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지키는 어버이들
김우종
고향에서는 아직 아무 소식도 없다. 개성(開成)에서 빠져나온 친구들을 몇 명 만났을 뿐이다. 그들도 모두 혼자들만 빠져 나온 불효자 들이다. 물론 나의 경우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평생 벌어 온 재산들을 훌훌 털어 버리고 , 선조들의 뼈가 묻힌 산과 들을 버리고 그때로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다.
나같은 젊은 학생들이 고향 생각을 하고 낭만적인 노스탤지어에서 친구들과 합창도 잘하지만 평생을 살아오고 얼굴에 잔주름이 패이고 여기서 모든 운명의 대결을 해온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경우에는 비교도 안 되는 것일까? 아마 그들이 고향에 대해서, 그리고 평생 피땀으로 마련해 온 집과 땅에 대해서 갖은 집착력(執着力)은 우리들의 상상이 미치지 못할 정도의 것인지도 모른다. 요즈음 여기서 만난 중학 동창들을 보면 대개가 다 그렇다. 그들도 모두 부모 없이 혼자들만 빠져나왔다. 사정이 급해졌기 때문에 젊은 장정들이 아니고는 달아나올 수 없었다는 것도 사실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더 절실한 이유는 그것이 아니다.
아버지 어머니들은 이제 모두 고향에서 집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집을 떠나서 조그만 보따리만 들고 타향에 가봐야 이 추운 겨울에 어떻게 생명을 이어갈 수 있을지 전연 자신들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 집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공산군이 밀어닥칠 것을 빤히 알면서도 , 그래도 설마 집까지 빼앗지야 않으리라는 기대를 걸고 .그리고 지난번처럼 유우엔군이 다시 들어 오리라는 막연한 기대에 스스로를 속이고 달래면서. 재산에 대한 집착.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것이다.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고향에 있는 집들, 재산들 때문에 나와 함께 떠나주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하니 더욱 딱하다. 그러나 나는 이제 노인네들의 그러한 사고 방식에 대해서 좀더 이해력을 가져야겠다. 위험을 무릅쓰고 지키고 있는 재산들. 그것은 그들이 이 재산을 모으기 위해서 평생 얼마나 어려운 고난을 겪어 왔는지. 그것만이 지금까지 살아온 거의 모든 노력의 총집계(總集計)인지도 모르니까?
집을 지키려는 노인들을 경멸하려는 것은 내가 그만큼 남의 힘으로만 살아오고 돈의 가치를 , 이 가난한 조국 땅에서의 화폐의 위력이 어떤 것인지를 아직 한번도 실감해 보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부모들은 그 재산을 꽁꽁 꾸려 두었다가 천당까지 화물 탁송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끝나고 다시 아들과 딸 들이 남쪽에서 돌아오거든 그 고향집에 다시 따뜻이 풀어주기 위해서 그것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부모들의 그 심정을 이해는 할 수 있다 . 그러나 만일 폭격이 있었다면? 지금쯤 그 자리가 평면으로 다져지고, 그러나 그리고 부모님들도 모두 불행하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면? 그렇다면 나는 부모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그 우매한 고집에 실망하고 말지도 모른다.
- 김우종 교수
1929년 2월 4일
서울대학교 국문과
1957년 현대문학 평론 등단
창작산맥 발행인
한국문학평론가협회 명예회장
2021.10. 은관문화훈장
저서- 한국근대문학사 조사 (한국방송사업단) 비평 문학론 (범우사.김혜니와공저 )
순수문학 비판 (자유문학사) 내일이 오는 길목에서 (에세이집 홍익출판사 ) 기타 30여권
그 겨울의 날개(좋은문학사 )비평문학의 이론 (신아출판사 )
서정주의 음모와 윤동주의 눈물 (글봄출판사) 한국현대수필 100년사 (연암서가) 외 다수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 오늘은 집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저는 오늘 집과 사람 가족 건강에 대해 두루 염려하며 하루 시작합니다^^