인간과 다른 것은 어디든지
앉는 곳마다 수없이 배설물을 떨어뜨려 놓으니 대소변을
못 가리는 걸로 볼 때 아기정도 이었다.
훈련소에서 받았던 QT(Quality test;지능검사)시험에서
한창의 나이어서 134점의 좋은 성적을 받았는데 130이
넘는 사람은 그 당시에는 2%에 불과하단다.
그리고 AT(ability test;재능검사)에서도 129점을 받았다고
신상명세서인 기록카드에 적힌 것을 보았는데 주특기번호는
보병에서 벗어난 자동차 운전병(610)으로 되어 있었다.
나중에는 상관에게 건의하여 정비주특기(618)로 내 스스로
바꾸었는데 좁고 경사가 급하고 비포장이니 울퉁불퉁하고
험난하니 교통사고가 잦아 불귀의 객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의 산골 도로는 노폭이 너무 좁아서 차량들이 서로 비켜갈
정도가 되지 않았는데 예로 십리길 사이를 한쪽에서 차를 보내면
그 길을 통과 할 때까지 반대편에서 오려는 차는 기다려야 했는데
십리 떨어진 양쪽에는 전화선으로 직접 연 결된 군용 야전전화기를
가진 군인이 두 명의 군인이 상주(常駐)했다.
내가 훈련을 받는 동안 나는 좋은 방향으로만 생각하여 좋은
성적을 받았으니 조금이라도 더 좋은 후방으로 보직을 받을줄
알았는데 이등병의 계급장에 임지명령서를 들고 훈련소를 떠날 때
고 득점자의 배치는 최전방이라는 것을 내가 안 것은 그 후의
일이며 이미 쏘아서 손을 떠난 화살이었다.
시험을 잘 본 것이 후회막급인데 후방보다는 교두보가 더
중요하다는 것쯤이야 산간의 농부나 어촌의 어부일지라도
이정도의 상식은 있으리라는 생각인데 나는 그들보다도
더 못한 등신이었나 보다.
용산역에서 그릇, 반찬, 숟가락이 필요 없는 소금을 섞어 뭉친
크기가 꼭 주먹만 한 주먹밥을 1개씩을 목으로 넘기고 강원도로
덜커덩거리는 완행으로 여러 시간을 달려 춘천의 소양강 옆
보충대에 머문 후 다시 배치된 곳은 운전교육대로 산세가 가장
험악한 산간 오지의 15사단(보름달 사단)인데 민간인들이
들어 올 수 없는 곳이고 인민군을 먼발치로 마주볼 수가
있는 적막한 강원도의 산속이었다.
추위도 더하고 땅이 높아서 모든 강들의 원천이 이곳에서부터
흘러 강원도(江原道)라는 이름이 유래된 것인지 아니면
강릉과 원주에서 온 것인지?.
첫댓글 정성으로 장문의글 수고가 많으십니다
내가 겪지 못한일 안해본것 님의 글로써
많이 보고 배웁니다 오늘도 행복하세요
좋게봐주시니 감솨요.
좋은 하루 되세요!
현관의 대리석이 햇살에 비추어 환상적일 것 같습니다
100여개의 프리즘으로 된 메인엑세스도어가 있다는것을
본적도 들은적도 없는데
작은딸이 건축설계사이니 주문을 했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배우게 되네요.
감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