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판화 외 9편 박 윤 배
헛배가 자꾸 불러 온다 비닐포장 처마위에 눈이 쌓이고 얼음꽃 차디찬 이마 뉘인 고등어들 비린내 상자에 잠겨서 지느러미를 꺾고 있다 등줄기 시퍼런 파도가 살갗에 달라붙는 소금알 몇 개를 닦아내고 있다 눈 치켜뜨고 살아가라고 사람들 얼마나 싱싱한가를 물어오고 가게주인은 몇홉 소주에 취해 코골며 망을 보는 한 폭 그림 속 어머니 심부름으로 달려온 아이 하나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어 서성이는 겨울 저물 무렵 살소름이 점점 섬으로 돋아나고 있다 바다 앞에 멈춰선 벼랑처럼 내가 발라낸 잉크는 미끄러지지 않고 머뭇거리는 추위 몇이 얼핏 보인다 앙상한 활굽이 등뼈로 누워 칼도마위에 얹혀질 순간을 다물지 못한 입으로 기다리고 있는가 스물스물 죽음도 도려낼 칼날을 귓밥 얼얼하게 지켜보고 있는 나는 분명 새겨 넣고 싶은 것 있어 굳은 피 혈관 속으로 세모칼을 밀어넣는다 흰 등뼈로 누워서만 살 수만은 없음을, 그리하여 완성되는 겨울 판화여 찢어진 부레로 눈발은 가볍게 내리고 싱싱한 뼈도 일으켜 세워야지 허무와 슬픔 뭉쳐진 대가리는 어느 집 싱거운 개가 물어갈지라도 가물가물 흐려진 풍경속에 찍혀질 몸뚱어리 너는 늘 푸른 원목이여 나이테 눈물 중심부에 과거도 그려 넣어야지 사람들 고픈 배로 바라보던 고등어 내장 꺼내던진 서러웠던 날도 있어 온기 나누고 싶어지리라 죽어 있던 숯불심장 위로도 세상의 죽어있는 것들에게도 소금 같은 눈발 한줌 뿌려지고 불기둥 세우고 달려나갈 펄떡펄떡한 지느러미를 아프게 새겨 넣는다
** '89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
두루미 사진작가
흰 물기둥 두루미 사진작가가
물살 위 외발의 균형을 잡아 본다
물고기가 발가락 간질여도
떠내려 온 꽃잎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그는
이미 마음은 허공에 두었으므로
바람에 절명한 이파리와
몸 안의 길을 구부리는 송사리 지느러미도
눈 이라는 그득한 물그릇에 담아두었다
그의 눈은 깊어서 순응에 닿았다하나
미동도 없이 저녁이면 허물
몸은 단지 그런 물기둥임을 안다
미진하게 마감한 어제와
오늘이 왠지 발아래 씁쓸해도
서있던 자리 혼자 남긴 고민은
흐르는 물살이 씻겨준다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다
물에서 튀어 오른 빛을
눈 밖의 마음으로 낚는다
새를 위한 초혼가 招魂歌
초여름 햇살이 가장 눈부신 시간에
공중을 흔들다 낡아진 깃발, 새는 날아왔다
잉어등을 넘어서 미끄러지는 하강의 기류
내가 머무는 이층 카페 강화 유리창이 쿵!
감전된 듯 놀라 문을 열고 내다보니
사정없이 둥근 이마로 박아 어질어질 몸 일으켜 세우려는 새다
까치가 머리로 쳤다는 종소리가 꾸며낸 전설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저 솟구친 혹에 약 발라줄까, 손을 뻗자
새는 푸드덕 가창한우식육식당 지붕으로 날아간다
그리곤 옆집 지붕에 누워 꿈쩍도 않는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지독한 땡볕
살가죽 안에서 끓던 구더기 폭발하듯 솟구쳤다
꽃잎 같은 깃털은 하나 둘 바람이 데려갔고
파리가 날아간 지붕엔 손바닥만 한 얼룩이 남았다
며칠 뒤 비가 왔다, 지붕은 다시 깨끗해졌다
북쪽 하늘에 흔들어 줄 흰 저고라는
아직 몸에서 헐거워지지 않았는데
새는 사람이 가축의 살점을 뜯는 지붕에 올라서
온몸으로 초혼가를 부르고는 떠났다
그렇게 새의 장례를 거든 것은 햇살과 바람과 비였고
까마득히 높은 어디쯤 있을 새의 지붕에
당신 돌아오라고 울부짖는 세 번의 곡성에 불과한 내 시는
얼마나 오래 깃발로 남아 펄럭일까
주천강酒川江
급경사로 내려온 물이 너울거리드래요
산그림자가 도망간 여자 그리운 듯
넘어지며 따라가며물 중심에 피우는 메밀꽃
바위에 어라리가락 퉁기는 여게가 주천강이드래요
北에서 南으로 흐르다가 東에서 西로 꺽이는
도원을 지나야 무릉이 되는 강물의 길
수직 절벽 맞은편에 흰 속치마처럼 백사장 펼치드래요
수수밭은 성큼성큼 총 맨 병정
물속에 들어도 함부로 첨벙이지 않는
무릉 입구 지나 도원에 이르러서야
달빛을 내려놓자 은빛 물고기들
막 튀어 오르더래요
맑은 들꽃들 번거로운 세속의 길 다 지워
여자가 떠나도 찾을 길 조차 없는
쑥맥 사내가 슬픔을 삭이는 노래
어딜 가서도 밥 굶지 말고, 병들지 말고 잘살길 바란다는
취기의 사내 오줌줄기 흘러드는 그런 강江이드래요
흘러가다보면 길이 있겠지
익숙한 골짜기로 붉은 속곳 노을이 지나갔다
그래서 나는 홀린듯 흘러들었다
겨우내 속눈썹 말라있던 잡목의 산능선을
누군가 잉어등이라 이름 붙여주었으니
환한 생의 후반부가 여기 있을까
사실은 흘러가기를 잠시 멈추었다
능선의 비늘 초록산란을 돕는 비가 가창을 지나가서
바람의 생식기는 단단해졌다는 것이지
부스스 일어나다가 넘어져 다친 상처
가려운 곳에서 운무는 연고처럼 피고
몸 안에 박혀 곪은 가시들
수천의 뾰족함들 내려놓을 곳이 여기임을
나는 직감으로 알았던 거다
흘러와서
흘러가려고
흘러든 것이니
절룩거리는 도시로 다시 흘러들겠다고
신천의 상류에서 물은 바짓단 걷어올린다
오랫동안 허공을 흐르고 흘러본
절대고수 두루미를 만나서 흐르는 물살은
눈감고도 내려다보는 눈을 마주보는 경지
오지 않을 내 어제의 길도
내일로 흐르고 흘러가느라
나이테 하나 줄어드는 줄도 모르는 물속의 돌
닳아서 맑아지는 그 익숙한 수행의 몸이
물끄러미 닿아야 할 다음의 행성인 듯
흘러가다보면 길이 있겠지
가뭇한 눈길로 바라본다
저녁의 개울
-얼룩 1
여러 번의 출산으로 튼 뱃살처럼 켜켜이 내려앉은 산자락 수리답에 물을 흘려 넣던 개울은 조금씩 늙어 간다 키만큼 자란 억새 풀섶 헤치고, 기계충 번진 뒤통수의 기억 속, 그리움의 긴 휘파람 불어 보아도 물총새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 기다림의 저녁 풍경을 개울물은 가로지른다 아래로만 흐르다가 올라 섬의 욕망이 지느러미를 달아, 굽은 등의 물고기 바위 몇 개를 타고 넘더니, 가쁜 숨 몰아쉬며 쉴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다
엇갈린 이별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둥근 것들의 반대 켠에서 만나지는가
물 속 앙금으로 가라앉아 있던 진흙이 몸 속에 생명 있음을 거품 방울 떠올리며 연신 신호하는 동안에도 폐경기의 여자처럼 개울은 뼈마디 시리다 나는 막내로 자란 물이던 녀석, 장마로 돌아와 잡목을 밀어 넣지만 개울의 중심에서 휘젓는 손, 잎 서너 개 매달려 있는 나뭇가지 유혹의 손짓 위에 장수잠자리 내려앉기를, 물총새 날아오르기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저녁인 그녀의 개울에는 잠자리가 날아야 출몰하던 물총새 끝끝내 보이지 않는다 우거지던 억새풀, 며느리밑씻개의 둑이 제초제로 시커멓게 타버려도, 석어 얼룩을 남기는 진흙 위에 빙빙 돌다 곤두박질로 처박히는 시간, 죽지만 알들은 다시 부화하고 있어 나는 이곳에서 얼마를 더 머물다 떠나야 할지, 어지러운 나의 생각들 무리지어 어두운 하늘을 하루살이 떼로 몰려다니고 있다
사랑나무그늘 · 4
봄비가 자두나무 꽃핀 어깨를 툭툭 친다
좀 더 일찍 온 꽃들에 취해 비틀거리는
황사의 하늘을 저리 비키라고
버짐 내려앉은 땅의 반경 위에
휙휙 긋는 흰 선들의 날쌘 드로잉
막 돋은 풀을 뜯고 있는 염소들 뿔 위로
가끔은 헤집는 발톱의 흙 위로
끌려올라온 풀의 뿌리를
다시 적셔주는 건 봄비였다
봄이 와서 저절로 나무가 꽃피는 거라고
태연함으로 얼버무리는 나이가 되어서
진즉에 알고 있었던 겨울바람의 눈짓
애절한 기다림도 눈치 채지 못한 척
숙맥인 듯, 빙빙
오늘도 맴 도는 한 사내
지난 아둔했던 시절의 그리움들도
흰 꽃의 틈새, 연록의 붓질을 하는 거야
둥글어서 치열한 염소똥 같은
찔끔찔끔 슬픔을 내려놓으며
알약들
반쪽짜리도 하나 끼워 동글동글
희뿌연 간유리 창안에 모여 있는 우리는
모서리가 찢기면 우르르 몰려갈 알약들
목구멍 좁은 그녀는 한입에 털어 넣지 못해
한 알씩 오물오물 삼킬 테지만
끝끝내 달려가 만날 곳은 목젖 너머의 통점
가래 끓는 기침 좀 그만하라고
당신이 믿을밖에, 별도리 없는
처방전 들고 약국 가던 그날부터
우리는 잠시 걸터앉을 곳이
문드러지는 몸의 가지인 줄 알았으니
왜 가냐고, 갔다가 편치 않으면
얼른 다시 돌아오라는 눈인사는 하지 말 것
둥근 물빛 안고 목젖 너머 미끄러져야
나는 제대로 뜨겁게 살았다 할 것이고
잠시 찾아온 몽롱, 그걸 당신이 즐기려 한다면
너와 나의 최후는 비참해질 뿐이지
그러고 보니 엊그제 만개한 철쭉도 알약
누군가를 위해 잠시 피었다가
해거름에 뚝뚝 떠나는 흰 꽃잎들
그걸 누구도 슬픔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무겁던 발등의 공중이 가뿐해졌다며
툴툴 털고 일어나 운동 나온 사람들
별밥
뜸 잘 들인 하늘
촘촘한 밥알
지상에 머무는 동안에는
가장 맛있을 밥
배부르지는 않아도
어느 밥 보다 맛있는 밥
그대 손잡고
눈 맑아져서야 먹는
마음까지 먹는
그 밥
수상가옥水上家屋
유목민의 핏줄 깊이
한 사내가 내려놓은 집은
오래 머물 량으로 지어진 것 아님
부레옥잠 가시연꽃이 그러하거늘
바람에 조금씩 떠밀리며
어린 물고기들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는 것
타는 햇볕으로 몸이 달궈진들
막히는 숨통 끝, 작고 여린 꽃을 피워
벌레 같은 시 몇 편 남기는 일은
본시 없는 집에 연연할 까닭 없는 슬픔도
둥둥 띄우는 것.
이유가 더 이상 없는 삶에도
한 사내, 물위의 집에 머물러 있음은
청개구리 울음 끝 번지는
비와 바람이 일으킨 물결위에
뿌리를 떼어주기 위한 것
미련 없이
그리곤 넌지시
바라보기 위한 것
첫댓글 이 까페에 가입 허가해 주심 정말 고맙습니다. 꽃밭을 만난 나비 아니 쌀고리에 닭이라 해야 하나. 볼 것 쉴 곳 너무 많아
부자 된 기분입니다. 아름답고 훌륭한 시 외갓집 들랑거리듯 즐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